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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린강단은 향린교회 주일예배의
'하늘뜻펴기'(설교)를 문서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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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55
10월 28일 성령의 역사(10) - 개혁은 본질의 회복
열하 23장 19-25절; 행 15장 4-11절
오늘은 중세의 부패한 가톨릭교회의 교권에 대항하여 교회를 바로 세우고 신앙을 새롭게 하고자 마르틴 루터의 저항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1517년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신학교수였던 루터신부는 교황이 베드로 성당의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방편으로 죽은 영혼들도 교황이 발행하는 면죄부를 사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며 성서를 왜곡하자 이에 대해 95개조에 달하는 비판적인 글을 대학교회 정문에 걸게 됩니다. 이를 기점으로 유럽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를 종교개혁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기독교 내의 개혁운동이니까 기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다종교의 사회에서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종교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어단어 Reformation 에도 교회 혹은 종교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개혁운동은 종교의 영역에서 출발했지만, 농민반란이 일어나는 등 사회전반에 걸친 매우 폭넓은 개혁운동으로 번져갔기 때문입니다. 물론 로마 가톨릭은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이를 개혁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란 혹은 분열로 받아드립니다. 얼마 전 베네딕트 교황 16세가 개신교를 선교의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이슬람교를 폭도로 매도하는 발언을 하여 논란거리를 제공하기도 하였지요.
[개혁자들의 사상과 오늘의 남한교회]
Sola Scriptura (오직 성서만으로) : 이는 교황의 권위를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Sola Gratia (오직 은혜만으로) : 구원은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교권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Sola Fide (오직 믿음만으로) : 의인은 믿음으로만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 면죄부와 같은 인간의 어떤 공로나 행위를 차단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개혁의 원칙들은 당시 가톨릭의 지나친 교권중심과 잘못된 신앙양태에 대한 반발로 나온 시대적 산물입니다. 이 원칙이 오늘 이 시대에도 문자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남한교회 특히 개혁주의라고 일컫는 보수교회들은 이 원칙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오히려 잘못된 신앙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오직 성서>는 이웃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기독교와 문자에 매인 축자적 신앙인을 양산해내고 있으며 <오직 은혜>는 신앙을 너무 감정적이고 감상적인 차원에 머물게 하고 있으며 <오직 믿음>은 기독교인의 사회적 실천을 무용화시킴으로 기독교인을 교회 건물 안에만 머물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원칙인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하여>라는 명제는 조용한 지하철 안에서 남들이 눈살을 지뿌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예수천당 불신지옥 구호를 외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교회의 날을 맞아 안티기독교인들을 초청하여 저들의 얘기를 듣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한 것들을 정리해보면, 첫째 기독교인은 말을 참 잘한다. 그러다보니 대화가 훈계조이다. 타종교에 대한 우월의식을 갖고 있다. 일례로 병문안 오는 목사는 다인용 병실임에도 다른 환자는 신경 쓰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기도를 한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은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둘째 출세했다고 보이는 개신교인들의 이미지는 부시 대통령의 아류처럼 보인다. 이들은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십일조 열심히 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부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마치 부시 정권이 국제사회에서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셋째 기독교인은 기름진 이미지이다. 가난한 사람은 들어가기 힘든 인상을 준다는 말이지요. 넷째 폐쇄성과 공격성의 이미지가 강하다. 개신교 내에도 수많은 교단이 있어 각각 신학교를 세우지만 다른 신학교를 나온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부적으로도 굉장히 폐쇄적이다. 다섯째 기독교는 다단계 업체를 연상시킨다. 다단계 업체는 왜 힘들게 일하냐고 다른 직업군을 비난한다. 이렇게 편한 일이 있는데 왜 다른 일을 하냐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인은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이렇게 좋은 종교가 있는데 왜 믿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물론 7,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나 통일운동의 선구자로서의 교회의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일반 NGO기관에서 이런 일들은 모두 담당하고 있다 보니 교회가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몇몇 대형교회가 아들에게 교회를 넘겨주는 세습행태나 개인의 비윤리적인 일들이 인터넷을 통해 젊은이들 사이에 쉽게 유포됨으로 반기독교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종교집단 이기주의]
금요일 오후에 문화방송 PD가 전화를 걸어 대선에 관하여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하기에, 종교인으로 대선후보를 언급하는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한다는 말이 ‘목사님, (몇 사람의 이름을 대며) 여러 목사님들이 설교단상에서 공공연히 장로대통령을 뽑으라고 얘기한 거 아시죠?’ ‘예 알고 있지요.’ ‘전00목사라는 분은 이번에 장로대통령 뽑지 않으면 그 사람은 생명책에서 제하여 버릴 것이라고 협박한 일도 아시죠?’ ‘그래 알고는 있지만 그 사람들 하고 다투는 얘기를 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래 또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한마디 더하더군요. 그만 제가 여기에는 거절을 더 이상 못하겠더군요. “목사님 지금 조계종 벽보에 ‘특정종교 편향하는 대선후보 반대한다.’고 씌어 있고 불교계의 청년들이 들고 일어나려고 합니다.” 가만히 듣고 보니 장로대통령 운운하는 목사들 때문에 잘못하면 종교전쟁 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독교인이 절에 들어가 부처상을 우상이라고 부셨을 때에도 불교계가 그렇게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당히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지사지 우리가 한번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다. 만약 어떤 불교인이 교회 십자가를 부수었다면 교회가 가만히 있었을까요? 지금 어떤 한 대선후보가 열심 있는 불교신도인데 이 사람이 과거 서울시장을 지내면서 서울시를 부처님께 봉헌합니다. 라는 기도를 한 경력이 있다면 기독교인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잘못하여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이 나라를 부처님께 봉헌하겠다.’며 불교국가를 만들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장로대통령이라는 말은 매우 잘못된 말입니다. 특히 목사가사석이 아닌 공개석상에서 특히 설교 중에 어느 특정한 대선후보를 뽑으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실 이것은 선거법 위반입니다. 지금 이분들이 모두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을 당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남한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지역연고주의 집단이기주이가 아닙니까? 장로니까 뽑아주어야 한다. 이거야 말로 집단 이기주의이고 연고주의입니다. 제일 경계해야 할 일을 기독교 목사들이 나서서 함으로 기독교의 명예가 실추되고 말았습니다. 사학법 재개정 한다고 삭발하고 아프칸 선교하다가 납치당하고 지금 개신교는 날개 없는 새 마냥 계속 추락하고 있습니다. 그래 저도 어디 가서 기독교목사라고 말하기가 부끄럽습니다. 목사라고 하면 속으로 그러지 않겠어요. 목사는 무슨 목사 먹사지.
우리가 대통령을 뽑을 때에는 기독교적 가치에 가장 근접해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이 가치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첫째는 예수님께서 사회적 약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일하셨으니까 약자들의 권익보호가 우선이고 두 번째는 경제 그 이상의 것을 말하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으로부터 첫 번째로 받으신 유혹이 무엇이었습니까? 돌로 빵을 만들어 나눠주라는 경제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빵을 넘어 생명 평화 정의 화해 일치 이런 것들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판단하여 나라의 지도자로 뽑아야 합니다. 특히 남북갈등을 해소하고 자주평화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목사는 이렇게 설교 단상에서 성서적인 원칙만 얘기하면 됩니다. 다음은 교인들 각자가 알아서 정하도록 하면 됩니다.
[향린교회의 신앙고백]
교회가 덩치는 커졌는데,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향린교회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14년 전 향린교회는 40주년을 맞아 향린교회 신앙고백 선언을 발표하고 몇 가지의 구체적인 교회갱신을 제안하였습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향린교회는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의 소용돌이가 채 가시기 전인 1953년 5월에 폐허로 변해 버린 서울 한복판에서 창립되었다. 이 시기는 우리 민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시련을 겪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들은 민족의 고난을 외면한 채 교파 분열과 교권 싸움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향린교회의 창립은 기성교회의 이 같은 나태한 모습에 대한 고백적인 결단이었다. 향린교회의 창립자들은 생활공동체, 입체적 선교공동체, 평신도교회, 그리고 독립교회라는 네 가지를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삼았다. 그들은 이러한 교회가 민족의 현실과 미래와 운명을 외면한 채 바리새주의에 빠져 있던 기성교회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고 희망이라고 믿었다. 향린의 창립정신은 이런 의미에서 신앙고백적인 의미가 있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상황에서 교회가 거듭 새롭게 갱신되어야 한다는 개혁교회의 신앙전통에 확고히 서는 것이다.]
14년 전에 발표한 우리의 신앙고백과 갱신들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향린교회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이 신앙고백과 갱신들을 지키기 위해 많은 개혁을 하였지만, 대다수의 교회들은 오히려 그때보다 더 후퇴한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에 대한 비판에 앞서 우리들 자신이 먼저 이 선언에 맞는 교회를 지켜오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크게 3가지 제안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한국교회의 예배와 문화는 민족정서를 담아낼 수 있도록 갱신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 교회의 자랑으로 다른 교회들이 배우려고 하는 있습니다. 국악 CD를 출간했고 이제 국악찬송가를 개편하여 내년에는 국악예배 컨퍼런스를 개최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보급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둘째 교회는 민주적 공동체로 갱신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만든 정관 속에 그 내용들이 충분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여성장로의 숫자는 교인들의 남녀비율에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부분입니다. 세 번째 교회는 선교지향적 공동체로 갱신되어야 한다. 아마도 이 부분이 저희 교회가 현재 가장 부족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단지 예산의 30% 할당이라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신앙의 자세가 선교 지향적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선교는 민족선교요 공동체선교요 사회적 선교와 향린교회의 미래의 일군을 만들어내는 미래지향적 선교를 말합니다. 교회가 늙어가면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부분이 선교의 안일함과 나태함입니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 육신의 힘이 부치면서 안으로 움츠러들게 되고 새로운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하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유지하려고 하듯이 교회 또한 그러하게 되는데 저는 그런 현상이 점차 향린교회에도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해 선교부 소속의 몇 사람의 선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선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평화나눔 작은공동체 운동을 시작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 그 열정이 많이 식어 있습니다. 기존의 신도회나 구역모임 부서별 활동 또한 책임을 맡은 분들이 모두 열심히 하긴 하였지만 그 열정에 있어 미진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그 원인은 다양하게 변화하는 사회에도 그 주요 원인이 있습니다. 각 가정이나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자녀양육과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쫓아가느라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분주하게 살아가는 매우 힘든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과거에 비하면 더 많은 수입과 더 좋은 주거환경, 풍성한 먹거리, 편리한 전자생활용품들을 갖고 살지만, 삶은 더 팍팍합니다. 교회예배나 행사에 참여할 시간적 여유나 물질적 여유가 더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야 하고 또 먹고 사는 일이야 말로 가장 우선시되는 일이라 저로서도 뭐라고 얘기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지만, 과연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께 참 생명의 길을 물으러 왔다가 ‘가진 것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근심하며 떠나가는 부자 청년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립니다. 하느님과 맘몬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우리들을 향해 저는 뭐라고 말을 못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진을 보면서 아 이 사람이 예수다. 그 얼굴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라.’ 하는 그 얘기를 들었으면 그대로 믿고 걱정을 떨쳐버리고 하느님의 의를 쫓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분가선교에 도전하라]
향린교회가 선교지향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선언에 덧붙여 한마디 하겠습니다. 향린교회를 몇 년 다니면 열정이 떨어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분들은 계속 머물러 있어봐야 자기 신앙에 도움도 안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 분들은 독자적인 신앙공동체 곧 분가교회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꼭 건물을 갖고 다른 곳으로 나가야만 분가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향린교회 건물을 이용해서 토요일에 모일 수도 있고 주일 오후에 따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분가교회도 가능합니다. 실제 제가 다녀본 워싱톤의 The Savior Church는 15개 이상의 분가교회가 있지만, 어떤 교회는 예배를 드리는 장소는 같습니다. 다만 예배 시간이 다르고 선교처가 다릅니다. 이는 꼭 건물이 먼저 있어야 분가가 시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교의 뜻이 맞는 사람만 있으면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선교지향적인 교회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유권이 강합니다. 그래 자기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어야만 자기 집이라고 말하고 전세나 월세는 자기 집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몸은 여러분의 것입니까? 아니면 얼마정도 빌려 쓰다가 돌려주는 것입니까? 빌려 쓰는 몸이지만 그 빌려 쓰는 동안은 자기 몸이라고 하지요. 소유권은 없어도 쓸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것입니까? 여러분이 주인이라면 언제 끝나는지 알고 있어야 하지요. 소유권은 없지만 자율권이 있는 한 우리는 내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건물 등기는 다른 교회 이름으로 되어 있어도 여러분이 어떤 시간대를 빌려 쓸 수 있다면 그건 여러분의 교회입니다. 만약 어떤 분들이 따로 모여 예배를 드린다면 제가 교회 간판도 따로 달아드리겠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조직도 아니고 기구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생명체의 본질은 새롭게 뻗어 나아가려는 약동하는 힘과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퍼뜨리고자 하는 번식에 있습니다.
이 선언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개혁은 교회를 거듭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활동하심에 대한 고백적인 참여이다. 우리 한국 교회가 지금의 상태를 고수하고자 더 이상 개혁하기를 멈추었을 때,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세인들의 지탄의 대상이 될 뿐임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갖추어야 할 경건의 미덕은 자기 개혁의 채찍을 놓은 보수주의나, 세상에 대하여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탈정치적 도피주의가 아니다. 경건은 성령을 통해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며, 동시에 세상을 향해 책임 있는 기독교인으로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당시의 산당들은 제국주의의 상징]
오늘 구약성서 본문에 나타난 요시아 왕 때의 이야기를 보면 성전을 보수하다가 벽에서 율법책이 발견됩니다. 신학자들은 이 책이 신명기법전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요시야 왕은 이 책에 씌어진 내용에 따라 일대 개혁을 합니다. 이방종교의 산당을 부수고 거기에 종사하는 사제들을 죽였습니다. 오늘날의 상식으로 보면 이웃종교를 박해하는 매우 파괴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정치과 종교가 일치하는 시대적 상황으로 본다면 이는 단지 종교적 핍박이 아닙니다. 이 산당들은 모두 가나안과 애굽 앗시리아 등 당시 제국들의 산당이었습니다. 이 산당들을 제거한다는 것은 국가의 기틀을 자주적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외국의 힘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자주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는 구절이 있는데 그건 21절입니다. 이 모든 산당들을 부순 후에 “왕은 또 전 국민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언약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너희 하느님 야훼께 감사하여 과월절을 지켜라. 그래서 지킨 과월절 축제는 일찍이 판관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나 왕들이 다스리던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과월절의 절기는 어떤 절기입니까? 이 절기는 자신들의 조상들이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 받았던 것을 기억하는 해방절입니다. 따라서 이 과월절은 유대교의 최대명절로 한해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뭐라고 얘기합니까? ‘그래서 지킨 과월절 축제는 일찍이 과거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이 말은 과월절 축제를 지키지 않다가 다시금 지키기 시작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요시아 왕 때의 과월절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축제였다 이런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질적으로 전혀 다른 축제가 되었습니까? 주위 제국들의 이방종교의 산당들을 제거하였다는 말과 연결하여 읽는다면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래 과월절이 갖는 의미 해방의 주체로서의 야훼 하느님, 모든 것을 모든 것 되게 하시는 야훼성을 회복하고 그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였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개혁은 단지 교회라는 종교조직 혹은 그 단체에 소속된 신도들의 신앙의 문제에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시작이라 말할 수 있는 예수님과 바울로의 개혁운동이 단지 종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의 문제에서 시작하였기에 이는 결국 사회의 정의와 평화 실현의 문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본문에 보면 당시 교회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열립니다. 그것은 바르나바와 바울로가 섬기던 안티오키아 교회 내부에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 율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한 종교집단의 교리문제이지만, 실제는 이웃 간의 평화의 문제요 일치와 화해의 문제였습니다. 만약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회 안에서 구원의 교리로 인해 갈라선다면 그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분열되는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해줍니다. 교리나 전통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개인의 다양한 의견을 좇아 집단의 원칙이 무너져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집단의 원칙을 앞세우다가 개인의 권리가 훼손되어서도 안 되겠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본래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습관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개혁은 처음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말씀에 따른다면 요시야 왕 때 세상권력적인 이방신을 제거하고 야훼 하느님의 자유와 해방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이는 예수에게서는 갈릴래아의 가난한 민중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되는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초대교회에서의 이방인우선의 선교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기도의 개혁적 의미]
우리가 현재 암송하는 주기도는 2천 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 기도했던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습니다. 그것은 시대가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주기도는 새롭게 읽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 이번 주 교회의 날을 여는 첫 예배에서 주기도문을 이렇게 읽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주보 맨 뒷면 목회자마당에 실려 있습니다. 함께 읽겠는데 제가 먼저 본래의 기도문을 읽으면 여러분은 오늘의 상황으로 재해석된 기도문을 교독형식으로 읽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나의 이름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서로를 돕고 살리는 기운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임하시고 민족과 종교와 이념을 넘어서 인류가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당신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옵소서.
오늘 필요한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부하게도 마시고 가난하게도 마옵소서. 굶주림과 재해로 고통 받는 형제, 자매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의 빚들을 탕감하게 하소서. 누군가에 품은 앙심이 눈 녹듯이 사라지게 하소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악에 대하여 양심의 소리를 내게 하시고 바벨탑을 쌓으려는 우리의 모든 교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당신의 것입니다.
사랑과 지혜, 조화와 기쁨 또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아멘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열하 23장 19-25절; 행 15장 4-11절
오늘은 중세의 부패한 가톨릭교회의 교권에 대항하여 교회를 바로 세우고 신앙을 새롭게 하고자 마르틴 루터의 저항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1517년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신학교수였던 루터신부는 교황이 베드로 성당의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방편으로 죽은 영혼들도 교황이 발행하는 면죄부를 사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며 성서를 왜곡하자 이에 대해 95개조에 달하는 비판적인 글을 대학교회 정문에 걸게 됩니다. 이를 기점으로 유럽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를 종교개혁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기독교 내의 개혁운동이니까 기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다종교의 사회에서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종교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어단어 Reformation 에도 교회 혹은 종교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개혁운동은 종교의 영역에서 출발했지만, 농민반란이 일어나는 등 사회전반에 걸친 매우 폭넓은 개혁운동으로 번져갔기 때문입니다. 물론 로마 가톨릭은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이를 개혁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란 혹은 분열로 받아드립니다. 얼마 전 베네딕트 교황 16세가 개신교를 선교의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이슬람교를 폭도로 매도하는 발언을 하여 논란거리를 제공하기도 하였지요.
[개혁자들의 사상과 오늘의 남한교회]
Sola Scriptura (오직 성서만으로) : 이는 교황의 권위를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Sola Gratia (오직 은혜만으로) : 구원은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교권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Sola Fide (오직 믿음만으로) : 의인은 믿음으로만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 면죄부와 같은 인간의 어떤 공로나 행위를 차단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개혁의 원칙들은 당시 가톨릭의 지나친 교권중심과 잘못된 신앙양태에 대한 반발로 나온 시대적 산물입니다. 이 원칙이 오늘 이 시대에도 문자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남한교회 특히 개혁주의라고 일컫는 보수교회들은 이 원칙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오히려 잘못된 신앙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오직 성서>는 이웃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기독교와 문자에 매인 축자적 신앙인을 양산해내고 있으며 <오직 은혜>는 신앙을 너무 감정적이고 감상적인 차원에 머물게 하고 있으며 <오직 믿음>은 기독교인의 사회적 실천을 무용화시킴으로 기독교인을 교회 건물 안에만 머물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원칙인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하여>라는 명제는 조용한 지하철 안에서 남들이 눈살을 지뿌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예수천당 불신지옥 구호를 외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교회의 날을 맞아 안티기독교인들을 초청하여 저들의 얘기를 듣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한 것들을 정리해보면, 첫째 기독교인은 말을 참 잘한다. 그러다보니 대화가 훈계조이다. 타종교에 대한 우월의식을 갖고 있다. 일례로 병문안 오는 목사는 다인용 병실임에도 다른 환자는 신경 쓰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기도를 한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은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둘째 출세했다고 보이는 개신교인들의 이미지는 부시 대통령의 아류처럼 보인다. 이들은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십일조 열심히 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부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마치 부시 정권이 국제사회에서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셋째 기독교인은 기름진 이미지이다. 가난한 사람은 들어가기 힘든 인상을 준다는 말이지요. 넷째 폐쇄성과 공격성의 이미지가 강하다. 개신교 내에도 수많은 교단이 있어 각각 신학교를 세우지만 다른 신학교를 나온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부적으로도 굉장히 폐쇄적이다. 다섯째 기독교는 다단계 업체를 연상시킨다. 다단계 업체는 왜 힘들게 일하냐고 다른 직업군을 비난한다. 이렇게 편한 일이 있는데 왜 다른 일을 하냐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인은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이렇게 좋은 종교가 있는데 왜 믿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물론 7,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나 통일운동의 선구자로서의 교회의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일반 NGO기관에서 이런 일들은 모두 담당하고 있다 보니 교회가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몇몇 대형교회가 아들에게 교회를 넘겨주는 세습행태나 개인의 비윤리적인 일들이 인터넷을 통해 젊은이들 사이에 쉽게 유포됨으로 반기독교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종교집단 이기주의]
금요일 오후에 문화방송 PD가 전화를 걸어 대선에 관하여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하기에, 종교인으로 대선후보를 언급하는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한다는 말이 ‘목사님, (몇 사람의 이름을 대며) 여러 목사님들이 설교단상에서 공공연히 장로대통령을 뽑으라고 얘기한 거 아시죠?’ ‘예 알고 있지요.’ ‘전00목사라는 분은 이번에 장로대통령 뽑지 않으면 그 사람은 생명책에서 제하여 버릴 것이라고 협박한 일도 아시죠?’ ‘그래 알고는 있지만 그 사람들 하고 다투는 얘기를 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래 또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한마디 더하더군요. 그만 제가 여기에는 거절을 더 이상 못하겠더군요. “목사님 지금 조계종 벽보에 ‘특정종교 편향하는 대선후보 반대한다.’고 씌어 있고 불교계의 청년들이 들고 일어나려고 합니다.” 가만히 듣고 보니 장로대통령 운운하는 목사들 때문에 잘못하면 종교전쟁 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독교인이 절에 들어가 부처상을 우상이라고 부셨을 때에도 불교계가 그렇게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당히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지사지 우리가 한번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다. 만약 어떤 불교인이 교회 십자가를 부수었다면 교회가 가만히 있었을까요? 지금 어떤 한 대선후보가 열심 있는 불교신도인데 이 사람이 과거 서울시장을 지내면서 서울시를 부처님께 봉헌합니다. 라는 기도를 한 경력이 있다면 기독교인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잘못하여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이 나라를 부처님께 봉헌하겠다.’며 불교국가를 만들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장로대통령이라는 말은 매우 잘못된 말입니다. 특히 목사가사석이 아닌 공개석상에서 특히 설교 중에 어느 특정한 대선후보를 뽑으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실 이것은 선거법 위반입니다. 지금 이분들이 모두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을 당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남한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지역연고주의 집단이기주이가 아닙니까? 장로니까 뽑아주어야 한다. 이거야 말로 집단 이기주의이고 연고주의입니다. 제일 경계해야 할 일을 기독교 목사들이 나서서 함으로 기독교의 명예가 실추되고 말았습니다. 사학법 재개정 한다고 삭발하고 아프칸 선교하다가 납치당하고 지금 개신교는 날개 없는 새 마냥 계속 추락하고 있습니다. 그래 저도 어디 가서 기독교목사라고 말하기가 부끄럽습니다. 목사라고 하면 속으로 그러지 않겠어요. 목사는 무슨 목사 먹사지.
우리가 대통령을 뽑을 때에는 기독교적 가치에 가장 근접해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이 가치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첫째는 예수님께서 사회적 약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일하셨으니까 약자들의 권익보호가 우선이고 두 번째는 경제 그 이상의 것을 말하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으로부터 첫 번째로 받으신 유혹이 무엇이었습니까? 돌로 빵을 만들어 나눠주라는 경제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빵을 넘어 생명 평화 정의 화해 일치 이런 것들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판단하여 나라의 지도자로 뽑아야 합니다. 특히 남북갈등을 해소하고 자주평화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목사는 이렇게 설교 단상에서 성서적인 원칙만 얘기하면 됩니다. 다음은 교인들 각자가 알아서 정하도록 하면 됩니다.
[향린교회의 신앙고백]
교회가 덩치는 커졌는데,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향린교회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14년 전 향린교회는 40주년을 맞아 향린교회 신앙고백 선언을 발표하고 몇 가지의 구체적인 교회갱신을 제안하였습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향린교회는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의 소용돌이가 채 가시기 전인 1953년 5월에 폐허로 변해 버린 서울 한복판에서 창립되었다. 이 시기는 우리 민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시련을 겪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들은 민족의 고난을 외면한 채 교파 분열과 교권 싸움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향린교회의 창립은 기성교회의 이 같은 나태한 모습에 대한 고백적인 결단이었다. 향린교회의 창립자들은 생활공동체, 입체적 선교공동체, 평신도교회, 그리고 독립교회라는 네 가지를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삼았다. 그들은 이러한 교회가 민족의 현실과 미래와 운명을 외면한 채 바리새주의에 빠져 있던 기성교회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고 희망이라고 믿었다. 향린의 창립정신은 이런 의미에서 신앙고백적인 의미가 있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상황에서 교회가 거듭 새롭게 갱신되어야 한다는 개혁교회의 신앙전통에 확고히 서는 것이다.]
14년 전에 발표한 우리의 신앙고백과 갱신들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향린교회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이 신앙고백과 갱신들을 지키기 위해 많은 개혁을 하였지만, 대다수의 교회들은 오히려 그때보다 더 후퇴한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에 대한 비판에 앞서 우리들 자신이 먼저 이 선언에 맞는 교회를 지켜오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크게 3가지 제안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한국교회의 예배와 문화는 민족정서를 담아낼 수 있도록 갱신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 교회의 자랑으로 다른 교회들이 배우려고 하는 있습니다. 국악 CD를 출간했고 이제 국악찬송가를 개편하여 내년에는 국악예배 컨퍼런스를 개최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보급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둘째 교회는 민주적 공동체로 갱신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만든 정관 속에 그 내용들이 충분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여성장로의 숫자는 교인들의 남녀비율에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부분입니다. 세 번째 교회는 선교지향적 공동체로 갱신되어야 한다. 아마도 이 부분이 저희 교회가 현재 가장 부족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단지 예산의 30% 할당이라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신앙의 자세가 선교 지향적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선교는 민족선교요 공동체선교요 사회적 선교와 향린교회의 미래의 일군을 만들어내는 미래지향적 선교를 말합니다. 교회가 늙어가면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부분이 선교의 안일함과 나태함입니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 육신의 힘이 부치면서 안으로 움츠러들게 되고 새로운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하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유지하려고 하듯이 교회 또한 그러하게 되는데 저는 그런 현상이 점차 향린교회에도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해 선교부 소속의 몇 사람의 선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선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평화나눔 작은공동체 운동을 시작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 그 열정이 많이 식어 있습니다. 기존의 신도회나 구역모임 부서별 활동 또한 책임을 맡은 분들이 모두 열심히 하긴 하였지만 그 열정에 있어 미진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그 원인은 다양하게 변화하는 사회에도 그 주요 원인이 있습니다. 각 가정이나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자녀양육과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쫓아가느라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분주하게 살아가는 매우 힘든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과거에 비하면 더 많은 수입과 더 좋은 주거환경, 풍성한 먹거리, 편리한 전자생활용품들을 갖고 살지만, 삶은 더 팍팍합니다. 교회예배나 행사에 참여할 시간적 여유나 물질적 여유가 더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야 하고 또 먹고 사는 일이야 말로 가장 우선시되는 일이라 저로서도 뭐라고 얘기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지만, 과연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께 참 생명의 길을 물으러 왔다가 ‘가진 것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근심하며 떠나가는 부자 청년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립니다. 하느님과 맘몬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우리들을 향해 저는 뭐라고 말을 못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진을 보면서 아 이 사람이 예수다. 그 얼굴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라.’ 하는 그 얘기를 들었으면 그대로 믿고 걱정을 떨쳐버리고 하느님의 의를 쫓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분가선교에 도전하라]
향린교회가 선교지향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선언에 덧붙여 한마디 하겠습니다. 향린교회를 몇 년 다니면 열정이 떨어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분들은 계속 머물러 있어봐야 자기 신앙에 도움도 안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 분들은 독자적인 신앙공동체 곧 분가교회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꼭 건물을 갖고 다른 곳으로 나가야만 분가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향린교회 건물을 이용해서 토요일에 모일 수도 있고 주일 오후에 따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분가교회도 가능합니다. 실제 제가 다녀본 워싱톤의 The Savior Church는 15개 이상의 분가교회가 있지만, 어떤 교회는 예배를 드리는 장소는 같습니다. 다만 예배 시간이 다르고 선교처가 다릅니다. 이는 꼭 건물이 먼저 있어야 분가가 시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교의 뜻이 맞는 사람만 있으면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선교지향적인 교회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유권이 강합니다. 그래 자기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어야만 자기 집이라고 말하고 전세나 월세는 자기 집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몸은 여러분의 것입니까? 아니면 얼마정도 빌려 쓰다가 돌려주는 것입니까? 빌려 쓰는 몸이지만 그 빌려 쓰는 동안은 자기 몸이라고 하지요. 소유권은 없어도 쓸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것입니까? 여러분이 주인이라면 언제 끝나는지 알고 있어야 하지요. 소유권은 없지만 자율권이 있는 한 우리는 내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건물 등기는 다른 교회 이름으로 되어 있어도 여러분이 어떤 시간대를 빌려 쓸 수 있다면 그건 여러분의 교회입니다. 만약 어떤 분들이 따로 모여 예배를 드린다면 제가 교회 간판도 따로 달아드리겠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조직도 아니고 기구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생명체의 본질은 새롭게 뻗어 나아가려는 약동하는 힘과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퍼뜨리고자 하는 번식에 있습니다.
이 선언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개혁은 교회를 거듭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활동하심에 대한 고백적인 참여이다. 우리 한국 교회가 지금의 상태를 고수하고자 더 이상 개혁하기를 멈추었을 때,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세인들의 지탄의 대상이 될 뿐임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갖추어야 할 경건의 미덕은 자기 개혁의 채찍을 놓은 보수주의나, 세상에 대하여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탈정치적 도피주의가 아니다. 경건은 성령을 통해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며, 동시에 세상을 향해 책임 있는 기독교인으로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당시의 산당들은 제국주의의 상징]
오늘 구약성서 본문에 나타난 요시아 왕 때의 이야기를 보면 성전을 보수하다가 벽에서 율법책이 발견됩니다. 신학자들은 이 책이 신명기법전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요시야 왕은 이 책에 씌어진 내용에 따라 일대 개혁을 합니다. 이방종교의 산당을 부수고 거기에 종사하는 사제들을 죽였습니다. 오늘날의 상식으로 보면 이웃종교를 박해하는 매우 파괴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정치과 종교가 일치하는 시대적 상황으로 본다면 이는 단지 종교적 핍박이 아닙니다. 이 산당들은 모두 가나안과 애굽 앗시리아 등 당시 제국들의 산당이었습니다. 이 산당들을 제거한다는 것은 국가의 기틀을 자주적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외국의 힘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자주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는 구절이 있는데 그건 21절입니다. 이 모든 산당들을 부순 후에 “왕은 또 전 국민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언약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너희 하느님 야훼께 감사하여 과월절을 지켜라. 그래서 지킨 과월절 축제는 일찍이 판관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나 왕들이 다스리던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과월절의 절기는 어떤 절기입니까? 이 절기는 자신들의 조상들이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 받았던 것을 기억하는 해방절입니다. 따라서 이 과월절은 유대교의 최대명절로 한해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뭐라고 얘기합니까? ‘그래서 지킨 과월절 축제는 일찍이 과거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이 말은 과월절 축제를 지키지 않다가 다시금 지키기 시작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요시아 왕 때의 과월절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축제였다 이런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질적으로 전혀 다른 축제가 되었습니까? 주위 제국들의 이방종교의 산당들을 제거하였다는 말과 연결하여 읽는다면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래 과월절이 갖는 의미 해방의 주체로서의 야훼 하느님, 모든 것을 모든 것 되게 하시는 야훼성을 회복하고 그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였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개혁은 단지 교회라는 종교조직 혹은 그 단체에 소속된 신도들의 신앙의 문제에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시작이라 말할 수 있는 예수님과 바울로의 개혁운동이 단지 종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의 문제에서 시작하였기에 이는 결국 사회의 정의와 평화 실현의 문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본문에 보면 당시 교회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열립니다. 그것은 바르나바와 바울로가 섬기던 안티오키아 교회 내부에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 율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한 종교집단의 교리문제이지만, 실제는 이웃 간의 평화의 문제요 일치와 화해의 문제였습니다. 만약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회 안에서 구원의 교리로 인해 갈라선다면 그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분열되는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해줍니다. 교리나 전통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개인의 다양한 의견을 좇아 집단의 원칙이 무너져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집단의 원칙을 앞세우다가 개인의 권리가 훼손되어서도 안 되겠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본래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습관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개혁은 처음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말씀에 따른다면 요시야 왕 때 세상권력적인 이방신을 제거하고 야훼 하느님의 자유와 해방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이는 예수에게서는 갈릴래아의 가난한 민중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되는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초대교회에서의 이방인우선의 선교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기도의 개혁적 의미]
우리가 현재 암송하는 주기도는 2천 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 기도했던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습니다. 그것은 시대가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주기도는 새롭게 읽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 이번 주 교회의 날을 여는 첫 예배에서 주기도문을 이렇게 읽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주보 맨 뒷면 목회자마당에 실려 있습니다. 함께 읽겠는데 제가 먼저 본래의 기도문을 읽으면 여러분은 오늘의 상황으로 재해석된 기도문을 교독형식으로 읽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나의 이름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서로를 돕고 살리는 기운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임하시고 민족과 종교와 이념을 넘어서 인류가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당신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옵소서.
오늘 필요한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부하게도 마시고 가난하게도 마옵소서. 굶주림과 재해로 고통 받는 형제, 자매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의 빚들을 탕감하게 하소서. 누군가에 품은 앙심이 눈 녹듯이 사라지게 하소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악에 대하여 양심의 소리를 내게 하시고 바벨탑을 쌓으려는 우리의 모든 교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당신의 것입니다.
사랑과 지혜, 조화와 기쁨 또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아멘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