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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설교)를 문서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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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0일 성도추모주일: 영원을 바라보는 믿음
시 39:4-7, 고후 4:16-18
[성도추모]
지난 금요일 아침 오늘의 하늘말씀을 준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전화를 받았습니다. 목사에게 밤늦게 혹은 아침 일찍이 걸려오는 전화는 대부분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는 전화입니다. 인민지집사님의 아버님께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다는 전화였습니다. 4년 전 뵈었을 때에 건강하셨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간 전혀 아프셨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고 아직은 2-30년은 더 사실수 있는 62세의 나이였기에 이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혈압이 있으시긴 했지만 매일 운동을 하시면서 건강을 유지하고 계셨는데 갑자기 쓰러지신 것입니다. 오늘 오후 5시 반에 우리가 함께 가서 부활증언예배를 드리겠지만, 먼저 갑작스런 아픔을 당한 인민지/김종완집사님 가정에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올해 여러분들도 가족들이나 친지 친구들의 죽음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노환이나 병으로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신 분도 계시겠지만, 갑작스런 죽음의 소식을 접하고 당황하신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희 교우들 중에서는 장덕순권사님과 김근영교우님께서 올해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장덕순권사님은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까지는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하셨기에 우리들은 모두 놀랄수밖에 없었습니다. 워낙 말씀이 적으신 분이시긴 했지만, 지금도 조용히 웃음 짓는 그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근영교우님은 20년 넘게 근육이 수축되어오는 불치병을 앓아오셨고 전혀 바깥출입을 할 수 없으셨기에 오래된 교우들 외에는 그 얼굴을 알고 계시는 분은 없습니다. 물론 본인께서도 가족들에게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도 갖고 계셨지만, 딸과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자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많은 가정들이 나름대로 각자의 아픔을 갖고 계시지만, 부인되시는 장명숙집사님의 경우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교우께서는 집사님이 항상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기에 그런 아픔이 있는 줄 몰랐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시고 어떤 권사님은 그 마음이 천사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저희 교우는 아니시지만, 이현숙준목님의 시아버님과 곽상진집사님의 시아버님께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곽상진집사님은 이미 오래전에 남편을 사고로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셨는데 이번에 아버님을 보내시는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또 이 조상석이정자권사님은 손주가 태어났지만 심장에 이상이 있어 이름도 짓기 전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엄마의 뱃속에서 한 생명으로 살다 세상에 나왔지만, 아버지나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는 안기지 못했던 한 이름 없는 생명 또한 한 인간으로 기억하고 추모합니다. 우리는 이런 죽음이 특히 아이들에게 일어날 때에 하느님의 존재성에 대해 심한 의문을 갖습니다. 어른들에게 어떤 고통이 오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말하겠지만,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는 우리들의 항의는 정당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침묵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고통에 대해 시원한 답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무어라고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을 통해 자신이 어느 정도 성숙해진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주위의 아픔을 당한 사람들의 마음을 진실로 이해하게 되고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펴게 됩니다. 저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의미는 이런 사랑의 나눔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아픔을 당했을 때에야 비로소 교회 신앙공동체의 참다운 존재를 깨닫게 되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참 신앙은 죽음을 준비하는 일에서부터]
그런데 요즘 한국 종교는 이러한 나눔의 신앙공동체적 신앙보다는 개인적인 묻지마 현세적인 축복신앙으로 전락하여가고 있습니다. 현세를 강조하는 샤머니즘과 신자유주의라는 세속주의의 영향으로 기독교나 불교 모두 본래의 종교성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인간편에서 본다면 종교는 본래 죽음에 대한 공포나 현세의 고통의 의미를 찾는 일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교회가 죽음이나 고통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고 현세적인 축복만을 외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은 병 고침을 받고 빵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병고침의 기적이나 급식기적에서 우리는 그 기적이 가리키는 영생의 삶을 보아야 하는데, 달은 보지 않고 그 손가락만 쳐다보고 예수님을 쫓아다녀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잘 살기 위해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여 유언장을 쓰는 일이 중요합니다.
서양 사람들에게 있어서 유언장을 쓴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에 죽음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매우 꺼려합니다. 그런데 죽고 나면 유별나게 제사에는 열심입니다. 실은 이게 반대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지금 연세가 드신 부모님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죽거든 자녀들이 제사 열심히 지내는 쪽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지금 살아있을 때 한번이라도 더 자주 찾아오는 것을 원하십니까? 이번에는 자녀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남한의 자녀들이 부모님을 찾아가는 횟수가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적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마 전 한국인구학회가 펴낸 통계 자료에 의하면 “함께 살고 있지 않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난다.”고 답한 자녀는 26%로 27개 국가 중 최하위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는데 그 경우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부모가 돈이 많은 경우입니다. 서양에서는 자녀에게 유산 상속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녀들도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에 별 차이가 없는데, 남한의 경우는 부모가 돈이 많으면 자주 찾아가는 것이 매우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난 설마 그럴 리가 있으랴? 그랬는데 이 통계를 보면서 정말 이 남한 사회의 병폐를 더 깊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효(孝)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허구에 가득 차 있고 가증한 것인가? 우리가 얼마나 돈의 노예가 되어 있고 이 사회가 얼마나 물질에 타락한 사회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겨레 2007년 12월 11일) 사교육비가 남한처럼 높은 나라가 없고 대학졸업률은 세계 최고인데, 그게 다 어떤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까?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 돈만 아는 돈노예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교육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예만 갖고 전체를 판단한다고 하는 것이 지나친 말일지 모르지만,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모두가 정신 나간 짓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된 인간을 만들어내자고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제대로 된 인간이란 사람을 보면 사랑할 줄 아는 인간입니다. 그가 가진 부나 권력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제 부모도 돈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만남의 횟수가 달라지는 인간이라면 이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더구나 가난한 이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합니다. 이 사회가 너무나 돈을 말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어제 모든 남한 신문 1면에 가장 크게 나온 뉴스가 뭐입니까? 이명박씨가 재벌들 불러다가 앞으로 친 재벌 국가경영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법규제를 풀테니까 마음 놓고 투자해라 그겁니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요구할 일 있으면 직접 전화해도 좋다. 이게 대통령당선자가 해야 할 말입니까? 차라리 그런 직접전화 얘기를 하려면 권력에 의해 억울한 일을 당한 국민들은 저에게 직접 전화해도 좋습니다. 이렇게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앞으로 잘 하길 바라지만, 재벌감싸기와 경제살리기를 혼돈하고 있어 걱정이 앞섭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말씀이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명박장로께서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부자되는 것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는 교회가 정말 교회다워지려면 죽음에 대해서 더 자주 얘기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이는 현실도피적인 신앙을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물질지향적인 삶에서 벗어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만약 종교가 죽음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굳이 교회에 나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들어야 할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교회가 세상 성공의 길과 돈 버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 그 자체를 매우 어두운 것으로 여겨 죽음에 대해 어떤 의미부여를 하지 않습니다. 유언장을 써보라고 하면 대부분이 거부반응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말똥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죽은 정승이 산개만 못하다.’ 이런 말들은 모두 죽음 그 자체를 비하하는 말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죽음 자체를 찬양하는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인생관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물질중심 현세주의는 죽음을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제가 유언장을 쓰자고 하는 것은 자기를 바로 알자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자기 분수를 알고 자신의 본래됨을 알자는 말입니다. 더구나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고 우리 모두는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부활이란 다시 산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삶이 있다는 말입니다.
[죽음은 또 하나의 탄생]
스위스의 의사이자 죽음학의 대가로 불리우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박사는 20년에 걸친 임상 경험을 통해 우리가 아는 그런 죽음은 없다고 말하면서 죽음은 단지 또 하나의 출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애벌레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고치를 벗어나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나는 것을 볼 때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 자유로운 몸이 되어 영원의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막연한 공포감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은 어둡고 쓸쓸한 곳이다라고 말하고 지옥문에는 무서운 염라대왕이 서 있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죽음의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본 로스박사는 죽음은 결코 그러한 곳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로스박사는 자신의 장례식에서 모든 참석자들에게 나비가 들어간 봉투를 나눠주고 일제히 이 나비를 날려 보냄으로 자신이 자유로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한번은 다 죽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누구나 한번 죽게 되어 있는 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마지못해 억지로 죽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실패한 인생이요 비굴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죽는 인생인 줄 알면서 나는 안 죽을래 하고 억지로 버틴다든가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면 이것이야 말로 위선입니다. 정말 정정당당한 삶은 죽기 전에 미리 죽으면 됩니다. 유언장을 쓰고 나면 그때부터 진짜 자유로운 삶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도 말합니다. ‘야훼여 알려주소서 며칠이나 더 살아야 이 목숨이 멈추리이까? 내 목숨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알고 싶사옵니다. 걸어 다닌다지만 실상은 그림자 재물을 쌓아도 그것은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으며 그 차지할 자 누구일지 모르는 것을. 그러니 당신 외에 또 누구를 믿으리이까?’
늙으면 사람은 고집이 세어지고 굳어진다고 합니다. 죽음이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리 죽으면 그 인생은 다시 태어나는 인생이요 그 인생은 어린아이의 인생이요 그 인생은 부드러움이 넘치는 젊음의 인생입니다. 스스로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는 분들 적어도 나보다 나이가 더 많으신 분들은 젊어지시길 원하시면 보약 대신에 유언장 한번 쓰시면 됩니다. 유언장 쓰시고 주위에서 요새 젊어졌다는 얘기 듣거든 저에게 보약값 내시기 바랍니다.
데카르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두 마디의 좌우명이 있었습니다. ‘잘 숨는 사람만이 잘 사는 삶’이라는 오비디우스의 말과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알려지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처하여 죽음을 무서워한다’는 세네카의 말입니다. 또 죽을 때 조용히 죽으면 됐지 무슨 유언장은 유언장인가?라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은 죽을 사람 죽으면 되지만, 문제는 남아있는 가족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되는 것이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는 남겨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배우자와 자녀들이 마지막 유언장을 펼쳤을 때, ‘여보 사랑해요. 당신 영원히 사랑합니다.’라는 이 말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아들아 딸아 내 너를 사랑한다. 조금도 세상에 지지 말고 힘차게 살아라.’ 이 말 한마디가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아들과 딸에게 큰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외적인간과 내적인간으로 나누어집니다. 외적인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낡아집니다. 그러나 내적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보이지 않습니다.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여 있다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아름다운 또 다른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지하게 유언장을 써보셨다면 여러분 안의 내적 인간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쓰신 분은 봉투에 넣으셔서 겉에 이름을 적으시고 이를 봉하신 다음 헌금궤에 함께 넣어주시고 안 쓰신 분은 다음 주에 써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물론 써서 갖고 계셔도 되지만, 여러분이 그냥 갖고 있는 것 하고 교회에 맡겨놓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끝으로 삶과 죽음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죽은 후에도 이 육신을 벗어나 한 단계 더 높고 성숙된 인격으로 계속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의 바람 하느님의 숨소리가 여러분의 심령의 귓전에 들려지기를 기도합니다.
[파견사]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시 39:4-7, 고후 4:16-18
[성도추모]
지난 금요일 아침 오늘의 하늘말씀을 준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전화를 받았습니다. 목사에게 밤늦게 혹은 아침 일찍이 걸려오는 전화는 대부분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는 전화입니다. 인민지집사님의 아버님께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다는 전화였습니다. 4년 전 뵈었을 때에 건강하셨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간 전혀 아프셨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고 아직은 2-30년은 더 사실수 있는 62세의 나이였기에 이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혈압이 있으시긴 했지만 매일 운동을 하시면서 건강을 유지하고 계셨는데 갑자기 쓰러지신 것입니다. 오늘 오후 5시 반에 우리가 함께 가서 부활증언예배를 드리겠지만, 먼저 갑작스런 아픔을 당한 인민지/김종완집사님 가정에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올해 여러분들도 가족들이나 친지 친구들의 죽음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노환이나 병으로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신 분도 계시겠지만, 갑작스런 죽음의 소식을 접하고 당황하신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희 교우들 중에서는 장덕순권사님과 김근영교우님께서 올해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장덕순권사님은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까지는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하셨기에 우리들은 모두 놀랄수밖에 없었습니다. 워낙 말씀이 적으신 분이시긴 했지만, 지금도 조용히 웃음 짓는 그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근영교우님은 20년 넘게 근육이 수축되어오는 불치병을 앓아오셨고 전혀 바깥출입을 할 수 없으셨기에 오래된 교우들 외에는 그 얼굴을 알고 계시는 분은 없습니다. 물론 본인께서도 가족들에게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도 갖고 계셨지만, 딸과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자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많은 가정들이 나름대로 각자의 아픔을 갖고 계시지만, 부인되시는 장명숙집사님의 경우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교우께서는 집사님이 항상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기에 그런 아픔이 있는 줄 몰랐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시고 어떤 권사님은 그 마음이 천사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저희 교우는 아니시지만, 이현숙준목님의 시아버님과 곽상진집사님의 시아버님께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곽상진집사님은 이미 오래전에 남편을 사고로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셨는데 이번에 아버님을 보내시는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또 이 조상석이정자권사님은 손주가 태어났지만 심장에 이상이 있어 이름도 짓기 전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엄마의 뱃속에서 한 생명으로 살다 세상에 나왔지만, 아버지나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는 안기지 못했던 한 이름 없는 생명 또한 한 인간으로 기억하고 추모합니다. 우리는 이런 죽음이 특히 아이들에게 일어날 때에 하느님의 존재성에 대해 심한 의문을 갖습니다. 어른들에게 어떤 고통이 오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말하겠지만,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는 우리들의 항의는 정당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침묵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고통에 대해 시원한 답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무어라고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을 통해 자신이 어느 정도 성숙해진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주위의 아픔을 당한 사람들의 마음을 진실로 이해하게 되고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펴게 됩니다. 저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의미는 이런 사랑의 나눔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아픔을 당했을 때에야 비로소 교회 신앙공동체의 참다운 존재를 깨닫게 되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참 신앙은 죽음을 준비하는 일에서부터]
그런데 요즘 한국 종교는 이러한 나눔의 신앙공동체적 신앙보다는 개인적인 묻지마 현세적인 축복신앙으로 전락하여가고 있습니다. 현세를 강조하는 샤머니즘과 신자유주의라는 세속주의의 영향으로 기독교나 불교 모두 본래의 종교성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인간편에서 본다면 종교는 본래 죽음에 대한 공포나 현세의 고통의 의미를 찾는 일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교회가 죽음이나 고통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고 현세적인 축복만을 외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은 병 고침을 받고 빵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병고침의 기적이나 급식기적에서 우리는 그 기적이 가리키는 영생의 삶을 보아야 하는데, 달은 보지 않고 그 손가락만 쳐다보고 예수님을 쫓아다녀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잘 살기 위해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여 유언장을 쓰는 일이 중요합니다.
서양 사람들에게 있어서 유언장을 쓴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에 죽음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매우 꺼려합니다. 그런데 죽고 나면 유별나게 제사에는 열심입니다. 실은 이게 반대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지금 연세가 드신 부모님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죽거든 자녀들이 제사 열심히 지내는 쪽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지금 살아있을 때 한번이라도 더 자주 찾아오는 것을 원하십니까? 이번에는 자녀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남한의 자녀들이 부모님을 찾아가는 횟수가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적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마 전 한국인구학회가 펴낸 통계 자료에 의하면 “함께 살고 있지 않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난다.”고 답한 자녀는 26%로 27개 국가 중 최하위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는데 그 경우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부모가 돈이 많은 경우입니다. 서양에서는 자녀에게 유산 상속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녀들도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에 별 차이가 없는데, 남한의 경우는 부모가 돈이 많으면 자주 찾아가는 것이 매우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난 설마 그럴 리가 있으랴? 그랬는데 이 통계를 보면서 정말 이 남한 사회의 병폐를 더 깊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효(孝)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허구에 가득 차 있고 가증한 것인가? 우리가 얼마나 돈의 노예가 되어 있고 이 사회가 얼마나 물질에 타락한 사회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겨레 2007년 12월 11일) 사교육비가 남한처럼 높은 나라가 없고 대학졸업률은 세계 최고인데, 그게 다 어떤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까?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 돈만 아는 돈노예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교육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예만 갖고 전체를 판단한다고 하는 것이 지나친 말일지 모르지만,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모두가 정신 나간 짓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된 인간을 만들어내자고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제대로 된 인간이란 사람을 보면 사랑할 줄 아는 인간입니다. 그가 가진 부나 권력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제 부모도 돈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만남의 횟수가 달라지는 인간이라면 이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더구나 가난한 이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합니다. 이 사회가 너무나 돈을 말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어제 모든 남한 신문 1면에 가장 크게 나온 뉴스가 뭐입니까? 이명박씨가 재벌들 불러다가 앞으로 친 재벌 국가경영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법규제를 풀테니까 마음 놓고 투자해라 그겁니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요구할 일 있으면 직접 전화해도 좋다. 이게 대통령당선자가 해야 할 말입니까? 차라리 그런 직접전화 얘기를 하려면 권력에 의해 억울한 일을 당한 국민들은 저에게 직접 전화해도 좋습니다. 이렇게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앞으로 잘 하길 바라지만, 재벌감싸기와 경제살리기를 혼돈하고 있어 걱정이 앞섭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말씀이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명박장로께서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부자되는 것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는 교회가 정말 교회다워지려면 죽음에 대해서 더 자주 얘기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이는 현실도피적인 신앙을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물질지향적인 삶에서 벗어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만약 종교가 죽음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굳이 교회에 나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들어야 할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교회가 세상 성공의 길과 돈 버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 그 자체를 매우 어두운 것으로 여겨 죽음에 대해 어떤 의미부여를 하지 않습니다. 유언장을 써보라고 하면 대부분이 거부반응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말똥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죽은 정승이 산개만 못하다.’ 이런 말들은 모두 죽음 그 자체를 비하하는 말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죽음 자체를 찬양하는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인생관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물질중심 현세주의는 죽음을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제가 유언장을 쓰자고 하는 것은 자기를 바로 알자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자기 분수를 알고 자신의 본래됨을 알자는 말입니다. 더구나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고 우리 모두는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부활이란 다시 산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삶이 있다는 말입니다.
[죽음은 또 하나의 탄생]
스위스의 의사이자 죽음학의 대가로 불리우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박사는 20년에 걸친 임상 경험을 통해 우리가 아는 그런 죽음은 없다고 말하면서 죽음은 단지 또 하나의 출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애벌레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고치를 벗어나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나는 것을 볼 때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 자유로운 몸이 되어 영원의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막연한 공포감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은 어둡고 쓸쓸한 곳이다라고 말하고 지옥문에는 무서운 염라대왕이 서 있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죽음의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본 로스박사는 죽음은 결코 그러한 곳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로스박사는 자신의 장례식에서 모든 참석자들에게 나비가 들어간 봉투를 나눠주고 일제히 이 나비를 날려 보냄으로 자신이 자유로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한번은 다 죽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누구나 한번 죽게 되어 있는 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마지못해 억지로 죽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실패한 인생이요 비굴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죽는 인생인 줄 알면서 나는 안 죽을래 하고 억지로 버틴다든가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면 이것이야 말로 위선입니다. 정말 정정당당한 삶은 죽기 전에 미리 죽으면 됩니다. 유언장을 쓰고 나면 그때부터 진짜 자유로운 삶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도 말합니다. ‘야훼여 알려주소서 며칠이나 더 살아야 이 목숨이 멈추리이까? 내 목숨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알고 싶사옵니다. 걸어 다닌다지만 실상은 그림자 재물을 쌓아도 그것은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으며 그 차지할 자 누구일지 모르는 것을. 그러니 당신 외에 또 누구를 믿으리이까?’
늙으면 사람은 고집이 세어지고 굳어진다고 합니다. 죽음이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리 죽으면 그 인생은 다시 태어나는 인생이요 그 인생은 어린아이의 인생이요 그 인생은 부드러움이 넘치는 젊음의 인생입니다. 스스로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는 분들 적어도 나보다 나이가 더 많으신 분들은 젊어지시길 원하시면 보약 대신에 유언장 한번 쓰시면 됩니다. 유언장 쓰시고 주위에서 요새 젊어졌다는 얘기 듣거든 저에게 보약값 내시기 바랍니다.
데카르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두 마디의 좌우명이 있었습니다. ‘잘 숨는 사람만이 잘 사는 삶’이라는 오비디우스의 말과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알려지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처하여 죽음을 무서워한다’는 세네카의 말입니다. 또 죽을 때 조용히 죽으면 됐지 무슨 유언장은 유언장인가?라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은 죽을 사람 죽으면 되지만, 문제는 남아있는 가족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되는 것이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는 남겨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배우자와 자녀들이 마지막 유언장을 펼쳤을 때, ‘여보 사랑해요. 당신 영원히 사랑합니다.’라는 이 말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아들아 딸아 내 너를 사랑한다. 조금도 세상에 지지 말고 힘차게 살아라.’ 이 말 한마디가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아들과 딸에게 큰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외적인간과 내적인간으로 나누어집니다. 외적인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낡아집니다. 그러나 내적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보이지 않습니다.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여 있다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아름다운 또 다른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지하게 유언장을 써보셨다면 여러분 안의 내적 인간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쓰신 분은 봉투에 넣으셔서 겉에 이름을 적으시고 이를 봉하신 다음 헌금궤에 함께 넣어주시고 안 쓰신 분은 다음 주에 써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물론 써서 갖고 계셔도 되지만, 여러분이 그냥 갖고 있는 것 하고 교회에 맡겨놓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끝으로 삶과 죽음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죽은 후에도 이 육신을 벗어나 한 단계 더 높고 성숙된 인격으로 계속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의 바람 하느님의 숨소리가 여러분의 심령의 귓전에 들려지기를 기도합니다.
[파견사]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