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이사야 51,1-8; 1요한 4,7-11

여러분도 마찬가지이지만, 어제 저녁 행사가 끝나고 집을 가면서 이 근처의 차량혼잡으로 매우 고생을 하였습니다. 성탄절을 맞아 세상은 온통 들떠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 또한 세상과 더불어 같이 들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삶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오늘은 누구나가 즐거운 표정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인이 됩니다.

[기쁜 성탄? 무엇이 기쁜 것인가?]

아이들이 묻습니다. 엄마 오늘은 왜 기쁜거야. 응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거든. 예수님이 태어나신 게 왜 기뻐? 응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셨기 때문이야. 구원을 베푸시기 때문이지. 그런데 엄마 구원은 뭐야? 음..... 여기서 우리의 말문은 막힙니다. 오늘 아침에 제 딸하고 통화를 하였는데, ‘Merry Christmas!’ 하길래, 저도 ‘메리 크리스마스 했지요.’ 그리고는 제가 물었습니다. ‘은주! 그런데 뭐가 기쁜거야?’ 갑작스런 질문에 딸이 한동안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합니다.‘실은 별로 기쁜 것은 없어요.’ 그래 제가 짓궂게 물었지요. ‘그러면 왜 메리 크리스마스! 한거야?’조금 침묵을 지키더니, ‘나는 별로 기쁘지 않은데, 아빠가 기쁘기를 바래서 그랬어. 근데 아빠는 왜 기쁜지 알아?’‘응 아빠는 알지’ 그리고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오늘 왜 기쁜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은 그 기쁨의 이유를 예수가 구세주 곧 구원의 주님으로 오셨기 때문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여러분 구원이 뭡니까? 통상 이해하는 대로 죽어 천국 가는 것이라면 죽기 전에 잠깐 기뻐하면 되었지 지금부터 기뻐할 이유는 무엇이고, 그 구원은 우리가 예수 믿기 시작한 그때부터 이미 시작한 것이니까 오늘만 특별히 기뻐할 이유는 없습니다.

세상이 떠들썩한다고 덩달아 기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차분하게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그 기쁨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요한서신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니 우리는 예수를 알기 전에 이미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었습니까? 왜 우리가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생명이란 단어는 목숨을 갖고 태어난 존재라는 겉치레의 의미도 있지만, 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속내의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단순히 살아 숨쉬는 존재가 아닌 사명이 있는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명이란 하늘로부터 임한 거룩한 명령을 말합니다. 죽음 너머까지 갖고 갈 수 있는 깨달음을 말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살아있는 존재로서 그런 거룩한 명령을 깨닫고 있다면 여러분은 생명의 존재이지만, 만약 이 깨달음이 없다면 껍데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죽은 존재와 다름이 없습니다. 오늘 죽어도 한이 없는 내 삶의 깨달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던 니고데모는 이 깨달음을 얻지 못해 괴로워했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하는 중에 바로 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깨닫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람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 달려갔던 것입니다. 돈을 생명으로 알고 돈만 모아오던 세리장 자케오는 무엇 때문에 창피를 무릎 쓰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고, 무엇을 깨달았기에 자신의 재산을 다 나누어주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까?

[생명의 깨달음]

이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들의 삶의 방향을 180도 틀어버린 이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요한은 이 깨달음을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생명을 얻게 된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알고 그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사랑을 얘기하면서 우리에게 하나의 주의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진실한 기독교인들이 흔히 말하기를 ‘나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과연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합니까?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 일일까요? 개미가 우리 인간을 향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사랑은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과연 개미가 우리 인간의 아픔을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 인간이 과연 하느님의 아픔을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까? 피조물이 창조주의 아픔을 나눌 수가 있습니까? 인간이 하느님을 직접 사랑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간접으로는 가능합니다. 그 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강조하기를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근거를 권력에 의존하기도 하고 부에 의존하기도 하고 인기에 의존하기도 하고 과학의 발전에 의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사회의 사랑의 관계가 무너지고 나서는 이런 것들은 성수대교나 삼품백화점 마냥 그대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없어 자기 목숨을 끊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말씀이 왜 복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이고 그 증거가 바로 나사렛 예수의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에 기뻐하는 것은 아기 예수 탄생이 바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깨닫는 우리들은 이 깨달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서로 나눈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이 아닙니다. 생명은 함께 나눌 때에 참 생명이 되고 더 큰 생명이 됩니다.

성탄절은 나눔의 절기입니다. 하느님이 자신의 생명을 인간들과 나누셨듯이 우리들도 받은바 생명을 함께 나누는 절기입니다. 그냥 나누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이 되시고 그리고 말구유에 나시기까지 자신을 비우셨듯이 우리 또한 철저히 비우는 나눔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자신을 로마 기마부대의 말에 먹이가 되시고 로마에 반역하는 정치테러범들을 처형하던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맡기셨듯이 우리 또한 예수를 쫓아 이 땅의 불의한 세력에 우리들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지는 것입니다. 이는 패배나 항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을 비웠기에 거기에는 패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을 통째로 집어 삼키는 부활이 승리만이 존재합니다. 작은 물고기를 통째로 집어 삼키는 큰 물고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를 만났습니다. 그가 순순하였기에 큰 물고기는 얼씨구나 하고 통째로 집어 삼켰습니다.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간 이 고기는 날카로운 지느러미로 큰 물고기의 배 천장을 갈랐습니다. 그러자 그 속에 갇혀있던 많은 작은 물고기들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가 있습니다. 철저한 나눔의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말구유 탄생의 참 뜻이 숨어 있습니다. 이 깨달음 속에서 이제 우리는 떡과 잔을 나누는 성찬의 예식을 갖습니다. 이 떡과 잔을 나누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고 예수님의 삶을 나눕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함께 나눔으로 이 땅의 어떤 세력도 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나 된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한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오늘의 부끄러움을 넘어서]

2005년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올해가 해방 60년이자 을사늑약 100주년이 되기에 뭔가 획기적인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습니다. 가을에 2차 6자회담이 열릴 때만 해도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민족은 강대국들의 이익에 휘둘려 우리의 자주역량을 드러내지 못한 채 이렇게 또 한해가 저물어갑니다. 미국 대사의 말 한마디에 우리의 국론이 통째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한 채 작은 것에 정신을 빼앗기는 우리 민족이 안타깝습니다. 황우석교수의 논문 조작이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든 것이 아니라, 60년이 넘도록 이념의 노예가 되어 제 형제자매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 되지 못한 우리 자신이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제 형제를 제 부모를 제 자식을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칭찬하면 감옥에 처넣는 우리의 현실이 부끄러운 것이고, 더욱 부끄러운 것은 이러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강대국들의 논리에 농락당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희희낙락거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깨우침을 얻어 누구보다도 앞장서야 할 종교인들마저 이러한 이념의 노예가 되어 아우성치는 모습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이 비록 이렇게 안타깝고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대로 주저 않을 수만은 없습니다. 어둠 속에 조용하게 비쳐오는 빛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지난 2천년동안 수많은 인간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그 빛은 변함없이 유유하게 세상을 비추어 왔습니다. 때로 우리의 조급함이 그 빛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시야를 가리웠습니다. 우리의 두려움이 우리의 시야를 가리웠습니다. 실패에 대한 우리의 공포가 그 빛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시야를 잠시 가리었던 것뿐입니다. 이제 조급함을 떨치고 두려움과 공포를 떨치고 그 빛을 뚜렷이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함께 손을 잡고 그 빛을 향해 나아가십시다. 사랑의 마음을 품고 나아가십시다. 그리고 사랑할 바에는 어설프게 하지 맙시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하였으니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완전히 몰아낼 만큼 완전하게 사랑하십시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라. 땅을 굽어보아라. 하늘은 연기처럼 스러지고 땅은 옷처럼 해어져 주민이 하루살이처럼 꺼지리라 그러나 내가 베풀 구원은 영원하고 내가 세울 정의는 넘어지지 않는다. 나의 말을 들어라! 정의를 익히 아는 자들아! 나의 훈계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하는 자들아. 사람들의 욕설을 두려워하지 말라! 비방을 받더라도 낙담하지 말라! 그들은 좀에 쓸려 떨어지는 옷이요. 빈대좀에 먹혀 삭아지는 양털이다. 내가 세울 정의는 영원하고 내가 베풀 구원은 대대에 미친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