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4일 새해맞이 -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교회

이사야 59장 12-17절; 마태오 5장 11-16절


(앞으로 구약성서는 제1성서로 신약성서는 제2성서로 일컫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이라는 말은 옛 약속이라는 말로 폐기되어져야 할 의미를 내 품고 있으며 이는 구약성서만을 경전으로 갖고 있는 유대교를 부정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며 구약과 신약은 모두 동일하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구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깨닫는 새로운 약속의 말씀이 있으며 신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버려야 할 오래된 약속의 말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서구의 진보적인 신학계에서는 오래된 관행이기도 합니다.)


        1월을 영어로 January라 하는데, 이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 야누스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입니다. 신 야누스는 사물의 처음과 끝을 주관하기에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시간으로 말하면 과거와 미래입니다. 우리는 지금 2008년과 2009년 사이에 서 있습니다. 뒤도 돌아보고 앞도 바라보는 두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 이 두 얼굴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얼굴은 ‘그때 그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고 있고 미래를 바라보는 얼굴은 ‘혹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하고 쓸데없는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나 아직 오지 않는 미래는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시간입니다. 통제 밖에 있는 일과 시간에 우리의 에너지가 소모되면 그 사람의 삶은 불행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현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의 현재에만 우리의 모든 생각을 집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영원 속에 거한 것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


        제2의 성서에서 그리스어로 이렇게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상대적 흐름을 크로노스라고 부르고 현재라는 절대적 깨달음의 순간을 카이로스라고 부릅니다. 올 한해에 모든 인간에게는 똑같은 시간, 52주, 365일, 8760시간, 52만 5,600분이 주어져 있지만, 사람에 따라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일상과 시간의 얽매임 속에 파묻혀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인식하고 기쁨과 감사 속에서 여유 있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감과 동시에 속사람도 함께 늙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속사람이 젊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청춘이란 마음의 나이로 따지는 것이지 호적의 나이로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새해가 되면 한 살을 더 먹었다라고 하는데, 저는 이런 통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갖지 않았던 꿈을 꾸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면 그는 나이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적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평소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일을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다시 태어난 사람이고 두 번째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란 작자 미상의 시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노라니 몸이 힘들고 마음에 아픔도 많지만,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다 보니

내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인생길이 순탄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노라니 가시밭길 많지만,

그때마다 내 삶의 갈섶에서 따뜻하게 손잡아 주는 이들이 있기에

내 인생길이 순탄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이름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노라니 실패와 유혹도 많지만,

그때마다 ‘안 된다’ 하고 일어선 내 이름이 얼마나 귀한지를 이제는 느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모습이 건강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노라니 눈물 흘릴 때도 있지만,

눈물을 그치고 열심히 살아가는 내 모습이 건강하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착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노라니 나쁜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돌아서서 후회하고 내 마음 밭의 좋은 생각의 터를 넓혀가다 보니 이제는 착해진 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시는 크로노스에 묻혀 살던 사람이 카이로스 시간으로 옮겨 온 삶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현재에 집중할 때,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으로부터 벗어날 때, 우리는 내 인생길의 순탄함을, 내 이름의 귀함을, 내 모습의 건강함을, 나의 착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현재에 충실할 때, 거기 하느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21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말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기적 같은 것은 없다고 믿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는 삶이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은 후자이다.” 이것 또한 크로노스의 인간과 카이로스의 인간을 구분하는 또 하나의 기준입니다. 사막에서는 물 한 방울도 기적입니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하루 한 끼 식사도 기적입니다. 병실에 누워있는 사람에게는 서서 걷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어떤 환자에게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일 자체가 기적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이와 같이 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기도하고 정의와 평화를 노래하고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조잡스런 시끄러움이 우리의 눈과 귀를 뒤덮어 일상의 기적을 깨닫는 일이 기적이 되어버린 어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四字成語]


        매년 교수신문은 한해를 보내고 한해를 맞이하면서 사자성어를 정하는데 2007년 말에는 2008년 새해의 사자성어로 시화연풍(時和年豊)을 선정했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나라가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2008년을 보내면서 이를 정정하였는데 그래 다시 뽑은 사자성의가 호질기의(護疾忌醫)입니다. 병이 있음에도 의사한테 보여 치료받기를 꺼린다는 뜻으로 문제가 있으면서도 남에게 충고 받기 싫어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미국산 쇠고기 파문과 미국발 금융위기를 처리하는 MB 정부의 대응방식이 국민비판과 충고를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부족한 모습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MB정권의 호질기의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보니 아연실색(啞然失色) 혹은 대경실색(大驚失色)으로 대신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2009년의 사자성어로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선정했습니다. 군자들의 사귐은 서로 진심으로 어울려 조화롭지만 그렇다고 의리(義理)를 굽혀서까지 모든 견해에 ‘같게 되기’를 구하지는 않는 데 반해, 소인배들의 사귐은 이해(利害)가 같다면 의리를 굽혀서까지 ‘같게 되기’를 구하지만 조화하지는 못한다는 논어의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그런데 MB정부는 2009년 신년화두를 부위정경(扶危定傾)으로 정했다고 한다. 위기를 맞아 잘못됨을 바로 잡고 나라를 바로 세운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잘못됨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가 자신은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자신만의 잣대로 하는 말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위기를 맞아 잘못되고 기울어진 것은 청와대이지 나라의 백성들이 아닙니다.


        다산 정약용이 작은 고을의 통치자인 목민관으로 있을 때입니다. 백성 천여 명을 이끌고 관아에 쳐들어가 항의해 실정법을 위반하여 5영에 수배령이 내려진 이계심이라는 사람이 붙잡혀 왔습니다. 그때 그는 “통치자가 밝은 정치를 펴지 못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제 몸의 편안함만 꾀하느라 백성들을 괴롭히는 통치자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官所以不明者 民工於謀身 不以 犯官也)라는 판결이유를 밝히고, “시위를 주동하여 통치자의 잘못을 일깨워 준 그대 같은 사람은 통치자가 천금(千金)을 주고라도 사야할 사람이지 처벌할 대상이 아니다”라는 설명을 하면서 무죄 석방한 사실이 있습니다. 당시는 민주주의 제도도 아니고 왕이라는 전제군주제가 군림하던 매우 엄한 시절이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이런 판결을 내렸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재판혁명입니다. 소귀에 경 읽기인 줄은 알지만, 청와대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나라는 경제적 성장에서 뿐만이 아니라 수십 년의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인권과 언론 자유의 영역에서도 세계가 놀랄 만큼 커다란 진보를 이룩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명박정권의 시작과 더불어 이러한 인권과 언론의 자유가 매우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수천 명의 군중들이 보신각 제야의 타종 33번에 맞춰 ‘MB악법 철회하라’ ‘이명박은 물러가라’라고 소리를 쳤겠습니까? 그래 실황중계를 하던 KBS는 이 소리를 지우고 박수소리를 거짓으로 만들어 내보내고 화면도 이를 비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할 바 차라리 전년도의 녹화를 재방영하는 것이 비용 절감 면에서 더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파시즘과 민주주의]


        요즘 신문에 자주 눈에 띠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MB정권이 국민과의 대화나 사회적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어 독재니 파시즘이니 하는 단어가 자주 언론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마 올해의 사회적 화두가 될 것 같습니다.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은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충분한 발전을 위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들을 만들어내는 제도다. 파시즘은 어떤 이름으로든 상관없이 개인을 외래의 목적에 종속시키며 진정한 개체성의 발전을 약화시키는 제도다.” 다른 말로 하면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 특히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하면서 대화와 자기 성찰을 통해 공동체가 나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반면 파시즘은 경제와 인간욕망 충족이라는 표어를 내 걸고 불필요한 이념으로 국민을 서로 이간질 시켜 권력의 지배 목적을 충족시켜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명박정권이 하는 모양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난봄에 시작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는 아예 경찰의 폭력으로 국민의 입을 막아버렸고, 청와대의 압력으로 경찰이 MBC의 PD수첩을 고발하였지만, 담당검사가 고발의 요건이 되지 않는다고 거부하자 그를 사직하도록 하였습니다. 대운하도 국민의 다수가 반대하자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새해 들어 국민들의 여론도 묻지 않은 채, 4대강 개발이라는 명칭 하에 이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마치 도둑고양이 하는 짓 같습니다. 언론장악 또한 그렇지요. 혁신적으로 일을 하지 못할 공기업 기관장들은 모두 물러나라고 말하지만, 실은 자기 사람 심겠다는 말이지요. 그래 2008년이 끝나고 2009년이 시작하는 이 야누스주간에 국회는 반민주 MB악법 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야당 국회의원들의 농성이 계속되고 있고, 여의도에서는 MBC를 비롯한 언론인들의 항의 집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위기감을 느끼고 한 교우께서 교회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제안하여 12월 31일 저녁에 거리행진 촛불 번개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녁 8시경 약 30여명의 교우들이 향우실에 모여 찬송을 몇 개 부르고 나서 모두 촛불을 하나씩 들고 종로와 광화문 시청 을지로를 거쳐 교회로 돌아오는 촛불 행진에 나섰습니다. 이날 보신각 제야의 행사에 여러 단체에서 나와 수천 개의 촛불이 켜졌는데, 저희가 선두주자였습니다. 전경들은 자정께나 나올 촛불이 8시부터 등장하니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결국 종각 근처에 가서 제지를 당했습니다. 왜 촛불이 문제가 되느냐고 하자 건물이 탈 위험이 있고 방화의 여지가 있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억지 주장에 어이가 없었고 오히려 지나가던 행인들이 나서서 우리를 대변하여 주었습니다. ‘여기 나이든 사람들과 여자들의 손에 들린 몇 개의 촛불이 왜 문제가 되느냐? 촛불은 시민들의 최소한의 의사표시인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것도 하지 못하느냐? 이를 막는 일은 전두환군사독재정권 하에서도 하지 않았던 공권력의 폭행’이라고 우리를 대변하는 행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십 수백 명의 전경이 막무가내로 길을 가로막는 상황 하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 흩어졌다가 다시 광화문 4거리에서 모여 노래를 하나 부르고 촛불을 켠 채 시청을 돌아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밤 10시부터는 두 교우께서 노숙자들을 위해 써달라고 개인적으로 희사한 130만원으로 100개의 바람막이 침낭형 텐트를 만들어 을지로 입구로부터 시청 앞을 다니면서 노숙자들에게 이를 전달했습니다.


[탐루(探淚)의 촛불을 켜자]


        저는 그날 저녁 생각했습니다. 이 땅의 꺼져가는 민주주의 정신을 회복하고 경제보다 더 높은 가치인 인권과 자유와 해방의 정신을 지켜가기 위해 계속하여 촛불을 켜야 하겠다고. 이제는 국민 모두가 배부른 돼지가 되어 배따지를 두들기며 희희낙락거리기 보다는 배가 고프더라도 사랑과 자유와 나눔을 노래할 줄 아는 참 인간이 되자고 소리를 쳐야 할 때라고. 예언자들은 성전 밖에서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아버지가 성전의 사제였지만,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고 요단강에 나아가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하늘 말씀을 선포하시기도 하셨지만, 주로 성전 밖 거리에서 산과 들에서 민중들이 있는 현장에서 하늘 뜻을 선포하셨습니다. 본래 하늘뜻펴기는 교회 벽만 울리다가 사라지는 소리가 아닌 세상 안에서 펼쳐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부패해 갈 때 소금은 자신의 몸을 녹여 짠맛으로 이를 막아야 하고 세상에 어둠이 깔려갈 때, 자신의 몸을 태워 빛을 발산해야 합니다. 김낙중선생께서는 일찍이 20대의 청년시절 부산에 피난을 갔을 때에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위해 일할 사람, 민족을 위해 눈물을 흘린 사람을 찾는다고 ‘탐루(探淚)’라는 글자를 새긴 등불을 들고 대낮에 광복동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우리 또한 진리에 살고 진리에 죽을 수 있는 참 사람을 찾는다는 팻말을 들고 촛불을 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부터 진행되는 목요평화기도회는 이제부터 교회 마당에서만 진행되던 틀을 벗어나, 거리 행진 촛불기도회로 진행하였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 예배 직후 이곳에서 논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간 한번이라도 목요평화기도회에 참석하신 분들은 모두 참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두 달 전 파주 무건리에서 평화예배를 드릴 때에 목요평화기도회를 열자고 주장만 했지 첫모임을 가질 때에는 저는 그날 국내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19명의 교우들이 모여 첫 시작을 했습니다. 이번에도 2월부터 4월까지 3개월은 제가 안식월을 갖기에 국내에 없을 예정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사제로 부름 받은 교우 여러분들께서 잘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이 성전 안에 머무는 신앙공동체로 머물지 말고 거기에서 얻어진 힘으로 성전 문을 열고 세상 안으로 나아가 그 속에서 살아 꿈틀대며 증언하는 신앙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욕을 먹는 이유는 입만 살아 있지 몸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천하는 믿음 행동하는 신앙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참 실천 참 행동을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뼈를 깎는 자기 반성과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언자 이사야서의 말씀과 같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 우리는 당신께 거역하기만 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외면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비꼬는 말, 반항하는 말만 하였고 거짓말이나 토해 놓고 있었습니다. 공평은 뒤로 제쳐 놓았고 정의는 얼씬도 못하게 하였습니다.”(12-14절) 그렇습니다. 경제적 공평은 자유경쟁의 이름으로 짓밟혔습니다. 분배는 개발과 경제살리기라는 이름으로 뒤로 제켜졌습니다. 사회적 정의는 짓밟히고 있습니다. 약자들의 소리, 민족화해와 민족공영, 그리고 평화통일을 외치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있습니다. 참 교육 바른 교육을 위해 정성을 다해 노력하는 교사들을 해직시키고 있으며 바른 양심을 갖고 소신 있게 일하는 검사를 내어 쫓고 있습니다.


        “성실과 정직이 통하지 않고 선한 자가 도리어 약탈당하는 세상”(15절)이 된 것이 우리의 죄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야훼께서 눈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는 세상”(15절)이 되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아니 야훼가 아니더라도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그리고 지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눈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눈엔 사람다운 사람 하나 보이지 아니하고 중재하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으니 기막힐 수밖에”(16절)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나서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중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기독인들이 일어서서 약자와 가난한 자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중재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 그를 사제라 부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모두 왕 같은 제사장, 사제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새해 첫 주일을 맞아 야훼 하느님은 우리로 하여금 ‘일어나 빛을 비추라’고 명령하십니다.(60장 1절)


[소의 해]


        올해는 기축년 소의 해입니다. 황소걸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천천히 한발 한발 걷지만, 만 리 길을 갑니다.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고 진창이라도 작은 일에는 개의치 않고 목표를 향해 바르게 걸어갑니다. 그래 소는 끈기와 우직함의 대명사입니다. 소를 상징삼아 올 한해를 우직하게 살아가십시다.


        소는 살아서는 인간에게 우유와 노동력을 제공하고 죽어서는 자기 몸을 양식으로 내어줍니다. 인간에게 소보다 더 헌신적이며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동물은 없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인도는 고대에서부터 소를 신격화시켜왔습니다. 잘못하면 우리는 소를 신으로 섬기는 인도인들을 미개한 신앙인으로 치부하기 쉽지만, 소를 통해 인간은 물론이요 동물과도 함께 살아가는 평화의 지혜를 실천하는 그들이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여 사람을 무참히 죽이는 서구의 그리스도인들보다는 덜 미개합니다.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교회]


        2009년도 표어로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교회”로 정하였습니다. 분단조국이 하나 되는 평화통일의 길은 우리 7천만 민족의 변함없는 희망입니다. 지금의 꽁꽁 얼어붙은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운하개발을 목적으로 4대강 대규모 토목공사를 시작하려는 잘못된 정책에 맞서 후손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보존하는 일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너덜너덜 다 헤진 국토를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작년의 표어에 생명이라는 단어를 덧붙였습니다. 단지 국토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생명이 존중받는 인간의 존엄성이 회복되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2천년 전 헤롯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왕궁과 별궁, 산 위에 2중 3중의 요새까지 지은 토목공사의 왕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러한 때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셨지요.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그 성전을 백성들의 복지를 위해 돌려주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남한의 정치 수장은 이 헤롯왕과 같이 불도저의 별명을 갖고 있는 토목공사 CEO 출신입니다.


        헤롯왕 때에 예수는 탄생했습니다. 오늘 이 사회는 작은 예수들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부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고백하는 공동체입니다. 여기 향린교회의 부름 받은 역사적 사명이 있습니다. 화살촉 교회로서의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올해 말 향린교회 10대뉴스를 선정할 때, 참으로 이 사회와 민족 역사에 기억될만한 일들이 너무 많아 선정하기 곤란하다는 얘기가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나이 90세가 넘은 어느 유명 사진작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난 72년 동안 사진작가로 크게 활약을 했는데, 그 많은 작품들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작품은 어느 것입니까?” 이 노 사진작가는 서슴지 않고 대답하기를 “내일 아침에 찍을 작품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세월 짧게는 20여년 길게는 80여년을 살아오셨는데 어느 날이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날이었나요?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의 말]  


   -무엇이 성공인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