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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설교)를 문서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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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55
예수 부활, 그 이후
창세기 2, 5- 7 ; 요한 20, 19- 29
김 진 목사
지난 주 우리는 부활절 예배를 드렸고, 예수부활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예수부활 사건은 예수 공동체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부활 믿음이 없었다면, 그 부활체험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에게까지 예수신앙은 전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예수 부활사건 자체가 그런 신앙을 자동적으로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듣고 믿었다고 해서 무조건 그에게 부활신앙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난 주 교회홈페이지 게시판에 “예수를 도둑맞다”라는 명상 글을 올렸는데 여러분 중에 읽으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글의 본문말씀은 마태 28,8-15절의 말씀인데 그 말씀 내용을 보면 대사제들도 예수부활을 알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이 사라짐을 보고 경비병을 돈을 주고 매수 합니다. 많은 돈을 집어 주며 경비병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잠든 사이에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시체를 훔쳐 갔다고 말하여라. 이 소문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우리가 잘 말해서 너희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도록 하여 주겠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 경비병들은 ‘감옥행’입니다. 빌라도 총독에게 까지 허락을 받으면서 까지 예수시체를 지키라는 명령을 특별히 받고 파병된 군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이 경비병들은 도망쳤든지 아니면 그렇게 보고했다 해도 문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돈까지 받습니다. 이 이야기는 대사제들이 가장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있을 때 “내가 부활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현실이 되었고, 그들이 예수부활을 백퍼센트 믿지 않았더라도 그것과 관련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알아차렸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부활신앙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부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인데,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하셨던 분이고, 특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분인데 왜 부활을 못하셨겠어? 당연히 그럴 능력이 있으신 분이니 부활은 분명 사실이야!” 이것이 부활신앙입니까? ‘사실’(Fact)을 믿는 다고 믿음(Faith)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이 진짜로 부활했어야만 부활신앙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낮은 단계의 믿음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성서의 기록된 대로 몸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부활신앙은 불가능한 것입니까?
인도 영성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현현사상’입니다. 신이 현실의 삶에 나타난다, 현재에 나타난다는 믿음이지요. 이 때 신은 힌두교의 3대 신인 브라흐마, 쉬바, 비쉬누 뿐 아니라 위대한 영적인 삶을 살아간 성자, 구루들 또한 현존한다는 믿음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인물은 분들이 비록 육체는 죽어도 그들을 따르는 제자들은 현존한다고 믿습니다. 엄연히 그들의 무덤이 있어도, 육신으로 부활하지 않았다 해도 그들은 신으로 믿고 자신들 곁에 있다고 믿고 대화하며 체험합니다. 그들의 중요한 영성수련 중의 하나는 죽은 성자들이 살며 생활했던 공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살아있는 영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하루 종일 앉아 있습니다. 육체의 부활여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육체의 부활이 있어야 반드시 부활사상이 생긴다거나 신의 현존체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 때문인지, 인도는 1억 3천만의 신이 있다고 하기도하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습니다만 그 어떤 나라보다 보이지 않는 신의 현존을 체험하는 영적인 민감성만은 확실하게 발달한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믿어진다 해도 그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하고 또 고 그 믿음을 쫓지 않으면 부활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과학적으로 볼 때 그의 부활이 믿겨지지 않더라도 그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면서 그의 생명을 퍼트리는 사람들은 부활신앙의 사람들입니다.
현대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이런 신의 현존을 체험하는 영적인 예민함이 점점 무뎌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체험은 일상과 먼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종교학적으로 볼 때 우리 민족 또한 인도인들 못지않게 보이지 않는 존재를 체험하는 영적인 민감함이 발달한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흔적이 무교, 샤마니즘에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이 무교에 대해 정서적으로 부정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뿐 만이 아닙니다. 제가 종교간 대화와 평화를 저의 신학의 주제로 삼고 또 그런 대화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도 모든 종교에서 무교에 대한 선입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와 무관하게 무당집을 오가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의 60 %이상이 무당에게 가서 점을 본 경험이 있고 또 지금도 계속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 미신(迷神)이라고 말하고, 가르치고 배우고 또 그것을 우상 숭배라고 말하면서도 생각하면서 어렵고 힘들고, 인생의 갈림길에서 헤맬 때 점집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의 표현으로 하면 그것은 ’무교의 빠른 즉발성‘이 갖고 있는 힘 때문입니다. 바로 즉각적으로 해답을 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목사님 한테 상담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합니까 계속 다녀합니까? 이혼을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혹은 투자를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등등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기로에서 답답함을 안고 질문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목사님에게서 확실한 해답 구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좀 시간을 두고 더 기도해 봅시다‘가 목사님들이 가장 많이 하는 대답입니다. 지금 상담자는 힘들어 죽을 뚱 살 뚱하는데 기다려 봅시다만 외치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런데 무당들은 어떻게 합니까? 즉각 대답합니다. ‘이렇게 하십시오, 저렇게 하십시오’ 아주 속 시원히 즉각적으로 대답해 줍니다. 이런 문화 때문에 또 사이비 무당들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소위 신의 음성을 듣고 ’신점‘을 치는 무당들은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십시오!! 그러니까 점을 본 사람들이 일단 속히 후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부턴가 기독교는 이런 영적인 힘을 잃어 버렸습니다. 예수의 삶을 보세요.... 그가 얼마나 즉발적으로 그때그때 사람들을 치유하고 가르치고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셨는지...그는 결코 머뭇거리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쳐주고, 깨달음도 일으켰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21세기 오늘 오셔서 그렇게 하셨으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박수무당‘이라 말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예수님의 하느님 체험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라 믿었던 그 하느님의 체험이 그렇게 확신에 찬 즉발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굿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굿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신이 그곳에 오셨다는 확실한 증거를 봐야 합니다. 그래서 굿에는 신이 임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장치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돼지를 삼지창에 세우는 것... 무당들은 신의 현존을 체험하지 않고는 굿을 더 진행할 수 없습니다. 신도 안 왔는데 어떻게 공수를 내립니까? 무슨 수로 작두를 탑니까? 만용을 부렸다가는 날카로운 칼날에 발을 베기 십상 입니다. 그랬다가는 큰일 나지요. 우리 예배는 어떻지요? 여러분은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께서 예배 중에 계신다는 확신 속에서 예배를 드립니까? 생각하면 당연한 사실인데 그런 생각도 체험도 없이 예배를 드릴 때가 비일비재합니다. 예배라는 단어가 무색할 지경입니다. 또 굿에는 ‘공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수란 신의 음성을 대신해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공수를 내린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설교입니다. 그런데 이 공수는 접신하지 않고서는 공수가 아니라 공수표가 됩니다. 공수를 내릴 수 가 없습니다. 무당이 신의 대리인으로 1인칭으로 말하는데 신이 몸에 실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목사들은 언제 부턴가 예수의 영 없이, 성령의 들려줌 없이 설교를 잘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 말에 불과합니다. 본래 설교는 선포지 강의나 설명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보에 나오는 대로 하늘 뜻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 설교를 듣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가 변화되지도 않고 치유도 없습니다. 지금 제가 무교를 무조건 두둔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경험과 공부를 통해 현실 무교 안에 참 많은 문제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본래 무교가 지닌 건강한 모습이 우리 비판하듯 기복적인 미신 신앙으로 치닫고 있는 모습도 봅니다. 그러나 배울 것은 배워야 합니다. 일부이긴 하지만 저는 무당들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절박한 심정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들이 정성어린 신에 대한 절절한 기도생활을 보면 저는 정신이 바짝바짝 들 때가 많습니다. 신을 경외하고, 자신을 처절하게 신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보면 저의 신앙을 될 돌아보게 합니다. 보지지 않는 신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부활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 속에서 지금 예수의 현존을 느끼고 그 살아계신 예수와 죽음의 문화를 거부하고 그것을 생명의 문화로 바꿔가는 신앙을 말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빈 무덤이야기’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이야기는 부활 그 이후, 오늘 부활한 예수와 제자들의 만남 이야기라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우리가 오늘 믿고 따라야할 부활신앙의 구체적인 현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 말고도 부활한 예수와 제자들이 만난 이야기들이 각기 다양하게 있습니다만 오늘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이 모든 이야기를 종합해 놓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 초신자가 별로 없기 때문에 오늘 읽은 요한복음의 내용을 모르는 이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그저 예수부활의 자기 증거 정도로 이해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예수를 만났다는 이야기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 속에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다시 체험하고 따라야 될 부활체험의 내용을 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 말씀 속에서 새로운 인간의 창조, 새로운 예수 공동체의 탄생을 봅니다. 본문에서 부활한 예수와 제자들의 만남이 없었다면 오늘 예수공동체는 형성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부활한 예수를 전해 듣기만하고, 실제로 체험하지 못했다면 계속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또 부활신앙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오늘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뒤 3일 지났는데도 여전히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한 집에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모여 있었습니다. 이 상황묘사는 지금 예수 공동체의 상태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지난 3년간 벌려 왔던 예수운동의 실패를 받아 드려야 하는 시간입니다. 불과 3년 전 세례요한이 목이 베임으로 해서 끝나버렸던 세례요한 공동체의 흩어짐처럼 예수 공동체와 하느님 나라 운동도 사라지려는 순간입니다. 그나마 모여 있긴 하는데 더 이상 밖으로 용감하게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유다인들이 무서워 ‘두려움’에 젖어 있는 제자들의 모습들 속에서 어떤 새로운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절망의 순간 부활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꽁꽁 걸어 잠근 집으로 들어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셨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샬롬!! “평화가 있기를...” 이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지난 한 주간 엄청난 혼란과 잔인한 경험한 제자들, 그리고 절망의 절망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가 있기를”라고 비는 예수의 평화의 인사는 제자들의 모든 고통을 한 순간에 씻어내는 치유였습니다. 예수부활체험은 평화체험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평화를 체험하는 것 그것이 예수부활, 예수의 현존체험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예수부활을 체험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의 결과는 우리의 안에 평화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평화입니다. 향린공동체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단순이 정적인 감정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두려움, 지난날의 어두움,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역동적인 평화입니다. 예수평화는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힘이고 예수부활체험은 그 평화의 힘을 통해 우리가 다시 새롭게 됩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인사를 전하고 나서도 제자들이 못 미더워했는지 예수는 친히 손과 옆구리를 보여 줍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유령인지 알고 놀랬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말합니다.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뿐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가 죽음에서 다시 되살아 난 듯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악몽 같았던 지난 삼일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그런 변화와 기쁨이었습니다. 죽음이 끝 인줄 알았는데, 예수운동이 끝난 줄 알았는데 예수부활체험은 그들로 하여금 새롭게 다시 시작하게 하는 힘이 된 것입니다. 예수는 다시 말합니다. “평화가 있기를!” 예수님이 다시 평화를 빕니다. 이것은 평화에 대한 분명한 강조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이 빈 평화의 인사와 지금 다시 평화를 비는 상황과 목적이 다릅니다. 앞의 평화가 이전의 상태에서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평화라면 이제 다시 비는 평화는 우리를 실천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평화의 모습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파송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예수부활 후 제자들에게 하신 것은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를 보낸 것처럼, 세상으로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이때도 평화는 없어서는 안됩니다. 평화를 잃고서는 예수 제자로 세상에서 예수운동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 미움과 분노를 지니고서는 일반 사회운동은 가능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수운동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향린교회가 사회선교를 많이 하는데 개인적으로나 교회 공동체로서나 이 평화를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평화를 잃지 않기를 더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부활을 체험하는 사람은 소명을 받습니다. 부르심을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세상에서 사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내가 왜 예수를 믿는지가 분명해 집니다. 예수의 부르심, 세상으로 나아감의 이유가 분명해 집니다. 내가 아직도 예수 믿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라는 마음이 드는 분이 계시면 예수부활 체험을 더 진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읽은 구약본문을 연상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자신의 호흡을 불어 넣자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이 떠올려 집니다. 오늘 예수님의 큰 호흡을 불어 넣으시는 모습은 마치 새로운 존재의 탄생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이전 존재가 아닙니다. 영으로 새로워진 존재들입니다. 두려움에 떨거나 무서워 도망간 존재가 아니라 당당하게 세상으로 파송된 존재들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체험하기 전과는 180도 다른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말씀에서 그것을 보다 분명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이 상황에서 용서를 이야기 하지요? 그것은 용서의 권한이 새롭게 변화된 존재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죄를 용서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 밖에 없다고 믿어졌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네 죄가 용서받았다’라는 말씀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자들이 그 반열에 오릅니다. ‘죄를 사할 수 있는 신적인 존재’로의 변화입니다. 예수부활체험은 이처럼 우리의 존재를 새롭게 변화시켜내는 사건입니다. 부활신앙은 바로 반복되는 이런 체험을 통해 이 세상의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 그 이후 우리의 삶은 평화를 통한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 평화를 담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영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켜내는 것... 거기에는 용서할 수 있는 신적권위가 주어져 있는데 이것이 부활신앙으로 우리의 삶에서 계속 반복되고 심화되는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토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토마는 오늘 이야기 때문에 믿음 없는 토마, 혹은 의심 많은 토마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혀 졌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토마 뿐 아니라 예수부활 신앙이 없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서에 기록된 토마의 몇 안 되는 기록을 유추하건대 토마는 참 뜨겁고 적극적이고 솔직한 사람이었던 갔습니다. (요한 11:16, 요한 14장 5절 참조)
오늘 본문 말씀에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 하겠소"라고 말한 것으로 보면 그는 아주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제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토마의 모습은 비단 토마의 뿐 아니라 예수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의심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심도 때로는 하느님과 소통하는 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척 하지 말고, 보다 분명하게 예수를 체험하고 싶은 갈망 때문에 의심하는 것이 더 큰 믿음입니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미지근한 신앙생활 보다는 한 번 제대로 의심해보고, 그리고 나서 의심을 버리고 예수를 믿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길, 하느님 나라 운동이 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길이요 운동이 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런 믿음이 듭니까? 우리 향린교회가 예수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믿습니까? 우리가 가는 길이 과연 올바른 길인가? 의심해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의심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절대 안됩니다. 그 의심 끝에 하느님, 예수그리스도의 답을 들어야 합니다. 그 해답을 들을 마음이 없다면 의심하지 마세요. 그 의심은 차라리 우리와 교회의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독이 될 수 있으니까요.
주님께서 토마의 의심을 아신 것처럼, 여러분이나 저나 믿는 척 해도 의심하는 것 이미 알고 계시니까 믿는척하지 하지 말고 의심을 내 놓아 보세요. 그러면 확실하게 처방해 주실 것입니다. 토마에게는 이렇게 말씀 하셨지요 ‘아예,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지고,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아주 리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토마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 부활한 예수님을 보지도 않고 믿는 우리, 우리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행복한 사람입니까? 보지 않아도 믿는 것이 복된 믿음이긴 하지만요, 그 믿음이 가능하려면 보이진 않지만 예수부활이 우리 삶에서 체험되어야 합니다. 보지 않아 못 미더워했던 토마는 인도의 복음을 전하며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보지 않고도 믿은 우리’는 진리를 위해 어떤 길로 걸어가 가겠습니까?
이 예수부활, 그 이후를 살아가는 저와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들이 이 부활체험 속에서 세계를 변화시켜가는 제자들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창세기 2, 5- 7 ; 요한 20, 19- 29
김 진 목사
지난 주 우리는 부활절 예배를 드렸고, 예수부활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예수부활 사건은 예수 공동체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부활 믿음이 없었다면, 그 부활체험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에게까지 예수신앙은 전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예수 부활사건 자체가 그런 신앙을 자동적으로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듣고 믿었다고 해서 무조건 그에게 부활신앙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난 주 교회홈페이지 게시판에 “예수를 도둑맞다”라는 명상 글을 올렸는데 여러분 중에 읽으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글의 본문말씀은 마태 28,8-15절의 말씀인데 그 말씀 내용을 보면 대사제들도 예수부활을 알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이 사라짐을 보고 경비병을 돈을 주고 매수 합니다. 많은 돈을 집어 주며 경비병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잠든 사이에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시체를 훔쳐 갔다고 말하여라. 이 소문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우리가 잘 말해서 너희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도록 하여 주겠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 경비병들은 ‘감옥행’입니다. 빌라도 총독에게 까지 허락을 받으면서 까지 예수시체를 지키라는 명령을 특별히 받고 파병된 군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이 경비병들은 도망쳤든지 아니면 그렇게 보고했다 해도 문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돈까지 받습니다. 이 이야기는 대사제들이 가장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있을 때 “내가 부활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현실이 되었고, 그들이 예수부활을 백퍼센트 믿지 않았더라도 그것과 관련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알아차렸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부활신앙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부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인데,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하셨던 분이고, 특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분인데 왜 부활을 못하셨겠어? 당연히 그럴 능력이 있으신 분이니 부활은 분명 사실이야!” 이것이 부활신앙입니까? ‘사실’(Fact)을 믿는 다고 믿음(Faith)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이 진짜로 부활했어야만 부활신앙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낮은 단계의 믿음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성서의 기록된 대로 몸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부활신앙은 불가능한 것입니까?
인도 영성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현현사상’입니다. 신이 현실의 삶에 나타난다, 현재에 나타난다는 믿음이지요. 이 때 신은 힌두교의 3대 신인 브라흐마, 쉬바, 비쉬누 뿐 아니라 위대한 영적인 삶을 살아간 성자, 구루들 또한 현존한다는 믿음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인물은 분들이 비록 육체는 죽어도 그들을 따르는 제자들은 현존한다고 믿습니다. 엄연히 그들의 무덤이 있어도, 육신으로 부활하지 않았다 해도 그들은 신으로 믿고 자신들 곁에 있다고 믿고 대화하며 체험합니다. 그들의 중요한 영성수련 중의 하나는 죽은 성자들이 살며 생활했던 공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살아있는 영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하루 종일 앉아 있습니다. 육체의 부활여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육체의 부활이 있어야 반드시 부활사상이 생긴다거나 신의 현존체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 때문인지, 인도는 1억 3천만의 신이 있다고 하기도하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습니다만 그 어떤 나라보다 보이지 않는 신의 현존을 체험하는 영적인 민감성만은 확실하게 발달한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믿어진다 해도 그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하고 또 고 그 믿음을 쫓지 않으면 부활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과학적으로 볼 때 그의 부활이 믿겨지지 않더라도 그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면서 그의 생명을 퍼트리는 사람들은 부활신앙의 사람들입니다.
현대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이런 신의 현존을 체험하는 영적인 예민함이 점점 무뎌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체험은 일상과 먼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종교학적으로 볼 때 우리 민족 또한 인도인들 못지않게 보이지 않는 존재를 체험하는 영적인 민감함이 발달한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흔적이 무교, 샤마니즘에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이 무교에 대해 정서적으로 부정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뿐 만이 아닙니다. 제가 종교간 대화와 평화를 저의 신학의 주제로 삼고 또 그런 대화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도 모든 종교에서 무교에 대한 선입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와 무관하게 무당집을 오가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의 60 %이상이 무당에게 가서 점을 본 경험이 있고 또 지금도 계속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 미신(迷神)이라고 말하고, 가르치고 배우고 또 그것을 우상 숭배라고 말하면서도 생각하면서 어렵고 힘들고, 인생의 갈림길에서 헤맬 때 점집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의 표현으로 하면 그것은 ’무교의 빠른 즉발성‘이 갖고 있는 힘 때문입니다. 바로 즉각적으로 해답을 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목사님 한테 상담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합니까 계속 다녀합니까? 이혼을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혹은 투자를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등등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기로에서 답답함을 안고 질문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목사님에게서 확실한 해답 구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좀 시간을 두고 더 기도해 봅시다‘가 목사님들이 가장 많이 하는 대답입니다. 지금 상담자는 힘들어 죽을 뚱 살 뚱하는데 기다려 봅시다만 외치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런데 무당들은 어떻게 합니까? 즉각 대답합니다. ‘이렇게 하십시오, 저렇게 하십시오’ 아주 속 시원히 즉각적으로 대답해 줍니다. 이런 문화 때문에 또 사이비 무당들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소위 신의 음성을 듣고 ’신점‘을 치는 무당들은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십시오!! 그러니까 점을 본 사람들이 일단 속히 후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부턴가 기독교는 이런 영적인 힘을 잃어 버렸습니다. 예수의 삶을 보세요.... 그가 얼마나 즉발적으로 그때그때 사람들을 치유하고 가르치고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셨는지...그는 결코 머뭇거리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쳐주고, 깨달음도 일으켰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21세기 오늘 오셔서 그렇게 하셨으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박수무당‘이라 말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예수님의 하느님 체험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라 믿었던 그 하느님의 체험이 그렇게 확신에 찬 즉발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굿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굿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신이 그곳에 오셨다는 확실한 증거를 봐야 합니다. 그래서 굿에는 신이 임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장치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돼지를 삼지창에 세우는 것... 무당들은 신의 현존을 체험하지 않고는 굿을 더 진행할 수 없습니다. 신도 안 왔는데 어떻게 공수를 내립니까? 무슨 수로 작두를 탑니까? 만용을 부렸다가는 날카로운 칼날에 발을 베기 십상 입니다. 그랬다가는 큰일 나지요. 우리 예배는 어떻지요? 여러분은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께서 예배 중에 계신다는 확신 속에서 예배를 드립니까? 생각하면 당연한 사실인데 그런 생각도 체험도 없이 예배를 드릴 때가 비일비재합니다. 예배라는 단어가 무색할 지경입니다. 또 굿에는 ‘공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수란 신의 음성을 대신해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공수를 내린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설교입니다. 그런데 이 공수는 접신하지 않고서는 공수가 아니라 공수표가 됩니다. 공수를 내릴 수 가 없습니다. 무당이 신의 대리인으로 1인칭으로 말하는데 신이 몸에 실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목사들은 언제 부턴가 예수의 영 없이, 성령의 들려줌 없이 설교를 잘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 말에 불과합니다. 본래 설교는 선포지 강의나 설명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보에 나오는 대로 하늘 뜻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 설교를 듣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가 변화되지도 않고 치유도 없습니다. 지금 제가 무교를 무조건 두둔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경험과 공부를 통해 현실 무교 안에 참 많은 문제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본래 무교가 지닌 건강한 모습이 우리 비판하듯 기복적인 미신 신앙으로 치닫고 있는 모습도 봅니다. 그러나 배울 것은 배워야 합니다. 일부이긴 하지만 저는 무당들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절박한 심정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들이 정성어린 신에 대한 절절한 기도생활을 보면 저는 정신이 바짝바짝 들 때가 많습니다. 신을 경외하고, 자신을 처절하게 신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보면 저의 신앙을 될 돌아보게 합니다. 보지지 않는 신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부활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 속에서 지금 예수의 현존을 느끼고 그 살아계신 예수와 죽음의 문화를 거부하고 그것을 생명의 문화로 바꿔가는 신앙을 말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빈 무덤이야기’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이야기는 부활 그 이후, 오늘 부활한 예수와 제자들의 만남 이야기라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우리가 오늘 믿고 따라야할 부활신앙의 구체적인 현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 말고도 부활한 예수와 제자들이 만난 이야기들이 각기 다양하게 있습니다만 오늘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이 모든 이야기를 종합해 놓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 초신자가 별로 없기 때문에 오늘 읽은 요한복음의 내용을 모르는 이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그저 예수부활의 자기 증거 정도로 이해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예수를 만났다는 이야기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 속에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다시 체험하고 따라야 될 부활체험의 내용을 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 말씀 속에서 새로운 인간의 창조, 새로운 예수 공동체의 탄생을 봅니다. 본문에서 부활한 예수와 제자들의 만남이 없었다면 오늘 예수공동체는 형성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부활한 예수를 전해 듣기만하고, 실제로 체험하지 못했다면 계속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또 부활신앙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오늘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뒤 3일 지났는데도 여전히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한 집에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모여 있었습니다. 이 상황묘사는 지금 예수 공동체의 상태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지난 3년간 벌려 왔던 예수운동의 실패를 받아 드려야 하는 시간입니다. 불과 3년 전 세례요한이 목이 베임으로 해서 끝나버렸던 세례요한 공동체의 흩어짐처럼 예수 공동체와 하느님 나라 운동도 사라지려는 순간입니다. 그나마 모여 있긴 하는데 더 이상 밖으로 용감하게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유다인들이 무서워 ‘두려움’에 젖어 있는 제자들의 모습들 속에서 어떤 새로운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절망의 순간 부활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꽁꽁 걸어 잠근 집으로 들어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셨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샬롬!! “평화가 있기를...” 이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지난 한 주간 엄청난 혼란과 잔인한 경험한 제자들, 그리고 절망의 절망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가 있기를”라고 비는 예수의 평화의 인사는 제자들의 모든 고통을 한 순간에 씻어내는 치유였습니다. 예수부활체험은 평화체험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평화를 체험하는 것 그것이 예수부활, 예수의 현존체험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예수부활을 체험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의 결과는 우리의 안에 평화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평화입니다. 향린공동체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단순이 정적인 감정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두려움, 지난날의 어두움,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역동적인 평화입니다. 예수평화는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힘이고 예수부활체험은 그 평화의 힘을 통해 우리가 다시 새롭게 됩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인사를 전하고 나서도 제자들이 못 미더워했는지 예수는 친히 손과 옆구리를 보여 줍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유령인지 알고 놀랬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말합니다.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뿐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가 죽음에서 다시 되살아 난 듯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악몽 같았던 지난 삼일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그런 변화와 기쁨이었습니다. 죽음이 끝 인줄 알았는데, 예수운동이 끝난 줄 알았는데 예수부활체험은 그들로 하여금 새롭게 다시 시작하게 하는 힘이 된 것입니다. 예수는 다시 말합니다. “평화가 있기를!” 예수님이 다시 평화를 빕니다. 이것은 평화에 대한 분명한 강조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이 빈 평화의 인사와 지금 다시 평화를 비는 상황과 목적이 다릅니다. 앞의 평화가 이전의 상태에서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평화라면 이제 다시 비는 평화는 우리를 실천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평화의 모습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파송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예수부활 후 제자들에게 하신 것은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를 보낸 것처럼, 세상으로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이때도 평화는 없어서는 안됩니다. 평화를 잃고서는 예수 제자로 세상에서 예수운동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 미움과 분노를 지니고서는 일반 사회운동은 가능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수운동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향린교회가 사회선교를 많이 하는데 개인적으로나 교회 공동체로서나 이 평화를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평화를 잃지 않기를 더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부활을 체험하는 사람은 소명을 받습니다. 부르심을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세상에서 사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내가 왜 예수를 믿는지가 분명해 집니다. 예수의 부르심, 세상으로 나아감의 이유가 분명해 집니다. 내가 아직도 예수 믿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라는 마음이 드는 분이 계시면 예수부활 체험을 더 진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읽은 구약본문을 연상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자신의 호흡을 불어 넣자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이 떠올려 집니다. 오늘 예수님의 큰 호흡을 불어 넣으시는 모습은 마치 새로운 존재의 탄생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이전 존재가 아닙니다. 영으로 새로워진 존재들입니다. 두려움에 떨거나 무서워 도망간 존재가 아니라 당당하게 세상으로 파송된 존재들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체험하기 전과는 180도 다른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말씀에서 그것을 보다 분명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이 상황에서 용서를 이야기 하지요? 그것은 용서의 권한이 새롭게 변화된 존재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죄를 용서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 밖에 없다고 믿어졌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네 죄가 용서받았다’라는 말씀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자들이 그 반열에 오릅니다. ‘죄를 사할 수 있는 신적인 존재’로의 변화입니다. 예수부활체험은 이처럼 우리의 존재를 새롭게 변화시켜내는 사건입니다. 부활신앙은 바로 반복되는 이런 체험을 통해 이 세상의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 그 이후 우리의 삶은 평화를 통한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 평화를 담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영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켜내는 것... 거기에는 용서할 수 있는 신적권위가 주어져 있는데 이것이 부활신앙으로 우리의 삶에서 계속 반복되고 심화되는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토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토마는 오늘 이야기 때문에 믿음 없는 토마, 혹은 의심 많은 토마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혀 졌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토마 뿐 아니라 예수부활 신앙이 없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서에 기록된 토마의 몇 안 되는 기록을 유추하건대 토마는 참 뜨겁고 적극적이고 솔직한 사람이었던 갔습니다. (요한 11:16, 요한 14장 5절 참조)
오늘 본문 말씀에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 하겠소"라고 말한 것으로 보면 그는 아주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제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토마의 모습은 비단 토마의 뿐 아니라 예수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의심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심도 때로는 하느님과 소통하는 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척 하지 말고, 보다 분명하게 예수를 체험하고 싶은 갈망 때문에 의심하는 것이 더 큰 믿음입니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미지근한 신앙생활 보다는 한 번 제대로 의심해보고, 그리고 나서 의심을 버리고 예수를 믿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길, 하느님 나라 운동이 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길이요 운동이 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런 믿음이 듭니까? 우리 향린교회가 예수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믿습니까? 우리가 가는 길이 과연 올바른 길인가? 의심해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의심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절대 안됩니다. 그 의심 끝에 하느님, 예수그리스도의 답을 들어야 합니다. 그 해답을 들을 마음이 없다면 의심하지 마세요. 그 의심은 차라리 우리와 교회의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독이 될 수 있으니까요.
주님께서 토마의 의심을 아신 것처럼, 여러분이나 저나 믿는 척 해도 의심하는 것 이미 알고 계시니까 믿는척하지 하지 말고 의심을 내 놓아 보세요. 그러면 확실하게 처방해 주실 것입니다. 토마에게는 이렇게 말씀 하셨지요 ‘아예,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지고,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아주 리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토마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 부활한 예수님을 보지도 않고 믿는 우리, 우리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행복한 사람입니까? 보지 않아도 믿는 것이 복된 믿음이긴 하지만요, 그 믿음이 가능하려면 보이진 않지만 예수부활이 우리 삶에서 체험되어야 합니다. 보지 않아 못 미더워했던 토마는 인도의 복음을 전하며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보지 않고도 믿은 우리’는 진리를 위해 어떤 길로 걸어가 가겠습니까?
이 예수부활, 그 이후를 살아가는 저와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들이 이 부활체험 속에서 세계를 변화시켜가는 제자들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