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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설교)를 문서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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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55
십자가와 평화의 영성(4)-종려주일
바보 예수 (시편 118, 21-29절 마르코 11장 1-10절)
[종려가지를 흔들며]
유대인들의 최대명절은 과월절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집트 파라오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 민족을 해방시킨 날입니다. 따라서 이 날에는 유대 땅 뿐만 아니라 저 멀리 외국에 살던 유대인들까지도 모두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기에 이때는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천 년 전 오늘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을 들어가십니다. 이때 예수님을 보던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라고 소리쳤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과월절에 하느님의 종 메시야 가 와서 지배자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왕의 옛 영광을 회복시켜 줄 것을 믿고 기다려왔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날을 예수님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종려주일이라고 부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일주일간 계속되는 과월절 축제의 첫날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여러분께서는 이천년전 이 과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 순례자라 여기고 실연을 해보겠습니다. 제가 나갔다가 들어올 때에 나눠드린 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라고 소리를 치시기 바랍니다. 연습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상징성]
이천년 전 예수님께서 사람이 한 번도 타보지 않는 나귀새끼를 타셨다면 이 나귀새끼는 당연히 기우뚱기우뚱 넘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폭소를 낳게 하는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군중들이 외친 함성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독립운동만세 사건입니다. 로마총독부로서는 간담이 떨어지는 장면입니다. 따라서 군중들 또한 이를 하나의 정치적 풍자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웃기는 장면을 오늘의 상황에 맞게 재연한 것입니다. 2년전에는 제가 광대 옷을 입고 들어왔었고, 오늘은 스케이트보드와 헬멧과 선글라스를 쓰고 들어왔습니다.
제가 주일 예배가 아닌 어느 휴일에 여의도광장에 이 모습으로 나타났더라면 이것은 하나도 관심을 끌만한 장면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성시여기는 이 주일예배 시간에 그것도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이 하늘뜻펴기 시간에 담임목사가 이런 복장으로 들어왔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여러분은 폭소를 금할 수밖에 없고 종교의 엄숙함과 이에 근거한 전통적인 어떤 체제가 무너지는 강한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마 한국교회에서 예수님의 나귀타심을 이러한 종교와 정치에 대한 강한 풍자로 보고 이런 시도를 하는 목사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어느 신학자의 주석에도 예루살렘 입성의 장면을 이렇게 풍자와 해학의 사건으로 해석한 사람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제 닷새 후에 죽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행하신 정치적 풍자요 여기에 깊은 종교적인 평화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이 장면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마태오가 그러했듯이 구약 즈가리야서 9장의 예언의 말씀에 비유하여 이를 겸손함으로만 설명합니다. 그러나 즈가리야의 말씀도 그 결론부분을 깊이 묵상하여 보면 나귀새끼와 연결된 세계 평화는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비폭력을 통한 정의와 평화 실현이라는 매우 깊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큰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시리라.’
[축제의 회복]
최근 <예수, 하바드에 오다>란 책을 통해 현대 젊은이들과 예수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부시의 이라크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고통 받는 이라크 민중들이야 말로 오늘의 고난받는 그리스도에 비유한 세계적인 진보 신학자 하비콕스가 있습니다. 40년 전 <세속도시>(Secular City)란 책을 통해 서구 신학계에 매우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던 인물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하느님은 하늘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세속도시 속에서 함께 일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사회참여를 강조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특별한 얘기가 아니지만 당시에는 교회와 세상을 성과 속으로 철저히 구분하는 근본주의 미국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강한 비판이었고 이는 60년대 남미 해방신학과 박정희군사독재에 직면한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참여를 통한 하느님 선교신학을 발전시키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비콕스는 그리고 나서 5년 후에 <바보제>란 책을 발간했는데, 이 책은 세속도시만큼 선풍적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 제목 자체가 던지는 신선함이 있었고 저 개인적으로는 어려서부터 받아왔던 보수적 신앙의 분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신학적 계시를 받았습니다. 당시 군사독재 계엄령 하에서 한국신학대학의 축제 이름을 바보제라고 바꿔 불렀는데, 담당형사가 이를 보더니 그 행사 광고지를 북북 찢었습니다.(당시 공권력은 대학 내에 마음대로 드나들고 모든 행사 그리고 강의내용까지 그들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을 때였습니다.)
아마 그도 스스로를 바보라 부르는 일에서 신학생들의 정치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읽었던 것이지요. 중세기 기간 중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는 ‘바보제’라고 불리우는 휴일이 성행하였습니다. 대체로 정월 초하루쯤에 거행되는 이 명절이 오면 늘 상 경건하기만 하던 사제들도 근엄하기 이를 데 없던 어르신네들도 모두가 우스꽝스럽고 징글맞은 가면을 쓰고 거리로 뛰어나옵니다. 목청을 뽑아 민요를 부르는 사람, 술에 취하여 마냥 흥겨워하는 사람, 풍자와 조소를 퍼붓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세상이 발칵 뒤집힌다. 바보제의 기간 중에는 풍속이나 관례를 아무리 조롱하여도 상관이 없으며 국가 최고급의 명사들을 대상으로 야유를 퍼부어도 용납이 됩니다. 그래서 사회 고위층들은 이를 혹평하고 교회공의회도 이를 금지하는 법을 냈지만, 16세기까지 계속되다가 종교개혁 시대에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이것의 잔재가 미국에서 10월 마지막 날에 갖는 할로윈이라는 풍속인데, 요즘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이를 흉내 내어 10월 마지막 날에 가면을 쓰고 거리 축제를 벌이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회의 권력층이나 종교적 사제들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이런 문화는 서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인 탈춤이나 판소리에도 있습니다. 봉산탈춤의 한 부분을 보면 말뚝이가 양반이 오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조롱합니다. <쉬, 양반 나오신다. 양반. 양반이라고 하니까 노론 소론 호조 병조 옥당을 다 지내시고 삼정승 육판조를 다 지내고 퇴로재상으로 계신 양반인줄 아지 마시오. 재잘양이라는 양자에 개다리 소반 반자를 쓰는 양반이 나오신단 말이오.> <양반이 말뚝이를 부르는디, 짐짓 모른 체 하니까 양반이 화를 내며 ‘야 이놈 말뚝아’ 하니 말뚝이 말하기를 ‘에에 아 제미를 붙을 양반인지 좌반인지 허리 꺽어 절반인지 개다리 소반인지 꾸래미전에 백반인지 말뚝아 다리 절뚝아 호도 엿장사 오는데 제 핼에비 채듯 왜 이리 찾소?>
동서양을 막론하고 억압된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에게는 축제를 통해 이렇게 사회 지도층을 조롱함으로 상하가 뒤집혀진 사회를 공상한다는 것은 삶의 숨통을 튀는 일임과 동시에 문화적으로도 상당한 가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동서양 모두 배금주의와 과학이성주의에 눌려 이러한 축제적 전통을 잃어버리고 그 잔재만 전통문화재란 이름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師)자 붙은 사람들의 기득권 수호와 민중들의 문화를 경멸하는 오만하고 배타적인 태도가 깔려 있습니다. 사자 붙은 사람들의 해석에 의하면(저도 결국 이런 부류의 한 사람이니까) 서구의 희랍문화에서도 규율과 지성을 앞세우는 아폴로적인 문화가 축제와 감성을 촉발하는 디오니소스적인 문화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우리나라 또한 유학의 영향으로 양반 중인 상놈 계급으로 차별을 두어 글공부를 최고로 여기고 몸으로 뛰고 손에 흙 묻히는 일은 모두 상놈들이나 하는 짓거리로 보는 것이 같은 문화적 사고입니다. 가장 유명한 예가 이조말엽 미국 선교사들이 테니스를 치는 것을 보고 양반들이 혀를 차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아니 여보시오 선교사 양반들 그렇게 땀 흘리는 일은 하인배들이나 시키고 구경이나 할 것이지 뭘 그리 뛰어다니시오?’
특히 종교는 전통과 제도 그리고 규율을 중시하기에 그런 분위기로 쉽게 휘말려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10년 전 고국방문 길에 강남의 인텔리들이 모이고 지성적인 설교로 유명한 한 대형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한 부 한 부 예배가 끝날 때마다 2,3천 명의 청중이 엇갈리면서 맨 앞줄에서부터 차곡차곡 앉는데 얼마나 질서 있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설교시간에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얼마나 엄숙하게 드리는지 옆 사람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전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 미국의 자유로운 예배 분위기에 익숙했던 저로서는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조금 있다 얘기하겠지만 강정구교우 재판시에 일어난 ‘예써’라는 에피소드도 같은 맥락 속에 있습니다.
인간이란 그 본성상 노동하고 사색을 하는 동물일 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과 기도하며 즐기는 축제의 인간(homo festivus) 인 것입니다. 황금만능사상과 기계 중심의 산업화와 그리고 도시중심의 아파트문화는 이러한 축제의 인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유대 최고의 명절인 해방절 첫날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하신 의미를 보다 축제적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거의 대부분 인류대속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비장한 의미에서 곧 아폴로적 신학 입장에서만 해석해왔다면 이제는 보다 민중적인 입장, 곧 웃음과 축제를 즐기는 디오니소스적 신학적 해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웃으시는 예수]
예수님을 그린 초상화가 많이 있습니다. 예배실 뒷면에 걸려 있는 그림들은 그런 것중 몇 그림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시는 목자 예수,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고뇌하시는 예수, 광야에서 홀로 기도하시는 예수, 세례자 요한이 ‘저 어린 양을 보라’고 외치는 예수, 이외에도 우리가 아는 대로는 하얀 옷을 입은 부활의 주님이나 하늘의 천군천사를 거느리고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 포효하는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와 같이 신적 모습으로 그린 그림이 있는가 하면, 문 두드리는 예수, 성전 뜰에서 채찍을 들어 분노하시는 예수, 노동하시는 예수 등 인간적인 면을 그린 그림들도 있습니다. 이 많은 예수 그림들 가운데 제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여기 들고 나온 ‘웃으시는 예수’ 그림입니다. 30년 전 미국의 어느 수도원을 방문했다가 너무 좋아서 여러 장을 구입해 가까운 지인들에게 나눠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전 지금도 이 그림을 바라보면서 자유하는 혼으로서의 어떤 영감을 얻곤 합니다. 고뇌하는 예수님의 얼굴과 길 잃은 양을 찾은 목자 예수님을 그린 윤임자권사님께 이번에는 웃으시는 예수님을 한번 그려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사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기록은 있지만,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웃으신 적이 없어서 그런 기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기에 특별히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어쩌다 한 번씩 우신 적이 있어 이는 특별한 일이기에 기록으로 남긴 것이라고 봅니다.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미심쩍은 얼굴을 하신 분들이 계시는데, 이는 한구절의 말씀만 보아서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비판했습니까?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먹고 마셨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먹고 마신 것이 아니라 즐겨 마셨다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즐겨하신 것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따라 포도주를 즐겨합니다. 저에게는 큰 즐거움이라 사순절 기간 동안에는 신앙의 훈련을 위해 절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즐겨하셨다는 비난을 받으셨는데,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가시는 곳은 항상 떠들썩하는 분위기 곧 삶의 축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단지 포도주를 즐긴 사람이 아니라 아예 포도주를 만든 장본인으로 말합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첫 번째 이적(sign)인데, 왜 하필이면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타부시 되는 포도주 만드는 일을 맨 처음에 얘기하고 있는 것인가?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이적과 다른 세복음서, 공관복음서에서 말하는 기적(miracle)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곧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독생하신 아들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드시는 이 이적이 의도하는 바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세상은 마치 포도주가 떨어진 결혼식과 같이 삭막한 세상이었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 세상이 흥겨워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에 맞추어서 글이 씌어졌기에 전체적으로 비장한 분위기를 띠울 수밖에 없지만, 군데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깊은 풍자와 해학이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비난하는 얘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너희는 땅의 소산물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 눈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어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다.’ 만약에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그림을 그린다면 사람이 입을 크게 벌리고 낙타를 집어삼키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될 것입니다. 잔과 접시의 겉만 닦는다든지, 회칠한 무덤 같다든지 형제의 눈 속에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하는 이 과장법 또한 당시의 지도자들을 비웃는 풍자가 담긴 해학언어입니다. 이를 듣고 있는 차별받는 민중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머가 넘치는 분이셨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죽음을 무너뜨린 바보 예수]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언제나 장엄하고 비장한 태도로 다른 말로 하면 꼭 인상을 쓰고 가야만 하는 것인가? 죽음은 피하고 싶고 수난이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꼭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는다는 것이 꼭 고통스러운 일이여만 하는 것일까?
불가의 고승들은 죽을 때에 매우 독특한 모습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칩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혹은 서서 혹은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삶을 마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십자가 위에서 손과 발에 못을 박히고 허리에는 창에 찔려 몸속의 모든 피를 밖으로 다 쏟아내며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치며 고통스럽게 죽으셨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공권력에 의한 폭력의 희생자로서의 죽어가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또한 이런 죽음을 짐작하셨고 이 죽음을 바라보며 오늘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사실은 죽음의 입성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성을 들어오실 때에 예수님은 인상을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몸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기우뚱거리는 새끼 나귀위에서 함께 기우뚱거리셨고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흥에 겨워 춤을 추셨다는 것이고 그리고 군중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배꼽을 잡고 웃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보와 같은 너털웃음을 웃으시며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신 것입니다.
전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정치적 풍자로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고 스스로 바보가 되는 해학을 통해 당시의 정치종교지배체제에 대한 강한 도전을 하신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귀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시어 성전 제사장들을 힘을 뒤 배경으로 삼고 있는 제상용 비둘기와 양을 파는 상인들과 성전세를 바치기 위한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그리고 그들을 성전 뜰에서 내어 쫓아버리는 엄청난 혁명을 시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부활은 이미 죽음의 세력을 웃음과 해학으로 무력화시켜버린 예루살렘 입성 때에 나귀 새끼 등 위에서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죽음을 풍자와 해학으로 맞받아친 사람들이 반드시 고승이나 수도승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도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에서 존 웨인 쉴레터라는 사람이 자기 어머니가 세상 떠나기 8시간 전에 자신의 마지막 자리를 보기 위해 모여든 자녀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사랑하는 아이들아, 내가 죽은 후 내 무덤에는 어떤 꽃도 가져오지 말아라. 왜냐하면 나는 그 자리에 없을테니까. 나는 육체를 떠나면 곧장 유럽으로 날아갈 예정이다. 네 아빠가 밤낮 유럽 데려간다고 약속만 했다가 한 번도 가지 못했잖아.” 그리고는 ‘내일 아침 다시 만나자.’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합니다. 이 어머니는 죽은 것이 아니지요. 죽음을 해학으로 이긴 이 어머님은 자녀들의 마음속에 웃음으로 영원토록 살아 있습니다. 죽음과 웃음과 종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지만 이는 사회가 만들어준 허위일 따름이요 우리들은 믿음 안에서 얼마든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게시판에도 실었지만, 화요일 강정구교우님의 국가보안법 위반 2심 재판정에서 제가 저지른 하나의 에피소드 또한 종교인으로 갖는 잘못된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봅니다. 그날은 변호인단의 증인으로 이철기동국대교수께서 나와서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에 대한 증언을 하시었습니다. 세계군사전문가들이 본 객관적인 남한의 군사력은 세계 6위이고 북한은 30위권 밖이다. 게다가 군사전략상 공격을 하여 승리하려면 상대방보다 적어도 3배의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따라서 북한은 결코 남침을 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검사의 반대심문이 있었는데, 이철기교수께서 작전계획 5027이라는 단어를 쓰자 이는 국가기밀에 해당하는 사항이라고 말문을 막았습니다. 그러자 이교수는 이는 모든 언론이 얘기하고 있는 하나의 상식이라고 답변을 하였고 동시에 방청석에서도 너무나 한심한 질문에 실소가 나왔고 한 두 사람은 ‘아니 검사는 신문도 읽지 않는 것 아니냐?’고 한탄 섞인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검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판사는 방청석이 시끄럽다는 쪽으로 갑작스레 권위적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큰 목소리로 ‘여러분 여러분’ 하고 우리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그래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때 나도 모르게 ‘예 써’하고 답을 했습니다. 바보가 된 것이지요.
사실은 우리가 약간 소란을 피운 것은 검사의 어리석은 질문으로 인한 것임을 잘 알고 있는 판사가 마치 우리가 뭔가를 잘못했다고 추궁하는 그 권위적인 태도가 매우 못마땅하고 ‘여러분 여러분’ 하는 소리가 마치 군대에서 중대장이 하는 위압적인 말투로 여겨 제가 풍자적으로 반응을 한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은 제가 후에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이렇다는 해석을 하는 것이고 그 당시로서야 단 2,3 초 만에 일어난 순간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일어서라는 명령을 받았고 한동안 서로 쳐다보다가 제가 사과한 후 그냥 끝났습니다. 아마 외국 같은 경우라면 판사가 그런 권위적 태도도 취하지 않았겠지만, 그렇더라도 그냥 ‘예써’하는 바보 같은 답변에 허허 웃고 말았을 것입니다. 남한사회의 경직성 관료들의 불필요한 권위가 저에게는 때로 참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하비콕스는 유럽 중세시대의 바보제를 평가하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바보제는 이와 같이 하나의 혁명적 차원을 함축한 것이었다. 바보제는 사회적 신분의 부동성을 폭로하였고 민중으로 하여금 현상이 언제까지나 현상대로만 지속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하였다.”(바보제 15쪽)
[원수 사랑의 참 의미]
우리가 잘 아는 원수 사랑의 말씀이 있습니다. 3년 전에 이 본문을 갖고 실연을 하면서 하늘뜻을 펼쳤기에 다들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른뺨을 맞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억지로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을 벗어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폭력을 쓰는 사람 앞에서 바보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보면 이는 단순한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대항하지 않은 상태로 뺨을 맞는다는 것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주인이 노예의 오른뺨을 때일 수 있는 방법은 오른 손등으로 때리는 것이고 이는 상대를 가해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조롱하는 의도입니다. 이때 오른뺨을 맞은 노예가 왼뺨을 돌려대는 행위는 나도 인간이니 정식으로 오른손바닥으로 나를 때려라. 하는 인간해방선언입니다. 이때 주인은 그를 때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를 노예가 아닌 자신과 같은 계급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금이나 빌려간 돈을 갚지 못한 가난한 사람을 부자가 재판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판사는 율법에 따라 겉옷을 벗어주라고 명령합니다. 이때 그는 겉옷마저 벗겨가는 비정한 인간과 그 법에 커다란 분노를 느낀 나머지 순간적으로 속옷까지 벗어주고 나서 벌거벗은 상태로 법정을 나서게 됩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부자와 그 비정한 법정을 비난하게 됩니다.
억지로 5리를 가게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로마의 군병입니다. 그는 자신의 무거운 짐을 지나가던 행인에게 짐을 지울 수가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생업을 보장하기 위해 5리까지만 허용이 되었습니다. 그 이상 지우게 하는 것은 군법을 어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한 사람이 5리를 더 가겠다고 자청하는 것은 로마군병으로 하여금 수치심을 갖도록 하는 일이 되는 길입니다. 이 세 가지 원수 사랑의 길은 겉으로 보면 바보가 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상대방을 조롱하고 수치심을 갖도록 하는 깨우침의 길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보가 됨으로 오히려 폭력을 행사하는 상대방을 바보로 만들고 더 나아가서 그런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사회정치 체제를 바보화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제시하신 이 사랑의 길은 단순히 개인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폭력을 정당화시켜온 사회 체제에 대한 거부였던 것입니다.
바로 같은 해방의 전통 위에서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바보가 되심으로 당시의 권력자들과 사회체제 자체를 바보화시키고 무력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본래 과월절이 갖는 해방과 자유의 축제는 로마의 압제로 말미암아 종교의 틀 안에서만 지켜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도 일제 지배 아래서 우리들의 전통적인 공동체 놀이인 씨름이나 택견, 탈춤이나 풍물놀이를 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형태로든지 과월절이 갖는 해방의 전통을 민중의 축제적 전통으로 되살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길은 스스로 바보가 되는 길입니다. 사람이 한 번도 타보지 않는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오심으로 누구나가 기대하는 정치적 해방에 대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과월절의 본래의 민중적인 축제를 되살리며 거기에 해학과 풍자를 넣어 ‘호산나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하는 소리를 마음껏 외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깊은 마음바닥으로부터 로마의 지배 자체를 뒤집어엎은 행위입니다. 그것은 로마가 자랑하는 위풍당당한 말과 기우뚱거리는 새끼 나귀의 대결이었고 결국 이런 정치적 풍자는 권력자들의 미움을 받아 십자가형으로 마치게 되었지만, 2천년이 지난 오늘 로마의 말과 칼은 이미 오래 전에 역사에서 사라졌고 예수님의 나귀와 평화를 향한 자유혼의 축제는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평택의 대추리나 광화문의 집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경찰의 폭력과 이에 맞서는 시위대의 폭력이 맞부닥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며 동시에 평화를 이루어갈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그때마다 나귀새끼를 타시어 스스로 바보가 되심으로 평화를 이루어 가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곤 합니다. 나귀타신 바보 예수님의 상징이 여러분의 삶에 녹아들어 평화의 바보 사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견사)
여러분이 오늘 나눠받은 종려나무 가지는 여러분이 1년동안 성경책이나 집에 보관하셨다가 내년 사순절이 시작하는 성회수요일에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그때 말라버린 이 가지를 태워 재를 만들고 이 재를 우리들의 이마 위에 찍는 예식을 하게 됩니다. 종려나무 가지에는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를 향한 우리들의 세상적인 꿈과 헛된 욕망이 담겨 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던 군중들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자 예수를 죽이라는 폭도로 변합니다. 이 종려나무 가지를 보면서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환호하는 것인가? 나의 세상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나는 ‘나뭇가지 손에 들고 줄줄이 제단 돌며 구원의 하느님을 노래하며 춤을 추어라’ 하는 시편의 고백과 같이 예수님을 향해 이 가지를 흔들 수 있는가? 앞으로 일 년간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성찰하는 잣대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바보 예수 (시편 118, 21-29절 마르코 11장 1-10절)
[종려가지를 흔들며]
유대인들의 최대명절은 과월절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집트 파라오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 민족을 해방시킨 날입니다. 따라서 이 날에는 유대 땅 뿐만 아니라 저 멀리 외국에 살던 유대인들까지도 모두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기에 이때는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천 년 전 오늘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을 들어가십니다. 이때 예수님을 보던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라고 소리쳤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과월절에 하느님의 종 메시야 가 와서 지배자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왕의 옛 영광을 회복시켜 줄 것을 믿고 기다려왔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날을 예수님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종려주일이라고 부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일주일간 계속되는 과월절 축제의 첫날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여러분께서는 이천년전 이 과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 순례자라 여기고 실연을 해보겠습니다. 제가 나갔다가 들어올 때에 나눠드린 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라고 소리를 치시기 바랍니다. 연습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상징성]
이천년 전 예수님께서 사람이 한 번도 타보지 않는 나귀새끼를 타셨다면 이 나귀새끼는 당연히 기우뚱기우뚱 넘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폭소를 낳게 하는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군중들이 외친 함성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독립운동만세 사건입니다. 로마총독부로서는 간담이 떨어지는 장면입니다. 따라서 군중들 또한 이를 하나의 정치적 풍자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웃기는 장면을 오늘의 상황에 맞게 재연한 것입니다. 2년전에는 제가 광대 옷을 입고 들어왔었고, 오늘은 스케이트보드와 헬멧과 선글라스를 쓰고 들어왔습니다.
제가 주일 예배가 아닌 어느 휴일에 여의도광장에 이 모습으로 나타났더라면 이것은 하나도 관심을 끌만한 장면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성시여기는 이 주일예배 시간에 그것도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이 하늘뜻펴기 시간에 담임목사가 이런 복장으로 들어왔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여러분은 폭소를 금할 수밖에 없고 종교의 엄숙함과 이에 근거한 전통적인 어떤 체제가 무너지는 강한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마 한국교회에서 예수님의 나귀타심을 이러한 종교와 정치에 대한 강한 풍자로 보고 이런 시도를 하는 목사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어느 신학자의 주석에도 예루살렘 입성의 장면을 이렇게 풍자와 해학의 사건으로 해석한 사람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제 닷새 후에 죽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행하신 정치적 풍자요 여기에 깊은 종교적인 평화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이 장면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마태오가 그러했듯이 구약 즈가리야서 9장의 예언의 말씀에 비유하여 이를 겸손함으로만 설명합니다. 그러나 즈가리야의 말씀도 그 결론부분을 깊이 묵상하여 보면 나귀새끼와 연결된 세계 평화는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비폭력을 통한 정의와 평화 실현이라는 매우 깊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큰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시리라.’
[축제의 회복]
최근 <예수, 하바드에 오다>란 책을 통해 현대 젊은이들과 예수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부시의 이라크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고통 받는 이라크 민중들이야 말로 오늘의 고난받는 그리스도에 비유한 세계적인 진보 신학자 하비콕스가 있습니다. 40년 전 <세속도시>(Secular City)란 책을 통해 서구 신학계에 매우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던 인물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하느님은 하늘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세속도시 속에서 함께 일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사회참여를 강조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특별한 얘기가 아니지만 당시에는 교회와 세상을 성과 속으로 철저히 구분하는 근본주의 미국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강한 비판이었고 이는 60년대 남미 해방신학과 박정희군사독재에 직면한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참여를 통한 하느님 선교신학을 발전시키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비콕스는 그리고 나서 5년 후에 <바보제>란 책을 발간했는데, 이 책은 세속도시만큼 선풍적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 제목 자체가 던지는 신선함이 있었고 저 개인적으로는 어려서부터 받아왔던 보수적 신앙의 분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신학적 계시를 받았습니다. 당시 군사독재 계엄령 하에서 한국신학대학의 축제 이름을 바보제라고 바꿔 불렀는데, 담당형사가 이를 보더니 그 행사 광고지를 북북 찢었습니다.(당시 공권력은 대학 내에 마음대로 드나들고 모든 행사 그리고 강의내용까지 그들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을 때였습니다.)
아마 그도 스스로를 바보라 부르는 일에서 신학생들의 정치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읽었던 것이지요. 중세기 기간 중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는 ‘바보제’라고 불리우는 휴일이 성행하였습니다. 대체로 정월 초하루쯤에 거행되는 이 명절이 오면 늘 상 경건하기만 하던 사제들도 근엄하기 이를 데 없던 어르신네들도 모두가 우스꽝스럽고 징글맞은 가면을 쓰고 거리로 뛰어나옵니다. 목청을 뽑아 민요를 부르는 사람, 술에 취하여 마냥 흥겨워하는 사람, 풍자와 조소를 퍼붓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세상이 발칵 뒤집힌다. 바보제의 기간 중에는 풍속이나 관례를 아무리 조롱하여도 상관이 없으며 국가 최고급의 명사들을 대상으로 야유를 퍼부어도 용납이 됩니다. 그래서 사회 고위층들은 이를 혹평하고 교회공의회도 이를 금지하는 법을 냈지만, 16세기까지 계속되다가 종교개혁 시대에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이것의 잔재가 미국에서 10월 마지막 날에 갖는 할로윈이라는 풍속인데, 요즘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이를 흉내 내어 10월 마지막 날에 가면을 쓰고 거리 축제를 벌이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회의 권력층이나 종교적 사제들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이런 문화는 서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인 탈춤이나 판소리에도 있습니다. 봉산탈춤의 한 부분을 보면 말뚝이가 양반이 오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조롱합니다. <쉬, 양반 나오신다. 양반. 양반이라고 하니까 노론 소론 호조 병조 옥당을 다 지내시고 삼정승 육판조를 다 지내고 퇴로재상으로 계신 양반인줄 아지 마시오. 재잘양이라는 양자에 개다리 소반 반자를 쓰는 양반이 나오신단 말이오.> <양반이 말뚝이를 부르는디, 짐짓 모른 체 하니까 양반이 화를 내며 ‘야 이놈 말뚝아’ 하니 말뚝이 말하기를 ‘에에 아 제미를 붙을 양반인지 좌반인지 허리 꺽어 절반인지 개다리 소반인지 꾸래미전에 백반인지 말뚝아 다리 절뚝아 호도 엿장사 오는데 제 핼에비 채듯 왜 이리 찾소?>
동서양을 막론하고 억압된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에게는 축제를 통해 이렇게 사회 지도층을 조롱함으로 상하가 뒤집혀진 사회를 공상한다는 것은 삶의 숨통을 튀는 일임과 동시에 문화적으로도 상당한 가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동서양 모두 배금주의와 과학이성주의에 눌려 이러한 축제적 전통을 잃어버리고 그 잔재만 전통문화재란 이름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師)자 붙은 사람들의 기득권 수호와 민중들의 문화를 경멸하는 오만하고 배타적인 태도가 깔려 있습니다. 사자 붙은 사람들의 해석에 의하면(저도 결국 이런 부류의 한 사람이니까) 서구의 희랍문화에서도 규율과 지성을 앞세우는 아폴로적인 문화가 축제와 감성을 촉발하는 디오니소스적인 문화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우리나라 또한 유학의 영향으로 양반 중인 상놈 계급으로 차별을 두어 글공부를 최고로 여기고 몸으로 뛰고 손에 흙 묻히는 일은 모두 상놈들이나 하는 짓거리로 보는 것이 같은 문화적 사고입니다. 가장 유명한 예가 이조말엽 미국 선교사들이 테니스를 치는 것을 보고 양반들이 혀를 차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아니 여보시오 선교사 양반들 그렇게 땀 흘리는 일은 하인배들이나 시키고 구경이나 할 것이지 뭘 그리 뛰어다니시오?’
특히 종교는 전통과 제도 그리고 규율을 중시하기에 그런 분위기로 쉽게 휘말려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10년 전 고국방문 길에 강남의 인텔리들이 모이고 지성적인 설교로 유명한 한 대형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한 부 한 부 예배가 끝날 때마다 2,3천 명의 청중이 엇갈리면서 맨 앞줄에서부터 차곡차곡 앉는데 얼마나 질서 있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설교시간에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얼마나 엄숙하게 드리는지 옆 사람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전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 미국의 자유로운 예배 분위기에 익숙했던 저로서는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조금 있다 얘기하겠지만 강정구교우 재판시에 일어난 ‘예써’라는 에피소드도 같은 맥락 속에 있습니다.
인간이란 그 본성상 노동하고 사색을 하는 동물일 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과 기도하며 즐기는 축제의 인간(homo festivus) 인 것입니다. 황금만능사상과 기계 중심의 산업화와 그리고 도시중심의 아파트문화는 이러한 축제의 인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유대 최고의 명절인 해방절 첫날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하신 의미를 보다 축제적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거의 대부분 인류대속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비장한 의미에서 곧 아폴로적 신학 입장에서만 해석해왔다면 이제는 보다 민중적인 입장, 곧 웃음과 축제를 즐기는 디오니소스적 신학적 해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웃으시는 예수]
예수님을 그린 초상화가 많이 있습니다. 예배실 뒷면에 걸려 있는 그림들은 그런 것중 몇 그림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시는 목자 예수,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고뇌하시는 예수, 광야에서 홀로 기도하시는 예수, 세례자 요한이 ‘저 어린 양을 보라’고 외치는 예수, 이외에도 우리가 아는 대로는 하얀 옷을 입은 부활의 주님이나 하늘의 천군천사를 거느리고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 포효하는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와 같이 신적 모습으로 그린 그림이 있는가 하면, 문 두드리는 예수, 성전 뜰에서 채찍을 들어 분노하시는 예수, 노동하시는 예수 등 인간적인 면을 그린 그림들도 있습니다. 이 많은 예수 그림들 가운데 제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여기 들고 나온 ‘웃으시는 예수’ 그림입니다. 30년 전 미국의 어느 수도원을 방문했다가 너무 좋아서 여러 장을 구입해 가까운 지인들에게 나눠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전 지금도 이 그림을 바라보면서 자유하는 혼으로서의 어떤 영감을 얻곤 합니다. 고뇌하는 예수님의 얼굴과 길 잃은 양을 찾은 목자 예수님을 그린 윤임자권사님께 이번에는 웃으시는 예수님을 한번 그려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사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기록은 있지만,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웃으신 적이 없어서 그런 기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기에 특별히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어쩌다 한 번씩 우신 적이 있어 이는 특별한 일이기에 기록으로 남긴 것이라고 봅니다.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미심쩍은 얼굴을 하신 분들이 계시는데, 이는 한구절의 말씀만 보아서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비판했습니까?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먹고 마셨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먹고 마신 것이 아니라 즐겨 마셨다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즐겨하신 것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따라 포도주를 즐겨합니다. 저에게는 큰 즐거움이라 사순절 기간 동안에는 신앙의 훈련을 위해 절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즐겨하셨다는 비난을 받으셨는데,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가시는 곳은 항상 떠들썩하는 분위기 곧 삶의 축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단지 포도주를 즐긴 사람이 아니라 아예 포도주를 만든 장본인으로 말합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첫 번째 이적(sign)인데, 왜 하필이면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타부시 되는 포도주 만드는 일을 맨 처음에 얘기하고 있는 것인가?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이적과 다른 세복음서, 공관복음서에서 말하는 기적(miracle)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곧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독생하신 아들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드시는 이 이적이 의도하는 바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세상은 마치 포도주가 떨어진 결혼식과 같이 삭막한 세상이었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 세상이 흥겨워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에 맞추어서 글이 씌어졌기에 전체적으로 비장한 분위기를 띠울 수밖에 없지만, 군데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깊은 풍자와 해학이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비난하는 얘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너희는 땅의 소산물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 눈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어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다.’ 만약에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그림을 그린다면 사람이 입을 크게 벌리고 낙타를 집어삼키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될 것입니다. 잔과 접시의 겉만 닦는다든지, 회칠한 무덤 같다든지 형제의 눈 속에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하는 이 과장법 또한 당시의 지도자들을 비웃는 풍자가 담긴 해학언어입니다. 이를 듣고 있는 차별받는 민중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머가 넘치는 분이셨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죽음을 무너뜨린 바보 예수]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언제나 장엄하고 비장한 태도로 다른 말로 하면 꼭 인상을 쓰고 가야만 하는 것인가? 죽음은 피하고 싶고 수난이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꼭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는다는 것이 꼭 고통스러운 일이여만 하는 것일까?
불가의 고승들은 죽을 때에 매우 독특한 모습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칩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혹은 서서 혹은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삶을 마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십자가 위에서 손과 발에 못을 박히고 허리에는 창에 찔려 몸속의 모든 피를 밖으로 다 쏟아내며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치며 고통스럽게 죽으셨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공권력에 의한 폭력의 희생자로서의 죽어가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또한 이런 죽음을 짐작하셨고 이 죽음을 바라보며 오늘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사실은 죽음의 입성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성을 들어오실 때에 예수님은 인상을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몸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기우뚱거리는 새끼 나귀위에서 함께 기우뚱거리셨고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흥에 겨워 춤을 추셨다는 것이고 그리고 군중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배꼽을 잡고 웃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보와 같은 너털웃음을 웃으시며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신 것입니다.
전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정치적 풍자로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고 스스로 바보가 되는 해학을 통해 당시의 정치종교지배체제에 대한 강한 도전을 하신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귀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시어 성전 제사장들을 힘을 뒤 배경으로 삼고 있는 제상용 비둘기와 양을 파는 상인들과 성전세를 바치기 위한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그리고 그들을 성전 뜰에서 내어 쫓아버리는 엄청난 혁명을 시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부활은 이미 죽음의 세력을 웃음과 해학으로 무력화시켜버린 예루살렘 입성 때에 나귀 새끼 등 위에서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죽음을 풍자와 해학으로 맞받아친 사람들이 반드시 고승이나 수도승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도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에서 존 웨인 쉴레터라는 사람이 자기 어머니가 세상 떠나기 8시간 전에 자신의 마지막 자리를 보기 위해 모여든 자녀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사랑하는 아이들아, 내가 죽은 후 내 무덤에는 어떤 꽃도 가져오지 말아라. 왜냐하면 나는 그 자리에 없을테니까. 나는 육체를 떠나면 곧장 유럽으로 날아갈 예정이다. 네 아빠가 밤낮 유럽 데려간다고 약속만 했다가 한 번도 가지 못했잖아.” 그리고는 ‘내일 아침 다시 만나자.’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합니다. 이 어머니는 죽은 것이 아니지요. 죽음을 해학으로 이긴 이 어머님은 자녀들의 마음속에 웃음으로 영원토록 살아 있습니다. 죽음과 웃음과 종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지만 이는 사회가 만들어준 허위일 따름이요 우리들은 믿음 안에서 얼마든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게시판에도 실었지만, 화요일 강정구교우님의 국가보안법 위반 2심 재판정에서 제가 저지른 하나의 에피소드 또한 종교인으로 갖는 잘못된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봅니다. 그날은 변호인단의 증인으로 이철기동국대교수께서 나와서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에 대한 증언을 하시었습니다. 세계군사전문가들이 본 객관적인 남한의 군사력은 세계 6위이고 북한은 30위권 밖이다. 게다가 군사전략상 공격을 하여 승리하려면 상대방보다 적어도 3배의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따라서 북한은 결코 남침을 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검사의 반대심문이 있었는데, 이철기교수께서 작전계획 5027이라는 단어를 쓰자 이는 국가기밀에 해당하는 사항이라고 말문을 막았습니다. 그러자 이교수는 이는 모든 언론이 얘기하고 있는 하나의 상식이라고 답변을 하였고 동시에 방청석에서도 너무나 한심한 질문에 실소가 나왔고 한 두 사람은 ‘아니 검사는 신문도 읽지 않는 것 아니냐?’고 한탄 섞인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검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판사는 방청석이 시끄럽다는 쪽으로 갑작스레 권위적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큰 목소리로 ‘여러분 여러분’ 하고 우리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그래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때 나도 모르게 ‘예 써’하고 답을 했습니다. 바보가 된 것이지요.
사실은 우리가 약간 소란을 피운 것은 검사의 어리석은 질문으로 인한 것임을 잘 알고 있는 판사가 마치 우리가 뭔가를 잘못했다고 추궁하는 그 권위적인 태도가 매우 못마땅하고 ‘여러분 여러분’ 하는 소리가 마치 군대에서 중대장이 하는 위압적인 말투로 여겨 제가 풍자적으로 반응을 한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은 제가 후에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이렇다는 해석을 하는 것이고 그 당시로서야 단 2,3 초 만에 일어난 순간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일어서라는 명령을 받았고 한동안 서로 쳐다보다가 제가 사과한 후 그냥 끝났습니다. 아마 외국 같은 경우라면 판사가 그런 권위적 태도도 취하지 않았겠지만, 그렇더라도 그냥 ‘예써’하는 바보 같은 답변에 허허 웃고 말았을 것입니다. 남한사회의 경직성 관료들의 불필요한 권위가 저에게는 때로 참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하비콕스는 유럽 중세시대의 바보제를 평가하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바보제는 이와 같이 하나의 혁명적 차원을 함축한 것이었다. 바보제는 사회적 신분의 부동성을 폭로하였고 민중으로 하여금 현상이 언제까지나 현상대로만 지속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하였다.”(바보제 15쪽)
[원수 사랑의 참 의미]
우리가 잘 아는 원수 사랑의 말씀이 있습니다. 3년 전에 이 본문을 갖고 실연을 하면서 하늘뜻을 펼쳤기에 다들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른뺨을 맞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억지로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을 벗어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폭력을 쓰는 사람 앞에서 바보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보면 이는 단순한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대항하지 않은 상태로 뺨을 맞는다는 것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주인이 노예의 오른뺨을 때일 수 있는 방법은 오른 손등으로 때리는 것이고 이는 상대를 가해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조롱하는 의도입니다. 이때 오른뺨을 맞은 노예가 왼뺨을 돌려대는 행위는 나도 인간이니 정식으로 오른손바닥으로 나를 때려라. 하는 인간해방선언입니다. 이때 주인은 그를 때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를 노예가 아닌 자신과 같은 계급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금이나 빌려간 돈을 갚지 못한 가난한 사람을 부자가 재판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판사는 율법에 따라 겉옷을 벗어주라고 명령합니다. 이때 그는 겉옷마저 벗겨가는 비정한 인간과 그 법에 커다란 분노를 느낀 나머지 순간적으로 속옷까지 벗어주고 나서 벌거벗은 상태로 법정을 나서게 됩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부자와 그 비정한 법정을 비난하게 됩니다.
억지로 5리를 가게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로마의 군병입니다. 그는 자신의 무거운 짐을 지나가던 행인에게 짐을 지울 수가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생업을 보장하기 위해 5리까지만 허용이 되었습니다. 그 이상 지우게 하는 것은 군법을 어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한 사람이 5리를 더 가겠다고 자청하는 것은 로마군병으로 하여금 수치심을 갖도록 하는 일이 되는 길입니다. 이 세 가지 원수 사랑의 길은 겉으로 보면 바보가 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상대방을 조롱하고 수치심을 갖도록 하는 깨우침의 길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보가 됨으로 오히려 폭력을 행사하는 상대방을 바보로 만들고 더 나아가서 그런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사회정치 체제를 바보화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제시하신 이 사랑의 길은 단순히 개인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폭력을 정당화시켜온 사회 체제에 대한 거부였던 것입니다.
바로 같은 해방의 전통 위에서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바보가 되심으로 당시의 권력자들과 사회체제 자체를 바보화시키고 무력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본래 과월절이 갖는 해방과 자유의 축제는 로마의 압제로 말미암아 종교의 틀 안에서만 지켜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도 일제 지배 아래서 우리들의 전통적인 공동체 놀이인 씨름이나 택견, 탈춤이나 풍물놀이를 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형태로든지 과월절이 갖는 해방의 전통을 민중의 축제적 전통으로 되살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길은 스스로 바보가 되는 길입니다. 사람이 한 번도 타보지 않는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오심으로 누구나가 기대하는 정치적 해방에 대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과월절의 본래의 민중적인 축제를 되살리며 거기에 해학과 풍자를 넣어 ‘호산나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하는 소리를 마음껏 외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깊은 마음바닥으로부터 로마의 지배 자체를 뒤집어엎은 행위입니다. 그것은 로마가 자랑하는 위풍당당한 말과 기우뚱거리는 새끼 나귀의 대결이었고 결국 이런 정치적 풍자는 권력자들의 미움을 받아 십자가형으로 마치게 되었지만, 2천년이 지난 오늘 로마의 말과 칼은 이미 오래 전에 역사에서 사라졌고 예수님의 나귀와 평화를 향한 자유혼의 축제는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평택의 대추리나 광화문의 집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경찰의 폭력과 이에 맞서는 시위대의 폭력이 맞부닥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며 동시에 평화를 이루어갈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그때마다 나귀새끼를 타시어 스스로 바보가 되심으로 평화를 이루어 가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곤 합니다. 나귀타신 바보 예수님의 상징이 여러분의 삶에 녹아들어 평화의 바보 사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견사)
여러분이 오늘 나눠받은 종려나무 가지는 여러분이 1년동안 성경책이나 집에 보관하셨다가 내년 사순절이 시작하는 성회수요일에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그때 말라버린 이 가지를 태워 재를 만들고 이 재를 우리들의 이마 위에 찍는 예식을 하게 됩니다. 종려나무 가지에는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를 향한 우리들의 세상적인 꿈과 헛된 욕망이 담겨 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던 군중들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자 예수를 죽이라는 폭도로 변합니다. 이 종려나무 가지를 보면서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환호하는 것인가? 나의 세상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나는 ‘나뭇가지 손에 들고 줄줄이 제단 돌며 구원의 하느님을 노래하며 춤을 추어라’ 하는 시편의 고백과 같이 예수님을 향해 이 가지를 흔들 수 있는가? 앞으로 일 년간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성찰하는 잣대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