세계성만찬주일 향린공동체 연합예배

종말론적 공동체, 메시아적 선교

미가 4, 1 - 5 ; 마르코 복음 13, 14 - 23


이 병 일 목사(강남향린)


[교회 : 종말론적 공동체]


        세 교회가 함께 예배를 드리니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도 보고 좋습니다.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이는 기분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가을날 하늘도 맑고 날씨도 좋은데, 오늘 본문이 좀 살벌하죠. 제가 작년부터 마가복음을 따라서 하늘뜻펴기를 하는데, 그 본문에 맞춰서 교회와 공동체에 대하여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마다 ‘교회’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고, 또 교회를 무엇이라고 하는 정의들은 다양합니다. 그 중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은 “종말론적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요즘 한신대학원에서 하는 민중신학 세미나에 함께 하고 있는데, 민중신학에서는 종말론적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면 그 종말론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듣는 사람에 따라서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개인의 세계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약속한 그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종말론이라는 말이 심하게 왜곡되었고, 기독교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로 게토화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에 2012년 지구종말론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2012년 12월에는 이명박의 임기가 끝나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 때에는 지구가 파괴되어 산산조각 흩어지거나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을 종말이라고 합니다. 종말은 그것으로 이 세상에서의 모든 것이 그야말로 끝이라고 합니다.

        또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기독교인들도 역사의 종말을 세상이 끝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묵시적인 성서구절을 해석하면서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면서 그날을 기다립니다. 모든 인간의 역사가 끝나고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삶의 형태를 지향합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육과 영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여 저 세상에서 영혼이 사는 종말을 기다립니다. 종말이라는 말을 이 세상의 끝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성서의 종말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희망 : 종말론적 공동체의 근거]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서에서 말하는 종말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변화된 사람들이 만드는 새로운 세상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 성서적 종말입니다. 그 새로운 세상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느님 나라 도래라는 천지개벽에 참여한 공동체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선포에 호응하여 모인 예수님의 공동체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는 이 종말적 순간에 모인 공동체이며, 지금 실현되고 진행되고 있는 사건으로서의 하느님 나라 도래 사건에 놀라 모여든 무리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종말사상으로 희망을 삼는 사람들을 모이게 했고, 움직이게 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작이 예수님과 민중들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이 종말의식은 기존체제를 자동적으로 폐기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앞에서 기존적인 것, 정치 윤리는 물론 종교마저도 기득권이 인정될 수 없습니다. 종말의식은 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내거는 힘을 가져옵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기존체제의 종말을 의미하고, 역사적 현장의 온갖 비리도 끝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시작이지, 아직 완성이 아닙니다. 현실은 아직도 하느님의 통치와는 거리가 멉니다. 따라서 오늘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특징은 희망이고, 희망은 약속된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공동체는 자기를 철저히 버림으로 공간적 패배를 시간적 희망으로 승리한 그리스도에게서 출발되었습니다. 새로운 공동체는 시간 즉 역사적 지향성에서 존재하는데, 그것을 약속, 희망 또는 믿음으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교회란 자기를 비움 내지 죽이면서 세상으로 보냄 받기 위한 운동체이고, 그렇게 보내진 사람들이 하는 일이 메시아적 선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공동체의 질서나 조직에 대해서 어떤 희망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뚜렷한 것은 그 어떤 형태의 것이든지 간에 인간을 인간으로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를 희망했다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이며,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희망은 막연한 희망이 아닙니다. 그 나라는 아직도 미래적이지만, 그 나라는 자라고 있습니다. 이 같은 확신은 희망을 행동으로 옮기게 합니다. 이 행동의 동력은 희망이며, 이 행동은 미래를 앞당겨 사는 것이기 때문에 낡은 질서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여기는 투쟁이 있으며 수난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기다림 : 그날이 오면]


        교회를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종말은 예수님과 함께 꿈꾸는 희망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가져올 우리의 현실은 멸망의 더러운 우상이 원치 않는 곳에 서있고,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서 사람들을 방황하게 합니다. 지금은 사람과 자연을 멸망으로 내모는 일과 정책이 난무하며 진행되고 있습니다. 경제적 안정과 성장이라는 우상이 오히려 인류를 파멸로 내몰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들만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인 것처럼 떠들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때에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종말신앙의 핵심입니다. 기다림은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무방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산다는 일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기다림으로 가능합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살았지만 죽은 사람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기다림은 구체적인 대상과 약속, 또는 그 약속의 담보를 분명히 갖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는 우리는 이미 만난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에는 간절한 마음이 있고, 처절함 몸부림이 있습니다. 예언자 미가는 그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아름다운 그림처럼 형상화합니다.


“그 날이 오면, 야훼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야훼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다른 모든 민족은 각기 자기 신들을 섬기고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나, 야훼 우리의 하느님만을 섬기고, 그분에게만 순종할 것이다.”<미가 4:3-5>


[자기초월성 : 메시아적 선교의 근거이며 힘]


        그 마음을 안병무 선생님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직도 어두움은 남았는데, 검은 껍질은 그냥 남았는데, 시몬의 가슴에 불을 지른 닭의 울음은 있어야겠는데, 너와 너희들은 아직도 잠이 들었는데, 너희들끼리의 세대는 껍질 속에 묻혔는데, 방탕과 허무에 불을 지른 예루살렘의 닭은 있어야겠는데, 밤을 울어 목이 터져도 모가지에 피가 엉켜 꽉 막혀 와도 내가 인젠 닭이 되어야겠다. 깨어나지 못한 이웃을 위하여 어두움에 눌려 있는 형제를 위하여 홰를 치고 우는 닭이 되어야겠다. 주여, 가슴 속 불을 울게 하소서. 피의 온도만큼 뼈의 빛깔만큼 진실하게 하소서. 시몬의 가슴이 되게 하소서.”


        종말론적 공동체로 부름 받았고,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메시아적 선교를 위해 애쓰는 우리도 이 새벽의 닭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우리들이 할 일이고, 기도이어야 합니다. 하찮은 닭 한 마리의 외침이 온 동네를 깨워서 사건을 일으킵니다. 향린공동체로 모인 세 교회는 각자가 처해진 자리에서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서로 조금씩 다른 일들을 하지만, 그 희망과 기다림의 중심에는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향린공동체는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기다리는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역할인 메시아적 선교를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안병무 선생님은 민중과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거룩한 영이 부어주시는 것이 ‘종말성’과 ‘자기초월성’이라고 합니다. 종말성과 자기초월성은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고 더 나은 공동체로 갈 수 있도록 단(斷)하는 힘입니다. 그 날을 희망하고 기다리는 종말성과 함께 자기를 넘어서 연대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자기초월성이 있습니다.

        자기초월성은 자기 자신이나 공동체를 목적으로 않습니다. 또한 자기를 돌아보는 깊은 성찰을 전제로 합니다. 자기초월성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메시아적 선교에 든든한 터전이며 근거이며 힘입니다. 자기초월에는 밖을 향한 원심력과 안을 향한 구심력이 함께 있습니다. 자기초월성은 밖을 향해 손을 뻗어서 연대하고, 안으로 힘을 모아서 자기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메시아적 선교를 위해 정체성과 주체성을 다지기 위해 자기초월성으로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 삶을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의 문을 닫지 말고 항상 열어두도록 합시다. 고여 있지 마시길... 멈춰있지 마시길... 고민은 어떤 일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생기기보다는 일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데에서 더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