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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설교)를 문서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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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1일 성령의 역사(9)-가치관의 충돌
창 4:1-8절; 행 14장 1-7절
[부끄러웠던 순간]
지난 주 휴가 차 미국 LA에 계신 부모님을 방문하면서 늦은 밤에 TV 채널을 돌리다가 Bill Maher가 진행하는 토크쇼를 보게 되었습니다. 연예인들의 주변소리나 듣는 토크쇼가 아닌 사회의 예민한 문제들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프로그램입니다. 부시정권의 이라크 침공 이후 미국 내에 비판적인 세력들이 크게 자라면서 현재 젊은이들과 진보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인기가 있는 토크쇼입니다. 그날 밤 제가 본 토크쇼에 초청받은 인사가 둘인데, 한 명은 Mos Def라는 랩 가수이자 유명한 흑인문화운동가였고 다른 한명은 Cornell West라는 흑인학자였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Mos Def의 영어발음은 흑인재즈풍의 구슬이 굴러가는 듯 매우 독특한 발음을 하기에 저 같은 사람은 거의 알아듣기 힘듭니다.
이 웨스트교수는 제가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을 다닐 때, 교수 중의 한분이셨고 흑인해방신학자 James Cone과 함께 공동강좌도 열면서 막시즘에 근거한 예리한 사회 분석과 비판논리로 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분입니다. 그는 막스의 이념에 근거한 사회운동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막시스트가 아니라고 부르는데, 그는 신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얼굴은 조그마한데, 흑인들의 눌러 붙는 머리카락을 파마를 해서 크게 들어 올려 아주 커다란 풍선 머리모양에 수염을 기르고 있어 생김새 또한 매우 독특한 분이십니다. 14년 전 Racial Matters (인종문제들)이란 두꺼운 책을 써서 백인주도의 미국사회를 심도 있게 비판하여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필독서가 되었고 뉴스위크지 표지모델로 까지 등장했던 분입니다. 그는 이후 예일대를 거쳐 하버드 대학으로 옮겨 갔다가 클린턴정권 시절 재무부장관을 지냈던 서머스 총장과의 충돌을 빚게 되는데 이 사건이 미국 대학사회에 큰 화제가 되었고, 웨스트교수는 그를 인종 편견을 가진 자로 공개비판하고 프린스톤 대학으로 옮겨갔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그분의 모습이 반가워서 그 토크쇼를 잠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토크쇼 마지막 부분에 사회자가 몇 가지 사회적 이슈를 끄집어내어 간단하게 멘트를 합니다. 단순한 멘트가 아니라 매우 수준 높은 해학을 통해 청중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기 때문에 이 토크쇼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합니다. 몇 몇 유명 정치인들이 도마에 올랐는데, 갑자기 저에게 낯익은 사진 한 장이 뜨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지난 달 국내에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샘물교회 아프칸 선교팀이 인천공항을 출발하면서 찍은 단체사진이었습니다. (이때 언급한 내용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보니까 이 프로그램은 이미 한 달 전에 했던 것이었는데, 청중들의 반응이 좋아 제가 지난주에 본 것은 재방영이었습니다.)
사회자는 21명의 사진을 잠시 보여주면서 남한의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사람들을 개종시키러 갔다가 오히려 피납되어 2명은 살해되고 19명은 정부가 개입하여 2천만불의 보상금을 지불하고 풀려났다고 언급하면서 그런 지역에 가서 선교하더라도 피납되지 않도록 하라고 조롱조로 언급하자 청중들이 껄껄대고 웃는 바람에 그만 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우리 민족은 감성이 강해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해 매우 뜨겁게 달아올랐다가도 그 시간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쉬이 차가와지는 냄비 경향이 있어 아프칸 납치 경험이 남한교회의 세계선교 정책을 크게 변화시킬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간 급격한 성장과 숫자를 자랑하던 남한교회가 세계인들에게 한갓 우스운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제국주의 선교방식]
제가 하늘뜻펴기를 시리즈 형태로 사도행전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흔히 이런 형태로 이어가는 설교 형태를 강해설교라고 합니다만, 저는 많은 목사님들이 선택하는 성서의 문자에 치우친 강해설교가 아닌 이 초대 기독교의 성장의 역사를 운동적 차원 곧 사회와 교회의 역학관계 혹은 교회 내의 그룹간의 역학관계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오늘의 남한 사회 혹은 교회 내의 신앙운동과 연계하는 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하였지만, 사도행전에 기술되어 있는 초기 교회운동 특히 사도 바울로의 전도 혹은 선교 여행을 종교적인 관점 곧 개종운동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그간 서구의 신학이 만들어 낸 매우 잘못된 이해방식입니다. 이는 17,18세기 유럽이 아시아 아프리카 미주대륙을 침범했던 식민주의적인 선교적 관점에서 본 백인 신학인데 남한의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식민지 침략주의를 뒷받침하는 전도나 선교에는 다른 문화나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나 존중이 애당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우월주의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저지른 잘못인데, 이 잘못-이미 서구교회들이 잘못했다고 회개하고 있는 이 잘못-을 다시금 남한교회가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잘못으로 인한 영향 가운데 하나가 남한교회에서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을 배제하도록 한 것입니다. 차이와 차별을 구별하지 못한 채, 우리의 고유함을 서구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보고 이런 잘못을 여전히 다른 가난한 나라에 가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군사적인 힘과 가난과 문화적 수준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부자들이 갖는 문화적 수준의 저급함이 이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우리가 가난하고 힘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 민족의 수 천 년 고유한 것들을 저급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선교를 시작하시면서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라는 커다란 전제를 내세웠지만, 여전히 그 빵의 논리가 우리의 신앙과 문화의 기본 틀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힘이 없고 못사는 것은 신을 잘못 믿기 때문이니 억지로라도 예수를 믿게 해야 한다는 서구의 자본주의 선교 논리가 현재 남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7, 80년대 남한교회의 급성장은 성령에 의한 성장이 아니라 박정희독재의 경제개발정책과 맞물린 기현상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 전국적으로 울려 퍼지는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와 맞물려 우리도 서구사회와 같은 부강한 국가가 되려면 그들이 믿는 신을 믿어야 한다는 논리가 분단과 전쟁으로 공황상태가 된 남한사회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밀물처럼 밀어닥친 것입니다. 저는 북조선의 주체사상도 같은 사회적인 공황상태에서 일어난 일종의 종교 운동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기초한 기독교 신앙 그리고 공산주의에 기초한 주체사상이 얼마나 더 오래 지속될는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지만, 분명 세계 냉전이 말들어낸 잘못된 사회적 병리 공황상태에서 자리를 잡은 이 극단적인 형태가 21세기 새로운 지구촌 지식사회로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여전히 유효하리라고 보는 것은 착각이겠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남북한의 결코 만날 수 없는 서로 다른 사회정치경제 체계가 유지되도록 만드는 제3의 공통이 있는데 그것은 미국이라는 것입니다. 남한은 친미 혹은 숭미적 관계에서 이제는 FTA를 통해 아예 미국의 한 부분이 되고자 함으로 그 기본 체제를 유지하려 하고 있다면 북한은 오히려 같은 미국이지만 이를 적대세력으로 만듦으로 그 통치체제를 유지하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조선은 여전히 미국종속적인 식민지 나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식민이란 사람을 심는다는 말인데, 남한의 지도자는 누가 더 친미적이냐에 달려 있고 북조선은 누가 더 반미적이냐에 달려 있으니 그 정책의 이름이야 동북아경제체제이든 환태평양경제체제이든 상관없이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 국가라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
그러나 현재 세계를 바라본다면 러시아나 중국의 부상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 남미 그리고 중동을 비롯한 지역에서 반미국 혹은 탈미국적인 새로운 국제관계나 경제체제가 계속 모색되고 있고 세계 역사 흐름을 이해할 때 이는 당연시 여겨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우리의 독자적인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분명 자충수입니다. 잘못하면 거대한 타이탄 호가 빙산에 부딪혀 기울듯이 미국이란 나라를 침몰로 몰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침몰을 막기 위한 정세 변화는 이미 미국 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밖에서 보면 그게 그거지만 그래도 소수자의 권익 보호를 자주 말하는 민주당이 이미 국회의 다수당이 되었고 차기 집권이 거의 확실시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게다가 이 민주당의 유력한 두 대선주자 중 하나는 여성인 힐러리상원의원이요 다른 한명은 젊은 흑인인 오바마상원의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소수계로 흔히 말해지는 여성과 흑인 중 한 사람이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된다고 하는 것은 불과 수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조차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미국 젊은이들은 여러 경제적인 혜택에도 불구하고 군 입대를 거부하고 있어 군충원에 어려움이 많고, 거기다가 현역 장교들마저 조기 제대 희망자들이 늘고 있어 부시정권은 국내외로 양곤마에 빠져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이런 탈미국적인 세계적인 추세와는 반대로 노무현정부는 자이툰부대 주둔 연장을 결정하고 한미FTA에 목숨을 걸고 있으며 남한사회의 꺼질 줄 모르는 영어열풍이나 현재 유력하다고 예견되는 차기 대통령은 부시의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고 싶은 숭미 경향의 사람이라는 사실들이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곤혹감을 자아내게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노무현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이 서로 만나 평화선언을 하였지만 아직까지는 서로의 다른 점만 재확인하는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는 현실입니다. 탈미국적인 상황에서 남과 북이 만나 하나 되는, 이 하나도 단순히 한반도 안의 민족이라는 틀이 아닌 세계사적으로 하나 되는 제3의 길은 없는가? 양극단을 달리는 남과 북이 평화적으로 만나 서로 상생할 뿐만 아니라 분쟁과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세계인들에게 평화와 생명 그리고 복지를 향한 대안적인 사회정치경제를 제시할 수는 없을까? 저 또한 많은 분들이 고백하는 바와 같이 개인에게 고난이 가져다주는 삶의 풍성함의 지혜가 있듯이 분명 민족 분단의 고난이 가져다주는 세계사적인 역사의 풍성함의 지혜가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를 찾아내고 키워가는 일은 진정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우리 신앙인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아시는대로 이번 가을학기에 홍근수목사님께서 한신대학원에서 <기독교와 주체사상>이라는 강좌를 부탁받았는데, 그만 5명이 되지 않는 정원미달로 이를 진행할 수 없게 된 것은 단지 개인적인 상실이 아닌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 지도자의 상실로 보고 싶습니다. 이는 어쩌면 오늘의 자본주의적 가치가 지배하는 남한 사회와 교계를 볼 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라고 보지만 이는 우리 교회와 사회의 비극적인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매우 씁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어떻게 하면 보다 세계인류 보편적인 시각을 갖고 평화 정의 사랑 생명이라는 가치를 확립할 수 있는 기독교적인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오늘의 예수께서 분명히 고민하였을 문제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한문덕전도사께서 하늘뜻펴기를 통해 매우 흔쾌하게 정리한 바 있지만, 우리의 신앙의 차원을 개인의 가정사나 개인의 행복 또는 성공의 영역에만 머무르도록 한다면 이는 성서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나 예수의 십자가 정신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폭넓게 변화하는 세계를 바라보고 이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남한의 기독교는 그 생명력을 상실하고 결국 한때 왕성했지만 지금은 그 형태만 제사 형식으로 남아 있는 유교와 같은 꼴이 될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른 종교가 아닌 다른 가치관]
오늘의 사도행전 본문의 말씀은 전통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별로 특이한 구절이 아닙니다. 그저 전통적인 유대교와 새로운 교파 기독교라는 두 종교 사이에 일어나는 자연적인 충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사도바울로가 분명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종교의 본래 됨을 회복하고자 했던 혁신운동으로 이해한다면 이 충돌은 종교 간의 충돌이 아닌 세계관의 차이로 인한 가치관의 충돌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바울로와 바르나바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신도가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구별하는 관점은 여럿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얼굴의 모양이나 피부의 색깔, 옷 입는 모습과 말의 어조가 다른 것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할례나 정결법과 같은 생활 관습을 갖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구별로 끝나지 않고 차별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사람들 사이의 이 태생적인 구별을 구원의 여부를 결정짓는 요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구원의 아성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아성의 벽을 허물라고 선언하셨고 이것들은 인간세계에 기초한 이런 차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오히려 당시의 목사나 신학자들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여겼던 창녀들과 세리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는 파격적인 선언을 하여 버렸습니다. 바울은 이런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해방선언에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하다가 그만 거기에 참 진리를 보고 이 진리 전파를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유다인이란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의 문을 점령하고 있는 기성세대입니다. 자기들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조상대대로 내여 오는 종교적 전통을 고수하며 거기에만이 오직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보는 전통중시의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이방인들이란 그런 종교적 전통과는 무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르침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린 가르침 그리고 그 파격이 좋아 교회의 일원이 된 새로운 세대들입니다. 힘과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위로를 얻을 길이 없었지만, 교회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옛 가르침을 변화된 세상에서 새롭게 이해하려는 세대입니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오늘 본문은 전합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복음의 메시지는 화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사랑의 포로가 된 한 남녀가 수십 년을 함께 몸을 섞으며 살아도 하나 되기 쉽지 않고 그 주어진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유다인과 이방인이 하나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복음 안에서 하나 된다고 하는 것은 미래를 향한 삶의 가치 추구에서 하나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의 장점을 통해 하나의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협력과 공존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은 쉽지만 행동에 있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1절에서 <수많은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신도가 되었다.>고 말하자마자 곧이어 2절에서는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는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믿는 형제들에게 악의를 품게 하였다.> 그리고 결국은 바울로와 바르나바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고니온 도시 전체가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지게 되고 폭력이 일어나는 상황이 되자 그 도시를 떠나게 됩니다.
[그들이 거부했던 것은?]
그렇다면 왜 바울로를 반대하는 유다인들은 왜 예수를 거부했고 그리고 그들은 뭐라고 선동했기에 도시사람들은 여기에 동조하였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이고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을 박해했던 바로 그 이유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민중을 현혹하고 세상을 소란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전통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현재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혁명분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세상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질서란 힘의 논리로 세상을 지배하는 자기들만의 세상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질서란 약육강식의 질서를 말합니다. 귀족의 딸로 태어난 사람은 귀족의 아내로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평생 노예의 아버지로 마쳐지는 그런 질곡의 질서를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하늘의 질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불평등의 세상 질서를 깨시려다가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열 시간 일했으니 열 개를 갖고 가고 한 시간 일했으니 한 개를 가져가는 자본주의적 방식이 아닌 열 시간 일한 강자나 한 시간 일한 약자 모두 생존에 필요한 다섯을 똑같이 나눠 갖는 하늘질서를 정당한 질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열 시간 일할 수 있는 강자들이 이를 쉽사리 용납할 리가 없지요. 세상 지배자들이란 자기들의 기득을 방해하는 세력을 언제나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자신들의 권한을 이용하여 법의 이름으로 처단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힘의 논리는 단지 미국이 반테러의 이름으로 이라크를 침공하는 국제사회뿐만 아니라 사학법이니 국가보안법이니 교육법과 같은 논쟁의 바탕에도 이런 세상질서와 하늘질서간의 충돌이 있습니다. 가진 쪽은 가진 것을 지키고 이를 바탕으로 더 늘리려 하고 있고, 못 가진 부모들은 자신들의 불운을 자식들에까지 대물림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에게 하늘이 부여한 자질을 개발할 수 있는 공평한 교육과 경쟁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인데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른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의 대선경쟁이 국민소득 3만불이니 4만불이니 하는 그림의 떡 크기 정하기 토토 게임에 너무 식상해있고 선량한 국민들을 대상으로 세계경제대국 7위권이니 5위권이니 하는 숫자의 장난질에 너무 실망하고 있습니다.
[카인과 아벨로 대변되는 두 가치]
카인의 제사는 버림받고 아벨이 제사는 받아들여졌고 이로 인해 카인이 형제 아벨을 살해했다는 창세기의 설화는 신학적으로 답변하기 힘든 많은 물음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목사님들이 이 본문을 얘기할 때 첫째는 아벨에는 맏배라는 곧 첫 번째를 드렸다는 말이 있지만, 카인에게는 그런 말이 없으니 카인에게는 정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신앙의 헌신을 강조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간혹 가인의 농사는 곧 가나안의 바알 신앙을 대변하는 것이고 아벨의 양을 치는 일은 이스라엘의 야훼신앙이라는 문화에 기초한 종교의 대비로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 설화를 이렇게 종교문화적으로만 해석해버리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는 모두 농경문화이니 이들은 모두 카인의 후예가 되고 맙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카인의 신앙은 가나안의 물질풍요에 기초한 가진 것에 안주하는 정착신앙으로 아벨의 신앙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떠돌아다니는 역사 신앙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타당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고자 합니다. 창세기의 대부분의 문서들이 솔로몬왕의 통치 이후 그의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남과 북의 흩어진 얘기들을 모아 편집하였고 이후 이 초기 문서와 설화들이 바벨론 포로기 이후 자신들의 왕국 멸망의 아픔의 역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재해석 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카인의 아벨의 형제 살해 이야기는 단순한 범죄이야기나 혹은 문화적 차이 그리고 정착과 유목신앙의 대비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으로 왕국의 멸망을 경험한 그들은 자신들을 아벨의 죽음에 동일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카인은 침략자 바벨론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예루살렘 멸망을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결과가 아닌 오히려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의 질투에 의한 폭력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제국 바빌론을 향해 선언합니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 카인은 오늘날의 자본과 힘과 권력으로 대변되는 제국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누구와 연대할 것인가?]
작년에 번역된 책입니다만, <오늘의 세계적 가치>란 책이 있습니다. 영어 제목은 Global Values 101: A Short Course로 본래 하버드대학 종교학과의 한 세미나 강좌 제목이었습니다. 이 강좌에서는 대안적 가치를 가졌다고 보는 사람들 곧 일용직 노동자로부터 백만장자, 유명교수에서 기업최고 경영자와 수녀를 강사로 초청해서 주로 질의응답을 통해 강의를 진행했는데 얼마나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는지 매주 600명 이상의 학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강좌 내용을 책으로 출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좌가 시작하게 된 동기가 매우 이채롭습니다.
신자유주의가 극성을 부린 1990년대 내내 하버드대학은 오늘 한국의 기업들과 대학들이 흔히 하는 방식대로 일거리를 외부 용역으로 돌려 값싼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했습니다. 잔디를 깎거나 청소를 하거나 식당에서 잡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임금을 주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일하고도 밤에는 머물만한 방 한 칸 마련하기 힘든 상황으로 몰린 것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이 노동자들을 위해 학교당국에 호소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2001년 4월 학생 50명이 총장실로 들어가 점거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잡역부와 조리사들에게 적절한 생활임금이 지급될 때까지 농성을 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총장실 앞에서는 매일 시위가 벌어졌고 학교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창문을 통해 먹을 것을 넣어주었고, 밖에는 또 다른 학생 수십 명이 만일을 대비해서 텐트를 쳤습니다. 3주 동안 계속되자 언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거액의 퇴직금을 보장받은 대학의 낙하산 관리자들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불운한 대학의 잡역부들의 격차를 다룬 신문 기사들은 대학의 권력자들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결국 21일 만에 노동자들의 생활임금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고 노동자, 학생, 교원들 간의 연합세력이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이때의 총장이 공교롭게도 제가 처음 언급했던 코넬 웨스트 흑인교수와 충돌을 빚었던 로런스 서머스총장이었습니다.
책 서문에서 저자는 하바드 대학은 억만장자들에게서만 기부를 받는 것이 아니다라며 바버라 에린라이크라는 작가의 글을 인용합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우리 사회의 주요한 자선가들이다. 그들은 남의 아이들을 돌보느라 제 아이들을 돌보지 않으며, 다른 집들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주느라 수준 이하의 집에서 살고, 인플레이션을 낮추고 주식을 높여주려고 궁핍을 감수한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익명의 기부자요 이름 없는 후원자들이다.’
이 강좌는 단지 어떤 지식만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세계의 폭력과 불의에 맞설 필요성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대안적 가치를 찾아 나서도록 인도합니다. 저는 예수님 또한 같은 고민 속에서 대안적 가치운동으로 갈릴래아에서 어부들과 세리들을 데리고 하느님 나라 복음 운동을 시작하셨다고 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이 행한 복음운동과 사도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목숨을 걸고 행한 선교활동이란 단순한 개종이나 포교활동이 아닌 새로운 삶의 가치 활동이었다고 봅니다. 이 가치 활동은 언제나 권력자들과 부자들에게는 위험을 느끼게 하는 활동이지요. 나는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시각에서 이해가 됩니다.
이 세상은 두 개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세상입니다. 카인으로 대표되는 힘과 권력에 의지하여 남을 밟고 일어서는 경쟁의 세상을 쫓아 살다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인지? 아니면 설사 아벨과 같이 살해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구원의 팔을 바라보며 평등과 화해의 삶을 추구해 나갈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끝으로 <오늘의 세계적 가치>란 책에 나온 얘기를 소개합니다. 유럽지역에서 외교관으로 평화활동을 하며 하버드대학의 교수로 있는 스와니 헌트가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준 얘기입니다. [소피아라는 나이든 여성이 크로아티아의 작은 마을에 살았습니다. 매일 그녀가 하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 정오에 교회에 가서 벽에 묶여 있는 끈을 풀고 그걸 잡아당겨 첨탑 위의 종을 울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자 세르비아 군이 탱크를 타고 한 마을씩 차례로 밀고 들어와 결국은 이 여성이 살던 마을 전체를 폭격했습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 건물은 부서졌고 종탑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은 매일 정오 교회 마당에서 이 여인을 볼 수 있었습니다. 건물의 파편들이 여기저기 쪼개져 흩어져 있고 그 파편더미 가운데 종이 바닥에 쓰러져 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여든 살의 여인 이 소피아는 몸을 굽혀 마디가 굵은 손으로 종의 추를 잡고는 쓰러진 종을 쳤습니다. 댕! 댕! 그 소리는 쉽사리 땅에 파묻혀 버리지만 그 소피아는 제 마음 속에 계속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길 바랍니다. 당신이 어떤 어디에서 일하든, 어떤 환경에서 살든, 당신의 일은 쓰러진 종의 추를 잡고 평화의 종소리를 울리는 것입니다.] (234쪽 문장바꿈)
어린왕자의 생 텍쥐베리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소피아와 같이 평화를 향한 꿈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 때문에 세상이 아름다워지기를 꿈꾼다면 지나친 욕심일까요?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창 4:1-8절; 행 14장 1-7절
[부끄러웠던 순간]
지난 주 휴가 차 미국 LA에 계신 부모님을 방문하면서 늦은 밤에 TV 채널을 돌리다가 Bill Maher가 진행하는 토크쇼를 보게 되었습니다. 연예인들의 주변소리나 듣는 토크쇼가 아닌 사회의 예민한 문제들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프로그램입니다. 부시정권의 이라크 침공 이후 미국 내에 비판적인 세력들이 크게 자라면서 현재 젊은이들과 진보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인기가 있는 토크쇼입니다. 그날 밤 제가 본 토크쇼에 초청받은 인사가 둘인데, 한 명은 Mos Def라는 랩 가수이자 유명한 흑인문화운동가였고 다른 한명은 Cornell West라는 흑인학자였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Mos Def의 영어발음은 흑인재즈풍의 구슬이 굴러가는 듯 매우 독특한 발음을 하기에 저 같은 사람은 거의 알아듣기 힘듭니다.
이 웨스트교수는 제가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을 다닐 때, 교수 중의 한분이셨고 흑인해방신학자 James Cone과 함께 공동강좌도 열면서 막시즘에 근거한 예리한 사회 분석과 비판논리로 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분입니다. 그는 막스의 이념에 근거한 사회운동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막시스트가 아니라고 부르는데, 그는 신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얼굴은 조그마한데, 흑인들의 눌러 붙는 머리카락을 파마를 해서 크게 들어 올려 아주 커다란 풍선 머리모양에 수염을 기르고 있어 생김새 또한 매우 독특한 분이십니다. 14년 전 Racial Matters (인종문제들)이란 두꺼운 책을 써서 백인주도의 미국사회를 심도 있게 비판하여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필독서가 되었고 뉴스위크지 표지모델로 까지 등장했던 분입니다. 그는 이후 예일대를 거쳐 하버드 대학으로 옮겨 갔다가 클린턴정권 시절 재무부장관을 지냈던 서머스 총장과의 충돌을 빚게 되는데 이 사건이 미국 대학사회에 큰 화제가 되었고, 웨스트교수는 그를 인종 편견을 가진 자로 공개비판하고 프린스톤 대학으로 옮겨갔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그분의 모습이 반가워서 그 토크쇼를 잠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토크쇼 마지막 부분에 사회자가 몇 가지 사회적 이슈를 끄집어내어 간단하게 멘트를 합니다. 단순한 멘트가 아니라 매우 수준 높은 해학을 통해 청중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기 때문에 이 토크쇼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합니다. 몇 몇 유명 정치인들이 도마에 올랐는데, 갑자기 저에게 낯익은 사진 한 장이 뜨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지난 달 국내에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샘물교회 아프칸 선교팀이 인천공항을 출발하면서 찍은 단체사진이었습니다. (이때 언급한 내용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보니까 이 프로그램은 이미 한 달 전에 했던 것이었는데, 청중들의 반응이 좋아 제가 지난주에 본 것은 재방영이었습니다.)
사회자는 21명의 사진을 잠시 보여주면서 남한의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사람들을 개종시키러 갔다가 오히려 피납되어 2명은 살해되고 19명은 정부가 개입하여 2천만불의 보상금을 지불하고 풀려났다고 언급하면서 그런 지역에 가서 선교하더라도 피납되지 않도록 하라고 조롱조로 언급하자 청중들이 껄껄대고 웃는 바람에 그만 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우리 민족은 감성이 강해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해 매우 뜨겁게 달아올랐다가도 그 시간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쉬이 차가와지는 냄비 경향이 있어 아프칸 납치 경험이 남한교회의 세계선교 정책을 크게 변화시킬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간 급격한 성장과 숫자를 자랑하던 남한교회가 세계인들에게 한갓 우스운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제국주의 선교방식]
제가 하늘뜻펴기를 시리즈 형태로 사도행전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흔히 이런 형태로 이어가는 설교 형태를 강해설교라고 합니다만, 저는 많은 목사님들이 선택하는 성서의 문자에 치우친 강해설교가 아닌 이 초대 기독교의 성장의 역사를 운동적 차원 곧 사회와 교회의 역학관계 혹은 교회 내의 그룹간의 역학관계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오늘의 남한 사회 혹은 교회 내의 신앙운동과 연계하는 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하였지만, 사도행전에 기술되어 있는 초기 교회운동 특히 사도 바울로의 전도 혹은 선교 여행을 종교적인 관점 곧 개종운동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그간 서구의 신학이 만들어 낸 매우 잘못된 이해방식입니다. 이는 17,18세기 유럽이 아시아 아프리카 미주대륙을 침범했던 식민주의적인 선교적 관점에서 본 백인 신학인데 남한의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식민지 침략주의를 뒷받침하는 전도나 선교에는 다른 문화나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나 존중이 애당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우월주의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저지른 잘못인데, 이 잘못-이미 서구교회들이 잘못했다고 회개하고 있는 이 잘못-을 다시금 남한교회가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잘못으로 인한 영향 가운데 하나가 남한교회에서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을 배제하도록 한 것입니다. 차이와 차별을 구별하지 못한 채, 우리의 고유함을 서구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보고 이런 잘못을 여전히 다른 가난한 나라에 가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군사적인 힘과 가난과 문화적 수준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부자들이 갖는 문화적 수준의 저급함이 이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우리가 가난하고 힘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 민족의 수 천 년 고유한 것들을 저급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선교를 시작하시면서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라는 커다란 전제를 내세웠지만, 여전히 그 빵의 논리가 우리의 신앙과 문화의 기본 틀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힘이 없고 못사는 것은 신을 잘못 믿기 때문이니 억지로라도 예수를 믿게 해야 한다는 서구의 자본주의 선교 논리가 현재 남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7, 80년대 남한교회의 급성장은 성령에 의한 성장이 아니라 박정희독재의 경제개발정책과 맞물린 기현상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 전국적으로 울려 퍼지는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와 맞물려 우리도 서구사회와 같은 부강한 국가가 되려면 그들이 믿는 신을 믿어야 한다는 논리가 분단과 전쟁으로 공황상태가 된 남한사회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밀물처럼 밀어닥친 것입니다. 저는 북조선의 주체사상도 같은 사회적인 공황상태에서 일어난 일종의 종교 운동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기초한 기독교 신앙 그리고 공산주의에 기초한 주체사상이 얼마나 더 오래 지속될는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지만, 분명 세계 냉전이 말들어낸 잘못된 사회적 병리 공황상태에서 자리를 잡은 이 극단적인 형태가 21세기 새로운 지구촌 지식사회로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여전히 유효하리라고 보는 것은 착각이겠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남북한의 결코 만날 수 없는 서로 다른 사회정치경제 체계가 유지되도록 만드는 제3의 공통이 있는데 그것은 미국이라는 것입니다. 남한은 친미 혹은 숭미적 관계에서 이제는 FTA를 통해 아예 미국의 한 부분이 되고자 함으로 그 기본 체제를 유지하려 하고 있다면 북한은 오히려 같은 미국이지만 이를 적대세력으로 만듦으로 그 통치체제를 유지하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조선은 여전히 미국종속적인 식민지 나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식민이란 사람을 심는다는 말인데, 남한의 지도자는 누가 더 친미적이냐에 달려 있고 북조선은 누가 더 반미적이냐에 달려 있으니 그 정책의 이름이야 동북아경제체제이든 환태평양경제체제이든 상관없이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 국가라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
그러나 현재 세계를 바라본다면 러시아나 중국의 부상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 남미 그리고 중동을 비롯한 지역에서 반미국 혹은 탈미국적인 새로운 국제관계나 경제체제가 계속 모색되고 있고 세계 역사 흐름을 이해할 때 이는 당연시 여겨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우리의 독자적인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분명 자충수입니다. 잘못하면 거대한 타이탄 호가 빙산에 부딪혀 기울듯이 미국이란 나라를 침몰로 몰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침몰을 막기 위한 정세 변화는 이미 미국 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밖에서 보면 그게 그거지만 그래도 소수자의 권익 보호를 자주 말하는 민주당이 이미 국회의 다수당이 되었고 차기 집권이 거의 확실시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게다가 이 민주당의 유력한 두 대선주자 중 하나는 여성인 힐러리상원의원이요 다른 한명은 젊은 흑인인 오바마상원의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소수계로 흔히 말해지는 여성과 흑인 중 한 사람이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된다고 하는 것은 불과 수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조차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미국 젊은이들은 여러 경제적인 혜택에도 불구하고 군 입대를 거부하고 있어 군충원에 어려움이 많고, 거기다가 현역 장교들마저 조기 제대 희망자들이 늘고 있어 부시정권은 국내외로 양곤마에 빠져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이런 탈미국적인 세계적인 추세와는 반대로 노무현정부는 자이툰부대 주둔 연장을 결정하고 한미FTA에 목숨을 걸고 있으며 남한사회의 꺼질 줄 모르는 영어열풍이나 현재 유력하다고 예견되는 차기 대통령은 부시의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고 싶은 숭미 경향의 사람이라는 사실들이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곤혹감을 자아내게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노무현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이 서로 만나 평화선언을 하였지만 아직까지는 서로의 다른 점만 재확인하는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는 현실입니다. 탈미국적인 상황에서 남과 북이 만나 하나 되는, 이 하나도 단순히 한반도 안의 민족이라는 틀이 아닌 세계사적으로 하나 되는 제3의 길은 없는가? 양극단을 달리는 남과 북이 평화적으로 만나 서로 상생할 뿐만 아니라 분쟁과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세계인들에게 평화와 생명 그리고 복지를 향한 대안적인 사회정치경제를 제시할 수는 없을까? 저 또한 많은 분들이 고백하는 바와 같이 개인에게 고난이 가져다주는 삶의 풍성함의 지혜가 있듯이 분명 민족 분단의 고난이 가져다주는 세계사적인 역사의 풍성함의 지혜가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를 찾아내고 키워가는 일은 진정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우리 신앙인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아시는대로 이번 가을학기에 홍근수목사님께서 한신대학원에서 <기독교와 주체사상>이라는 강좌를 부탁받았는데, 그만 5명이 되지 않는 정원미달로 이를 진행할 수 없게 된 것은 단지 개인적인 상실이 아닌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 지도자의 상실로 보고 싶습니다. 이는 어쩌면 오늘의 자본주의적 가치가 지배하는 남한 사회와 교계를 볼 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라고 보지만 이는 우리 교회와 사회의 비극적인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매우 씁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어떻게 하면 보다 세계인류 보편적인 시각을 갖고 평화 정의 사랑 생명이라는 가치를 확립할 수 있는 기독교적인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오늘의 예수께서 분명히 고민하였을 문제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한문덕전도사께서 하늘뜻펴기를 통해 매우 흔쾌하게 정리한 바 있지만, 우리의 신앙의 차원을 개인의 가정사나 개인의 행복 또는 성공의 영역에만 머무르도록 한다면 이는 성서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나 예수의 십자가 정신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폭넓게 변화하는 세계를 바라보고 이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남한의 기독교는 그 생명력을 상실하고 결국 한때 왕성했지만 지금은 그 형태만 제사 형식으로 남아 있는 유교와 같은 꼴이 될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른 종교가 아닌 다른 가치관]
오늘의 사도행전 본문의 말씀은 전통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별로 특이한 구절이 아닙니다. 그저 전통적인 유대교와 새로운 교파 기독교라는 두 종교 사이에 일어나는 자연적인 충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사도바울로가 분명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종교의 본래 됨을 회복하고자 했던 혁신운동으로 이해한다면 이 충돌은 종교 간의 충돌이 아닌 세계관의 차이로 인한 가치관의 충돌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바울로와 바르나바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신도가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구별하는 관점은 여럿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얼굴의 모양이나 피부의 색깔, 옷 입는 모습과 말의 어조가 다른 것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할례나 정결법과 같은 생활 관습을 갖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구별로 끝나지 않고 차별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사람들 사이의 이 태생적인 구별을 구원의 여부를 결정짓는 요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구원의 아성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아성의 벽을 허물라고 선언하셨고 이것들은 인간세계에 기초한 이런 차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오히려 당시의 목사나 신학자들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여겼던 창녀들과 세리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는 파격적인 선언을 하여 버렸습니다. 바울은 이런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해방선언에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하다가 그만 거기에 참 진리를 보고 이 진리 전파를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유다인이란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의 문을 점령하고 있는 기성세대입니다. 자기들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조상대대로 내여 오는 종교적 전통을 고수하며 거기에만이 오직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보는 전통중시의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이방인들이란 그런 종교적 전통과는 무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르침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린 가르침 그리고 그 파격이 좋아 교회의 일원이 된 새로운 세대들입니다. 힘과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위로를 얻을 길이 없었지만, 교회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옛 가르침을 변화된 세상에서 새롭게 이해하려는 세대입니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오늘 본문은 전합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복음의 메시지는 화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사랑의 포로가 된 한 남녀가 수십 년을 함께 몸을 섞으며 살아도 하나 되기 쉽지 않고 그 주어진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유다인과 이방인이 하나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복음 안에서 하나 된다고 하는 것은 미래를 향한 삶의 가치 추구에서 하나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의 장점을 통해 하나의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협력과 공존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은 쉽지만 행동에 있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1절에서 <수많은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신도가 되었다.>고 말하자마자 곧이어 2절에서는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는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믿는 형제들에게 악의를 품게 하였다.> 그리고 결국은 바울로와 바르나바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고니온 도시 전체가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지게 되고 폭력이 일어나는 상황이 되자 그 도시를 떠나게 됩니다.
[그들이 거부했던 것은?]
그렇다면 왜 바울로를 반대하는 유다인들은 왜 예수를 거부했고 그리고 그들은 뭐라고 선동했기에 도시사람들은 여기에 동조하였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이고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을 박해했던 바로 그 이유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민중을 현혹하고 세상을 소란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전통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현재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혁명분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세상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질서란 힘의 논리로 세상을 지배하는 자기들만의 세상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질서란 약육강식의 질서를 말합니다. 귀족의 딸로 태어난 사람은 귀족의 아내로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평생 노예의 아버지로 마쳐지는 그런 질곡의 질서를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하늘의 질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불평등의 세상 질서를 깨시려다가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열 시간 일했으니 열 개를 갖고 가고 한 시간 일했으니 한 개를 가져가는 자본주의적 방식이 아닌 열 시간 일한 강자나 한 시간 일한 약자 모두 생존에 필요한 다섯을 똑같이 나눠 갖는 하늘질서를 정당한 질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열 시간 일할 수 있는 강자들이 이를 쉽사리 용납할 리가 없지요. 세상 지배자들이란 자기들의 기득을 방해하는 세력을 언제나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자신들의 권한을 이용하여 법의 이름으로 처단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힘의 논리는 단지 미국이 반테러의 이름으로 이라크를 침공하는 국제사회뿐만 아니라 사학법이니 국가보안법이니 교육법과 같은 논쟁의 바탕에도 이런 세상질서와 하늘질서간의 충돌이 있습니다. 가진 쪽은 가진 것을 지키고 이를 바탕으로 더 늘리려 하고 있고, 못 가진 부모들은 자신들의 불운을 자식들에까지 대물림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에게 하늘이 부여한 자질을 개발할 수 있는 공평한 교육과 경쟁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인데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른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의 대선경쟁이 국민소득 3만불이니 4만불이니 하는 그림의 떡 크기 정하기 토토 게임에 너무 식상해있고 선량한 국민들을 대상으로 세계경제대국 7위권이니 5위권이니 하는 숫자의 장난질에 너무 실망하고 있습니다.
[카인과 아벨로 대변되는 두 가치]
카인의 제사는 버림받고 아벨이 제사는 받아들여졌고 이로 인해 카인이 형제 아벨을 살해했다는 창세기의 설화는 신학적으로 답변하기 힘든 많은 물음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목사님들이 이 본문을 얘기할 때 첫째는 아벨에는 맏배라는 곧 첫 번째를 드렸다는 말이 있지만, 카인에게는 그런 말이 없으니 카인에게는 정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신앙의 헌신을 강조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간혹 가인의 농사는 곧 가나안의 바알 신앙을 대변하는 것이고 아벨의 양을 치는 일은 이스라엘의 야훼신앙이라는 문화에 기초한 종교의 대비로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 설화를 이렇게 종교문화적으로만 해석해버리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는 모두 농경문화이니 이들은 모두 카인의 후예가 되고 맙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카인의 신앙은 가나안의 물질풍요에 기초한 가진 것에 안주하는 정착신앙으로 아벨의 신앙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떠돌아다니는 역사 신앙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타당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고자 합니다. 창세기의 대부분의 문서들이 솔로몬왕의 통치 이후 그의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남과 북의 흩어진 얘기들을 모아 편집하였고 이후 이 초기 문서와 설화들이 바벨론 포로기 이후 자신들의 왕국 멸망의 아픔의 역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재해석 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카인의 아벨의 형제 살해 이야기는 단순한 범죄이야기나 혹은 문화적 차이 그리고 정착과 유목신앙의 대비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으로 왕국의 멸망을 경험한 그들은 자신들을 아벨의 죽음에 동일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카인은 침략자 바벨론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예루살렘 멸망을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결과가 아닌 오히려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의 질투에 의한 폭력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제국 바빌론을 향해 선언합니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 카인은 오늘날의 자본과 힘과 권력으로 대변되는 제국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누구와 연대할 것인가?]
작년에 번역된 책입니다만, <오늘의 세계적 가치>란 책이 있습니다. 영어 제목은 Global Values 101: A Short Course로 본래 하버드대학 종교학과의 한 세미나 강좌 제목이었습니다. 이 강좌에서는 대안적 가치를 가졌다고 보는 사람들 곧 일용직 노동자로부터 백만장자, 유명교수에서 기업최고 경영자와 수녀를 강사로 초청해서 주로 질의응답을 통해 강의를 진행했는데 얼마나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는지 매주 600명 이상의 학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강좌 내용을 책으로 출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좌가 시작하게 된 동기가 매우 이채롭습니다.
신자유주의가 극성을 부린 1990년대 내내 하버드대학은 오늘 한국의 기업들과 대학들이 흔히 하는 방식대로 일거리를 외부 용역으로 돌려 값싼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했습니다. 잔디를 깎거나 청소를 하거나 식당에서 잡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임금을 주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일하고도 밤에는 머물만한 방 한 칸 마련하기 힘든 상황으로 몰린 것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이 노동자들을 위해 학교당국에 호소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2001년 4월 학생 50명이 총장실로 들어가 점거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잡역부와 조리사들에게 적절한 생활임금이 지급될 때까지 농성을 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총장실 앞에서는 매일 시위가 벌어졌고 학교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창문을 통해 먹을 것을 넣어주었고, 밖에는 또 다른 학생 수십 명이 만일을 대비해서 텐트를 쳤습니다. 3주 동안 계속되자 언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거액의 퇴직금을 보장받은 대학의 낙하산 관리자들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불운한 대학의 잡역부들의 격차를 다룬 신문 기사들은 대학의 권력자들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결국 21일 만에 노동자들의 생활임금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고 노동자, 학생, 교원들 간의 연합세력이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이때의 총장이 공교롭게도 제가 처음 언급했던 코넬 웨스트 흑인교수와 충돌을 빚었던 로런스 서머스총장이었습니다.
책 서문에서 저자는 하바드 대학은 억만장자들에게서만 기부를 받는 것이 아니다라며 바버라 에린라이크라는 작가의 글을 인용합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우리 사회의 주요한 자선가들이다. 그들은 남의 아이들을 돌보느라 제 아이들을 돌보지 않으며, 다른 집들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주느라 수준 이하의 집에서 살고, 인플레이션을 낮추고 주식을 높여주려고 궁핍을 감수한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익명의 기부자요 이름 없는 후원자들이다.’
이 강좌는 단지 어떤 지식만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세계의 폭력과 불의에 맞설 필요성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대안적 가치를 찾아 나서도록 인도합니다. 저는 예수님 또한 같은 고민 속에서 대안적 가치운동으로 갈릴래아에서 어부들과 세리들을 데리고 하느님 나라 복음 운동을 시작하셨다고 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이 행한 복음운동과 사도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목숨을 걸고 행한 선교활동이란 단순한 개종이나 포교활동이 아닌 새로운 삶의 가치 활동이었다고 봅니다. 이 가치 활동은 언제나 권력자들과 부자들에게는 위험을 느끼게 하는 활동이지요. 나는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시각에서 이해가 됩니다.
이 세상은 두 개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세상입니다. 카인으로 대표되는 힘과 권력에 의지하여 남을 밟고 일어서는 경쟁의 세상을 쫓아 살다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인지? 아니면 설사 아벨과 같이 살해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구원의 팔을 바라보며 평등과 화해의 삶을 추구해 나갈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끝으로 <오늘의 세계적 가치>란 책에 나온 얘기를 소개합니다. 유럽지역에서 외교관으로 평화활동을 하며 하버드대학의 교수로 있는 스와니 헌트가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준 얘기입니다. [소피아라는 나이든 여성이 크로아티아의 작은 마을에 살았습니다. 매일 그녀가 하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 정오에 교회에 가서 벽에 묶여 있는 끈을 풀고 그걸 잡아당겨 첨탑 위의 종을 울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자 세르비아 군이 탱크를 타고 한 마을씩 차례로 밀고 들어와 결국은 이 여성이 살던 마을 전체를 폭격했습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 건물은 부서졌고 종탑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은 매일 정오 교회 마당에서 이 여인을 볼 수 있었습니다. 건물의 파편들이 여기저기 쪼개져 흩어져 있고 그 파편더미 가운데 종이 바닥에 쓰러져 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여든 살의 여인 이 소피아는 몸을 굽혀 마디가 굵은 손으로 종의 추를 잡고는 쓰러진 종을 쳤습니다. 댕! 댕! 그 소리는 쉽사리 땅에 파묻혀 버리지만 그 소피아는 제 마음 속에 계속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길 바랍니다. 당신이 어떤 어디에서 일하든, 어떤 환경에서 살든, 당신의 일은 쓰러진 종의 추를 잡고 평화의 종소리를 울리는 것입니다.] (234쪽 문장바꿈)
어린왕자의 생 텍쥐베리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소피아와 같이 평화를 향한 꿈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 때문에 세상이 아름다워지기를 꿈꾼다면 지나친 욕심일까요?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