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우주일] 인 간 회 복


창세기 1, 26- 31 ; 요한 9, 1- 7 고 현철 집사/ 김 영광 교우


나간이 활동에 대한 회고


나간이 소모임이 3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3년의 경험을 회고해 보고, 장애인 주일과 나간이 활동의 공통 주제가 될 수 있는 이웃의 고통(장애)과 나눔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저희 모임은 의정부에 있는 나눔의 샘이라는 노인 요양 시설에 계신 남자어르신들의 몸을 씻겨드리는 일을 합니다. 한 달에 한번 첫 번째 토요일 열시부터 시작해 점심 식사 전에 끝나는 이일은 경우에 따라 변동은 있지만 대략 한 번의 방문에 두 팀으로 나누어 스무 분 내외의 어르신들이 몸을 씻겨드리는 것입니다. 치매나 중풍으로 불편하신 분들의 옷을 벗겨드리고 씻겨드리는 일 그리고 목욕 후 간단한 로션이나 오일을 발라드린 후 옷을 입혀드리고 머리를 말려드리는 일 등으로 이루어집니다.

나간이라는 명칭의 의미에 대해 궁금해 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그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간이는 정신 나간이의 준말이라고 합니다. 어르신들의 정신이 또렷하지 못한 것 때문에 붙은 명칭이 아닌, 봉사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제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을 가진 명칭입니다. 물론, 나간이에 참석하는 분들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은 절대 아닙니다. 나간이가 지향하는 방향성이 그러하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간이 모임에 활동하시는 분들을 소개드리면, 임승계 장로님, 이 충언 장로님, 최영웅 집사님, 이춘복 집사님, 백경신 권사님, 박영화, 최재우, 박정례 교우님, 청년은 김영광, 독고지은, 김치섭 교우입니다. 이 충언 장로님은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분을 움직이시다가 허리를 삐긋하셔서 상당기간 고생을 하시고, 심지어 벌침을 맞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최 영웅, 이 춘복 집사님은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도 정이 담긴 말씀과 함께 어르신들의 몸을 씻겨드리시던 모습이 유난히 생생합니다. 금년부터 참석하신 최재우 교우님은 목욕 중에 대변을 손으로 받아내시면서 정작 어르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실지 안쓰러워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쁘신 일상과 아담한 체격임에도 젊은이들이 무색할 정도의 열정을 보여주시는 백경신 권사님, 공부나 청춘사업에도 바쁜 일정을 쪼개어 기꺼이 시간을 내어 참석하는 젊은 청년들, 한결같이 모범을 보이시면서 구심점이 되어 주시는 임승계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제 나간이와 관련한 저의 개인적인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05년 초 향린에 신앙생활의 보금자리를 마련한 후 2개월 정도 지날 즈음에 소모임 활동에 대한 홍보가 교회소식란을 통해 몇 차례 소개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저희 부부는 목욕봉사활동을 하는 ‘나간이’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봉사활동도 한 달에 한번, 이동시간을 포함하여 반나절 정도의 시간만 할애하면 되었고, 게다가 일의 성격상 머리 써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첫날의 경험을 더듬어 보면, 신체와 정신이 원활하게 기능하지 못하는 분들의 몸을 씻겨드리는 일이 초보자인 저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몇 차례의 경험을 가지고 계신 집사님들의 설명을 듣고, 어설프게 머리를 감기고 비누로 몸을 닦았습니다. 내가 잘 하든, 못하든 그 분들의 반응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처음에 느낀 충격이었습니다. 말씀 자체를 하기가 힘들기도 하거니와, 본인들이 원하는 것에 대한 요청보다는 남이 해주는 대로 받는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지요. 약간이라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분들에게는 억지로 말을 붙여봅니다만, 그 곳에 계신 분들의 상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거의 반응이 없고, 반응을 하더라도 매우 단순하게 예, 아니오 정도로 표현을 하십니다.

또 하나 느낀 것은 장애를 가진 분들의 옷 입히고 벗기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매일 같이 옷 입고 벗는 것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저로서는 그 전에는 그 일이 이다지도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지 못했습니다. 내 편의와 기준으로 타인의 행동을 판단하는 것이 습관화된 나에게 그 때의 경험은 동일한 현상이라도 처한 상황과 형편에 따라 얼마든지 판단의 기준과 경중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편하게 하지 못하기에 느낌으로 그 분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통해 일상생활에서도 말이나 글로는 전달할 수 없는 이심전심의 마음 주고받기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일상을 말이나 문자로 표현하는데 익숙한 저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3년째 나간이 활동을 하다 보니까 이제는 그 일이 일회성 행사가 아닌 규칙적인 생활의 일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 시간표로 비유하자면, 나간이 활동이 특별활동시간이 아니라, 정규교과로 편성된 것 같습니다.

고통(장애)받는 이웃

저는 이 시간에 여러분과 함께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나간이에서 만나는 분들은 중증장애를 겪는 어르신들입니다 그 분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위축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 분들은 정신도 육체도 온전치 못한 상태로 연로하시기까지 합니다. 그 분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일까? 속된 말로 무슨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그 상황 속에 투사시켜 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 분들에 비해 육체적, 정신적 조건이 나은 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저 자신이나 그 분들을 별로 다르게 보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에게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그 무엇이 있는가? 소망과 뜻을 품고 하루하루를 벅차게 살고 있는가? 고백하건대, 매일 매일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면서 최선을 다하기 보다는, 그냥 또 주어진 하루로 여기면서 오늘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언제나 어디서나 다양한 형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그분들이나 저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지요. 그리고, 지금 당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저 역시 세월이 지나거나 혹은 불의의 사고로 그 분들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질 수도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도 그 분들과 별반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 세상의 눈으로 여기는 고통 혹은 장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들과 나는 다른 존재라는 생각은 정말 착각이 아닐까요. 세계보건기구가 장애를 가진 사람을 전 세계인의 10%로 추정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보더라도, 10명 중 한 사람이 해당될 만큼 매우 보편적인 현상인데도, 왜 그리 차이와 차별을 두려는지 모를 일입니다.

나눔과 섬김

그럼에도 장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활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폭력 때문은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장애에 대한 사회적 폭력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새롭게 시작한 평화 나눔 공동체 활동의 핵심은 폭력으로 피폐해진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소외된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장애를 가진 사람들 또한 우리의 소중한 이웃임을 깨닫고 함께 사는 세상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들 사람을 만드셨다.”는 성경말씀에서 우리들 사람에 장애를 가진 이웃도 포함되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런 생각과 행동은 보이는 장애를 넘어 보이지 않는 장애까지도 아울러, 세상의 기울고 패인 곳을 메우는 평화의 정신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았고,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더구나, 나눔과 섬김은 멋진 말이나 직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복음 13:14∼15)”라고 하십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말씀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묻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 드러내시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경말씀은 사람들에 따라서는 장애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소경은 눈에 보이는 장애에 가려서 각 사람에게 존재하는 하나님의 귀하신 뜻과 사랑을 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소경은 실로암으로 가서 씻으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도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실로암에 가서 눈을 뜨는 소경의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김영광 교우(청년신도회)

안녕하세요? 저는 청년 신도회 김영광이라고 합니다. 향린교회에 출석한지 오늘로 딱 일 년이 되어갑니다. 모태신앙으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권위를 내세우고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보수신앙에 염증을 느껴 한동안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향린교회를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고 오랜 보수신앙의 틀을 깨고 제대로 믿어보겠다는 큰 다짐으로 향린교회에 발을 디뎠습니다. 처음 접해본 시위현장에서 고통 속에 신음하시는 하느님을 느꼈고, 평택 대추리 촛불집회와 현장예배를 통해 갈릴래아에서 만나자는 예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웃과 사회를 향한 하느님나라 복음운동을 하는 향린의 모습은 계속해서 저에게 신앙의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권위적인 제도들을 허무는 향린의 여러 움직임들, 국악찬송, 목회운영위원회, 평신도 하늘뜻펴기, 목사, 장로 임기제등 교회의 권위들을 내려놓고 성전을 허무는 향린의 작업들을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2주전 임승계 장로님으로부터 장애인주일에 평신도 하늘 뜻펴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계속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하라고 권면하셔서 어쩔 수 없이 하늘 뜻펴기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성적인 저의 성격과 고질적인 무대 울렁증이 있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제 머리 속에는 아직까지도 하늘뜻펴기는 영성있는 목사님들이 하시는 ‘설교’라는 이미지가 남아있어,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가르치기엔 저는 어리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연륜으로 보나 신앙으로 보나 더 탁월하신 여러 어르신들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열등감도 있었습니다. ‘평신도 하늘뜻펴기’ 참 좋은 것이고 향린의 자랑하는 것 중의 하나이지만 나는 할 수 없는 일이고, 나는 그냥 박수만 쳐야지 하는 모순적인 생각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 예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 속에 있는 ‘설교’라는 성전을 허물지 못한 채 향린의 진보성과 개혁성 뒤에 자신을 감추고 관망하며 대리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화과 나무의 무성한 잎만 보면서 만족하고, 잎 뒤에 숨겨져 있는 무화과나무 열매를 찾기 위해 잎을 들추는 작업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는 동안, 스트레스도 받고 고민도 해야 하는 편치 않는 시간이었지만 신앙의 훈련 없이는 신앙의 성장이 없듯이, 작은 불편함을 신앙의 훈련으로 생각하고, 하늘뜻펴기를 한 후에는 영적인 성장과 신앙의 열매가 있을 것을 기대하며 이 강단에 섰습니다.

작년 4월에 향린교회에 등록을 하고 주보를 펼쳐보았는데 광고란에 ‘나간이 목욕봉사’모임을 소개한 것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때 수년전 하느님과 했던 한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대학 1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저는 당시 IVF라는 기독교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방학이 되면 여러 학교들이 연합으로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평상시 하지 않던 기도를 금식해가면서 하고, 성경을 읽는 영성 프로그램 속에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마지막 날에 수련회 때 받은 은혜를 나누고 앞으로의 다짐들을 적어서 성경책에 붙이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다짐한 것은 매일 큐티하는 것, 30분 이상 기도하는 것, 성경 일독하는 것들이었는데, 거기에 봉사활동 하겠다는 것도 포함이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신앙은 냄비신앙에 근거한 것이라, 다짐들을 적을 때는 이산을 옮겨 저리로 옮길 것 같은 믿음이 생겼고, 세상에 가서 강한 주님의 용사로 살아가겠다고 기세등등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금방 식어버리는 냄비처럼 그런 다짐들도 무뎌져 갔습니다. 그런데 ‘나간이 목욕봉사’를 주보에서 보았을 때 그때의 다짐이 머리 속에 생각이 났고 작은 신앙의 실천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나간이 목욕봉사에 참여하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번 하는 것이지만 ‘나간이’ 봉사는 저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그분들을 통해서 고통 받는 이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지하철을 탈때나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애인들, 노숙자들을 보면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에 관심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지만 삶의 무게와 이기심으로 인해 이웃을 향한 마음이 무뎌집니다. 나간이 봉사는 이웃에 냉담해진 마음에 온기를 불어주고, 다시금 이웃에 관심하게 해줍니다. 목욕을 하기 위해 어르신들의 옷을 벗기고, 불편하신 몸을 저희들에게 의지하셔서 목욕의자로 옮기 우신 다음, 저의 손으로 몸 구석구석을 씻겨드립니다. 말로서 대화하는 것이 어렵지만 서로의 체온과 온기를 느끼면서 몸짓의 언어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저를 알아보시는 분도 몇 분 계셔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 어느 날 보다 첫째 주 토요일은 풍성한 날이고 가슴 뜨거워지는 날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날입니다. 목욕 봉사 후 같이 수고한 교우님들과 하는 식사는 풍성함을 더해줍니다.

타드 허스턴이라는 수상스키 선수를 꿈꾸던 미국 청년이 있었습니다. 스키 로프를 끌다가 그만 배에 달린 프로펠러에 다리가 말려들어가 다리를 절단하고 두 개의 의족에 의지하여 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었고 하박국서를 읽으면서 자신에게 남아있는 가능성이 무엇인지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그는 심리학을 공부하고 재활병원 상담원으로 취직하여 자신과 같은 장애인을 돕고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다가 잠시 잠이 들었는데 하느님께서 자꾸만 산으로 올라가라 하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저와 같은 장애인 친구들한테 놀라운 꿈이 될 것 입니다. 그들의 삶에 격려가 될 것입니다. 제가 그 계획을 세워 도전해 보겠습니다.’하고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서키트 아메리카’라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미국 50개주의 최고봉들을 의족으로 정복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94년 6월 1일 매킨리봉을 시작으로 하여 여러 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기며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지켜갔습니다. 드디어 그는 66일째 만에 50번째 주 50번째 산 하와이의 마흐나키아산 정상에 우뚝 섰습니다. 그 산위에서 그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 모습이 미국 TV에 방영되었고 그는 엎드려 기도 드렸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나의 가능성의 정상을 도전케 하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 땅의 모든 장애인들이 저마다 그 삶의 가능성의 정상을 포기하지 않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오르게 하여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는 주위에서 불굴의 의지와 삶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장애을 극복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장애인은 주위의 억압과 사회적 차별로 인해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맙니다. 장애인들의 50%이상이 초등학교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수십 억 원의 국가 보조금을 지원받는 장애인복지 시설 대표들이 공금을 횡령해서 부를 축적하는 파렴치한 행위도 주위에서 목격하게 됩니다.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은 기본적인 권리도 보장 받지 못하고 폭력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 앞에서 기습시위를 벌였던 박경석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대표는 “장애인들에게 현실은 무관심과 차별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행복한 장애인, 아름다운 대한민국은 정부의 선전 속에서나 존재할 뿐입니다.”라고 고통 속에서 우리를 향해 호소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들에게 주신 가능성을 우리가, 이 사회가 무참히 짓밟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장애인에게 주신 가능성을 짓밟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더 나아가 그 가능성을 짓밟는 사회구조나 차별에 대해 방관해서도 안 되고,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그 가능성을 더 잘 발휘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피조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책의 머리말을 보고 저자의 의도나 방향을 알 수 있듯이 성서의 첫 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입니다. 하느님께서 온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 하신 후 ‘아주 좋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그저 그렇고 또 어떤 것은 별로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차별이 없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 차별이 심합니다. 특히 장애인들을 향한 차별과 멸시는 박경석 대표의 말처럼 세상에 가득 차 있습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차별이 없으신 창조주 하느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존재를 사랑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 난 것이고,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느님의 사랑, 즉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허스턴의 예화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는 근거는 장애인이든 아니든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믿음의 고백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형상을 우리의 관계 속에서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사도요한이 말한 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은 차별이 없어야 하고 사랑한다는 믿음의 고백 속에 장애인도 마땅히 포함되어야 합니다. 약자에 관심하시는 하느님의 성품으로 볼 때 더욱더 장애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목욕시켜드리는 할아버지 중에 항상 춥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 할아버지께서는 너무 춥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샤워기의 온도를 높여서 씻겨드렸습니다. 그리곤 할아버지께 ‘이제 안 추우세요?’ ‘물 따뜻하니까 어떠세요?’ 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너무 좋아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는 그냥 할아버지께서 반응해 주셔서 기뻤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면서 그 때의 일을 다시 생각하고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맞추어 다시 묵상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할아버지께서 ‘너무 좋아요’라고 했던 말씀이 마치 하느님께서 그때의 모습을 보시면서 한 말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너무 좋다’라고 하실 때 저와 할아버지는 서로의 모습 속에 하느님의 형상을 보았고 하느님께서도 그 모습을 보시면서 ’심히 좋다‘라고 말씀하시며 목욕실의 좁은 공간에서 충만한 사랑의 영으로 함께 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장애인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동일한 사랑의 영으로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다 하느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존재입니다. 자기욕심만 채우고, 형제 자매와 화해하지 못하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을 형상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 장애인입니다. 평화롭게 살지 못하고 전쟁을 일삼는 세상, 환경을 파괴하는 세상, 맘몬의 신이 지배하는 세상,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장애로 가득찬 세상입니다. 장애인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안의 이런 장애는 없는지 살펴보고 그 장애를 하느님의 가능성, 곧 하느님의 온전한 형상을 자신 안에 심음으로 극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가능성을 장애인들을 포함한 이웃의 모습 속에서도 발견하여 하느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 안에 온전함을 이루어 가는 저와 향린 교우님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