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은 하느님의 것이다/ 좋은 편/ 생명의 숲이 되기까지

레위기 25, 23 ; 루가복음 10, 38 - 42 ; 요한 4, 7 - 15


땅은 하느님의 것이다.
서 형식 교우

아름다운 여인들의 이야기가 구약 성서에 나옵니다. 약 기원전 11세기경 판관시대에 나오미는 기근으로 황폐해진 토지를 헐값에 넘기고(임대하고)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갑니다. 10년 후 그녀의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은 죽고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데리고 베들레햄으로 돌아옵니다. 땅을 되
무를 수 있는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엘리멜렉의 보리밭에서 이삭을 주우며 근근히 살아갑니다. 땅을 되찿는 방법은 나오미가 오래 산다면 희년에 토지를 돌려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같은 지파 내에 가까운 친척들이 그 땅을 되 물려 줄 수 있습니다. 이때 룻과 엘리멜렉의 친척인 보아스는 사랑에 빠집니다. 땅을 무를 수 있는 권리는 가까운 친척부터 있었기 때문에
보아스는 그 친척에게 땅을 무르고 룻과 결혼해서 그 상속자에게 땅을 기업으로 넘겨주겠냐고 제안합니다. 그 가장 가까운 친척은 그 제안을 거부하자 그 다음 순서인 보아스는 자기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룻과 결혼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이 시대의 토지 제도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25장23절에서 “토지를 영영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에서처럼 토지매매 금지와 토지 신유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임대한 토지를 무를 수 있습니다. 무를 형편이 안 된다 하여도 희년이 되면 원래 소유자가 다시 경작권을 갖게 됩니다. 또한 안식년이 되면 빚을 탕감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업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집트에서 비천하게 살던 히브리인들이 탈애굽하여 광야에서 40여년 고생하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생긴 땅을 제비뽑기를 통해 각 지파별, 가족별로 분배한 땅을 말합니다. 이를 유업, 산업, 분깃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기업은 하느님께서 토지 사용권을 소수가 독점하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시려는 뜻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부족연맹 주위에 바벨론, 이집트 등 강력한 왕권 국가가 성립하여 제국을 만들자 지배층을 중심으로 왕을 세우자고 청원합니다. 사무엘은 왕정이 도입되면 기존의 토지법이 붕괴될 것이라는 경고를 다음의 말로써 대신합니다. “왕은 너희의 밭을 빼앗고 포도원과 올리브 밭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그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다”(사무엘상8장11-17)

기원전 1005년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연방체제로 다윗왕조가 만들어 집니다.다윗은 끊임없는 전쟁으로 많은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그의 후계자 솔로몬은 많은 공과가 있지만 가장 치명적 과오는 정치적, 종교적 권력을 유대 지파에만 집중함으로서 사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200년간 분단의 씨앗을 심었다는 것입니다.

성서의 예언서와 역사서는 여호와와 바알이 벌이는 투쟁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9세기 중엽의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서 이러한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은 이스라엘에 왕궁을 건설하기 위해 나봇에게 포도원을 좋은 값으로 쳐주거나 아니면 다른 토지와 바꾸어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제안 모두다 사실상 토지 소유가 개인적인 것이며 개인이 처분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나봇은 “내 조상의 기업을 왕에게 주기를 야훼께서 금하신다”라고 거부했습니다. 이에 아합과 그 부인 이사벨은 나봇과 상속인들을 처형하고 나봇의 토지를 빼앗앗습니다. 이때 분노한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 가문이 멸절되리라는 저주를 퍼붓습니다.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린 예후왕은 많은 지주들을 숙청하는 등 토지 개혁을 선지자 엘리사와 함께 진행시켜 나갑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토지제도는 점점 후퇴합니다. 그러다가 예후 왕가 4대째인 여로보암 2세를 마지막으로 예후 왕가는 막을 내립니다. 이시기에 아모스 선지자는 땅에 굶주린 투기꾼들을 가리켜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까지도 탐내는 사람들이라고 규탄했습니다. 이로부터 몇 년이 지난 기원전 722년 호세아 선지자 시절에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멸망하고 맙니다. 이 시기 남유다도 아하즈왕의 우유무단한 외교정책으로 앗시리아의 속국이 됩니다. 다음 왕인 히스기야왕은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희년을 선포하며 토지개혁을 단행합니다. 이때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앗시리아 군대가 갑자기 퇴각하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히스기야가 사망한 뒤 친바알 세력들이 득세하여 무려 70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반동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요시아왕 18년(기원전 626년)에 예레미아가 주도가 된 종교개혁을 시행하는 등 마지막 안간힘을 써보지만 암살당하고 맙니다. 에집트에 의해 세어진 여호야킴은 선왕의 정책을 되돌려 놓았습니다. 시드기야왕 때 신흥 강국 신바벨론에 의해 세 차례에 걸쳐 지배층이 포로로 끌려가는 등 수모를 겪는 끝에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리면서 멸망하고 맙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약간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공통되게 바알신이라고 질타하는 죄악들이 있습니다. 도덕적 타락, 지역 정령(우상) 숭배, 정의를 외면한 종교행위, 종교를 빙자하여 정의를 유린하는 것, 지주나 권력자의 탐욕과 경제적 불의 등입니다. 땅을 사고 팔 수 있다면 ,판 토지를 되무를 수 없다면, 자기 땅을 되찾을 수 있는 희년이 없다면
땅을 잃은 사람은 자자손손 소작농이나 하인이나 부랑인이 되어 생계형 범죄에 빠질 수밖에 없는 반면 지주들은 더 많은 땅을 소유할 수 있음으로 해서 노동 없이도 독점적인 지위에서 많은 부와 권력을 갖고 사치와 향락에 부패에 빠집니다. 땅을 빼앗긴 사람들은 당장의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기복신앙에 빠져 듭니다. 지주들은 종교 행위나 예식에 벽을 둘러 쳐 그들만의 하나님으로 독점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초한 삶의 방식을 여호와이즘이라 한다면 이와 대척되는 바알리즘은 도대체 어떠한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는가? 건강하고 조화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가? 아니면 파괴적이며 분열된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가? 이것이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선지자의 입을 통해 건강하고 조화로운 정의로운 사회가 하느님의 나라라고 하셔습니다. 따라서 제가 여기서 언급한 토지제도는 하느님의 나라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제도인 것입니다.

바빌론 시절, 느헤미아 시절 외세 또는 자체적으로 토지 개혁이 있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좌절되고 맙니다. 땅은 황폐화되고 로마의 식민체제하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가장 척박한 땅 갈릴리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마 5:5)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land) 예수님은 아람어로 말씀하셨는데 예수님 돌아 가신 후 최소한 40년이 지나서야 것이 기록으로 남게 되고 그것이 그리스어로 번역되고 다시 영어로 번역되고 다시 우리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역이 있을 수 있으며 번역하는 사람의 의도가 개입될 수 있습니다. 온유한 나티내는 영어의 meek은 그리스어 praus인데 이는 “가난한”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서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의 수식어로도 쓰인 말입니다.

이것을 다시 번역하면 땅을 빼앗기고 넋이 빠져 있는 가난한 사람들아! 내가 너희에게 노동을 하면서 살 땅을 아무 대가 없이 기업으로 주겠다. 이 약속은 그 시절의 민중들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으며 기쁜 소식이었고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몇 달 전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다”라는 슬로건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예수원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곳 설립자인 대천덕 신부는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신 분이셨습니다. 성경적 토지법으로 우리나라 토지 제도를 개혁함으로서 불로소득으로 인한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에게 노동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교회가 집중해야 할 일은 성경적 토지법을 회복시키는 일과 자발적 희년(free will jubilee)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구휼사업은 장마철에 비새는 안방에 세숫대야 갖다 놓는 것과 같습니다. 지붕을 고쳐야지요. 오늘날 성경적 토지법이란 헨리 조지 경제학에서 말하는 지대조세제와 토지 단일세을 말합니다. 노동과 무관하게 토지에서 발생하는 지대를 공적으로 징수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고 그 외 다른 세금은 걷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발적 희년이란 사도행전 2장에서의 초대교회에서 신자들이 스스로 집과 밭을 팔아 사람들의 가난을 해결한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대천덕 신부님이 말년에 하신 말씀을 전해 드리면서 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물질적인 문제는 기도와 영적 전쟁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며 영적인 문제는 현실의 삶, 즉 실제적인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좋은 편
어 수남 교우

안녕하세요?

저는 향린에 온지 9개월쯤 되었고요. 고1, 중2 두 아들을 둔 39세의 행복한 여성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는 다녔고요. 이번 ‘여성의 눈으로 보는 성서’ 공부를 마치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 저는 역사를 통하여 현실을 살펴 보고자합니다. 여성과 남성 하나님께서 나누어 놓으신 역할을 아직도 잘 이해 할 수 없지만 우리사회 구조 속에서는 성 평등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로 억압과 비인격의 현실 속에서 과연 성경말씀이 낮은 곳의 우리들 여성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왜 여성과 남성을 구분 하셨을까요? 하긴 지금까지 노동현장과 전쟁의 상황에서는 분명히 남성의 생산성은 여성을 능가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남성은 역사의 주역 이였다고 인정받으며 그 권위를 유지하려고 애먹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요. 열심히요!

저의 직장에 옷 잘 입는 여성에게 너무 노출이 심해서 남성들이 자꾸만 처다 보면 어떻하냐고 말했더니 괜찮아 보는 지들만 힘들지 뭐! 하더라고요.

아직도 지금 이 세상 남성들은 여성을 대할 때 외모로 평가하면서 여성의 가치를 남성개인의 취향이나 성교육 수준에서 개별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여성을 대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정 하십니까? 향린 남성분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저의 친정아버님과 어머님의 모든 생활 속의 관계를 보면 남존여비의 관계가 확립 되여 있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납니다. 그 시절 저의 친정 생활수준과 별반 차이가 없었던 분들이라면 같은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생활을 경험하는 유년시절을 경험하셨을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저의 친정어머님 유년시절은 더 심한 남녀 불평등 시대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때에도 교회는 다녔지만 교회에서는 사회 계몽적 설교는 없었습니다. 그저 신앙적 순종의 미덕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여성들에게 순종 신앙의 값어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남녀 불평등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요? 남녀 불평등의 피해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이제 시작 하자라고 말하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무엇부터 해야 되나요?

그럴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문제는 당사자가 해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방관자의 목소리도 들리는듯합니다. 모든 문제 해결을 하는 방법이 관념적이든 물질적이든지 여성이 남성과 구분되는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분명한 차이를 넘어선 평등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등 그것은 인격의 존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본연 성의 존중 그것이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의 평등 그리고 그것에 대한 책임은 남성과 여성 우리 모두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깊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각의 책임과 의무 그리고 권리. 우리가 당당히 지키고 누려야할 것들입니다.

저는 여자로서 책임과 의무 권리 등을 얻고 누리기 위하여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 고민 하였습니다. 성경에 슬롭핫의 딸들도 관심이 있었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성서속의 여성들 그 시대 여성들은 사람 수를 헤아릴 때 포함되지 않았으며 그리고 인종차별 성차별 신분차별을 감수하며 살 수밖에 없는 그 현실은 한반도 여성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까지는 여성의 눈으로 보는 성서 공부의 대략 요약이 이구요.

오늘 저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로 오늘 우리 삶을 들여다보려합니다
누가복음 10장38절에서 40절 말씀의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분주하게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마르다가 예수님의 발 앞에 가만히 앉아 있던 마리아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예수님께 “ 쟤가 가만히 앉아 있지만 말고 나를 좀 도와주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께 전혀 예상외의 대답을 듣습니다.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순간 마르다는 예상치 않았던 주님의 말씀에 당황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자신이 모습이 우습게 느껴지고 좌절감까지 느꼈을지 모릅니다. 존경했던 예수님께 실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 4 구절의 내용을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또 그 얘기야!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구절을 다시금 읽으면서 마르다의 외침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너무해. 공정치 않아!’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여.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마르다가 원한 것은 결국 그거 아닐까요?
부드럽게 위로해주는 말 , 그리고 넉넉한 도움.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일에 치일 때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예수님도 내심 마르다에게 미안하셨던 모양입니다. 마지막 십자가상에서 마르다의 이름을 부르셨죠.
“목 마르다....ㅎㅎ”

이번엔 마리아를 변호해 볼까요? 밖에서 떠들썩하게 음식준비로 분주함을 알고는 있었을 겁니다. 어쩜 언니 마르다의 부르는 소리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그 순간 더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 ‘부르심’ 이것이 마리아를 꼼짝 못하게 하지 않았을까요?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교사로 성가대로 여전도회장으로 능력도 안 되면서 바쁘게 만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가정이 소홀해지자 남편과의 갈등도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남편이 원망스럽기만 했었죠. 어쩌면 제 잘못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 대목을 쓸 때 남편은 “간증하냐?” 하더군요. 그래서 달리 써보려 했지만 잘 안되더군요.

이번에 하늘뜻 펴기를 준비하면서 갑자기 하느님께서 깨닫게 하심을 느낍니다. 또한 마르다의 세상에서 마리아로 살아가길 원하는 저를 다시금 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하느님 나라는 역설적입니다. 세상은 업적에 박수를 보내지만 하느님은 우리와 교제를 갈망하십니다. 세상은 “좀 더 해.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뤄!”하고 아우성이지만 하느님은 잠잠히 있어 내가 하느님인 것을 알라“고 속삭이십니다.

분명 거실에서 마리아는 분주한 부엌에 있던 마르다가 결코 누릴 수 없는 예수님과의 교제를 즐겼습니다. 마르다또한 아마 최상의 대접을 예수님께 해드리려고 온갖 애를 썼을 것입니다.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늘 성과에 덫에 붙들려 그분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야한다고 생각해서 교제를 나눌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급히 뛰어 들어가 분주해져 정말 주님을 알 기회조차 일어버리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 사이에 고민하며 삽니다. 저 또한 직장일과 가정 일에서 허덕이는데 다만 제가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남편, 아이들과의 시간을 좀 더 가지려 애쓰고 있는데 그러다 보면 정작 제시간이 너무 없다고 불평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요새 이글을 준비하면서 책도 좀 읽고 인터넷도 뒤지고 했습니다. 우리는 늘 갈등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더 좋은 편을 선택하기위해. 그렇죠? 더 좋은 편을 선택하기위해....
마리아의 깊고 거룩한 교제의 거실과 마르다의 부엌에서 진솔한 신앙인으로 균형 잡힌 삶의 생활인으로 더욱 노력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향린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부디 향린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갈등과 대립이 없었으면 합니다. 아니, 나의 개인 신앙 안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갈등과 대립이 없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마르다 없는 마리아도 없고 마리아 없는 마르다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둘 다 하느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살아가다 보면 시기와 형편에 따라 마르다를 중요하게 여길 때도 있고 마리아를 중요하게 여길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균형 잡힌 신앙을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마르다의 역할이 중요히 여겨질 때에는 마리아의 말씀 공부와 기도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이고, 마리아의 역할을 중요시 여기게 될 때에는 마르다의 실천과 봉사를 행함으로 배움의 완성을 가져와야만 하겠습니다.


생명의 숲이 되기까지
노 은아 교우

틈만 나면 뛰는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따뜻한 햇살 가득한 봄이면 진달래꽃 만발한 산등성을 뛰었고, 벼이삭이 노랗게 토실토실 영글었을 땐 빛나는 들판을 잠자리들보다 빨리(?) 뛰었습니다. 또 그녀는 흰 눈 펄펄 날리는 추운 겨울엔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차박차박 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름에는 되도록 뛰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덥기 때문이지요. 촌놈들은 대체적으로 그렇습니다. 여름 뙤악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들에서 흙과 씨름해보신 분은 아실 겁니다. 사람의 몰골이 어떻게 되는지를.... 그래서인지 그녀는 지금도 여름을 그리 좋아라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열일곱 되던 겨울엔 부산 어느 신발공장에서 본드공으로 뛰었고, 드디어 어른이 된다는 스무 살엔 마치 내 세상이라도 된 것 마냥 학교 교정과 거리를 날듯이 뛰었습니다. 하느님의 세상은 결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소위 진보된 신앙인의 모습을 알게 된 그녀는, 돈100만원을 손에 들고 무작정 상경하여 불타는 사명감으로 노래하며 뛰었습니다.(이쯤에서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 채셨겠지요?) 그렇게 방방 뛰던 그녀가 어느 날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무릎에선 피가 흐르고, 일어설 수 없었습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지요. 아픔으로 주저앉아 엉엉 울던 그녀는 이제 아예 그 자리에 누워버렸습니다.

저는 말하는 것에 대한 많은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제 속에 들어있는 무언가를 속 시원히 말로 표현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오히려 노래가 더 가까운 도구라고 느낍니다. 그런 저에게 다른 것도 아닌 설교라니요, 심장은 쿵쾅거리고 손은 떨리고 가슴은 답답했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이 자리에 선 것은 저보다 먼저 고통의 삶을 체험하고 굳건히 살고 계신 여러분에게 용기를 얻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이 자리에 함께 하심을 의지합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저와 함께 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난 3월 중순 우리는 한문덕 전도사님과 요한복음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첫 날 한전도사님께선 “이 공부는 여러분들을 위해서가 아닌 제 공부를 위해서 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무지한 우리는 들러리란 말씀입니까? 당시 하느님의 생생한 말씀에 갈급했던 저에게는 정말 야속한 말씀이었지요. 그래도 무언가 내게 다가오는 게 있겠지,.. 생각하며 성서공부를 시작하였지요.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로 시작합니다. 그 말씀이라는 것은 “로고스”라고 번역됩니다. 그 당시 스토아학파는 이것을 “절대적 진리”라고 하였습니다. 절대적 진리라...처음부터 어려운 이야기였습니다. 이런 말 외에 요한복음에서는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영원한 생수”, “성령”, “구원”과 같은 삶의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소개됩니다. 계속되는 공부 속에서 “이건 내 문제를 얘기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가 솔깃하였습니다. 성서 앞에 바짝 다가가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 본질적인 질문은 오늘 본문인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대화”에서 정면으로 이야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마리아 지방 수가라는 동네에 있는 우물가에서 어떤 여인과 예수와의 대화를 그려놓습니다. 그 여인은 당시 그곳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할 정도로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이었고, 사람취급도 못 받는 여자였습니다. 게다가 이전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현재 있는 남편도 제대로 된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비참한 가난 속에서 하루하루를 위태하게 살던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게 두려워 사람들이 뜸한 한 낮에 물을 길러 이 우물가에 나옵니다. 그런 그녀에게 유대인으로 보이는 낯선 사람이 말을 건넵니다. ‘나에게 물을 좀 주시오’ 유대인이 말을 건 사실에 어리둥절해 있는 이 여인에게 이번에는 뜬금없이 물도 그냥 마실 물이 아닌 영원한 생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이 여인은 처음엔 이 이상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자꾸 다른 얘기를 합니다. 다소 집요한 대화 끝에 예수의 존재를 알아 본 여인은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게 되지요. 영원한 생수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 것일까요?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수는 무엇인가요?

사람은 역시 고통 중에 있을 때 삶의 궁극적인 질문들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가 나타난 것처럼 말입니다. 저 역시 처절한 고통의 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자기 존재에 대한 되묻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외부적으로 내게 일어난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과, 내 안에서 곪아 터진 오래 된 상처로 인해 저는 영혼의 암야(喑夜)의 시간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으나 죽은 상태였지요. 저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작고 초라하여 마치 거대한 숲 속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아주 작은 잡초의 모습으로 한껏 움츠리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왜 이토록 고통스럽지 않으면 안 되는가? 나에게 이 고통이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신을 원망하고 또 신의 존재를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신은 어느새 제 곁에 함께 앉으시며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있으라. 그냥 거기에 머물러 슬퍼하여라.
침잠하여라. 때가 되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일어날 힘도 없이 가슴 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눈물만 흘렀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제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려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극복하려는 것이 아닌 어두움에서 빠져나오려는 비겁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단 한번도 나 자신에게 어두움 속에 있는 스스로를 가만히 들여다볼 시간을 주지 못했었습니다. 제가 믿고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 또한 자기를 살피고 가꾸는 모습보다는 이웃의 아픔을 먼저 돌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 스스로를 억눌러 어느 것 하나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의 삶을 통해 신이 이루려는 뜻은 무엇일까?’ 저는 끊임없이 묻고 찾았습니다.
그 치열한 자기 발견 속에서 저는 작은 기쁨을 맛보았고, 내 속에 이미 있었던 신의 마음을 느끼며 따뜻함으로 충만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고통의 순간이 있었나요? 아니면 지금 그 순간을 보내고 계신가요? 만약 그 때가 오거든 그 고통의 순간을 온몸으로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까마득한 우주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자신이 보일 것입니다. 그런 작은 자신을 신의 따스한 시선으로 들여다보고 보살펴 주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어루만지고 안아주고 격려해 보세요. 그러면 분명 자기 안에서 샘솟는 무한한 사랑을 발견할 것이며 위로부터의 내리는 성령의 기운을 충만하게 느끼시는 넉넉함 또한 갖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사랑하는 우리는, 더 이상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거대한 우주 속에서 신과 함께 커다란 존재로 당당히 서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영원한 생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예술 작품 중에는 [피에타 상]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죽은 예수의 벌거숭이 몸을 어머니 마리아가 온몸으로 껴안고 있는 모습을 그려놓은 작품입니다. 저는 그 작품을 보면 기독교의 마음이 보입니다. 예수의 시체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진정한 슬픔이 강하게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두운 그림자 같은 슬픔이랄까요, 그런 음성적인 면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마도 기독교의 마음은 그런 면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의 어떤 버팀목조차 모조리 빼앗겼을 때 토해내는 참된 통곡이라는 게 있고서야 비로소 인간은 인간의 진실에 가 닿을 수 있고, 거기서 또한 참된 구원의 의미가 보이는 게 아닐까요?. 그런 근본적인 것이 예수의 십자가 상 속에 담겨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처럼 이 세상의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댈 곳이었던 예수 속에야 말로 참된 빛이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의 체험이 곧 교회의 토대, 그리고 교회의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그동안의 고통의 시간을 멋지게 살아오신 여러분과 이 노래를 나누고 싶습니다. 함께 숲을 일궈나갈 때 우리는 거기서 기쁨으로 함께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누워 있던 그녀가 이제 조금씩 몸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생명이 넘치는 숲을 향해 걷기 시작합니다.

- 노은아집사의 노래 -


고 문 -앨리스 워커

그들이 그대의 어머니를 고문할 때
그들이 그대의 아버지를 고문할 때
그들이 그대 형제자매를 고문하면
나무를 심으세요.
그들이 그대의 지도자를
그들이 그대의 눈물 같은 연인을 죽인다면
나무를 심으세요.
그들이 그대를 고문해
그 고통 이루 말할 수 없을 때
나무를 심으세요.
그들이 그 나무마저 고문하여
그 숲을 잘라버리면
또 다른 숲을 시작하세요.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