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 8일                                 

               

                하느님의 부름과 인간의 응답(요나3)

                 -변혁의 영으로서의 기도-

                     (요나 2:1-10, 마태오 12:38-42)


       “하느님께서 이 몸을 바닷속 깊이 던지셨습니다. 밀려오다 부서지는 하느님의 물결이 네 위에서 넘실거렸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하늘뜻 펴기’라고 풀어 부르고 있습니다만, 흔히 말하는 설교라는 것은 본질상 완성품일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이 들어올 수 있는 영역을 남겨놓아야 하는 미완성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서는 목사들은 언제나 완성품을 내어 놓기 위해 수고를 합니다. 오늘 요나서 2장, 요나가 고기 뱃속에서 드리는 기도가 본문인데, 이를 어떻게 전해야 할 것인가?를 여러날 고민했습니다. 보통의 교회라면 그냥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기도의 주제를 풀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제가 서는 자리가 항상 민족과 사회라는 보다 큰 틀 안에서 움직여온 향린교회이기에 기도라는 주제를 전통적인 각도에서 풀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다른 때도 항상 미완성인 채로 이 자리에 섰지만, 오늘처럼 설교 내용이 뒤죽박죽 내 자신도 뭐가 뭔지 모르는 미완성인 채로 서는 때는 그리 많치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 다시 한번 설교 원고를 정리하는 저의 마음은 상당히 무거웠습니다. 잠시 묵상하는 가운데 아주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전혀 서로 다른 두개가 하나라고 하는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지난주 두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손규태목사님으로부터 이번에 본훼퍼목사 심포지움에 참여하는 일본의 목사 평신도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하는데, 이분들이 특별히 향린교회 예배에 참석하겠다고 한다는 전화 연락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10여분이 참석하셨습니다. 물론, 예배 후에 인사말이 있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CBS 기독교방송국의 김동민 PD로부터 저를 인텨뷰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번에 3.1절 특집으로 일제청산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데, 제가 지난해에 조부님과 관련되어 고백한 부분과 연관되어 인텨뷰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제 대답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나의 아버님과 고모님이 살아 계시는데, 나도 물론 고통이지만, 두 분에게 다시금 고통을 드리고 싶지 않다. 두 번째는 미국에서 살던 손자가 향린교회에 오더니 제 할아버지 팔아 유명세를 타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 같아 하고 싶지 않다. 셋째, 고백하지 못하는 후손들에게 보이지 않는 압력을 넣는 것 같고, 잘못하면 나만이 의인인 것 같은 착각을 가져오는 위험이 있어 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피디는 민족이라는 보다 큰 주제를 내 세우면서 저를 빠져나올 수 없는 코너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오늘 두 그룹의 특별손님을 앞에 놓고 아주 묘한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한쪽은 일제청산이라는 목표로, 또 다른 한쪽은 한일기독인들의 교류라는 어떻게 보면 서로 대립되는 그룹이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본훼퍼목사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그 안에 함께 공존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게 있어서는 혈통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오늘의 나, 향린교회의 담임목사라는 저를 낳게 한 조부님과 그리고 그분의 어두운 과거를 다시금 들쳐 내야 하는 민족의 요구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전 사실 이런 부분에서 향린교회를 섬기러 온 것은 아닙니다. 이런 줄 알았더면 전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물론, 제가 향린교회에 오지 않았더면, 제 할아버지의 어두운 과거도 적어도 제가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면, 향린교회는 제 가정의 가시입니다. 동시에 향린교회로서 볼 때도 제가 담임목사가 된 것이 가시입니다. 민족이라는 주제를 놓고 보면, 친일 청산과 반미는 가장 큰 두개의 틀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두 틀에 다 걸림돌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저도 요나와 같이 목사를 하지 않기 위해 도망 다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영광이라고는 생각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즐거움일 것이요 새로운 도전이라고 여겼던 향린의 섬김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현재로서는 고통입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그리고 어느 쪽도 스스로는 택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길에 들어선 것 같은 마치 고기 뱃속에 갇혀있는 요나와 같습니다.


       우리 향린교회가 다른 교회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물론 겉의 모습에서도 분명합니다. 십자가가 달린 종탑이 없다든가 다른 교회에서는 감히 볼 수 없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 또는 ‘이락크파병반대’와 같은 정치 사회문제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예언자적인 태도입니다. 이외 국악 찬송을 비롯한 장로목사 임기제 등은 다른 교회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 모두가 빼어 놓을 수 없는 향린교회의 특색이긴 하지만, 저는 이 보이는 특징 안에 감추어진 보다 근원적인 특징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교회 그러면, 우선 건물을 떠 올립니다. 그러나 교회로 번역되는 희랍어 ekklesia라는 단어는 ‘밖으로 불러내었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 건물을 뜻하지 않고 ‘불림 받은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와의 차이를 얘기할 때는 겉의 건물의 모습이나 혹은 예배 형태의 다른 모습에서 찾아야 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건물도 흉내낼 수 있고, 예배 형식도 흉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흉내낼 수 없습니다.


        우리 향린교회는 민중, 민족의 문제를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는 사회선교지향적인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일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단체, NGO와 구별되는 점은 무엇인가? 우리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사회 선교 그것이 목적이라면 차라리 그런 기관에 가서 일하면 되지 않느냐? 왜 교회가 이런 일을 하느냐? 교회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냐?는 외부적인 비판도 있고 내부적인 성찰의 소리도 있습니다. 교회는 분명히 하느님을 믿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단체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이 사회 속에 거하고 이 사회 속에서 그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려고 하기 때문에 동시에 사회단체입니다. 종교단체와 사회단체를 하나로 묶는 것은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실천 현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종교단체와 사회단체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사회선교를 지향하면서도 굳이 교회라는 신앙의 공동체 안에 머물고자 하는가? 우리 향린교회 교인들은 바로 이 양극점 속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습니다. 교회를 거의 일반 사회기관과 거의 구별 없이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교회는 사회기관일 수는 없다.고 확연한 선을 긋는 양극단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가? 둘 다 옳습니다. 아니 목사님 서로 반대되는 두 주장이 다 옳다니 있을 수 있는 얘기입니까? 당신은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양극단을 다 붙잡고 나가려는 회색분자가 아닙니까? ‘아 저는 그 얘기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요나는 이스라엘 동쪽에 있는 이방인의 나라 니느웨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이 꿈꾸어 온 이상향의 나라 서쪽 끝에 있는 다르싯을 향해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다가 폭풍으로 결국은 바닷속에 자신을 던져 넣는 죽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니느웨도, 다르싯도 아닌 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하느님이 가라고 하는 장소도 아닌, 자기가 꿈꾸던 장소도 아닌, 제3의 장소에 있습니다. 이 고기 뱃속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고기의 배는 어둡고 축축하고 악취가 진동하는 좁은 공간입니다. 암흑 속의 오도가도 못하는 갇힌 상태입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요나서의 저자는 일종의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야훼의 눈을 피해 멀리멀리 가고자 했던 요나, 그래서 요빠로 올라갔고, 배위로 올라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실제 의지와는 달리 배 밑창으로 내려갔고, 바닷속으로 던져졌고, 그리고 이제는 고기 뱃속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의 눈을 피해 멀리멀리 가고자 했던 요나는 실제는 멀리 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고기 뱃속이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실존적인 죽음의 고통을 겪는 하나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령과 자신의 꿈 사이에서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인간의 실존을 우화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고기 뱃속에 들어간 이 요나의 모습이 바로 교회가 사회단체와의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같습니다. 하는 일은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 있는 자리는 다르고 지향하는 궁극의 목적이 다르습니다. 대체로 종교를 마약이라고 공격하는 막시스트들의 초점은 인간이 할 바를 다하지 않고 신에게 의존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신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신 앞에서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나의 나약함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이고, 인간 실존의 어둠과 그 죄성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나약해진다는 말과 신 앞에서 자신의 나약함에 솔직해진다는 말은 다릅니다. 오히려 신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드러낸 솔직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용감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신 앞에서 자기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이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에서 공격하는 노예적인 기독인의 모습은 잘못된 교회 전통에서 나온 것이지, 본래의 예수 정신이나 성서의 정신은 아닌 것입니다. 본훼퍼목사님, 그리고 문익환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신앙 투사들은 하느님 앞에서 다 연약한 존재임을 알았던 분입니다. 동시에 그분 앞에서 솔직하였습니다.


        오늘 요나는 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요나는 죽음의 뱃속에서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조금 전만 해도 그는 죽음 앞에서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는 폭풍 앞에서 기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막가파의 ‘배째라’는 배짱으로 ‘나 때문에 일어난 폭풍이니 나를 바닷속으로 던져 내가 죽으면 일은 해결이 된다.’ 하며 폭풍 바닷속으로 죽음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하느님을 이겨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고 고기 뱃속에 갇혔습니다. 치졸한 삶에 더 이상 살아갈 여력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생각합니다. 살아오면서 여러분도 모두 자살을 한두번쯤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과연 내 인생이 살아갈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인가? 저도 고민하던 청소년 시절 결코 치사량에 미치지 않는 수면제 몇 알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던 알량했던 시절, 그러나 진지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게세라세라의 요나, 죽으면 됐지! 그러면 하느님도 별수 없을 것 아니냐! 니느웨로 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다! 그런데 요나는 죽지 아니하고 어두컴컴한 고기 뱃속에 갇혔습니다.


        그때 불현듯 요나는 생각합니다. ‘아하 이게 내 것이 아니구나! 죽음이 내 것이 아니구나!’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을 보니 내 것이 아니구나. 동시에 그는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삶도 나의 것이 아니구나!’ 지나온 모든 삶이 하느님의 은혜였음을 깨닫습니다. 거기서 그는 갑자기 삶의 의욕을 느낍니다. 바닥까지 내려가보면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다시금 불붙듯이 일어납니다. 사실, 자살하는 분들은 바닥이 무서워서 바닥까지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에 도중하차하시는 분들입니다. 악취나고 컴컴한 실존의 어둠 속에 사흘을 지낸 요나, 이 3일을 물량적 수치로 이해하는 분은 한분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혹 그런 분이 계실까봐 노파심에서 다시 한번 언급을 합니다. 크로노스의 3일이 아닌 카이로스의 3일을 견뎌온 요나는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던 자신의 삶이 하늘의 뜻이 담겨있는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 삶에 대한 강렬한 충동을 느낍니다. 그리곤 그는 기도합니다. ‘살려달라고.’ 그런데 이를 우리는 단순히 육체적인 삶으로만 한정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5절 말씀을 보면, ‘하느님 눈앞에서 쫓겨난 몸, 하느님 계시는 성전 쪽으로는 두 번 다시 눈도 못 돌릴 줄 알았습니다.’ 하느님 눈앞에서 쫓겨나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경험한 죽음의 세계였습니다. ‘물은 모가지 차 올랐고 깊은 바다는 이 몸을 휩쌌습니다. 머리는 갈대에 휘감겨 저 땅 밑 멧부리로 빠져드는데, 땅의 빗장들은 영영 내려버렸습니다.’ 지옥 바닥에까지 떨어졌는데, 거기서 땅의 빗장이 내려진 모습. 그러니까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의 빛이라고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 심연의 소굴로 떨어진 것입니다.


        오늘 2장의 본문은 요나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요나의 창작이 아닌 이미 시편에 나와 있는 시편의 기도들의 반복이자 인용입니다. 시편은 당시 유대인들이 매일같이 외우는 기도문이었습니다. 그러면 2장의 의도는 무엇인가? 어려움에 처하면 기도하라는 명령인가? 사실, 단지 위기 속에서의 기도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면, 요나는 배가 폭풍 앞에서 흔들릴 때, 그때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기를 각오하고 그는 자기를 죽음의 세계에로 내어 몰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한 나약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하느님 앞에서 그 명령을 거역할 줄 아는 배짱이 두둑한 인간이었고, 그리고 적어도 죽음 앞에서도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은 조폭 중의 조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살려달라고 외칩니다. 이 기도는 자신의 실존의 죽음을 통과한 영혼의 기도였고 신 앞에서 솔직한 기도였습니다.


        저는 설교 서두에서 ‘향린교회가 다른 교회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건물의 겉모습이나 예배형식에서 찾아질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찾아져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이제 여러분과 함께 8개월을 있으면서 여러분을 다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23년을 산 제 아내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제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다 알겠습니까? 그러나 느끼는게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필이란게 있습니다. 향린사람들이 다른 교회의 사람들과 다른 것은 자신의 죽음의 세계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민족 앞에서 자신이 죽었든, 민주화와 통일의 과제 앞에서 자신이 죽었든, 적어도 자신의 이기적인 차원을 넘어선 어떤 과제를 안고 씨름하다 한번쯤은 다 죽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저도 모릅니다. 죽었던 경험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죽기위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본다면 별 자랑거리도 없는 이 교회를 향해 동네의 크고 아름다운 교회를 몇 개씩 지나쳐서 온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걸어서 5분 10분이면 갈 수 있는 수많은 크고 아름다운 교회들을 제쳐두고 차로 한시간 이상씩 오는 이상한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교회를 나올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왜 눈앞에 보이는 저 수많은 교회들을 두고 이렇게 애써서 오늘도 향린교회를 향해 가고 있는가?’ 그냥 오지는 마세요. 고민하면서 오세요.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교회를 마치 쇼핑가는듯한 마음으로 옵니다. 자신들을 기쁘게 해주거나 자신들의 기호나 요구를 만족시켜줄 무언가를 찾기 위해 옵니다. 존 칼빈은 인간의 마음이 우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쉬임없이 가동되는 공장과 같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인들은 목사를 공장의 품질관리 기사쯤으로 여깁니다.(유진피터슨 ‘성공주의 목회신화를 포기하라.’ 112쪽) 자신의 생각이라는 품질이 인정받고 거기에 설교라는 아름다운 포장지로 덧입혀지기를 원합니다. 많은 경우 신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신은 이미 신의 자격을 박탈한 자신만을 위한 자기 생각의 정당화를 위한 노예로서의 신을 믿습니다. 기도도 많은 경우 이런 노예로서의 신을 부르는 방편으로 때로는 기술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요즈음 영성훈련이라는 말은 마치 훈련만 하면 영성이 고취되는 어떤 기술습득방법으로 오해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예수께서는 요나가 큰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삼 주야를 지냈던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땅 속에서 삼주야를 보낼 것이다.’ 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 속 곧 지옥의 불 속에서 삼일 밤낮을 머물러야만 하는 것일까? 그냥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그 자리에서 부활하시면 안되는 것일까? 요나가 고기 뱃속에 3일을 있었으니까 예수님도 꼭 3일을 채우셔야만 하는 것일까? 이는 철저한 패배, 완전한 죽음을 상징화하는 말일까?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사실, 이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여기에 본래 원문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사 매장되셨으며,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왜 한국말 번역에서 ‘매장되셨다가 지옥에 내려가셨다가’라는 구절을 뺐는지 이유를 잘 알지 못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말로 이해되었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이 사탄의 세력권인 지옥에 가서 3일씩이나 매여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저는 그 지옥에 가 있는 그 3일을 꼭 그렇게 패배적인 의미로만 이해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그건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죽음의 영혼들, 죽음의 사슬에 매여 그 속에서 고통하며 패배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영혼들을 깨우기 위한 하늘 뜻 선포의 기간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예수님은 마태오복음 본문에서 요나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오늘 요나는 그러면 패배의 사흘을 보낸 것입니까? 요나 2장의 기도는 결코 그런 패배의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야훼 나의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그 구렁에서 이 몸 살려주셨습니다.’ 지옥의 현장 안에서 지옥의 빗장이 그를 영영 가둬버린 그 현장 속에서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는 그 위기 속에서 그는 그의 기도가 하느님 계시는 거룩한 궁전에 다다랐다고 하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절에서 그 확신 속에서 감사의 제물 곧 자신을 드리고 있습니다. 지옥 속에서 그는 감사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느님을 경배하는 찬양의 시간이지만, 동시에 이는 우리 인간들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는 낮아짐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감사와 찬양은 구름 위에서가 아닌 심연의 바닥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옥중에서 죽음을 경험한 많은 민주인사들이 쓴 글들을 읽을 때에 많은 감명을 받습니다. 성경 안에도 죽음의 현장 안에서 주옥같은 글들이 나왔습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서 옥중서신이라고 불리우는 에페소 필리비 골로사이 교인들에게 보내는 놀라운 생명력이 담긴 복음의 글들을 썼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묵시록은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된 상태에서 쓴 책입니다. 물론, 이 묵시록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대로 죽음 이후의 세계를 그리는 피안적인 서적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읽을 필요가 있는 종교적인 혁명과 정치적인 해방이 서로 씨줄날줄로 엮어져 있는 책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 또 다른 부활을 경험합니다.


        종교의 신비주의자들은 기도의 형식에 빠져듦으로 금식이나 고행을 통한 자학적인 현상에 너무 치우치어 현실도피적인  잘못을 범하지만, 동시에 이를 비난하는 현실개혁파들은 기도라는 신 앞에서의 인간의 죽음을 통과한 자기 성찰 없는 자기 논리로 무장한 칼날을 이리저리 들이대어 인간사이 사이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잘못을 범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외치는 목사이면서 ‘하느님 없이 하느님 앞에’라는 화두를 붙들고 ‘기독교의 비종교화’라는 신학적인 주제를 안고 고민하였던 천재 신학자.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의 좋은 자리를 두고,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속으로 들어간 목사님.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승객과 행인들의 안전을 위해 미치광이 운전수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히틀러의 암살단원으로 참여하였다가 거사를 앞두고 밀고로 발각이 되어 2년여 간 감옥에 있으면서 주옥같은 신학의 글들을 남긴 목사님. 독일 패전 불과 2개월을 앞두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행동하는 양심, 본 훼퍼 목사님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 시를 요나서 2장의 현대판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남들이 나더러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모습이 어찌 침착하고 명랑확고
        한지 마치 자기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가끔 나더러 말하기를 감시원과 말하는 나의  모습
        이 어찌 자유롭고 친절 분명한지 마치 내가 그들의 상전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또 나에게 말하기를 불행한 하루를 지내는 나의 모습이
        어찌 평온하고 웃으며 당당하지 마치 승리만을 아는 투사 같다는데


        남의 말의 내가 참 나냐?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냐?

        새장에 든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약한 나,

        목을 졸린 사람처럼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나,

        색깔과 꽃과 새소리에 주리고,

        좋은 말 따뜻한 말동무에 목말라하고,

        방종과 사소한 굴욕에도 떨며 참지 못하고,

        석방의 날을 안따깝게 기다리다 지친 나,

        친구의 신변을 염려하다 지쳤다.

        이제는 기도에도 생각과 일에도 지쳐 공허하게 된 나다.

        이별에도 지쳤다.-이것이 내가 아닌가? 

        

        나는 무엇?

        이 둘 중 어느 것이 나냐?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인가?

        이 둘이 동시에 나냐? 남 앞에서 허세를 떠는 나인가, 자신 앞에선 한 없이
        불쌍하고  약한 나인가? 이미 결정된 승리 앞에서 무질서에 떠는  패잔병에
        비교할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적막한 물음은 나를 끝없이 희롱한다.

        내가 누구이든 나를 아는 이는 오직 당신뿐 나는 당신의 것이외다

        

        오 하느님!


               - 본 훼퍼가 옥중에서 그리고 요나가 고기 뱃속에서-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