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역사(6) 위계를 넘어
시 78:1-8; 행 10:1-16

[우리의 기도]

오늘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평화의 주님께서 아프카니스탄 가즈니주 어느 곳에 인질로 붙잡혀 있는 22명의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함께 하시어 저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피살당한 배경호목사님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분당샘물교회에 하느님의 깊으신 위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하루 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저들에게 주어진 인생의 가능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픔을 당하는 당사자들에게 있어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시간이지만,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이번의 경험은 그간의 지나치게 일방적인 한국교회의 선교 방식에 대하여 깊은 반성과 성찰을 하도록 하는 시간도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흑백사고를 주의하자]

그리고 피납자 가족들이 국민들에게 부탁한 바와 같이 우리가 이번 사건만을 통해 탈레반을 무조건 악마시 여기는 흑백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탈레반은 누구입니까? ‘구도자’ ‘학생’이라는 뜻을 가진 이들은 이슬람의 원리주의자들로 알라의 뜻을 이 땅에 그대로 실현하겠다는 신정정치주의자들입니다. 이슬람 학생조직으로 출발한 강경 수니파 무장 정치세력입니다. 미국의 부시정권이 911 테러를 일으킨 빈라덴의 알케이다의 배후세력으로 보고 침략하기 전까지는 아프카니스탄의 세계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정부였습니다. 탈레반은 집권 과정에선 오랜 내전에 시달린 아프간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집권 이후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앞세운 공포정치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여성들의 사회 활동을 일절 금지시켰고 범죄자에 대해서는 신체 절단형과 공개처형을 실시했습니다. 특히 이슬람 율법의 `우상금지'를 내세워 바미얀 석불 등 인류 문화유산을 파괴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탈레반은 현재의 아프카니스탄 정부를 미국의 괴뢰정부로 보고 있고 자신들의 잃었던 정권과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독립군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역사가 있고 독립운동의 역사가 있기에 저들의 입장과 처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동의하에 우리나라를 식민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안중근의사와 같이 오늘날 우리가 추앙하는 독립 운동가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던 것을 기억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탈레반이 과거 무력 공포정치를 통해 국민의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억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미국편에 서서 그들을 단지 악의 화신으로 보거나 테러리스트들이라고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정당한 태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현재는 자신들의 생명에 전혀 해가 되지 않는 우리 국민들을 인질로 잡고 한 사람을 무참히 살해하는 악을 행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 하나만을 갖고 저들을 악마로 우리는 천사로 보는 흑백사고는 버려야 합니다. 단지 흑백사고를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원수를 사랑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원수를 악마로 보고 있는 한 그를 결코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원수와 나는 별로 다를 바가 없는 하느님 앞에서는 같은 죄인이라고 하는 생각을 품을 때에야 가능합니다.

[원수사랑은 못한다 하더라도]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예수님의 원수 사랑을 보다 쉽게 풀이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운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그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부에도, 우리들 속에 살고 있는 것과 똑같은 영혼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때도 ‘그래, 세상에는 온갖 사람이 다 있게 마련이니까 참아야지’ 하고 생각하라. 만일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드러낸다면, 첫째로 우리는 옳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며, 둘째로 그들을 결사적인 싸움으로 유인하게 된다. 그가 어떤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신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는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우리와 싸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현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면 좀 더 잘해 줄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도 선의로 대하며, 그에게 다른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쇼펜하우어,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 82쪽)

저는 여기서 원수 사랑까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남을 바꾸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다운 선교는 남의 생각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사랑하기 위한 신앙의 행동이라는 것 그래서 그를 통해 나의 생각이 바꿔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목사는 하느님 사랑, 원수 사랑을 외치니까 부부싸움도 안하는 줄 알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전 가끔 했습니다. 지금 결혼생활 26년째지만 한 20년쯤 지나면서부터 늦어서야 아내를 내 생각에 맞추어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차라리 바꾸려면 나를 바꾸는 일이 더 쉽고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깨닫기는 깨달았는데 실천은 잘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엄격히 말하면 예수님도 원수 사랑을 말씀하셨지만,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을 비난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도 100% 실천은 하신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도 갖게 되고, ‘내가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나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 혹은 ‘ 나로 인해 가족끼리 서로 다투고 갈라서게 된다.’라는 말씀을 들으면 원수 사랑과는 상치되는 말이라 고개가 갸우뚱거리게 됩니다.

사랑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가르침은 바울로가 말한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워 사랑장이라고 부릅니다. 언제 읽어보아도 마음에 깊은 감동을 일으키는 놀라운 시입니다. 이 시를 읽다 보면 바울로야 말로 진정 사랑의 사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러나 바울로의 다른 서신을 보면 그도 가끔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분노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고린도교회가 베드로파와 바울로파와 아볼로파와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서로 싸운다는 얘기를 듣고 그는 너무 화가 나서 채찍을 들고 가서 그들을 훈계하고 싶다는 표현도 하고 있습니다.(고전 4:21)

[경계와 위계를 넘어]

오늘 사도행전 본문의 말씀, 베드로와 고르넬리오의 만남에 대해서는 한 2년 전에 ‘경계를 넘어’라는 제목으로 하늘뜻펴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살짝 제목을 바꿔 ‘위계를 넘어’라고 했습니다. 경계나 위계는 같은 의미이긴 하지만, 경계는 수평적인 의미에서 위계는 상하의 의미에서 사용됩니다. 경계는 지역적인 의미이지만, 위계는 계층적인 의미입니다. 같은 지역인 한 경계 안에 있다 하더라도 위계상 상하의 계층은 존재합니다. 가진 사람과 적게 가진 사람, 늙은이와 젊은이, 힘이 강한 이와 약한 이의 차별이 존재합니다. 복음은 단지 평면의 경계를 넘어 하나로 묶는 힘이 될 뿐만 아니라 상하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나가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당시 초기 예수공동체에서 이방인의 구원문제는 가장 큰 논란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구원론은 오늘날과 같이 단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할례와 안식일 그리고 정결법과 같은 규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종교적 규례가 아니라 유대 민족 문화의 기본적인 틀이었습니다.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했지만 모두 유대인으로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하여 예배를 드렸고 할례와 안식일과 정결법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은 당연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것들이 이방인들에게는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나 기본적인 정결예식 등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할례였습니다. 자신들은 이미 태어나자마자 할례를 받았지만, 이미 어른이 된 남성들에게 자신들의 성기 표피를 잘라내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실상 오지 말라는 소리나 다름없었고 이는 선교포기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사도로 자각하고 있는 바울로에게 있어서는 이 할례문제만은 반드시 해결해야할 문제였고 이 때문에 사도들과도 갈등이 많았습니다. 세계선교를 꿈꾸고 있는 루가는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베드로 사도가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얘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루의 시간차를 두고 가이사리아에 살던 로마의 군지휘관인 고르넬리오와 요빠를 방문 중이던 베드로는 각각 하느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고르넬리오는 베드로를 데려오라는 계시를 받고 베드로는 율법에 먹지 말라고 명한 더러운 음식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들려오기를 하느님이 깨끗하게 하였으니 먹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고르넬리오의 집을 방문하고 그의 친척과 친구들 앞에서 예수를 증언하는 구원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령을 받고 기이한 언어를 말하게 되자 이를 보고 세례를 베풉니다. 할례는 결코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되는 조건이 될 수 없음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루가에게 있어 이렇게 쉽게 해결된 할례문제가 실제에 있어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로의 편지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바울로의 게파 비판]

“게파(히브리식 이름, 베드로는 로마식 이름)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책망 받을 일을 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의 책망 받을 일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게파가 이방인 교우들과 한자리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들어오자 그는 할례를 주장하는 그 사람들이 두려워서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물러나갔습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안 먹은 체하며 게파와 함께 물러나갔고 심지어 바르나바 까지도 그들과 함께 휩쓸려서 가식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의 행동이 복음의 진리에 맞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게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다인이면서 유다인 같이 살지 않고 이방인같이 사는 당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갈 2:13-14)

요즘말로 하면 목사와 몇몇 장로와 교우들이 술자리에 앉아 있었는데(이 경우 꼭 술을 먹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앞에 술잔이 놓여 있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교단의 총회장이 보낸 사람이 갑자기 찾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목사와 장로들이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일어나 빠져나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어이 바울로 나 급한 약속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네.’ 그러자 바울로가 면전에서 가식적인 사람이라고 화를 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험상 문제가 될 때에는 양측의 얘기를 다 들어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나 바르나바의 얘기를 못 들은 상태에서 바울로의 얘기만 일방적으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베드로나 바르나바의 입장을 대변해보면 ‘아니 내가 술을 먹은 것도 아니고 얘기 좀 하자고 해서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주인이 나에게 잔을 따라 주니 나는 예의상 받았을 따름인데, 이 때문에 괜한 문제를 일으킬 필요도 없고 해서 그 자리를 피한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술 먹는 것이 죄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괜한 오해로 분쟁을 피하기 위하고자 했을 따름입니다.’

바울로는 가식적인 행동을 했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이것이 꼭 가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바울로의 지나친 비난은 아닐까? 정확한 판단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서 베드로의 얘기를 들어보고 하려고 합니다. 하여간 바울로의 글을 보면 베드로나 바르나바가 가식적인 행동은 아니라 할지라도 소신 없는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신을 이끌어준 선배이자 동료인 베드로나 바르나바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비난하여 그들의 인격을 묵살시키는 일이 과연 옳은 행동이었는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당시 가장 존경받는 사도였고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바르나바 그는 누구입니까? 루가에 의하면 그는 사도라 불리지는 않았지만, 예루살렘 예수공동체의 존경받는 지도자였고 안티오키아에 교회가 섰을 때 정식으로 파송 받은 목회자였습니다. 이 바르나바의 초청에 의해 바울로는 이 교회의 공동목회자로 초청받았고 이 교회를 발판으로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바르나바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인입니다. 바울로가 그들의 실수를 봐주지 않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일은 예의상 지나친 일은 아니었을까?

남을 비난하는 바울로는 누구입니까? 그는 과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옥에 가둔 사람이 아닙니까? 전과를 따지자면 바울로만큼 큰 전과자가 없습니다. 바울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니 실제로 그는 고백하기를 가장 작은 사도라고 말하고 있고 때로는 죄인 중의 두목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보면 그게 정말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편지에만 그렇게 쓴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게다가 그는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서 사랑이란 “친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고 성을 내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덮어준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만을 본다면 바울로는 ‘친절하지 아니하고 자랑하고 교만하고 무례히 행하고 성을 내고 모든 것을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자신이 얘기한대로 라면 바울로는 베드로와 바르나바를 따로 불러 ‘어떻게 당신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조용히 따져야 하지 않았을까? 어떤 장로님이 약간의 잘못을 행했는데, 제가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보고 하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가식적인 사람입니다.’ 하고 공개적인 비난을 한다면 저와 그 장로님 사이는 평생 원수 되기 십상이고 이로 인해 잘못하면 교회공동체 전체가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복음의 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로가 전하는 얘기를 보면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이 이방인과의 식사를 나누는 일에 매우 주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계시사건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 기사인가에 대해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1장의 기록을 보면 베드로는 바울로의 얘기와는 전혀 다르게 이 고르넬리오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식사를 나눈 일에 대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유대신도들로부터 공개적인 비난을 받자 자신이 경험한 계시사건과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하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성령의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그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회개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의 기록된 계시사건의 진정성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우리는 루가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메시지 하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은 세상이 그어 놓은 경계선과 사람이 만들어 논 차별의 위계선을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베드로와 고르넬리오는 죽었다 깨어나도 만날 일도 없고 만나서도 안 되는 사이였습니다. 고르넬리오에게 있어 베드로는 억압받는 피식민지인으로 유대 땅 촌구석인 갈릴래아의 어부 출신이었고 로마 정부가 정치범으로 처형한 나자렛 예수의 으뜸가는 제자입니다. 위험인물 1호 대상자입니다. 로마의 군대지휘관인 고르넬리오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가 아무리 야훼 하느님을 믿는 개종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집에 베드로를 초청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일은 군복을 벗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볼 때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의 집에는 들어가는 것은 자신을 더럽히는 행위이자 하느님을 더럽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당시의 문화와 관습과 종교의 벽을 깨고 그것도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로마 백부장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를 하고 형제애를 나누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로마인과 유대인이라는 경계의 차이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의 가장 높은 계층과 낮은 계층으로 위계의 벽을 허물고 만났습니다. 얼굴 스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은 함께 손을 잡고 만났고 함께 손을 잡고 인류가 하나 되는 꿈을 나누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역사는 종교 간의 갈등으로 수많은 전쟁을 겪어 왔고 21세기의 과학과 이성의 시대라는 지금도 여전히 종교 간의 갈등은 세계를 불안케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의 침공은 제 2의 십자군 전쟁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서로를 향한 보이지 않는 증오를 갖고 있습니다. 1년 전 저희는 이슬람교의 지도자 이만을 초청해서 특별강연을 듣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슬람교는 배척의 대상이고 정복의 대상이고 증오의 대상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이슬람교도에게 있어서 기독교 또한 배척의 대상이고 증오의 대상이고 정복의 대상입니다. 사랑과 용서 그리고 평화를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선포하는 이 쌍둥이 종교가 과거의 과오를 극복하지 못한 채 오늘의 세계를 불안과 전쟁의 공포로 몰고 가는 가장 큰 원인 제공자가 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모순입니다.

리처드 도킨스라는 미국의 저명한 생물학자는 최근 The God Delusion(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통해 기독교의 광신적 행태를 비난하면서 차라리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이 더 옳은 삶의 방식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이 주장은 세계 많은 사람들의 동조를 얻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책에서 주장하기를 [구약성서의 야훼 신은 시기하고 거만한 존재, 좀스럽고 불공평하고 용납을 모르는 지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불타고 피에 굶주린 인종 청소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유아를 살해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자식을 죽이고 전염병을 퍼뜨리는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난폭자로 등장하고 있다.] 우리가 그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비기독교인들의 눈에 비치는 성서의 야훼 하느님의 모습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이해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그래도 신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 도덕이 잇고 정의가 설수 있다고 말하면서 신이 없다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선하게 살려고 애쓰겠는가? 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질문에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감시카메라를 돌아보면서 혹은 당신의 머리에 든 아주 작은 도청 장치에 대고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지 도덕이 아니다. 오로지 처벌이 겁나서 그리고 보상을 바라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한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로 딱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신에 대한 믿음이 인간을 오히려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기도 한다는 이러한 종교 비판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는지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자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땅 끝까지 나아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는 주님의 선교명령을 복음의 빛에 비추어 새롭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편 기자가 외치는 ‘역사에서 교훈을 뽑아내어 숨은 뜻을 밝혀 주리라’는 야훼 하느님의 뜻이 종교 배척론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그러한 제국주의적이고 정복주의적인 것인지 아니면 오늘의 본문 말씀과 같이 세상이 만들어 논 경계와 위계를 넘어서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하나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외쳐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평생을 걸어도 도달할 수 없는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심장까지’라는 말을 생각할 때 우리가 가야 할 ‘땅 끝’은 저 아프리카 오지가 아닌 나 자신의 심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테레사 수녀의 시입니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며 자기중심적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을 사랑하라

만일 그대가 좋은 일을 하면 사람들은 그대에게 숨은 동기가 있을 것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좋은 일을 하라

만일 그대가 성공하면 그대는 거짓된 친구들과 많은 적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성공하라

만일 그대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그대는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렇더라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그대가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렇더라도 좋은 일을 하라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라도 가장 작은 사람들의 총탄에 쓰러질 수 있다.
그렇더라도 위대한 생각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를 좋아하지만 강자만을 따른다.
그렇더라도 약자를 위해 싸우라

그대가 수년에 걸쳐 건설한 것이 하룻밤 사이에 파괴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건설하라

그대가 세상에게 최선을 베풀어도 무자비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세상을 향해 그대가 갖고 있는 최선을 베풀라

그렇더라도...
세상이...
다른 사람이....
이 시대가 그렇더라도...
우리의 기준은...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