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23일- 말 밥통에 뉘인 예수
(역상 21장 1-7절, 루가 2:1-7)

지난 주 대통령선거 다음날 목요일자 한 일간지 광고란을 통해 70명의 목회자들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선언문을 내었습니다. 저도 그중 한사람입니다.

[치명적인 상처]

[이번 17대 대통령선거는 일부 교계지도자들의 안타까운 행동과 이에 대한 상당수 목회자들의 묵인으로 말미암아 한국개신교 교회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습니다. 특정 후보의 불의와 부정과 부도덕에는 애써 눈을 감았고, 그 정도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며 '장로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고 말았습니다. 공예배에서 벌어진 특정후보에 대한 노골적이고 공공연한 지지는 한국개신교의 도덕적 신뢰를 정치인 한사람에게 내맡기는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일시적으로는 대단히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제 부도덕한 특정후보를 지지했던 입술로 설교하는 정직, 정의, 사랑은 사람들의 냉소를 받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청와대에 계시는 하나님'은 거리와 촌락에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들과는 무관한 분으로 외면 받을지 모르는 현실에도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재주는 있을지 모르나 의롭지 못한 일꾼'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감싸 안는 행동을 보여주었으며, '착하고 충성된 종'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말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선택이 ‘교세를 성장시키는 재주는 있으나 선지자의 순결함을 잃어버린 목회자들’의 허다한 출현을 부채질하지는 않을까 염려됩니다. 세상의 논리에 매몰되어 개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비신앙적인 선택도 마다 않는 교인들을 솔선수범하며 인도할 지도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의 도덕적 힘은 황무한 이 세상에 대한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대통령 투표권을 가진 성인이 되었을 때는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꾀하여 국민직접선거에서 장춘체육관 간접선거로 바뀐 후였기에 이번 투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처음 해본 투표입니다. 저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후보자를 선택했기에 대선 패배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지만, 제가 만나 본 교계의 여러 어르신들이나 동료들 가운데는 상당한 분들이 허탈감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현실정치와 하느님 나라 이상정치 사이의 분리와 겹쳐짐이라는 변증적 관계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개의 예수 탄생 이야기]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4개의 복음서 가운데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만이 예수 탄생에 관련한 얘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 두 얘기를 서로 적당히 섞어서 기억하고 있지만, 실상 이 두 복음서가 전하는 탄생 이야기는 매우 다르고 신학적으로는 어떤 의미에서 서로 반대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 복음서 저자가 살았던 삶의 자리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팔레스타인 내의 구약성서에 정통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였고 그들은 예루살렘 멸망으로 꿈을 잃고 좌절하고 있었기에 마태오가 강조하는 메시야 상은 높임 받는 왕으로서의 메시야입니다. 반면 루가는 팔레스타인 밖 로마 세계에서 주변부 인간으로 살아가는 헬라파 유다인과 이방인들이 대상이었기에 그가 강조하는 메시야 상은 낮은 자 곧 종으로서의 메시야입니다.

이 관점에서 예수 탄생의 이야기를 서로 비교해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래 마태오는 요셉이 처음부터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대대로 살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아기 예수는 마구간이 아닌 집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별을 따라 온 동방 박사들이 매우 귀한 예물을 드렸다고 말합니다. 귀족 집안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집안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반면 루가복음에서는 요셉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으로 목수였음을 말하고 로마 황제의 명령에 의해 호적신고를 하러 고향 베들레헴에 갔다가 그곳에서 아기 예수를 낳았는데, 머물 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낳았고 누일 자리가 없어 말 밥통에 누였고, 아기 예수를 처음 방문한 자들 또한 양을 치던 목자들입니다. 마태오가 그리는 아기 예수 탄생의 그림은 마리아와 예수는 방안에 있고 그 앞에는 멀리 저 동방 페르시아로부터 온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박사들이 엎드려서 왕에게 드리는 값진 선물을 드리는 모습입니다. 반면 루가는 여러 짐승들이 사는 마구간을 배경으로 요셉과 마리아가 있고 아기 예수는 말밥통에 누어있고 그 앞에는 양똥 냄새가 풀풀 풍기는 가난한 목자들이 빈손으로 와서 경배합니다. 이 두 그림은 매우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마태오복음에서는 아기 예수 탄생에 관련한 주인공을 아버지 요셉에게 두는 반면 루가복음에서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동정녀 탄생이라고 하는 스캔들의 극복을 마태오는 의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요셉의 희생적 결단에 두고 있는 반면 루가는 마리아의 헌신적 순종에 두고 있습니다.

이 얘기만을 갖고 루가복음서는 민중적 시각을 갖고 있는 복음서로 마태오복음서는 그렇지 않은 복음서로 단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마태오가 처음 제시하는 예수의 족보에서 4명의 문제 많은 이방 여인들의 이름을 언급함으로 루가의 족보에는 등장하지 않는 여인들의 이름을 삽입하면서 소외된 자, 낮은 자로부터의 하느님 나라 혁명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가는 마태오에 비하면 차별받던 여성의 눈으로 아기 예수를 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로마제국내의 이방인 선교라는 큰 틀에다 예수 선교를 놓음으로 마르코가 지향하던 예루살렘의 지배세력에 저항하는 갈릴래아의 오흘로스의 민중을 라오스라는 일반 대중으로 고쳐 말함으로 오히려 복음의 혁명성을 약화시켰습니다.

그런데 신학적으로 보면 서로 상반되는 메시야 상을 그리고 있는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은 그 정치적 메시지에 있어서는 일치합니다. 마태오복음은 아기 예수 탄생은 유대의 통치자 헤로데를 불안케 하고 지배계층이 살았던 예루살렘 성내를 온통 술렁거리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결국 이 불안은 베들레헴 성내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들이 살해당하는 폭력으로 이어졌다고 말합니다. 루가복음에서 또한 예수를 밴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탄생에 관련된 이야기에만 근거한다면 분명코 복음은 현실정치에서 힘을 행사하는 지배세력에 반대하고 부자가 아닌 가난한 자들 편에 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남한 사회와 남한의 교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데서 우리의 고민은 깊어갑니다.

[하느님과 맘몬을 동시에 잡은 사람]

언제부터인가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기간인 12월은 경기부양의 달이요 소비의 달이요 회식의 달이요 백화점과 술집이 가장 많은 매상을 올리는 달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특히 대선주자들의 경제대통령 팔자 고치는 대통령들의 난무한 언어잔치로 풍성한 달이었고 경제를 확실히 살리겠다는 이명박씨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으니 특검은 물거품이 될 것이고 앞으로 최소 5년간은 진실과 도덕은 뒷전으로 밀리고 경제와 성공이라는 두 단어가 이 사회를 지배하는 화두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맘몬이라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이 아닌 헛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명박씨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은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초일류기업의 사장으로 수백억 수천억대의 부자로 그리고 서울 시장과 차기 대통령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 되었고, 강남의 초대형교회의 장로로 천국에도 분명히 들어갈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한 인터넷 서점에서 2007년 남한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을 소개했는데, 첫 번째 책은 ‘수세기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화 성공의 비밀’이라고 표지에 씌어있는 <시크릿>이라는 책이고, 두 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가는 곳마다 1등 조직으로 만든 명 사령관의 전략노트’라는 홍보문구를 달고 있는 <이기는 습관>이고, 세 번째 <에너지 버스>라는 자기계발서이고 네 번째는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입니다. 베스트셀러 상위 10권 중 7권이 성공이라는 화두를 달고 있는 자기계발서 아니면 돈 버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부자 되고 성공하는 세상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명박씨는 신화적 인물로 정치적 메시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정치가들이 말하는 부와 성공은 상대적 개념이지 보편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와 성공은 나를 중심으로 두고 하는 말이지 모두를 대상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어도 내가 부자가 되지 않는 한 이 나라는 여전히 가난한 나라입니다. 내가 잘살고 내가 성공하려면 필수적으로 나와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못살고 실패해야 합니다. 도박장을 들어가는 입구에는 ‘당신이야 말로 오늘의 승리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도박장에서 모두가 돈을 따는 길은 없습니다. 모두가 로또에 당선되는 길은 없습니다. 승자는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도박을 합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야말로 승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착각과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남한 사회는 ‘국민성공시대’라는 이 착각과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적어도 이 나라 국민 반수에 해당되는 사람은 이 환상에 젖어 있습니다. 도박장에서 빈손 털고 씁쓸히 돌아서는 그날, 비로소 그 길이 처음부터 잘못된 길이었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박을 거는 사람이 자기 돈만 갖고 하면 괜찮은데 내 돈을 포함한 도박을 원치 않는 모든 국민의 돈을 가져가서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빵과 자유의 선택]

빵과 자유의 문제는 인류 역사가 생긴 이래 변함없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성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히브리민족이 그 처음부터 빵과 자유의 갈림길에서 항상 고민하고 주저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야곱을 비롯한 그의 아들딸들은 자유는 있었지만 빵이 없어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처음에는 빵도 자유도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백년 후 그들은 빵은 있었지만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래 자유를 달라고 외쳤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모세를 불러 그들을 자유의 길로 해방의 길로 불러내었습니다. 그런데 나온 지 사흘이 되지 않아 물이 없다고 아우성치고 한 주간이 되지 않아 빵과 고기가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차라리 자유는 없었을망정 빵과 고기 걱정 없었던 이집트의 노예생활이 좋았다고 말합니다. 우리 민족은 어떠합니까? 지난 40년 동안 군부와 독재 아래 우리 민중은 자유를 달라고 신음했습니다. 4.19와 5.18과 6월의 자유민주항쟁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고 그래서 자유를 쟁취했습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나지 않아 이제는 자유보다 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그 독재자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일찍이 사람을 소유형과 존재형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소유형은 삶의 의미와 목표를 외적인 물질을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데 두는 반면, 존재형은 삶의 의미와 목표를 내적 체험과 진리 깨달음에 둡니다. 소유형의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각박해지고 이웃끼리의 투쟁은 더욱 가열되어질 수밖에 없으며 존재형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훈훈한 인간미로 넘쳐납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슈마허는 ‘만일 경제학이라는 것이 국민소득이라든가 성장률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언제까지고 넘어서지 못한 채, 빈곤 좌절 소외 절망 등과 범죄 현실도피 스트레스 혼잡 그리고 정신의 죽음과 같은 현실의 모습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경제학을 페기하고 새로운 경제학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라고 반문합니다.

[Pax Romana]

아기 예수 탄생과 맞물려 있는 것이 아우구스토라는 로마 황제 칙령에 의한 호적조사령입니다. 이 호적 조사령은 단지 인구조사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군인을 차출하고 더 많은 세금을 걷어내고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종교적 측면도 있습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 역대상 21장의 이야기는 다윗 왕이 이와 비슷한 병적 조사를 행하는데, 본문은 이 병적조사가 하느님의 눈에 거슬렸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치셨다고 말합니다. 이런 조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리에 인간이 올라서려고 하는 교만이요 비신앙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사고에 의하면 로마의 주민등록증에 그 이름을 기재하는 것은 자기 생명의 소유주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일이었습니다. 이름을 기재하고 지문을 찍는 행위는 이제부터 그들이 믿는 신의 소유가 아닌 로마황제신의 소유임을 확인하는 종교적 절차이기도 했습니다.

아우구스토 황제가 호적조사를 하면서 모두 고향으로 가라고 명령하자 사람들이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때 아우구스토는 말했습니다. 이는 여러분 모두를 부자로 만들기 위한 일이고 로마국민의 성공시대를 위한 길입니다. 여러분 저를 따르세요. 저만 따른다면 여러분의 행복은 보장됩니다. 여러분의 미래는 안전하게 보장됩니다.

오늘 루가복음 본문에 등장하는 아우구스토라는 말은 단지 왕의 칭호가 아닙니다. 그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입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카이사르라는 칭호 또한 로마의 최고 통치자를 의미하고 그 또한 신의 자리에까지 올라갔지만, 이때는 아직까지 공화제로서의 원로원이 있었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신의 자리에 까지 올라갔다고 말할 수 없고, 옥타비우스 때에 이르러 그가 모든 정적들을 격파하고 이후 원로원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나서부터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토란 이름은 단지 정치군사적 통치자로서의 황제의 칭호가 아닌 모든 지역의 신들을 지배하는 가장 높은 신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비로소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영원할 것이라는 찬양이 지중해 연안에 울려 퍼지게 됩니다. 물론 로마사회는 전쟁을 통한 약탈과 노예로 이루어진 사회였기에 이 Pax Romana는 소수의 지배자들과 가진 자들만의 평화였지 백성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아우구스토가 60년 동안 로마를 지배하면서 3번의 호적조사를 하지만 실제 예수께서 태어나던 해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루가는 예수의 탄생이 아우구스토 황제의 명령에 의한 호적조사 때에 있었다고 함으로 로마의 평화에 대체하는 또 다른 평화의 왕으로서의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로마제국을 지배하고 신의 자리에 올라선 아우구스토는 당시의 신화적 인물이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을 부자로 만들어주고 국민성공시대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환상에 싸인 신화적 인물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도 그 시대의 신화적 인물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이 따라다니고 환호하는 그런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인간에서 황제의 자리로 그리고 거기서 신으로 올라선 신화라고 한다면 다른 한 사람은 신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그리고 그중에서도 말 밥통의 자리에까지 내려온 신화입니다. 한 사람은 부자와 국민성공시대를 외치면서 정적들에 둘러 싸여 죽어갔다면 다른 한 사람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십자가에서 강도들과 함께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사람입니다. 두 사람 다 평화를 말했습니다. Pax Romana라는 힘과 권력의 평화를 좇아갈 것인가? 아니면 Pax Iesus라는 십자가의 희생과 낮아짐의 평화를 좇아갈 것인가는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에덴동산 중앙에는 두 나무가 있었습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선택할 것인가는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두개의 십자가]

이 두 개의 십자가는 멕시코의 한 작은 도시에서 구입한 십자가입니다. 멀리서 보면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이 십자가는 전혀 정반대의 신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이 검은 바탕의 십자가 안에는 약 30개의 작은 상징들이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 늙은이와 젊은이들의 다양한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이 안에는 성경책이 있고 성찬의 떡과 잔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신체 곧 다리나 손 귀 뿐만이 아니라 심장이나 위도 있습니다. 닭과 개도 있고 자동차도 있습니다. 이미 짐작하다시피 이는 소위 말해 만사형통 축복 십자가입니다. 아픈 부분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는 기적의 십자가일 뿐더러 집의 가축들이 새끼를 잘 낳도록 자동차를 필요로 하거나 운전하기 전 사고로부터 보호를 바라는 축복기적 십자가입니다.

제가 외국 여행을 하면 기념으로 그곳의 십자가를 사곤 하였는데, 이 십자가를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멕시코의 가톨릭 신앙은 우리가 아는 가톨릭과는 매우 다른 샤머니즘에 가까운 가톨릭 신앙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까지 십자가가 오용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기독교는 인민의 아편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 영향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십자가는 이런 종류의 십자가 중 가장 작은 것입니다. 번화한 대로변에 위치한 이 가게에는 이런 십자가가 아주 많았습니다. 크기도 다양하여 이보다 작은 것에서 아주 커다란 것도 있었고 그 안의 그림도 서로 달랐습니다. 돈이 그려진 십자가는 못 보았지만 곧 나오겠지요.

그런데 같은 도시 변두리 가게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모양의 십자가를 발견했습니다. 이 십자가는 구멍이 많은 연약한 나무 위에 녹순 철사와 깡통 쪼가리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여기에 매어 달린 모습은 짧은 치마를 입은 십대 소녀의 모습입니다. 머리 위에는 철사면류관이 있고 십자가 팻말에는 흔히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상을 보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표현되는 INRI라는 황금색 글자를 보게 되는데, 이는 라틴어로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단어의 첫 글자입니다.

이 십자가에는 녹슨 양철 조각이 붙어 있고 IN까지는 확실한데 그 이하 글자는 분명치 않습니다. 라틴어로 다른 의미를 드러내려고 한 것 같습니다, 이 십자가는 분명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한 어린 소녀가 희생당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녀의 치마 한쪽 곁은 찢어져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혹사당하는 한 어린 여성의 모습일 수도 있고 휘황찬란한 불빛의 도시 한쪽 끝에 몸을 팔아 집안의 생계비를 대는 십대 딸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십자가는 같은 모양이지만, 이 십자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상징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바로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십자가의 모습이 오늘 현대의 교회의 서로 다른 두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이 남한의 현실에서 정작 필요한 성서의 메시지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분명 성서에는 높임 받는 메시야 상과 낮은 자의 메시야 상이 동시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찬양하고 높여 경배해야 할까요? 아니면 낮은 자로 오시어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는 민중의 친구로서의 예수님을 기억해야 할까요?

만약 지금이 일제시대와 같이 국가권력이 기독교를 박해하고 있다면 이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고난에 찬 정치적 현실을 이겨날 수 있으니까요. 요한의 묵시록에서 심판자로 오시는 예수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오늘 시장자본주의가 판을 치고 돈이 돈을 낳고 돈이 없는 자는 평생을 정직하게 일해도 대대로 없는 자로 살아야만 하고 돈과 권력이 있는 자는 죄가 있어도 없다는 판결이 나오고 돈 없고 빽없는 자만이 감옥에 갇히는 정의가 사라진 시대라면 낮은 자의 예수가 외쳐져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 두 개의 십자가가 놓여 있습니다. 어느 십자가를 선택할 것인가? 그것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여러분이 오늘의 역사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후손들에게 물려줄 미래의 조국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선택하겠지요.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만일 야훼를 섬기고 싶지 않거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여러분이 오늘 택하시오.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에서 여러분의 조상들이 섬기던 신을 택하든지, 여러분이 들어와서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인의 신을 택하든지 결정하시오.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야훼를 섬기겠소.”(24장 15절)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