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 겨울이 오기 전에
창 33:1-4; 디모테오 II 4:6-22

‘겨울이 오기 전에’라는 하늘뜻펴기 제목에 익숙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초대 담임목사이셨던 김호식목사님께서 이 제목으로 여러 번 하늘뜻펴기를 하셨고 저도 같은 본문과 제목으로 3년 전에 하였습니다. 수십 년을 목회하신 분도 같은 본문 같은 제목으로 설교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다른 목사님들이 같은 강단에서 왜 같은 본문과 제목의 하늘뜻펴기를 하는가?

이 얘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이 교회에 새로 부임을 했고 교회에 자리가 많이 비어있어 ‘이 자리를 채웁시다.’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하늘뜻을 펼쳤습니다. 교인들은 많은 감동을 받았고 얼굴에는 목사님을 정말 잘 모셨다는 기쁨의 빛이 넉넉했습니다. 두 번째 주일에 더 큰 기대를 안고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지난 주의 설교를 반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찜찜했지만, 지난주의 감동이 남아 있어 그런대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주일에도 목사님은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반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기도 전에 교인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같은 설교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를 얼간이로 보시는 것입니까?’ 목사님이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전을 채우자’라는 제목으로 하늘뜻을 선포하였고 여러분은 모두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사람도 새로 오시는 분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새로 오는 분이 있을 때까지 이 하늘뜻을 반복할 예정입니다.” 하늘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늘뜻펴기는 우리의 삶의 변화를 위한 선포이지 성서적 교리에 대한 이해를 위한 설명이 아닙니다. 사실 저도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는 반복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몇날 며칠 동안을 끙끙 앓아가며 준비하지만, 교인들은 하루 밤만 자고 일어나면 설교 내용은커녕 제목조차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기억한다면 예화정도입니다.

그래 지난번 침묵으로 하늘뜻을 편 이유 중의 하나가 그런 것입니다. 어차피 기억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바에야 침묵으로 한들 그게 무슨 큰 차이가 있으랴? 예배 후에 침묵 때문에 약간의 소요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고 어떤 분은 제게 불만을 말씀하셨지만, 오히려 저는 그런 반응을 보면서 뜻한 바를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뜻펴기를 반복하는 이유]

한 65년 전 미국 피츠버그제일장로교회를 담임하시던 맥카트니목사님께서 디모테오후서의 이 본문으로 하늘뜻펴기를 하셨습니다. 깊은 감동을 받은 교인들이 매해 이를 반복해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당회에서는 이를 아예 결의하였습니다. 그래 이 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은퇴하실 때까지 40년 동안 매년 이를 반복하셨습니다. 한 25년 전 미국장로교단에서는 제일 큰 아틀란타의 피치트리장로교회의 해링톤목사께서 이 얘기를 듣고 이를 따라 했습니다. 15년 전 메릴랜드에서 목회하던 조헌정이라는 목사가 해링톤 목사의 얘기를 듣고 같은 방식으로 하늘뜻펴기를 하기 시작하였고, 10년 전 조목사의 얘기를 들은 미국감리교회 목사가 또 그렇게 시작하였습니다. 해링톤목사님은 5년 전에 돌아가셨고, 감리교회 목사님은 그 후 만나지를 못해 이 방식이 계속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 짐작에 ‘겨울이 오기 전에’라는 하늘뜻펴기를 매년 반복하는 목사님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는 하늘뜻펴기를 반복하니까 이번 주는 설교 준비하는 일에 목사님이 편했겠다고 생각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실은 그 반대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뜻펴기란 내용도 중요하지만, 펴는 자의 영성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대화에 있어 내용은 30%에 불과하고 70%는 말하는 자의 태도에 달려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목사에게 하늘뜻을 펼침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말씀의 깨달음에서 얻어지는 창조적인 열정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성령의 감동입니다. 이 열정과 감동은 주로 새것에서 나오지 헌것에서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가 없는 것이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뜨거운 반응이 없다면 이는 세미나 학술 발표이지 하늘뜻펴기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복은 더 어려운 과제입니다. 교수와 목사의 차이가 그런 것입니다. 교수는 지난 강의 반복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청중이 다르니까요. 그러나 목사에게 청중은 항상 동일합니다.

그래서 같은 본문을 채택할 때는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영감을 찾아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제가 3년 전 이 하늘뜻을 펴면서 저도 매년 반복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였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당회의 결의가 없었기 때문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제 마음 속에 반복에 대한 열정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몇 주 전부터 ‘겨울이 오기 전에’라는 단어가 제 머리를 감돌았습니다. 지난 주 이병희장로께서는 목회기도 중에 이 말을 쓰셨지요. 바라기는 오늘의 하늘뜻펴기는 처음 듣는 것 같다는 평이 있기를 바라고 올해에는 당회의 결의문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신약성서 안에 사도 바울로가 쓴 편지들은 대개 수신인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글은 바울로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에페소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디모테오에게 보낸 개인 서신입니다. 보통의 개인서신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유언과도 같은 서신입니다. ‘나는 이미 피를 부어서 희생제물이 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가 왔습니다.’ 디모테오는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금의 터키에 있는 에페소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바울로 선생으로부터 편지가 온 것입니다. 내용인즉 마르코를 데려오고 자신의 외투와 책을 갖다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겨울 전에 와 달라고 말합니다.

[돌에 갇힌 돌멩이]

겨울이 되어 강풍이 불기 시작하면 소아시아 지방 에베소에서 지중해 해협을 따라 그리스를 거쳐 로마로 가는 뱃길은 매우 위험합니다. 사도행전 27장에는 바울로가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던 중 유라퀼라라는 강풍을 만나 배가 파선하여 죽음 직전에 까지 갔던 경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겨울 전에 오라’고 말 속에는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오의 안전을 염려하는 말이기도 하고 빨리 보고 싶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매우 외로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재판을 받았을 때는 한 사람도 자기를 도와주지 않고 모두가 자기를 버리고 가버렸다고 말합니다.(16절) 구체적으로 이름을 언급합니다. 데마는 이 현세를 사랑해서 떠났다고 말하고 그레스겐스와 디도도 각기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주치의 역할을 했던 루가만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병이 들었거나 괴로운 일을 만날 때에 혼자 있으면 그 괴로움이 배나 더 합니다. 곁에 누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더구나 모함으로 재판을 받는 경우라면 그 외로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일본에서 태어나 진정한 조선 사람이 되기 위해 남한으로 유학을 왔다가 형과 함께 <유학생 간첩>으로 체포되어 무려 17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서준식선생이 20년 전 1987년 12월 마지막 날에 동생 서경식씨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경식아 보아라. 인간은 타자와의 만남에 의하여 인간다워진다고 했다. 그러기에 인간에게 있어서 <존재함>이란 <대화함>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오랫동안 만남도 없고 대화도 없다. 돌멩이처럼 고집스런 거부와 저항의 세월에는 만남과 대화 대신 숙명적 책임이 있을 뿐. 이렇게 나는 오랜 세월동안 조금씩 조금씩 돌멩이를 닮아왔다.
때로 무척 인간다워지고 싶었던 돌멩이의 슬픈 밤들.... 그러나 삶이란 어차피 무엇이든지 고루 갖추어진 완벽한 것은 아닐터이다. 소중한 한 가지를 버리는 바로 그 아픔이, 나에게 남아 있는 다른 한 가지를 더욱 아름답게 키워주는 것이 아니던가? 우리의 삶이란 이런 식으로 소중한 것을 버리는 아픔 속에서 그 나름대로 완성으로 완성으로 무르익어가는 것이리라...... 어차피 나는 돌멩이, 소중한 무엇인가를 버렸기에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는 돌멩이라면, 나는 아무래도 버려야 할 것에 미련을 두지 않으련다. 나의 인생을 저주하지 않으련다. (<고뇌를 뚫고 떠오르는 희망> 옥중서간집 334쪽)

서준식선생은 철장에 갇힌 자신을 ‘하나의 돌멩이’에 비유합니다. 하루 종일 벽을 향해 앉아 있어야 했던 젊음의 날, 7년의 형기를 마쳤지만, <사회안전법>이라는 새로운 법망에 갇혀 또 다시 10년을 영어의 몸으로 살아가야 했던 그는 바깥의 삶에 대한 희망을 끊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그는 자신의 하루하루를 영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장군이 그 세력을 크게 떨치던 12월 30일 그는 돌멩이를 닮아가던 자신이 결국은 돌멩이가 되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차가운 벽의 일부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바울로가 받았던 느낌 또한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자유에 대한 희망은 사라진 채, 죽음의 날을 기다려야 하는 자신을 보면서 그는 깊은 고독감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요? 바울로 또한 사람이었지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기를 기도했던 예수님과 같이 바울로 또한 인간의 성정을 가졌지요. 그래서 그는 떠나간 사람들 때문에 더욱 큰 고독감을 느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는 배반감입니다. 그 어느 날 바울로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불구자를 고쳤던 그 기적을 보고 바울로의 곁에 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이 자기가 바라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임을 깨닫자 하나씩 둘씩 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데마만은 끝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 바울로 또한 그에게 마음을 주었고 그를 사랑했고 그를 향해 기대를 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로에게 사형언도가 떨어지자 그마저 떠났습니다. 그래 바울은 큰 상처를 받았지요. 차라리 마음을 주지 않았더라면 상처도 적었을 터인데, 마음을 주었기에 상처가 컸습니다. 그래 오죽 했으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한 바울로 선생께서 ‘데마는 이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카로 가버렸습니다.’라고 강한 원망이 담긴 말을 할까요?

저도 그래서 여러분에게 부탁을 드립니다. 떠나려거든 지금 떠나세요. 나중에 속았다고 생각하고 욕하고 떠나지 말고 지금 떠나세요. 그래야 여러분도 상처를 덜 받고 예수님도 상처를 덜 받겠지요. 요한복음 마지막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래아 해변에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번 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으니 예수님도 세 번 사랑을 확인했다는 설명은 너무 매몰찬 해석입니다. 약간은 불경스러울지 모르지만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세 번째 물음에 베드로가 약간 짜증스런 반응을 하지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예수님께서 더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걸 모르실리 만무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묻는 것은 그만큼 상처가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차라리 네가 ‘나는 결코 선생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선생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세 번이나 반복하는 확인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이 자리에는 현세를 사랑하여 주님 곁을 떠나는 데마와 같은 사람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결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맹세 또한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맹세는 하늘에 두거나 땅에 두거나 아예 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왜냐하면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이고 땅은 하느님의 발판이니까요. 그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무엇을 입을까?]

마음이 외로우면 추위도 더 타지요. 어두컴컴하고 습기 찬 로마의 감옥에서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바울로는 외투가 필요했습니다. 물론 로마교회의 교인들에게 부탁을 하면 다른 외투를 구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디모테오에게 굳이 드로아스의 가르포의 집에 두고 온 외투를 가져오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을 보면 거기에는 아마도 사연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어떤 교인이 손수 만들어 준 외투였을 것이고 복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옷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몽둥이로 맞은 핏자국이 남아 있거나, 산길에서 맹수를 만나 옷이 찢어져 꿰맨 자국이 남아 있는 외투였을 것입니다. 혹 여러분의 옷장 속에도 어떤 추억이 담긴 옷 한 벌쯤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이즈도 맞지 않고 색깔은 바랬지만 그래도 굳이 간직하고 싶은 옷 한 벌 쯤은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장례 예법은 그 시신에 베옷을 입힙니다. 전통이 중요하긴 하지만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서양에서는 입고 싶은 옷을 입힙니다. 저도 관에 들어갈 때 그냥 평소의 옷을 입고 가고 싶습니다. 12월 마지막 주일에 유언장을 다시 한 번 써보려고 하는데, 무슨 옷을 입고 갈 것인지도 미리 생각해 두시기 바랍니다. 외투를 갖다달라고 하는 부탁은 바울로 또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 것은 아닐까요? 추운 겨울을 외투에 담긴 교우들의 사랑을 기억하고 핏자국을 보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려는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바울로는 외투와 함께 양피지로 만든 책을 갖다 달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구약성서일 것이고 혹은 복음서의 일부일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원 마가복음일 수도 있고 혹은 Q 복음 일수도 있습니다. 읽으려는 것이 목적이겠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애용하는 책을 관에 함께 넣는 일은 당시의 습관이기도 했으니까요. 서양에서는 마지막 장례식을 viewing service 라고 합니다. 관의 뚜껑을 열어 마지막 모습을 보는 것이 기독교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곱게 옷을 차려입고 성경을 품에 안고 있는 마지막 모습은 떠나보내는 가족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지요.

[믿음의 다툼]

죽음을 준비하는 외투와 양피지 책을 부탁한 바울로 선생은 또 한 가지를 부탁하는데, 이는 물건이 아닌 마르코라는 사람입니다. 마르코는 누구입니까? 마르코는 바르나바의 조카로서 바울로가 바르나바와 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함께 출발했던 도우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행 초기에 힘들다고 집으로 되돌아간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2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에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다시 데려가기를 원했고, 바울로는 이에 반대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28절은 이에 대해 이렇게 짤막한 얘기를 전합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심한 언쟁 끝에 서로 헤어져서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바울로는 실라를 택하여 각각 길을 떠났다.’

바르나바와 바울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떠한 사이였습니까? 함께 안티오키아교회를 섬겼던 동역자였습니다. 선교여행에서 죽음의 고개를 함께 넘었던 끈끈한 동지였습니다. 바울로에게 있어 바르나바는 동역자나 동지 그 이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없었다면 바울로는 고향 다르소에서 그저 무명의 한 인간으로 그 삶을 마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로는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거듭났지만, 과거 교회를 핍박했던 악명으로 모두 그를 기피했습니다. 그러나 바르나바가 적극적으로 나서 그를 안티오키아교회에 동역자로 불러온 것입니다. 오늘날 바울로는 예수 다음으로 때로는 예수 이상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이 모든 공로는 전적으로 바르나바에게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로에게 있어 바르나바는 대 은인입니다. 그 은인의 소원을 한번 들어주어 마르코를 선교 여행에 데려가는 일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그러나 바울로는 한번 실망한 사람은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는 고집불통의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갈라서게 되었고 이후로 바르나바는 역사에 다시금 등장하지 않습니다. 루가가 소식을 몰라서 기록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바울로가 마르코를 데려오라고 하는 것을 보면 바르나바의 근황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사도 루가가 초대교회사를 기록하면서 바르나바를 빼고 바울로 중심으로 기술한 일에 대해 불만이 많습니다. 하늘나라 가면 한번 따져볼 참입니다.

[용서는 조건이 아닌 자유]

믿는 사람들도 때로는 의견차이로 갈라 설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일은 아니지만 인간의 약점으로 인해 이런 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실망하고 분노하며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바울로는 마르코라는 인간은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으리라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죽음을 앞둔 이 로마 감옥에서 마르코를 보기를 원합니다. 마르코가 복음을 위해서 목숨도 아끼지 않고 많은 일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바울로는 내가 그 당시 너무 고집을 피웠구나 하고 후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마음으로 후회하는 것으로 그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로는 단지 후회하는 일로 그치지 않고 그를 직접 만나 용서를 빌고자 합니다. ‘마르코는 내가 하는 일에 꼭 필요한 사람이니 그를 데리고 오시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그를 복음사역의 동역자로 인정하고 그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하게도 이 두 사람이 서로 만났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가 바울로의 마지막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만났다고 한다면 서로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고 껴안는 순간은 정말 감격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살면서 가슴 뭉클한 순간이 많이 있지만, 미워하던 두 사람이 서로 만나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손을 내밀고 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포옹하는 순간처럼 아름답고 감격적인 순간은 없을 것입니다. 형 에서오와 동생 야곱의 만남. 세상에 둘도 없는 혈육지간. 그러나 동생 야곱의 간계로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형 에서오는 그를 죽이고자 했고, 야곱은 이를 피해 20년 동안 고향을 떠나있어야 했습니다. 이제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기로 결단합니다. 그러나 형이 그를 용서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그는 형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그러자 형이 400명의 부하들과 함께 오고 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이 사백 명이 환영의 인파인지 아니면 살인의 행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공포와 불안 속에 돌아설까 고민합니다. 그러나 돌아설 곳이 없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먼저 강을 건너게 한 후 밤새 내내 필사적인 기도를 합니다. 소위 이 장면을 야뽁나루터의 천사와의 씨름이라고 하지요. 날이 밝자 그는 그곳에서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에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고 형 에서오와 감동의 장면을 연출합니다. 야곱은 형을 보자 일곱 번 절을 하며 최대한의 예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형 에서오는 마구 뛰어와서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장면은 언제고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습니다.

용서한다고 하는 것 그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성서의 말씀은 입으로는 쉬워도 행동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악에 대하여 분노하고 복수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야 말로 복수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진정한 복수는 악에 대하여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악에 대하여 선으로 보답하게 되면 그 악을 행했던 사람의 기쁨을 빼앗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는 한 하느님께로 향하는 문은 닫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상처받은 마음의 치유는 자신으로부터의 용서로 시작합니다. 용서는 상대방에게서 얻는 조건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자유입니다.

이제 남은 질문 하나는 과연 디모데오가 이 편지를 받자말자 즉시 마르코에게 연락을 하고 외투와 양피지 책을 찾아 함께 로마를 향해 떠났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갔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디모테오가 에베소 교회에서의 중요한 회의나 제직 임직식이 있어 서너 주일을 지체하다가 배를 놓쳤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 겨울을 지나 봄에 로마에 갔다고 가정을 해보십시다. 감옥을 찾아가 바울로를 면회하러 왔다고 하니까, 장부를 뒤적이던 간수가 그런 이름은 여기 없다고 말합니다. 낙담이 된 디모테오는 혹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았을까 이리저리 수소문을 하다가 로마 교회의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아 당신이 바로 바울로 선생께서 그렇게도 보고 싶어 했던 디모테오이시군요. 바울 선생은 지난 겨울 새벽에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혹 디모테오가 오거든 내가 정말 사랑했노라고’ 디모테오는 그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 속에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을 것입니다. ‘아 그때 만사를 제쳐놓고 떠났어야 했는데...’

[인생 성공은 우선순위 정하기]

후회막급(後悔莫及)이라는 말이 있지만, 가끔 교우들이 이런 얘기 하는 것을 듣습니다. ‘내가 한 10년만 젊었어도 더 잘 해볼 수 있을텐데.’ ‘예수를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전 그때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교우님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사실, 인생은 조금 미루다가 영원히 미완성으로 그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지금 시작할 수 있다면 세상에 늦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며 내일은 아직 오지 않는 시간이며 오늘만이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시간이 있고 없고는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는 선택의 문제이지 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루가 25시간이 되면 누구에게나 똑같이 한 시간이 남을 것 같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사람에게는 추가되는 여유의 한 시간이 되겠지만, 지금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부족한 시간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바울로의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돈이야 아꼈다가 다음번에 쓸수 있지만 시간은 모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세월은 흘러가는 겁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라는 말입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라는 말씀이고 인생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지금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중요한 일은 미뤄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서를 묵상하며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을 지금 당장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당장 가족들과 함께 사랑의 대화 시간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하지 않고 하루하루 미루다보면 결국은 커다란 곤경에 빠집니다.

어느 대학 총장 부인이 입학 청탁과 함께 돈을 받았습니다. 합격을 하지 않았으니 돈을 돌려달라고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었습니다. 그때는 그게 그리 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미루다가 인생 전체를 송두리 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일은 급하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무시하면 언젠가는 한순간에 인생 전체를 바닥으로 떨어뜨립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해야 합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용서하시고 겨울이 오기 전에 출발하세요.’ 일단 찬바람이 불면 그때는 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봄에 가면 바울로는 그곳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대체로 시간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공간적으로 이해합니다. 죽으면 가는 나라. 대체로 그렇게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거의 대부분은 공간 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결단 촉구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대부분은 이 말씀을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들께서는 승차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래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지. 그래 기다리고 있다가 열차가 도착하면 타야지. 여러분 이게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현재완료형입니다. 이미 와 있다는 말입니다. 가까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그 뜻이 더 정확해집니다.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하느님의 나라는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손을 뻗지 않으면 영원히 잡을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성서를 배우고 깨닫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인생에 무슨 변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불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미루면 그 인생이 그 인생이 됩니다. 열심히 사느라고 산 것 같은데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제가 마지막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는 이 얘기가 마지막 얘기가 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현재 임보라목사나 한문덕전도사님이 인도하는 성서배움 마당반이 진행 중에 있고 제가 하는 화요 성서배움마당은 지난주에 처음 시작했습니다. 중간에 들어간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제 반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분은 오늘 안병무평전을 구입하셔서 읽고 7시반까지 제 방으로 오시면 됩니다. 인생의 성공은 삶의 우선순위의 결단에 달려 있지 쌓아가는 업적이 아닙니다. 그 쌓아 논 업적은 한순간의 실수로 무너지는 것이고 결코 죽음과는 동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과 긴급한 일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의 비결입니다.

[자신의 월계관을 향해]

본 훼퍼목사님은 교회에는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를 구하는 두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값싼 은혜는 십자가의 순종의 훈련 없이 말로만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값비싼 은혜는 순종의 훈련을 통한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제자를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지금 주님의 이름으로 순종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개인으로는 원치 않지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기에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답변을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향린교회에 나온다 하더라도 저기에 자기 십자가를 걸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값싼 은혜를 추구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는 믿음의 실체인 자유와 해방을 향해 일어서십시다. 자기 자리를 툭툭 떨고 일어서십시다. 그리고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그 길에 첫걸음을 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첫걸음이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자신이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고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월계관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준비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월계관이 보이시나요?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