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25일 오실 선생님이 당신입니까?
시편 37:1-11; 루가 7:18-28

성탄절을 앞둔 4주간의 기간을 교회력으로는 대림절이라고 말합니다. 다음 주 12월 2일이 대림절 첫 주일이 됩니다. 그런데 다음 주는 자매교회끼리 강단교류가 있는 날로 저는 강남향린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우리 교회에는 김경호목사께서 오시어 말씀을 전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이 대림절 첫 주일은 아니지만, 대림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신앙을 강조하는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대림이라는 말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삶은 기다림이다 라는 말이 있고 사람마다 삶의 목적은 다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모두 자신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또 우리가 오늘의 아픔과 역경을 견디며 사는 것은 내일이라는 기다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낙심하거나 비관하지 말라는 지혜가 담긴 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게 한 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불구하고’의 믿음]

믿음이 무엇입니까? 여러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 믿음은 기다림이라고 답변할 수 있습니다. 믿음장이라 일컬어지는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이 믿음의 정의를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한다면 믿음은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될 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사람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 믿음은 ‘무엇무엇 때문에’가 아니라 ‘무엇무엇에도 불구하고’입니다. 모든 일이 생각대로 잘 되어가기 ‘때문에’가 아니라, 생각대로 안 되어 감에도 ‘불구하고’에서 생기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람들은 기다릴 수 있는 형편이 되어서 기다린 것이 아니라, 기다릴 수 없는 형편 가운데서 핍박과 고문과 감옥을 견디며 기다려온 사람들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마지막 구원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지만, 저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다는 말씀을 우리가 좀 더 묵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인정을 받으면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세상고통근심걱정하나 없는 그런 삶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를 포함한 성서 기자들은 세상고통근심걱정없는 삶과 하느님이 인정하는 삶과는 다른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믿음에 대해 왜 이런 착각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믿음의 주체를 내 안에 두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말씀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아니 이건 무슨 소리인가? 그러면 나의 주체성을 포기하고 인간적인 이성 판단을 포기하고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말인가? 제가 말하는 믿음의 주체를 내 안에 둔다는 말은 세상사 결과에 연연하는 어떤 이기적인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할 때, 믿음의 결과는 둘 중 하나입니다. 첫째는 나의 뜻대로 된 것이고, 둘째는 나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뜻대로 되어질 때, 그 믿음은 교만의 늪으로 떨어지기 십상이고, 나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그 믿음은 낙심으로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믿음에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은]

믿음의 판단 주체를 나에게 두지 말라는 것은 인간의 생각하고 의심하고 비판하는 그런 이성과 오성의 노력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믿음과 자기중심적인 세상일과 연계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신앙의 고민이 있습니다. 삶에 충실하고 믿음생활에도 열심인데 왜 내 안에 확신이 없는 것일까? 왜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일까요? 세상에 있으면서 하느님의 세계를 바라보면 참다운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세계 안에 거하면서 세상을 바라볼 때 참 확신이 서게 됩니다.

오늘 구약성서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자가 잘된다고 불평하지 말며 불의한 자가 잘산다고 부러워 마라 풀처럼 삽시간에 그들은 시들고 푸성귀처럼 금방 스러지리니 야훼만 믿고 살아라 땅위에서 네가 걱정 없이 먹고 살리라 네 즐거움을 야훼에게서 찾아라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리라 그에게 앞날을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께서 행해 주시리라 햇빛처럼 너의 옳음을 빛나게 하시고 대낮처럼 네 권리를 당당하게 해주시리라 고요하게 지내라 야훼만 믿어라.”

엄마와 5살 아이가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데, 이 아이가 걸어가는 엄마의 손을 붙잡으려고 하지만,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손을 앞으로 뻗으면 엄마 손은 어느새 뒤로 가있고 손을 뒤로 뻗으면 어느새 엄마의 손은 앞으로 가 있습니다. 이때 엄마의 손을 붙잡는 방법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편 채, ‘엄마! 내 손!’ 하고 내밀면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 자리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 힘 있게 걸어가시면 됩니다. 엄마 손을 잡고 있는 아이는 항상 흥얼흥얼거립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때]

루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출생에 관련된 비화를 얘기하면서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주 하느님의 품으로 다시 데려올 것이다. 그가 바로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먼저 올 사람이다.”(1장 16,7절) 그리고 그는 요르단 강 부근의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며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선포하며 세례를 베풉니다. 성서기자 루가는 이때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때는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3장 15절) 그리스도의 오심은 곧 새로운 세상 하느님이 지배하는 나라의 시작을 말합니다. 백성들이 새 세상을 기다린다고 하는 말은 다른 말로 로마의 식민지 지배는 날로 잔악해지고 있었고 예루살렘의 지배자들은 자기 뱃속만 채워가기에 여념이 없었고 밑바닥의 민중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다는 말입니다. 이때 제사장 계급의 출신이었던 세례 요한의 등장은 정말 하늘이 보내준 사자였습니다.

그래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나는 너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광야의 외치는 이의 소리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머지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자신의 존재성을 소리에 비유한 그는 유대의 영주 헤로데가 본 부인을 쫒아내고, 자기 이복동생의 부인 헤로디아를 강탈한 사실을 비롯하여 여러 정치적인 실책들을 힐난하게 비판합니다. 그래서 그는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리 마음이 안타깝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헤롯데의 부정을 이렇게 고발하다 옥에 갇혔지만, 예수께서는 영주 헤로데 정도가 아니라, 하늘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이 로마군대를 모조리 쫒아내실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문이,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아무리 들어 보아도 자기의 기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자를 건 자르고, 끊을 건 끊고, 모든 것을 빨리빨리 해치우셨으면 좋겠는데, 그런 소식이나 조짐은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때에, 자신의 눈으로 하느님 나라를 보게 되리라 기대했던 세례요한의 실망이 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이렇게 묻습니다.

[기대의 차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우리도 이런 질문을 하지요. 주님 이것이 저의 기도에 대한 당신의 답변입니까? 아니면, 제가 또 다른 답을 기다려야 합니까? 머리 부분에서도 이미 말씀드렸지만 참 신앙은 ‘무엇무엇때문에’가 아니라 ‘무엇무엇에도 불구하고’입니다. 우리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빈 마음으로 나아가 주님의 소리를 듣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성서는 우리 인간이 모두 죄인임을 선언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주눅 들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어떤 인간적인 기대나 조건을 갖고 자신 앞에 나오는 것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죄인이라는 말은 집 나간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집나간 자녀들이 집에 돌아올 때, 어떤 조건이나 기대를 갖고 가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집의 하나의 하인으로 여겨주십시오.’라는 마음밖에는 없습니다. 이때 부모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 주시고, 새 신발과 새 옷을 입혀 주시고, 송아지를 잡아 마을 잔치를 베푸십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자기인지를 묻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들은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 여기서 우리는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죽은 사람, 가난한 사람을 단순히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소경이나 절름발이나 나병환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누구입니까? 육신의 눈은 떴어도,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소경입니다. 절름발이가 누구입니까? 자기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손만 벌리고 앉아 있는 우리들이 절름발이가 아닌가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는 얘기를 듣고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우리들이 귀머거리가 아니면 누가 귀머거리입니까? 먹고 싸고 돈 버는 것만으로 나는 살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죽은 사람들이 아니면 누가 죽은 자들입니까?

[비도덕적 사회]

오늘의 우리 사회는 지난 해방 이후 10여 년 전까지의 군부독재정치의 시대보다 더 큰 위기 속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국민의 다수가 차기 대통령의 인격이나 도덕적 가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후보의 경제적 역량이다. 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도덕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20%미만입니다. 유력한 대선후보의 비리에 대해서 그리고 초일류 삼성재벌의 비리에 있어서 남한 사회의 법과 양심은 경제라는 두 단어에 의해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목적이 돈이라면 그 수단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무서운 사회로 변하여 가고 있습니다. 인간됨의 주체성을 포기하고 돈에 대한 자발적 노예가 되겠다고, 배고픈 철학자가 되기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되겠다고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소경이요 귀머거리요 죽은 사회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유다사회의 이런 비리와 부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든 부자가 되고 권력의 높은 자리를 앉으면 그것이 바로 성공이라는 인생관이 어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 생명들에게 뿌리 깊게 내려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미래가 없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저녁에도 교육부에서 일하는 장로님들과 전도사님들과 선생님들이 모여 1년을 돌아보면 내년을 준비하는 모임을 했습니다. 특히 청소년부 선생님들의 고민은 시험 때만 되면 학생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점점 심해지고 당연히 여기고 있다. 종교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겨우 일요일에 와서 두시간정도 하는데, 그것마저 오지 않으려는 이 사회의 부정적 현상에 대해 얘기를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건 부모님들의 책임도 있고 그 부모님들이 책임이라면 그건 제 책임이기도 합니다.

뇌물을 쓰든 부정한 축재를 하던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어른들의 생각은 어린 생명들에게 너는 어떻든 합격만 하면 된다. 그러면 된다는 논리! 여기에 도덕과 윤리 생명과 정의는 설 자리를 잃습니다. 입학시험을 치러가는 버스 안에서 답안지를 불러주는 오늘의 부정한 현실. 따지고 보면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돈에 사로잡혀 어른들의 욕망에 의해 희생당하는 교육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학부모님이나 학생들의 억울함도 인정하지만, 중학교 3학년이면 그것이 옳은 일이 아님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시험칠 때 커닝하면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수십 명의 학생들이 답을 불러주는 그 버스 안에서 어느 누구하나 항의하지 않은 것입니다. 불의할 줄 알지만 합격을 위해 모두의 양심을 불살라버린 것입니다.

라인홀드 니버가 말한 개인으로 보면 도덕적 인간이지만 집단이 되면 비도덕적 사회로 변질되고 만 것이지요. 요즘 나온 책에 ‘루시퍼 이펙트’에서 미국의 스텐포드 대학의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이를 실험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결론에서 말하기를 누구든 악마로 전락할 수 있지만, 누구든 영웅이 될 수도 있다고 얘기하면서 우리에게 유혹의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악에 맞서 싸우라고 말합니다.
[도덕적 인간]

루터는 말합니다. 한 마리의 새가 우리의 머리 위를 지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 새가 우리 머리 위에 내려와서 집을 짓는 것을 막을 힘은 우리에게 있다. 그릇된 생각이 가끔 우리의 머리 위를 스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며, 인간의 머리란 잡다한 생각이 맘대로 들이닥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릇된 생각이 자리 잡을 때 이를 쫓아 버리는 힘, 즉 양심은 우리에게 있다. 양심이 없는 인간. 그것은 스스로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고 짐승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쌩 떽쥐베리는 말합니다. “우리들은 먹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동물이 아니다. 우리들에게는 한 사람의 가난한 파스칼의 출현이 욕심 많은 부자의 출현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제 저녁 한총련 학생 한명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저희들은 지금 대선을 앞둔 이 사회의 부패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저희들이 가진 힘은 적지만, 이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는 젊은이들의 소리를 내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학교에서 20명이 농성을 시작했는데, 수배중인 학생도 있어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명동성당을 비롯한 여러 곳을 다니면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모두 거절을 당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향린교회에 왔습니다. 저희들을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런 일을 저 혼자 결정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오늘 당회나 목회운영위원회 모임을 통해 알려주겠다고 하루를 미룰 수도 있었지만 저는 향린교회를 마지막 보호처소로 알고 찾아온 이 사회를 염려하는 젊은이들의 순수한 눈을 그런 논리로 미룰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자리에서 이후 일어나는 모든 책임은 제가 질 것을 생각하고 허락을 했습니다. 남한의 보수 세력들이 한총련을 친북단체로 비난하여온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의 미래를 염려하고 남한 사회의 부정의와 부패에 대해 정의로운 소리를 내고자 하는 저들을 향린의 따뜻한 품으로 품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녁부터 대선전날까지 약 25일 동안 일층 유치부실에 머물 것이고 일요일 예배에는 전혀 어려움 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우리민족을 종교적인 민족이라고 말하고 실제 통계도 대부분의 국민들이 하나의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민족이 종교적인 민족이라는 것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도스토에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 형제>에 나오는 이반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지금 이 사회는 돈으로 모든 것이 허용되는 사회입니다. 결코 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을 수가 없는 사회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자기 영혼을 기다리세요]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설교 하면 떠올리는 분이 한분의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 해박하고 유식한 성서 해석으로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던 목사님이 계시고 그 초대형교회에서 교육받은 대표적인 장로님 한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말단사원으로 시작해서 세계적인 일류기업의 사장까지 지내다가 정치에 입문하여 서울시장까지 지냈고 지금은 갖가지 비리와 소문에도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돈이 그렇게 많아 사모님께서는 핸드백 하나만도 천만원짜리를 들고 다니셨는데 그런 분이 돈 얼마가 아까워 유령회사를 만들어서 자기 자식들을 위장취업 시키고 아내의 운전사까지 그 회사의 직원으로 만들어 월급을 주었다고 하니 그 교회에서는 도대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추측컨대 그 교회가 갖고 있는 신약성서에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는 예수님의 말이나 추수가 넘쳐 창고를 크게 짓겠다고 하는 부자 농부에게 ‘네 영혼을 오늘 저녁 다시 찾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 부자와 거지 나자로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얘기나 세리장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여 전 재산을 돌려주는 얘기는 빠져 있는 것 같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도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신문이나 뉴스를 들으면 살맛도 없고 밥맛도 없고 설교할 맛도 없습니다. 해보면 뭐합니까? 모두가 문 밖만 나가면 도로 묵인걸. 차라리 입이나 다물고 살면 입이나 덜 아프겠지 하고 혼자 주절거려 봅니다.

한 백인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가 선교지로 가려면 원주민 안내원과 함께 밀림 속으로 며칠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원주민의 발걸음이 너무 늦습니다. 그래서 빨리 가자고 재촉을 하였습니다. 하도 재촉을 하니까 속도를 내어 빨리 걸었습니다. 그 다음날도 빨리 걸었습니다. 선교사의 생각에 이렇게 가면 예정보다 이틀은 빨리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 출발 준비가 끝났는데도 이 원주민이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 출발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말이 ‘지금 자기 영혼을 기다리는 중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우리가 이틀 동안 너무 빨리 걷는 바람에 자기 영혼이 뒤처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영혼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요즘 우리가 너무 빨리간 것 같아요. 지금 여러분은 자기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계십니까?

이제 밖을 나가면 주님을 기다린다는 명목으로 세상의 밤은 온통 불야성을 밝혔습니다. 번쩍이는 각종 색깔의 네온싸인들 이제는 도시 중심의 웬만한 건물에는 커다란 TV화면이 우리를 부르고 나무마다에는 푸른 잎 대신 하얀 작은 전구들로 온통 감싸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귀에는 성탄절의 캐롤의 노래들이 울려 퍼지고 대형마트에서는 새로운 상품과 회식이라는 세상 즐거움이 우리 모두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두 오시기로 되어 있는 ‘선생님’을 빙자하여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모험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

우리가 주님을 기다린다 함은 팔짱끼고 기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귀한 손님이 온다고 하면 우리는 집을 깨끗이 하고 옷을 갈아입고 마음에는 설레임으로 가득합니다. 김종태장로님께서 청년시절 강원도 깊은 산골 암반석이라는 곳에 통나무집을 만들고 살았는데, 어느 날 존경하는 함석헌선생님이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그 오시는 길이 편하도록 도끼를 들고 나가서 며칠에 걸려 그 기나긴 길을 혼자 베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다림의 자세입니다. 팔짱을 끼고 기다리는 자세가 아니라 몸을 앞으로 기울려 그 나라를 앞당기기 위해 함께 실천하는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대림절은 라틴어로 Advent라 부르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도착한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도착한 그리스도와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와 그리고 그와 더불어 새로운 세계를 함께 만들어간다는 모험의 의미가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영어의 advance와 adventure가 이를 말해줍니다. 기다림 그것은 곧 주님의 손을 잡고 모험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입니다.

반칠환 시인은 새들에게 가장 충격인 것은 날아오를 하늘이 없는 것보다 내려앉을 대지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라고 노래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날아오를 높은 하늘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려앉을 차분한 마음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고 가난한 영혼들이 편안히 쉴 장소를 얻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번 대림절에는 자신의 마음을 비워내어 자신의 영혼을 되찾고 다른 가난한 이들의 영혼까지 품에 안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기장 총회 교육부가 펴내는 대림절 묵상집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미 이멜을 통해 여러분에게 전달이 되었고 오늘 주보에도 삽입되어 있지만, 2008년도 여러분이 교회를 통해 실천할 수 있는 곳을 나열한 종이를 나눠드렸습니다. 한사람도 빠짐없이 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화여대 교목을 지내셨던 김흥호선생께서는 이런 말을 하십니다. ‘책임을 지면 주인이요 주인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천국이다.’ 저는 이곳이 천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소수의 몇 몇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교회 일에 참여함으로 여러분이 주인이 되고 그래서 바로 이곳이 우리가 바라는 천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