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민주항쟁기념과 환경주일-강물처럼

창세기 3장 1-7절; 마태오 7장 13-20절


[610민주항쟁과 향린교회]


        오늘은 환경주일로 더불어 610민주항쟁기념주일로 겸하여 지킵니다. 저희 교회 입구 돌기둥에는 610민주항쟁 기념패가 걸려 있습니다. 당시 한 청년이 웃통을 벗은 채 커다란 태극기를 들고 도로를 활주하는 유명한 사진이 실려 있고, 그 아래에는 당시 저희 교회에서 6월 항쟁의 중심조직인 ‘민주헌법쟁휘 국민운동본부’가 5월 27일 공안당국의 눈을 피해 기습적으로 결성이 되었던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1979년 10월 박정희암살을 불러일으킨 부산과 마산의 민주화 투쟁 그리고 80년 5월의 광주민주화 투쟁 그리고 이어지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분신자살에도 불구하고 전두환군사독재정권의 공안통치는 여러 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87년 1월 서울대 학생이었던 박종철 군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고문으로 인해 죽은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때로부터 교계를 중심한 민주화 투쟁 운동이 심화되었고 연세대 학생이었던 이한열군이 머리에 최루탄에 맞아 숨짐으로 전국적인 민중항쟁운동으로 번져갔던 것입니다.


        국민운동본부가 중심이 되어 벌인 6월 민주항쟁은 6월 10일에 전국 18개 도시에서 4.13 호헌조치 철폐, 군사독재타도, 민주헌법 쟁취, 미국의 내정간섭 등을 외치는 수십 만명의 시민투쟁을 비롯하여, 800여 학생, 시민들의 명동성당 농성투쟁, 6월 18일에 14개 도시 247곳에서 열린 ‘최루탄추방 국민결의 대회’, ‘6월 26일 33개 도시 270여 곳에서 1백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벌인 ’국민평화대행진‘등으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군사정권으로부터 629선언이라는 대통령 직선제를 끌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향린교회는 그 이름이 대내외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홍근수목사님의 분명하고도 예리한 예언자적인 외침과 더불어 통일 민주화운동에 있어 기독교의 중심 교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민족의 역사가 단지 대통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남한의 정치사는 28년간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군부출신의 대통령과 16년간의 민간출신의 대통령 곧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에 이어 현재의 이명박정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위 말하는 문민정부가 시작한 이래 적어도 촛불이 한참이던 작년까지만 해도 남한 사회는 더 이상의 공안정치 그러니까 정부의 강압으로 말미암아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 표현의 자유나 집회 결사의 자유가 억압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민주의식이 충분히 깨어났기에 적어도 공안정치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촛불정국이래 이명박정권의 경제와 북풍을 앞세운 교묘한 공안통치에 대해 그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현혹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자각이 아직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인간의 비겁함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라고 할까요? 자신에게 직접 손해가 되지 않으면 부당한 현실에 외면하고 동료의 아픔에 침묵하는 다수를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회사구조조정으로 수십 년을 함께 일하던 동료가 해직을 당해도 자신이 해직대상자 명단에 끼어있지 않으면 여기에 침묵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침묵하면 다음 희생자는 자신이 될 것이라고 하는 자명한 판단을 포기하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경제를 살리겠다는데, 언론의 자유가 조금 침해를 당한들 그게 무슨 대수인가? 하며 수수방관하고 있습니다.


[카나리아와 토끼]


        최근 현실 정치와는 비교적 무관한 대학교수들이 연이어 성명서를 내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서울대 교수 124명이 시국선언문을 내었습니다. 저희 교회의 최무영 조현설 홍승권교우의 이름을 보았고 오늘 특강을 하여 주시는 김정욱교수님의 이름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정권의 반응은 서울대 교수가 1,700명이나 된다고 하며 이를 숫자에 근거하여 무시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을 지키는 파수꾼이나 본대에 앞선 첨병은 숫자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예언자적 소리를 내는 종교인들이나 이 사회를 비판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는 교수들은 이 사회의 파수꾼들이자 첨병입니다. 이들은 민감한 사회인식을 가진 사람들로서 마치 지하 깊숙이 자리 잡은 탄광 속의 카나리아처럼,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산소부족을 제일 먼저 느끼고 비상벨을 누르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비상벨이 되어야 한다고 보지만, 적어도 향린교회는 610민주항쟁 22주년을 보내면서 다시 한 번 이러한 첨병의 역할을 재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독재시대부터 예언자의 외침으로 옥고를 치루고 90년대 범민련초대의장을 지내시면서 통일운동에 앞장 섰던 강희남목사님께서 비록 89세의 노령이지만, 이 땅의 민중과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치기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던졌습니다. 어제 저녁 목을 매어 자살하시면서 이러한 짧은 유서를 남겼습니다. “지금은 민중 주체의 시대다. 4.19와 6월 민중항쟁을 보라. 민중이 아니면 나라를 바로잡을 주체가 없다. 제2의 6월 민중항쟁으로 살인마 리명박을 내치자.” 목사님은 한달 전 단식을 통해 자신의 예언자적인 몸짓을 내셨다가, 주위에서 말리자 9일 만에 그만두셨는데 다시금 우리를 깨우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살아봤자 얼마나 더 사시겠어 라고 우리는 그분의 희생을 폄하할지 모르지만, 사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삶에 애착이 더 강해지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목사님의 희생은 결코 폄하할 수 없고 오히려 더 반대로 그 죽음의 결단을 높이 사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외로이 하늘을 떠돌 노무현씨의 영을 위로하기 위해 가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사실 고 노무현씨께서 인권변호사로 시작하여 올곧은 정치활동을 하던 20여년간 고국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고국에 돌아왔고 국정초기 대통령 후보시절의 그의 주장과는 달리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않아 배신감을 느꼈고 이락크 파병과 한미FTA협정에 있어 의견을 달리함으로 사실 찬성쪽 보다는 반대쪽에 서 있던 사람입니다. 물론 때때로 그의 탈권위적인 행동이나 솔직한 발언에 내심 놀라기도 하고 미흡하지만 친서민적인 개혁정치에 박수를 쳤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번 죽음을 통해 그의 여러 가지 행동과 언어들이 다시금 재조명을 받으면서 제가 미처 몰랐던 부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닫는 것은 그는 역대의 어느 유명한 정치인에 못지않은 훌륭한 지도자였다는 사실입니다. 퇴임 후에도 백성이 주인 되는 진보정치를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며 책을 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노무현대통령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견딜 수 없는 참극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희망이 되었습니다. 신앙의 표현을 쓰자면 노무현의 정신이 사람들 속에서 부활하고 있습니다.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여러 추모 글들 가운데 몇 분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노무현과 그의 시대를 보내며] - 정지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노무현의 죽음은 역사에 등장하는 숭고하고 비장한 영웅들의 죽음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는 고전비극의 주인공처럼 왕이나 장군, 귀족도 아니고 반인반신의 용사도 아니었다. 강철같은 의지를 가진 혁명가나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지도자, 신출귀몰한 책략가도 아니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으나,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연민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고집 때문에, 인권 변호사로, 바보 정치인으로, 대중의 자발적 지지에 의해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다시 농민으로 돌아온지 1년만에 절벽에서 몸을 던진 어수룩한 촌놈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비극적이되 그 추락의 낙차는 크지 않다. 왜냐하면 노무현은 결코 신비로운 만년설로 빛나는 절대 권력의 봉우리에 올라간 적이 없었고 그저 해발 백 미터의 야트막한 뒷산에 올랐다가 부엉이바위에서 사십 미터 아래 골짜기로 떨어졌을 뿐이니까.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기는 했으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고, 휘두를 수도 없었으니까. 기득권 세력은 탄핵으로 그를 무력화시켰고 재벌의 앞잡이인 수구족벌언론은 집요하고 야비하게 그를 씹어댔다. 이제 권력은 청와대에서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대통령 노무현의 탄식은 수사적 과장이 아니라 정확한 현실진단이었다. 그는 시장의 힘에 떠밀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함으로써 지지층으로부터 고립되었고, 퇴임 직전 힘겹게 성사시킨 남북정상회담의 영광도 그의 뒤를 이은 이명박 정권의 무조건적인 ‘거꾸로/뒤집기정책’으로 원천무효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뒤늦게서야 그의 비극적인 추락이 4·19와 5·18, 6·10으로 얻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성과에 안주했던 우리 모두의 탐욕과 나태와 위선의 결과임을 깨닫는다. 한때 그에게 열광하고 박수를 보내던 서민 대중은 주식과 대운하, 뉴타운으로 떼돈을 벌어볼 욕심에, 이른바 386세대의 중산층은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어 출세시키기 위해, 등을 돌렸다. 민주시민과 노동자, 지식인들은 반대세력을 모질게 짓밟지 못하는 촌놈 노무현의 무력함과, 속내를 너무 솔직하게 드러내는 투박한 언행을 나무라며 현실정치를 외면하고 한탄만 하다가, 허황한 경제살리기 747공약을 내세운 수구기득권세력에게 민주주의를 헌납하고 말았다.

    노무현의 죽음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야만성을 증명한다. 온갖 풍파에도 끄떡없이 버텨온 세련되고 영악한 기득권세력은 재산도 학벌도 없는 시골 출신 대통령의 우직한 정의감을 비웃고 왕따시키는 데서 끝내지 않고, 그가 낙향한 고향 마을까지 따라와 처자식과 친구, 후배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끝장을 볼 때까지 괴롭혔다. 물고 뜯고 짓밟고 조롱했다.

    약삭빠른 수구족벌신문과 방송은 권력에 빌붙어 알량한 잇속을 챙기려고 온갖 거짓말과 욕지거리를 끝없이 쏟아냈다. 심지어는 소박한 촌집이 ‘아방궁’으로 왜곡되고, 봉하마을을 찾는 버스에 30만원씩 돈을 준다는 헛소문까지 나돌았다. (나는 1980년대에 전라도 주유소에서는 ‘김대중 선생 만세’를 외치치 않으면 기름을 팔지 않는다는 유언비어를 대학 교수휴게실에서 들은 적이 있다.) 줄을 풀어준 너그러운 주인한테 버릇없이 대들던 검찰과 경찰은 강퍅한 새 주인이 ‘물어라 쉭’ 하고 줄을 당기자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전 주인이건 누구건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정적을 역적이라고 모함하여 유배를 보내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3족을 멸하여 씨를 말리던 왕조시대의 잔혹한 정치보복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토끼몰이를 당하는 고통이 오죽했으면 유서에서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도 없다”고 비명을 질렀을까. 그들이 악에 바쳐 부르짖던 ‘잃어버린 10년’이란 구호는, 민주화의 대세에 밀려 빼앗겼던 기득권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되찾아 다시는 내주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과연, 그들은 ‘촛불’로 흔들리는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언론과 집회와 표현의 자유, 남북화해, 양극화 해소 등 보편적 가치와 상식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와 경멸을 불사함으로써 우리시대를 ‘인간에 대한 예의’마저 내팽개친 ‘야만의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 이 기막힌 퇴행과 모욕에 맞서 힘없는 농민 노무현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생 동안 추구해왔던 가치를 온몸을 내던져 지켜내는 투신뿐이었으리라.


    잘 가시오, 벗이여!


    야만의 시대에 우리는 고통을 견디고 치욕을 감수하며 ‘살아남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추구했던 노무현은 너무도 우직한 촌놈이었기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스스로 “삶과 죽음이 한 조각인 자연”으로 돌아갔다.

    1946년 병술(丙戌)생 개띠. 그가 기득권세력의 사냥개들에 쫓겨 헐떡거리며 살았던 개같은 시대는 이제 저물고 있다. 탐욕으로 파헤쳐지고 남북분단과 지역주의로 갈갈이 찢긴 산하를 장엄하고 처절한 낙조로 물들이며.

    잘 가시오, 벗이여! 같이 태어나 같은 길을 걷다가 먼저 간 동갑내기 도반들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본다. 화가 오윤, 시인 김남주, 음악가 문호근, 변호사 조영래 그리고 바보 촌놈 대통령 노무현!


[권력만 잡으면 끝]


        한겨레 21에 실린 금융경제연구소의 연구위원이 홍기빈씨의 글의 일부입니다.


    ‘권력만 잡으면 끝’이라는 이 야비한 원리는 또 ‘줄만 잘 서면 끝’이라는 바닥 모를 시꺼먼 허무주의를 온 사회에 창궐시키며, 나라와 개인의 영혼과 양심과 자율성의 가치를 좀먹는다. 사람들은 모두 높게 뻗쳐 올라간 권력 위계의 사다리에 올라타서 자기 발밑의 사람을 짓밟고 또 위 사다리로 기어 올라가려는 무한의 아귀다툼을 벌이면서 사회는 아수라장이 된다. 바로 이 오만한 권력의 사닥다리야말로 노무현이라는 ‘바보’가 돌격했던 풍차다. 비록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몰이해와 실책이 있었을망정, 탈권위주의를 몸소 실천하고 영호남 대립에 도전하고,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교육계와 언론계를 위시해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박은 크고 작은 기득권의 사다리를 허물려 안간힘을 썼던 거의 진심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그의 도전은 한국 사회를 크게 바꿔놓았다.(중략)


        프랑스 리옹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박사 과정중에 있는 이찬웅씨의 글의 일부입니다.

    [지난 1년간 한국 사회는 회사 운영을 모델로 삼은 귀족정으로 개조되었다. 청와대는 전략기획실로, 수사기관은 청원경찰 같은 것이 되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고 두려움이 퍼지는 동안, 노 전 대통령의 민주적 상징성을 제거하기 위한 비열한 모욕 주기가 진행되었다. 민주주의의 훼손과 그의 서거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은 추모객들이 방어막에 막혀 서울광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광경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그가 죽음을 선택했던 방식을 두고 모욕을 시도하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답하겠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불가피하게 자신의 생물학적인 생명을 소멸시키면서 우리의 정치적 이념을 보존하고 작동시키길 원했다. 그가 대립시킨 것은 삶과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우리 공동의 삶이다. 정치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되고, 그래서 혐오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 그는 정치라는 단어를 그 모든 오염에서 거의 유일하게 구해냈다. 이렇게 순수해진 바로 그 의미에서 그는 위대한 정치가가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정치인도 한반도의 땅과 여기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토록 강렬하게 뒤흔들지 못했다.


[묘비명들]


        <한겨레21>이 작가와 시인 10명에게 노무현을 위한 묘비명을 부탁하였는데, 그중 한 두개를 소개합니다.


도종환시인의 비명입니다. <치열하게 살았으나 욕되게 살수는 없어 허공에 한 생애를 던진 노무현의 영혼을 하늘이여. 당신의 두 팔로 받아 안아주소서.>


공지영소설가의 비명입니다. <대통령이면서 시민이고자 했고 정치인이면서 정의롭고자 했으며 권력을 잡고도 힘없는 자 편에서 현자였으나 바로로 살아 마침내 삶과 죽음까지 하나가 되도록 온몸으로 그것을 밀고 갔던 한 사람이 있으니 그를 미워하면서 사랑했던 우리는 이제 그를 보내며 영원히 우리 마음에 그를 남긴다.>


소설가 김연수씨의 비명입니다. <말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대신해 번쩍 치켜들었던 당신의 오른손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패배한 자들을 위해, 또 그들과 함께. 그게 지는 길일지라도 원칙과 상식의 길이라면 두려움과 불이익을 마다하지 않았던 당신의 삶에게. 또 사랑과 행복의 기억이 공포와 폭력의 기억보다 더 오래간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당신의 삶에게, 또한 지는 길처럼 보이는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영원히 승리한다는 진리를 가르쳐준 당신의 죽음에게.>


[강물처럼]


        그래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 ‘강물처럼’은 언필 들으면 오늘 환경주일을 맞아 상징적으로 내세우는 제목같지만, 실은 이 제목은 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이 좋아하던 글귀에서 따온 말입니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강물처럼!” 그가 말하는 바다 그가 꿈꾸었던 바다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그가 말하는 강물처럼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이었을까요?


        그런데 지금 돈이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강물의 줄기를 막아 운하를 만들려는 세력이 있습니다. 본인이 건설회사 CEO 출신임을 자랑하면서 대한민국을 대한주식회사로 낙하시키고 모든 국민을 돼지떼로 만들고자 하는 정권과 이를 부추기는 보수언론과 재벌세력이 있습니다. 이제 권력은 정치에서 자본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대통령의 얘기를 입증하기나 하듯이 우리는 그의 국장이 거행되던 그날 대법원이 상식과 원칙을 무시한 불법승계를 인정함으로 삼성재벌 앞에 무릎을 꿇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상장이든 비상장이든 삼성의 에버랜드 사건은 계열사간 순환출자의 반시장적 지배구조를 바탕으로 부모와 자식간에 내부자 거래 형식으로 초저가에 전환사채 발행과 인수를 통해 경영권 승계를 한 불법적 탈세 행위인 것입니다. 삼척동자라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뻔한 사실입니다. 법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든지 그 결과는 열매로 말해지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에는 좋은 열매가 맺는 법이고 나쁜 나무에는 나쁜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민주사회의 마지막 보루인 법원마저 신뢰할 수 없는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억울한 현실입니다.


[오체투지의 결의로]


        그러나 우리 종교인들마저 여기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습니다. 작년 한반도대운하에 반대하여 종교인 100일 순례에 한발 물러설 것처럼 보였던 이명박정권이 4대강 살리기라는 기만정책을 펴자 지난해 가을 문규현신부와 수경수님은 몸과 마음을 던져 문제를 풀어갈 씨앗을 만드는 기도의 한 방편으로 오체투지를 시작하였습니다. 지리산 노고단으로부터 시작하여 계룡산을 거쳐 북의 묘향산에서 마치고자 했던 오체투지단이 어제 오후 파주 임진각 망배단에서 124일간의 행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이분들은 지금 시대의 아픔이 단지 이명박정권 때문 만에 생긴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명박정권은 속았던 속지 않았던 우리 국민들이 스스로 뽑았고, 또 정권은 대중 언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에 정치권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문제들은 결국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체투지 순례단은 다음과 같은 '임진각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가장 느리고도 낮은 자세로 참으로 머나먼 길을 걸어서 왔다. 날마다 천 번 이상 온몸을 던지는 오체투지 순례는 차마 필설로 다 하지 못할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 고통은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우리 순례단은 생명과 평화는 고사하고 너무나도 처참한 한반도의 현실을 목도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오늘 이 사회의 여러 문제들 곧 용산참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 철거, 미디어 악법 추진, '5대강 살리기'(섬진강 포함)로 명패만 바꾼 '한반도 대운하', 종교 갈등, 경색된 남북관계 등을 들며 "처음 오체투지를 시작할 당시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더욱 거세되고 세상사는 더더욱 험악해졌다"고 분노를 토하면서 사회 각계각층에서 시국선언 등을 통해 촉구하고 있는 대통령의 공개사과가 이뤄지더라도 "이는 단발마적인 임기응변식 조치에 불과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단순명쾌한 진리를 거부하는 권력의 모습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역사와 우리 국민에게는 지금까지의 혼란만으로도 충분한 불행이었다. 100번 넘는 대국민 사과가 오히려 국민에게 1000일이 넘는 고통으로 다가온다면 차라리 권력 스스로 진퇴를 엄중히 판단하는 것이 역사와 민족을 위한 길임을 고통스럽게 촉구한다.”고 밝혔습니다.


[창조질서회복을 위한 교회의 역할]


        오늘 환경특강을 하여 주시는 김정욱교수님의 제목 “환경문제진단과 창조질서회복을 위한 교회의 역할”에도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만, 지금 이 땅의 많은 기독인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열심히 봉사하면 할 일을 다 한 줄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시키는 일만 잘 하면 복받고 천당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 곧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쫓아가기 보다는 그저 목사가 시키는 일만 잘 하면 구원을 받는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목사도 인간이기에 인기에 연연하고 그 결과에 연연하여 교인들 듣기 좋은 소리나 하고 교인 숫자 늘려 교회 건물 번듯하게 세우는 일에 주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을 헐고 밖으로 나가라고 말씀하시지만, 지금 예수를 따른다는 대부분의 목사들은 세상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하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 나오도록 사람들을 전도하고 약간의 물질로 구제하는 것만이 세상을 위한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구조 악에 대해서 자유 경쟁이라는 명패 뒤에 숨어 있는 개인주의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교회끼리의 경쟁 그리고 종교 간의 다툼을 조장함으로 얻어지는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확장이 곧 하느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중세시대 유럽에서의 중세가톨릭이 저질렀던 기독교국가 곧 Christendom의 잘못을 다시금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이 땅이 하느님의 나라가 되도록 그 첨병을 길러내는 훈련소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교회 안으로 부르셨지만, 교회 안에 머물도록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교회 안에서 세상에서 살아갈 가치관이 무엇인지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켜 가야할지를 깨닫고 세상 안으로 나아가 그 삶을 실천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편하게 갈 수 있는 넓은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좁을뿐더러 험악하여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외롭습니다. 때로는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끝내 구원으로 인도하는 의의 길이며 평화의 길입니다.


        창세기의 1장으로부터 3장에 이르기까지의 창조 이야기 곧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와 더불어 에덴동산에서 함께 살다가 선악과를 먹는 범죄로 인해 쫓겨남을 당한 이야기는 구원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는 원래의 창조를 회복할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에덴의 복원이란 단지 우리가 그곳에 돌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무너뜨린 세계를 복원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복원에는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내 안에 숨어 있는 아니 억눌려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찾아내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 회복은 곧 우리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우리 인간 또한 이 세상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써 저들과 함께 조화롭게 살아갈 책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우리 사람들로 하여금 번성하고 세상을 다스리라는 말은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 아닌 단지 그 창고의 열쇠를 맡은 청지기로, 여러 형제중의 맏이로 다른 동생들을 보호할 책임이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일이 성서가 말하는 참 영성입니다.


        선과 악, 그것을 참으로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개인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영역에서 윤리적인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자신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하는 자아중심의 판단은 결국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고백했던 공동체의 하나됨을 파괴시켜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떼어 넘기는 비겁한 인간으로 소외된 인간으로 변질시켰음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그 결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이간질이 일어나고, 인간과 동물 사이에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IQ가 높은 인간이 승리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새들과 닭과 소와 돼지들은 조류병과 광우병으로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유식하기를 좋아하는 인간들은 뭐 신종 인프루엔자니 A형 B형이니 하고 별 이상한 이름을 같다 붙이지만, 이는 마치 ‘한반도대운하’를 ‘강살리기’로 본말을 뒤집는 것과 같은 인간들의 어설픈 장난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좋게 말해 환경주일을 지키지만, 좀 거칠게 말하면 지구몰락 각성주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태평양에는 투발루라는 인구만명이 사는 작은 섬나라가 있습니다. 지구온난화로 바닷물이 차오르고 지하수의 염도가 높아져 2001년에 국토포기를 선언했습니다. 최소한 600년 이상 인간이 살아왔고, 동물의 연령으로 따지자면 수천년동안 동물이 존재했던 곳이지만, 이제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나라가 되었습니다. 호주 뉴질랜드 미국 등에 이민을 요청했지만, 매년 75명만 받겠다는 냉정한 현실에 부딪쳐 있습니다. 100년 전 아니 50년 전 그 땅에 살았던 선조들이 이런 비극을 꿈에라도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100년 혹은 200년 후 우리가 사는 이 땅이 같은 비극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지난주 우리는 한국기독교협의회와 기독교환경연대가 공동으로 주는 ‘녹색교회’라는 거창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는 지난 15년간의 전북에 있는 들녘자매교회와의 도농직거래를 통한 유기농산물 구입과 농촌살리기 모범사례에 대한 보답입니다. 이제 예배가 끝나면 교회 입구에서 우리의 다짐을 고백하는 현판식을 갖겠지만, 이는 앞으로 더욱 더 열심히 도농간에 하나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나아가 지구살리기에 앞장을 서라는 하나의 채찍이기도 합니다. 환경주일 이는 오늘 하루 차를 가져오지 않는 것으로 그칠 일은 아닙니다. 먹거리와 CO2와 물이라는 생명의 문제는 이 땅에 이 지구상에, 이 한반도에 정의와 평화를 세워나가는 일과 하나된 일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아무리 좋은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한다 한들, 우리 손주들이 아무리 영어를 유창하게 말한다 한들 이 지구가 멸망한다면 그게 무슨 이득이 되겠습니까?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녹색교회 현판식 공동기도문]

창조주 하나님!


당신의 형상대로 온 피조 세계를 지으시고,

그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첫 아담으로부터 오늘 21세기를 사는 65억 명의 인간 생명 모두에 복을 주셔서,

먹을 것과 입을 것, 잠잘 곳과 쉴 곳

그리고 생의 기쁨들을 누릴 수 있는

지구환경을 허락하셨음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들은, 1억2천만년의 세월 속에서 만들어진 화석연료를

산업혁명 이후 300년 이란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소진해 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구 자원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탐욕은

생명에 대한 약탈과 살생을 자행케 했고,

결국 지구온난화, 기후변화를 불러오는 죄악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우주 생명의 하나님!


인간들로 하여금 모든 생명과 지구별을 위협하는

기후변화에 대한 죄책고백을 하게 하셔서,

온실가스를 줄이고,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돕고,

자연 섭리에 맞게 지구를 돌보는 일에 적극 나서게 하소서.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몸인 이 지구별을 살려,

생명이 살아 숨쉬는 풍성한 지구 공동체를 자녀들에게 물려 주게 하소서.

이 거룩한 사명을 위해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켜

생명이 노래하는 새 하늘 새 땅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