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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설교)를 문서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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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55
12월 25일(성탄절)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시 15:1-5; 요한 1:1-14)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기록한 4개의 복음서를 비교해보면 요한복음은 매우 독특한 복음서인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처음부터 분명합니다.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반면 마태오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족보로 시작하면서 헤로데 왕 때에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하였다고 말합니다. 마르코는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이 옥에 갇히자 갈릴래아 나자렛으로부터 오셨음을 말합니다. 루가는 세례 요한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길게 하면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 나갑니다. 세복음서는 모두 그 지점은 다르지만 예수께서는 유대 땅 안에 한 지점에 삶에 근거를 갖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고 그 역사적 시점 또한 모두 헤로데 왕 때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각각 역사적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
그런데 요한은 같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예수를 인간의 어떤 역사적 지점이나 시점에 연계하는 얘기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갈릴래아나 베들레헴이나 예루살렘이라는 어떤 제한된 장소를 말하지 않습니다. 시간적으로도 어떤 제한된 인간 역사의 한 시점에 예수님을 묶어두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아무런 전 이해 없이 요한복음만을 읽는다면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는 내내 이 사람은 어떤 시대에 살았던 사람인가? 하는 의문을 풀만한 단서를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죽음을 앞두고 재판을 받을 때에 가서야 비로소 예수는 가야파라는 대사제와 빌라도라는 로마 총독이 예루살렘을 지배하던 시대의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역사적 예수에 관심이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줄기차게 예수를 인간의 어떤 제한된 공간이나 시간에 가두어 두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영의 복음서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그가 바라보는 공간은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 저 너머의 우주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가 말하는 시간은 창조 이전 곧 인간의 역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는 비록 그가 인간의 언어로 말하긴 하지만, 언어 이전의 비언어의 세계로부터 그의 이야기가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예수를 매우 독특하게 설명합니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예수님을 말씀으로 설명하고 그 처음 창조이전의 그 처음부터 예수님은 말씀으로 계셨고 이 분이 육신으로 우리에게 오셨지만, 실은 이 분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단언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니 혹은 메시야니 혹은 사람의 아들이니 하는 다른 언어로 말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우회하여 말하지 아니하고 아예 하느님이시다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래 요한은 예수의 족보나 그의 고향이나 그의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그는 하느님이신데 우리 가운데 말씀으로 오셨다고 말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말에 대한 존경어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아버지의 말씀 혹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그런 말씀으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이 말씀이라고 번역된 단어 희랍어 Logos는 당시 희랍종교철학 특히 영지주의 종교에서 가장 지고한 신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라고 말할 때의 그 말씀과도 구별되는 단어입니다.
이 Logos는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깨달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말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요한이 본 예수 이전의 세계는 암흑의 세계입니다. 그것은 해가 빛을 잃어서 캄캄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들이 달은 쳐다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를 알지 못하는 깨달음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본래 이 Logos라는 말씀에 의해 생겨났고 이 Logos를 통해 생명을 얻었는데 이 자기를 낳게 한 그 생명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Logos를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면 세상은 왜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는가? 더구나 그분은 빛으로 오셨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창조 전부터 계속 비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이 다른 무엇으로 가리어서 그 빛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빛의 증언자로 온 세례 요한은 인간들에게 그 눈가림을 벗겨내라고 외치는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이땅의 어둠의 세력들]
그런데 인간의 어둠의 역사는 계속해서 빛을 이겨보려는 어리석은 몸부림을 쳐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 안에도 부정과 불의와 부패가 정의와 진실과 진리를 꺾어 이기려고 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돈으로 진실을 감추고 권력을 쥐어 잡고 이 땅을 좌지우지하려는 어둠의 세력들을 보고 있습니다.
얼만 전 한겨레에 실린 글입니다. “한 대기업에서 대표이사를 포함한 고위 임원 5명이 신입 사원 최종면접 때 ‘김용철 변호사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돌발 질문을 하고 이에 김 변호사를 옹호한 답변을 한 지원자는 모두 떨어지고 ‘김 변호사는 배신자’라는 식으로 말한 이들만 합격했다. 한 지원자는 이전까지 높은 점수를 받아 이변이 없는 한 합격할 상황이었지만, 김 변호사를 두둔하면서 ‘삼성이 투명한 기업문화를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 인성 점수에서 낙제점을 받았고 임원들은 논란 끝에 그 지원자를 탈락시켰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삼성만이 아닌 엘지·코오롱·롯데·지에스·대우 등 지난달 공채를 한 대부분의 대기업에서 최종면접 때 김 변호사에 관한 질문을 했고,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지원자들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너무나 암담했습니다. 만약 내 아들이나 딸이 대기업에 면접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면 나는 무어라고 조언하겠는가?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자신의 양심을 좇아 당당하게답변하라고 얘기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마음에 없는 답변을 하여 합격을 하고 나서 그런 문화를 고쳐나가라고 말할 것인가? 이런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일에 너무나 절망하고 이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지도자로 나서고 있는 현실에 너무나 분노합니다.
이 기사를 본 박노자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지금처럼 거짓이 판을 치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더 진척되면 대한민국의 모습이 어떻게 바뀔까요?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 2-30%에 이르고 그들은 사채업자들의 빛 동촉에 시달렸다가 자살하거나 몸을 스스로 팔는 폐인이 되어가고 그들이 모여 사는 빈민굴이 생겨나고 그리하여 남미에서 보는 "깽" 문화가 점차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를 하층민의 "원풀이 대상"으로 이용하는 극우 파시즘의 급증할 것이다. 남한은 "선진화"가 되기는커녕 제2브라질이 되어 "토건 개발경제"의 버블도 언젠가는 터질 것이고, 수출에 의존하는 대기업들도 미국의 위기가 심해질 경우 엄청난 사회적 "지진"을 겪게 될 것이다.”
저는 박노자씨가 말하는 ‘엄청난 사회적 지진’은 유혈폭동을 말한다고 봅니다. 지금 국민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국민성공시대는 김용철변호사를 배신자로 계속하여 낙인찍는 그래서 사회 정의와 진실을 짓밟는 일을 계속 해야 하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지금 이 사회는 악마 메피스토펠리스에게 자기 영혼을 팔아치운 파우스트들의 낙원으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자기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치운 파우스트들이 성공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정직한 자들은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 우리가 꿈꾸는 선진국입니까?
구약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야훼여 당신 장막에서 살 자 누구입니까? 당신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 허물없이 정직하게 살며 마음으로부터 진실을 말하고 남을 모함하지 않는 사람. 손해를 보아도 맹세를 지키고 돈놀이하지 않으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지 않는 사람. 이렇게 사는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요한이 보는 어둠의 세상이란 이렇게 육이 지배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은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가요? 왜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의 빛이 자신의 거짓된 양심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팔아치운 악마의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살았다고 하지마나 이는 이미 죽은 생명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거짓된 모습이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의 감추어 있는 추악한 모습을 본다면 오늘의 성탄절이 단순한 즐거움의 날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오심은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성탄절이 참으로 기쁨이 되는 것은 우리 안의 거짓과 불의의 모습을 몰아내고 참과 진실의 참 모습으로 우리를 회복시켜 줄 때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역사는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잠시 어둠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만,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우리의 착시현상일 따름이다. 한 번도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은 없습니다. 이것은 성서의 증언이자 우리가 살아온 인간 역사의 증언입니다.
성탄절에 우리가 촛불을 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빛에 대한 증언입니다. 예수님의 초를 중심으로 우리들의 초가 그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 빛이 있습니다. 오늘 성탄절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 아니 하느님이 말씀이 되어 육신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신 이날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중의 비밀]
유대의 가르침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하느님이 그 아기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아기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다 알려주시고는, 손가락으로 아기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쉬-'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아기와 비밀을 간직하자는 약속을 하는 겁니다. 그래 인간은 누구나 그 얼굴을 보면 코 바로 아래 부분, 윗입술 위에 움푹 들어간 자리가 있습니다. 인중이라 부르는 그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여러분 모두 지금 자신의 인중을 한번 만져 보시기 바랍니다. 움푹 들어간 그 부분은 모양으로 만들어 논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지문이 남아 있는 자리입니다. 하느님과 여러분이 한 비밀 약속의 흔적입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아기 때의 하느님과의 비밀 약속을 기억하고, 하늘 삶의 지혜를 되찾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여러분을 짓누른다 하여도 세상에 휘둘림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여러분 자신의 인중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자녀됨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주신 하느님의 비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행하는 성찬의 예식. 세례식과 성찬식은 모두 이 자신에게 있는 인중을 재확인하는 절차입니다. 그 비밀이 알려지는 시간입니다. 무정란이 유정란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우리 안에 생명이 임하는 시간입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해지는 순간입니다.
많은 분이 저에게 성탄의 선물을 주시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일일이 성탄의 선물을 드리지 못합니다. 대신 여러분 모두에게 인중의 선물을 드립니다.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 영원의 선물을 드립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조심스럽게 잘 펼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포장지가 한 장이 아닌 여러 장으로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조급하지 마세요. 시간을 갖고 긴장을 늦추지 마시고 조심스럽게 한 장 한 장 펼치시기 바랍니다. 선물을 여는 기쁨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삶이란 바로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선물을 하나하나 펼쳐가는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기록한 4개의 복음서를 비교해보면 요한복음은 매우 독특한 복음서인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처음부터 분명합니다.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반면 마태오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족보로 시작하면서 헤로데 왕 때에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하였다고 말합니다. 마르코는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이 옥에 갇히자 갈릴래아 나자렛으로부터 오셨음을 말합니다. 루가는 세례 요한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길게 하면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 나갑니다. 세복음서는 모두 그 지점은 다르지만 예수께서는 유대 땅 안에 한 지점에 삶에 근거를 갖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고 그 역사적 시점 또한 모두 헤로데 왕 때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각각 역사적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
그런데 요한은 같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예수를 인간의 어떤 역사적 지점이나 시점에 연계하는 얘기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갈릴래아나 베들레헴이나 예루살렘이라는 어떤 제한된 장소를 말하지 않습니다. 시간적으로도 어떤 제한된 인간 역사의 한 시점에 예수님을 묶어두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아무런 전 이해 없이 요한복음만을 읽는다면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는 내내 이 사람은 어떤 시대에 살았던 사람인가? 하는 의문을 풀만한 단서를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죽음을 앞두고 재판을 받을 때에 가서야 비로소 예수는 가야파라는 대사제와 빌라도라는 로마 총독이 예루살렘을 지배하던 시대의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역사적 예수에 관심이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줄기차게 예수를 인간의 어떤 제한된 공간이나 시간에 가두어 두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영의 복음서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그가 바라보는 공간은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 저 너머의 우주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가 말하는 시간은 창조 이전 곧 인간의 역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는 비록 그가 인간의 언어로 말하긴 하지만, 언어 이전의 비언어의 세계로부터 그의 이야기가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예수를 매우 독특하게 설명합니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예수님을 말씀으로 설명하고 그 처음 창조이전의 그 처음부터 예수님은 말씀으로 계셨고 이 분이 육신으로 우리에게 오셨지만, 실은 이 분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단언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니 혹은 메시야니 혹은 사람의 아들이니 하는 다른 언어로 말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우회하여 말하지 아니하고 아예 하느님이시다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래 요한은 예수의 족보나 그의 고향이나 그의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그는 하느님이신데 우리 가운데 말씀으로 오셨다고 말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말에 대한 존경어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아버지의 말씀 혹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그런 말씀으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이 말씀이라고 번역된 단어 희랍어 Logos는 당시 희랍종교철학 특히 영지주의 종교에서 가장 지고한 신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라고 말할 때의 그 말씀과도 구별되는 단어입니다.
이 Logos는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깨달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말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요한이 본 예수 이전의 세계는 암흑의 세계입니다. 그것은 해가 빛을 잃어서 캄캄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들이 달은 쳐다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를 알지 못하는 깨달음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본래 이 Logos라는 말씀에 의해 생겨났고 이 Logos를 통해 생명을 얻었는데 이 자기를 낳게 한 그 생명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Logos를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면 세상은 왜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는가? 더구나 그분은 빛으로 오셨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창조 전부터 계속 비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이 다른 무엇으로 가리어서 그 빛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빛의 증언자로 온 세례 요한은 인간들에게 그 눈가림을 벗겨내라고 외치는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이땅의 어둠의 세력들]
그런데 인간의 어둠의 역사는 계속해서 빛을 이겨보려는 어리석은 몸부림을 쳐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 안에도 부정과 불의와 부패가 정의와 진실과 진리를 꺾어 이기려고 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돈으로 진실을 감추고 권력을 쥐어 잡고 이 땅을 좌지우지하려는 어둠의 세력들을 보고 있습니다.
얼만 전 한겨레에 실린 글입니다. “한 대기업에서 대표이사를 포함한 고위 임원 5명이 신입 사원 최종면접 때 ‘김용철 변호사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돌발 질문을 하고 이에 김 변호사를 옹호한 답변을 한 지원자는 모두 떨어지고 ‘김 변호사는 배신자’라는 식으로 말한 이들만 합격했다. 한 지원자는 이전까지 높은 점수를 받아 이변이 없는 한 합격할 상황이었지만, 김 변호사를 두둔하면서 ‘삼성이 투명한 기업문화를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 인성 점수에서 낙제점을 받았고 임원들은 논란 끝에 그 지원자를 탈락시켰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삼성만이 아닌 엘지·코오롱·롯데·지에스·대우 등 지난달 공채를 한 대부분의 대기업에서 최종면접 때 김 변호사에 관한 질문을 했고,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지원자들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너무나 암담했습니다. 만약 내 아들이나 딸이 대기업에 면접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면 나는 무어라고 조언하겠는가?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자신의 양심을 좇아 당당하게답변하라고 얘기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마음에 없는 답변을 하여 합격을 하고 나서 그런 문화를 고쳐나가라고 말할 것인가? 이런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일에 너무나 절망하고 이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지도자로 나서고 있는 현실에 너무나 분노합니다.
이 기사를 본 박노자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지금처럼 거짓이 판을 치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더 진척되면 대한민국의 모습이 어떻게 바뀔까요?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 2-30%에 이르고 그들은 사채업자들의 빛 동촉에 시달렸다가 자살하거나 몸을 스스로 팔는 폐인이 되어가고 그들이 모여 사는 빈민굴이 생겨나고 그리하여 남미에서 보는 "깽" 문화가 점차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를 하층민의 "원풀이 대상"으로 이용하는 극우 파시즘의 급증할 것이다. 남한은 "선진화"가 되기는커녕 제2브라질이 되어 "토건 개발경제"의 버블도 언젠가는 터질 것이고, 수출에 의존하는 대기업들도 미국의 위기가 심해질 경우 엄청난 사회적 "지진"을 겪게 될 것이다.”
저는 박노자씨가 말하는 ‘엄청난 사회적 지진’은 유혈폭동을 말한다고 봅니다. 지금 국민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국민성공시대는 김용철변호사를 배신자로 계속하여 낙인찍는 그래서 사회 정의와 진실을 짓밟는 일을 계속 해야 하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지금 이 사회는 악마 메피스토펠리스에게 자기 영혼을 팔아치운 파우스트들의 낙원으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자기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치운 파우스트들이 성공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정직한 자들은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 우리가 꿈꾸는 선진국입니까?
구약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야훼여 당신 장막에서 살 자 누구입니까? 당신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 허물없이 정직하게 살며 마음으로부터 진실을 말하고 남을 모함하지 않는 사람. 손해를 보아도 맹세를 지키고 돈놀이하지 않으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지 않는 사람. 이렇게 사는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요한이 보는 어둠의 세상이란 이렇게 육이 지배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은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가요? 왜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의 빛이 자신의 거짓된 양심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팔아치운 악마의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살았다고 하지마나 이는 이미 죽은 생명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거짓된 모습이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의 감추어 있는 추악한 모습을 본다면 오늘의 성탄절이 단순한 즐거움의 날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오심은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성탄절이 참으로 기쁨이 되는 것은 우리 안의 거짓과 불의의 모습을 몰아내고 참과 진실의 참 모습으로 우리를 회복시켜 줄 때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역사는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잠시 어둠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만,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우리의 착시현상일 따름이다. 한 번도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은 없습니다. 이것은 성서의 증언이자 우리가 살아온 인간 역사의 증언입니다.
성탄절에 우리가 촛불을 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빛에 대한 증언입니다. 예수님의 초를 중심으로 우리들의 초가 그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 빛이 있습니다. 오늘 성탄절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 아니 하느님이 말씀이 되어 육신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신 이날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중의 비밀]
유대의 가르침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하느님이 그 아기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아기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다 알려주시고는, 손가락으로 아기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쉬-'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아기와 비밀을 간직하자는 약속을 하는 겁니다. 그래 인간은 누구나 그 얼굴을 보면 코 바로 아래 부분, 윗입술 위에 움푹 들어간 자리가 있습니다. 인중이라 부르는 그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여러분 모두 지금 자신의 인중을 한번 만져 보시기 바랍니다. 움푹 들어간 그 부분은 모양으로 만들어 논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지문이 남아 있는 자리입니다. 하느님과 여러분이 한 비밀 약속의 흔적입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아기 때의 하느님과의 비밀 약속을 기억하고, 하늘 삶의 지혜를 되찾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여러분을 짓누른다 하여도 세상에 휘둘림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여러분 자신의 인중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자녀됨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주신 하느님의 비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행하는 성찬의 예식. 세례식과 성찬식은 모두 이 자신에게 있는 인중을 재확인하는 절차입니다. 그 비밀이 알려지는 시간입니다. 무정란이 유정란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우리 안에 생명이 임하는 시간입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해지는 순간입니다.
많은 분이 저에게 성탄의 선물을 주시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일일이 성탄의 선물을 드리지 못합니다. 대신 여러분 모두에게 인중의 선물을 드립니다.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 영원의 선물을 드립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조심스럽게 잘 펼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포장지가 한 장이 아닌 여러 장으로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조급하지 마세요. 시간을 갖고 긴장을 늦추지 마시고 조심스럽게 한 장 한 장 펼치시기 바랍니다. 선물을 여는 기쁨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삶이란 바로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선물을 하나하나 펼쳐가는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