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하나가 되게 잡고 있어라”

에제키엘 37장 15-17절 요한복음 4장 3-9절

 

제가 담임목사로서 목회를 시작한지 20년이 넘었고, 그때부터 625를 전후한 주일을 남북화해주일로 지켜왔고 이에 상응하는 하늘 뜻을 펼쳐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2009년도의 남북화해주일을 맞이하는 저의 심정은 20년 전 군사독재정권시절의 남북화해주일을 맞이할 때의 심정보다 더 우울하고 찹찹합니다. 20년 전에는 그래도 북남간의 만남이 거의 없었을 때이니까 서로 만나 교류하다보면 통일의 길이 열릴 것이다라고 하는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서의 희망이 살아 있었는데, 오늘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간의 끊임없는 교류와 나눔이 있어 오다가 갑작스레 이명박정권의 출범과 더불어 모든 것이 닫혀 버렸고, 그리고 이 정권이 지속되는 한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인권 정의 평화 생명의 관점에서 본 남한정부의 모든 정책이 극도로 후퇴할 것이라는 예감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背恩忘德]

남북관계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명박정권은 인수 초기부터 통일부를 폐지하고자 했던 만큼 반통일적인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던 것이니 사실 오늘의 북남경색은 이미 시작부터 그 운명이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현 이명박 정권의 언론탄압이나 인권탄압 그리고 경찰과 검찰의 강압적인 태도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이기에 다시금 반복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남북경색을 보면서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명박씨가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가장 큰 요인은 그가 현대건설회사 사장을 역임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래 국민들은 그가 경제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믿었고 <7%의 경제성장 4만불 국민소득 7대 세계강국>이라는 과대망상 허위공약이나 <국민 모두를 부자 되도록 하여 주겠다>는 사기공약에도 불구하고 찬성표를 던졌던 것입니다. 그가 39살의 나이에 대형건설회사 사장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고 정주영현대회장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주영씨는 그의 생애 말기에 남북관계를 민족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소떼를 몰고 가는 화해바람을 일으켜 금강산 개발과 개성공단이라는 불가능의 문을 열어놓았고, 이의 성공을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우렸습니다. 그런데 이명박정권이 시작하면서부터 겉으로야 관광객 피살사건이 도화점이 되었지만, 금강산관광이 중단되고 개성공단마저 폐쇄될 위기에 다다른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키운 이명박씨에 의해 자신의 사재를 다 털어 심혈을 기우려 세운 현대아산이 망할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배은망덕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물론 그의 배은망덕은 단지 고 정주영씨 개인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민족대통합의 원칙을 계속 지켜달라고 뽑아 주었던 국민들에 대한 배은망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아이러니는 인권과 자주 평등을 중시했던 노무현대통령이 정치 권력은 청와대에서 시장과 자본으로 넘어갔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를 했지만, 이명박정권의 행태를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닐뿐더러 그 반대입니다. 실용과 시장지상주의를 외친 이명박정권이 말만 그러할 뿐 실제는 친미반북의 이분법적 보수 이념이 경제보다 더 중요한 정치 잣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59년 전 우리는 625라는 3년간의 남북상잔의 끔찍한 전쟁을 통해 엄청난 인명피해와 손실을 겪었고 이로 인해 지금도 우리 민족이 겪는 집단적인 상흔과 세계인으로부터 받는 조롱의 도는 필설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1950년 6월 당시에는 38선 이곳저곳에서 작은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고, 남과 북의 위정자들은 모두 무력통일을 입으로 떠들고 있었기에 전면전은 북이 시작하였지만,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남북전쟁은 이미 미국과 소련이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남북을 갈랐을 때부터 태동하고 있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은 이탈리아와 독일이 항복을 하고 핵폭탄 두발로 일본이 쉽게 항복함으로 예상과 달리 너무나 빨리 끝나고 말았습니다. 일본 천황이 8월 15일에 항복선언을 하고 포성이 멈췄다고 해서 미국과 소련의 군수공장을 당장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 포탄들이 계속 창고에 쌓여만 갔습니다. 유효날짜가 박혀 있는지라 어디엔가 소비처가 필요했고, 한반도는 가장 적절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래 미국은 북한의 전쟁을 준비하는 것을 알면서도 한반도는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된다는 선언을 애치슨 국무장관이 1950년 1월에 발표합니다. 이는 북쪽으로 하여금 전면전을 시작하도록 미끼를 던진 것입니다.

 

[병 주고 약 주는 迷國]

여기서 병 주고 약 준다는 우리 속담이 딱 들어 막는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2차 세계대전의 연장선상에 있던 마무리 전쟁이었습니다. 지금도 크게 보면 변함이 없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옷도 없어 맨발에 맨몸으로 사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손에 미제와 러시아제의 최신식 총이 한정씩 들려 있는 사실이 그러합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우리말이 있지만, 625는 정말 그러했습니다. 전쟁의 책임을 물으려면 남북이든 동서든 일본땅을 그어야 했지 왜 우리 한반도가 그 희생이 되어야 했는지 이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통터지는 일입니다.

 

물론 해방과 더불어 소련군과 미군이 각각 남과 북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당시 전 국민이 하나 되어 힘을 합쳤더라면 분단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힘을 합쳐도 어려운 판국에 이념대결을 벌리고 권력다툼을 벌려 편을 가르고 정적을 죽인 일은 우리의 책임이지 남에게 그 책임을 전가할 일은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북과 남은 서로 힘을 합쳐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해도 모자란 판에 형제가 서로 나뉘어 싸우고 있어 인간 어리석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데올로기에 한번 사로잡히면 그 앞에서는 인륜도 도덕도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는 인간 집단적 죄성이 바로 오늘의 우리의 분단조국이 세계에 보여주는 가르침입니다. 북쪽이 신봉하는 공산주의나 남쪽이 신봉하는 자본주의나 이미 그 허점과 모순이 여실히 증명됨으로 이 두 경제 체제가 시작했던 나라들에서마저 그 효력을 상실하였지만, 이 두 체제의 어리석은 싸움은 여전히 이 조선 한반도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북으로 갈린 팔레스타인]

그런데 한 형제나라가 둘로 나뉘어 다투는 일은 삼천년 전 저 지중해 연안의 팔레스타인 땅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솔로몬 왕 이후 나라는 양분되어 남쪽에는 유다왕국이 북쪽에는 이스라엘왕국(혹은 에브라임왕국, 혹은 사마리아 왕국)이 따로 서고 그 이후 수백 년에 걸쳐 반목과 질시의 싸움을 계속합니다. 그러다가 북쪽이 먼저 아시리아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이 아시리아는 효과적인 식민지 지배를 위해 서로 다른 민족들의 피를 섞는 강제혼혈정책을 썼는데, 이로 인해 북쪽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 상당히 흐려지고 혼합 종교와 혼합 문화라는 이질화가 일어납니다. 그래 남 왕국 유다는 이 북쪽 사마리아 형제들을 더러운 사람들로 취급을 하고 상종하기를 꺼려하기 시작합니다. 사마리아를 요즘말로 옮기면 빨갱이가 됩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 왕국 유다 또한 바빌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수만 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아픔을 당합니다. 그 이후 500년간 페르시아와 그리스제국의 통치를 받았고 잠시 독립의 기간을 갖기도 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사실 분단왕국의 역사는 200년 정도이고 그 이후 500년을 다른 나라의 지배아래 살아왔으니 남과 북의 구분은 실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무슨 국경선이 그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 차이라는 것은 지방색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덧씌워진 남쪽 유다사람들은 5백년이 지나도록 그 빨갱이 타부 의식을 버리지 않았고 사마리아 형제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는 일조차 막았던 것입니다.

 

이런 빨갱이 차별 의식이 살아있는 그때에 요한복음 4장의 얘기가 시작합니다. 2절에서 예수께서는 유다에서 북쪽 갈릴래아로 가시고자 하였는데, 그러려면 중간의 사마리아를 거쳐야만 했다고 오늘 이야기의 근거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9절에 가면 이와 상반되는 얘기가 등장하는데,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종교적 정결법을 말합니다. 그런데 상종하지 않으려면 그 땅을 들어가서는 안 되는데, 예수는 거기를 통과해야만 했다고 말합니다. 무엇 때문에요?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요?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가 숨어 있을까요?

 

당시 남쪽 유다인들이 갈릴래아 북쪽으로 여행할 때에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동쪽 요단강을 건너서 올라가 다시 요단강을 건너든가 아니면 지중해 해변가의 ‘왕의 도로’라 불리는 1번 도로를 따라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우회 길을 선택하지 않고 금단의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남북으로 갈린 한/조선반도]

오늘 남한이라는 땅에도 2,000년 전 저 유다 땅에 존재했던 정결법이 존재합니다. 불결하다고 법으로 정해놓아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 주민들을 만나고 사진을 찍고 말을 걸고 손을 잡고 함께 밥을 먹어도 괜찮지만 그 한 나라만은 들어가서도 안 될 뿐더러 제3국인 밖에서도 결코 만나서도 안 됩니다. 우리 집 대문을 두들기며 목이 말라 물 한 컵을 달라고 해도 그쪽에서 온 것을 알고 물을 주면 감옥에 가두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서는 만날 수도 없고 만나면 감옥에 가두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얼굴도 같고 말도 같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성도 같습니다. 성이 같아 조상만 같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같은 아버지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진짜 핏줄도 있습니다. 같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같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던 형제들입니다. 그런데도 일단 헤어졌으면 그것으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래 천보 만보를 양보해서 형제는 안 된다고 합시다. 그러나 어머니가 자기 품에서 나온 자식을 만나는 것조차 가로막는 법은 무슨 법입니까? 그건 이미 법이 아닙니다. 인륜의 기본을 파괴하는 것은 법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어떤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게 법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어기면 여차 없이 감옥에 가둡니다. 얼굴도 모르지만 전화로 얘기하고 이메일로 주고받기만 해도 감옥에 가둡니다. 그렇게 해서 국가를 보안한다고 말합니다. 인륜과 도덕을 죽이고 인간성을 말살시킴으로 지켜지는 국가는 어떤 국가를 말하는 것이고 보안은 무엇을 보안한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한번 답을 해보세요. 내 머리로는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회를 정상적인 사회로 볼 수 있습니까? 여러분 그런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정상적인 인간으로 볼 수가 있습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 비정상적인 인간들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 저녁에는 경찰들의 폭력으로 5명이 숨진 그 용산의 현장에서 목사님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려고 준비하는데, 경찰들이 들어와 방해를 합니다. 남편들과 아버지들이 죽은지 150일이 지나도록 장례식을 치루지 못하고 검은 상복을 입고 울부짖는 유가족들을 위로하고자 예배를 드리겠다는데, 안된다는 겁니다. 2주전 목요일에는 목사 평신도 30여명이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촛불을 켜고 한 10분 동안 인도를 따라 한 구역을 돌아오려고 하는데 경찰이 길을 막아요. 그래 길을 비키라고 소리를 쳤는데 소환장이 날아오고 있습니다. 요즘은요 수천억 원을 떼어 먹은 삼성재벌 이회장이나 불법을 저지른 신대법관은 모두 정상이 되고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항의하는 뜻으로 기독인 소수가 모여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걸어갔다고 잡아 가두는 비정상의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다가 제가 이런 세상에 태어나 살게 되었는지 참으로 슬픕니다. 여러분도 참 안됐습니다. 가난하고 못살아도 시대가 어두우면 촛불 하나 켤 수 있는 자유나 누렸으면 참 좋겠습니다.

 

[국가보안법을 어긴 예수]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셨고 목이 말라 우물가에 가셨습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목사님들이나 성서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셨다는 구절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우물가의 여인과의 대화 내용에만 관심합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께서 사마리아 땅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여인과의 대화 내용보다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때로는 틀이 내용을 규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 성서본문 말씀이 그러합니다. 사실 영생하는 물에 대한 대화는 어디에서나 누구와도 할 수 있는 대화입니다. 굳이 사마리아의 여인과 얘기해야만 영생하는 물에 대한 종교적 의미가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는 당시의 율법인 국가보안법을 어기고 들어가서는 안 되는 지역을 들어갔고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과 얘기를 하는 점입니다.

 

예수는 우물가에 기다렸다가 물통을 이고 오는 아낙네에게 목이 마르니 물 한 컵 달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아낙네 하는 말이 ‘아니 당신은 남쪽 유대사람이고 나는 북쪽 사마리아 여인인데 어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아니 당신네 남쪽 사람들과 우리네 북쪽 사람들은 접촉하면 안 되는 국가보안법을 모른다는 말입니까? 아니 목마른 사람이 물 한 컵 달라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법이 있고 무슨 보안이 있고 무슨 이념이 존재하는 것입니까? 사람이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면 이렇게 인간성이 말라버린 껍데기의 인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60년이나 만나지 못했던 아내와 남편이 어머니와 자식이 그래 죽기 전에 한번 얼굴이라도 보고 손이라도 만져보겠다는데 무슨 놈의 법이 있고 무슨 놈의 이념이 있고 무슨 놈의 보안이 필요합니까?

 

예수께서 왜 이 법을 몰랐겠습니까? 예수께서 왜 이러한 사탄화 된 신앙을 몰랐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지금 이 법을 깨트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먼저이지 이념이 먼저이지 않다는 것, 인정이 먼저이지 법이 먼저이지 않다는 것, 사랑이 먼저이지 보안이 먼저이지 않다는 것을 몸소 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선언하십니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물은 사탄화 된 잘못된 신앙이 만들어준 차별과 분단의 벽을 깨트리는데서 얻어지는 물이지 그냥 앉아서 믿습니다 라고 소리치는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소금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어떤 이념이나 가치 그리고 어떤 사상은 알면 알수록 미움이 일어나고 너와 나를 더 멀리 갈라놓습니다. 자기만이 옳다는 독선이 커집니다. 자신만이 선이요 천사가 되며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악이요 사탄이 됩니다. 이런 가르침은 매우 쉽고 단순하기에 사람들이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현재 북과 남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논리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선이고 저쪽은 악이라고. 부시가 북조선과 이란 이라크 세 나라를 가리켜 악의 축이라고 했지요. 어제 이란의 최고지도자 하메네이 또한 선거부정이 있었고 이 때문에 국민들이 데모를 하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외부의 불순세력 악의 세력들이 설치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국가보안을 외치더군요. 자기와 반대되면 다 악입니까? 이것이야 말로 스스로가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악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샘물이란 무엇입니까? 그 샘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샘물을 밖에서 찾지 마세요. 그 샘물은 유대 땅에 있는 것도 아니고 미국 땅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조선 땅에 있는 것도 아니고 향린 땅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 안에 있습니다. “내가 주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그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찾는 그 사람 속에 있습니다. 자기 안에 하느님이 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 안에 하느님이 있는 줄 알면 다른 사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 보이고, 다른 사람 안에 하느님이 보이면 사람 사이에 경계가 무너집니다. 정치인이든 종교인이든 스스로 선의 주체가 되어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 짓는 사람들이야 말로 사탄의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명박장로께서 갖고 있는 북을 사탄으로 보는 눈은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배운 것입니다. 성서에는 없는 가르침이요 예수의 입에서는 결코 나온 적이 없는 가르침인데,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던 것입니다. 미국은 천사의 나라요 절대 선이요 북한은 절대 악이요 사탄이라고, 그래 북쪽에서 얘기하는 것은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지 않지만, 30개월 된 미국산 쇠고기는 미국 대통령이 보증했으니 무조건 믿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미국의 핵우산을 이번 외교의 결과물로 자랑하는데, 이거야 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핵은 한번 터지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것입니다. 양산은 펴면 햇볕을 가릴 수 있고 우산은 펴면 비를 피하게 할 수 있지만, 핵에는 우산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쪽에서건 한번 터지면 그것으로 끝장인데 무슨 우산이라는 말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는 국민을 호도하는 또 하나의 속임수입니다. 지금 이명박정부가 해야 할 일은 미국의 품안에 들어가는 핵우산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북이 스스로 핵을 포기하도록 하는 자주적인 통상정책입니다.

 

[같이 죽든가, 같이 살든가]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입니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무슨 일이든 할 것입니다. 남이 북을 적대적 관계로 만들면 결국 이는 남북 모두를 죽이게 됩니다. 현재의 군사적 대치상태에서는 <너 죽고 나 사는 길>은 없습니다. <같이 죽든지 같이 살든지>의 선택밖에는 없습니다.

 

백범 김구선생이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오늘로 꼭 60년이 됩니다. 그가 죽기 일 년 전에 출간한 백범일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른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김구 도진수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05 14쪽) 바로 그 추태가 그 다음 해에 일어난 남북상잔이고 오늘의 이명박정권이 만들어낸 남북경색이요 핵우산입니다. 요즘 그가 말한 <잃어버린 10년>이란 다름 아닌 <남북의 군사적대결>이요 국민들의 입에 자갈을 물리는 <독재정권의 회복>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시장경제원칙에 입각한 평화통일’이라는 말을 명문화하였습니다. 이전까지는 북과 남이 통일을 하게 되면 남북 모두가 한발씩 양보하는 유럽식 사회주의와 같은 제3의 체제를 지향하는 일에 암묵적으로 동의하였지만, 이번 회담에서 미국식 자본주의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일방적인 선언을 하였습니다. 헤어졌던 부부가 다시 합치려면 양쪽이 한발씩 양보하는 화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MB정권은 한발도 양보할 수 없음을 선언한 셈입니다. 이 말은 겉으로는 평화통일을 말하지만, 실상은 분단을 고착화하겠다는 뜻이고 무력에 의한 흡수통일을 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이제 남과 북은 최악의 상태를 향해 달려가는 길만 남아 있습니다. 제1의 625는 재래식 무기로 수백만의 희생자로 끝났지만, 핵과 미사일과 고성능 폭탄으로 이루어질 제2의 625는 전후방이 따로 없는 한반도 전체의 초토화를 말합니다. 생존자가 거의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물론 대통령과 각료와 그의 가족들은 청와대 밑에 파놓은 벙커 속으로 들어가면 살아남겠지요.

 

[뼈 속까지]

중국 제나라를 방문한 명의 편작이 환공에게 말합니다. “임금에겐 병이 있는데 지금은 피부에 있습니다. 치료하지 않으면 안으로 깊이 들어갈 것입니다.” 환공은 편작이 물러가자 “내겐 병이 없다. 저 의원은 돈에 눈이 멀어서 나를 겁주려고 멀쩡한 사람을 환자로 만든다.”고 비판했습니다. 5일 뒤에 편작이 다시 환공을 만나 “임금에게 병이 있는데, 그 병은 혈맥 속에 있습니다.”라며 치료를 권했는데 이를 못마땅해 하며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5일 뒤에 편작이 다시 만나 “임금의 병은 이제 위와 장 사이에 있습니다. 손을 쓰지 않으면 더 깊어질 것입니다.” 임금은 여전히 불쾌해 하며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5일 뒤에 편작을 만났는데, 이번에는 아무 말없이 물러났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환공이 신하를 보내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편작이 말하기를 “병이 피부에 있을 때는 고약으로 고칠 수 있고, 혈맥에 있을 때는 침으로 치료할 수 있으며, 위장에 있을 때는 탕약을 써야만 효험이 있는데, 골수에 이르면 귀신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임금의 병은 이미 뼛속을 스며들었습니다. 그래서 치료하자는 말을 못했습니다.” 5일 뒤에 환공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시켜 편작을 불렀으나 이미 도망친 뒤였고, 얼마 있지 않아 환공은 죽었습니다.

 

지금 이 우리 사회를 진단하는 편작이 누구이겠습니까? 종교인들이요 교수들입니다. 올해 초 생각 있는 소수의 종교인들과 교수들이 이 정권의 피부에 병이 있다고 얘기했지만 무시했습니다. 2주 전 교수 4천명과 신부님 1100명과 스님 1450명과 목사 2천 3백명이 병이 피부에서 혈맥 속으로 퍼졌다고 병의 위중함을 알렸습니다. 이제 천주교 신부 100명이 용산참사현장에 모여 시국미사를 드리고 그곳에 천막을 치고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이는 병이 위장에 까지 진입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뼛속으로 번져갈 일만 남아 있습니다.

 

예수께서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깨트리고 율법이 금하는 사마리아 땅을 들어갔다는 것은 분명 당시 민족분단으로 인한 폐해를 보고 이를 극복하고 하나 되는 통일의 길을 위해 나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곳에 가시어 수도 사마리아의 그리심 성전을 찾아가지도 않았고, 정치적 지도자를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는 거기서 이전에 다섯 남자랑 살다가 이제는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 가장 천한 한 여성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 여인은 당시의 민중을 대표하며 그 어느 것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불안한 심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남성들에게서 대리만족을 찾으려는 본심을 꿰뚫고 그의 내면에 있는 신성을 만나도록 인도하였고, 여기서 이 여인은 새로운 자기를 발견하고 이에 너무 기뻐 마을 한 가운데로 들어가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이 얘기를 이렇게 개인적인 삶의 변화 이야기 그대로 읽어도 좋지만 여기에는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또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전의 다섯 남편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애굽과 바빌론과 아시리아와 페르시아와 그리스제국을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여섯 번째 남편이란 곧 로마제국을 말합니다. 이 여섯 제국들은 유대민족이 꿈꾸는 다윗나라의 회복을 바라는 정치군사적인 강대국의 전형들입니다. 우리는 어떠했나요? 명나라와 원나라와 청나라라는 중국의 제국들을 섬겼고 러시아제국과 일본제국을 섬겨왔고 지금은 미국제국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다섯 남편을 두었고 지금은 여섯 번째 남편과 사는 사마리아 여인들입니다. 자주역량보다는 FTA와 핵우산이라는 제국의 품에 안겨 기뻐하는 어리석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언제 버림받을 줄 모르는 얼빠진 인간이요 얼빠진 사회요 얼빠진 정부요 얼빠진 민족입니다.

 

이 시간 참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우리 안의 잃어버린 신성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라 우리 마음에 그어진 분단의 땅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 우리의 반쪽 얼을 되찾아 바른 인간성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통일은 우리 안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즈키엘 성서 말씀에 따라 오늘의 남북왕국 곧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써진 두 개의 막대기를 하나의 십자가로 만들겠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 봉헌시간에 남북나눔헌금 1년 약정을 드립니다. 이 나눔 헌금은 북쪽 어린이를 위한 분유보내기로 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