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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린강단은 향린교회 주일예배의
'하늘뜻펴기'(설교)를 문서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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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55
섬김과 하느님 나라
이사야 52, 7 ; 마가복음 10, 35- 45
홍 주 민 목사
부족한 제가 이 귀한 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를 드립니다. 조헌정 목사님을 통해 설교와 특강을 부탁받고 지금 이 순간까지 계속해서 향린교회에 대한 생각이 내 머릿속에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제게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향린교회는 우리나라에서 아주 분명한 프로테스탄트적 교회, 즉 개신교 교회라는 것이었습니다.
개신교라함은 두개의 원칙위에 선 교회를 말합니다. 그 하나는 만인사제직 위에 기초한 교회요, 다른 하나는 믿음에서 우러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수많은 개신교회가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만인사제직이 실현되어 있는 교회가 과연 얼마나 됩니까? 또한 믿습니다 하면서 믿음만으로만 강조하며, 실천의 열매에 까지는 가지 못하는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한국교회의 상황속에서 야훼 하나님께서 이 향린교회를 통하여 이제 더 큰 하늘 뜻을 이루려는 운동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우선 저에 대한 소개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독일에서 10년간 공부하다가 지난 3년 전 바로 오늘 2월 4일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청주에 기거하면서 한신대 연구교수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년 전에는 디아코니아학교를 설립해 청주에서 디아코니아 실천가를 교육하고 있습니다. 2년제 학교인데, 사회복지학과 디아코니아신학을 통해 교회현장에서 디아코니아 실천을 하는 전문인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 섬김 전문인들을 독일에서는 디아콘/디아코닌/디아코니세라 부르는데 한국땅에서 이러한 시도는 그 첫 번째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난 해 2월 18일에는 한국디아코니아 연구소를 청주에 설립해 디아코니아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실천을 함께 모색하고 있습니다.
간략한 저의 소개를 드리면서 계속해서 디아코니아라는 단어가 많이 나왔는데 이에 대해 설명을 드리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실은 제가 독일에 공부하러 가기 전에는 이 디아코니아라는 단어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저의 삶의 가장 중심부에 이론과 실천의 장으로서 디아코니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 해에는 MBC 방송사 피디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종교개혁과 디아코니아에 대한 저의 논문을 보고 연결이 되어, 디아코니아에 대한 특집방송을 두어 달간 공동으로 제작해서 지난 성탄 전야에 55분간 방송된 사례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이 길로 들어서게 된 과정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1987년 그러니까 6.10항쟁이 일어났던 해에 한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신대원 시절, 저는 철거민 동네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고 시골교회에서 전도사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마쳤습니다. 그 후 저는 좀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동료들과 민중신학연구소를 설립하는데 함께 하면서 막일터와 공장에서 실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 말에 독일 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독일에 갈 때, 신대원에서 신약학으로 논문을 썼고 성서신학에 관심이 있었기에 막연히 성서신학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처음에 하였지만, 저의 학문적 방향은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있었던 어학과정 기간동안 새로이 결정되었습니다. 저는 마인츠 시내를 가끔 나갔는데, 그 때마다 궁금한 곳이 눈에 띄었습니다. 바로 디아코니아기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관이 한 두개가 아니고 즐비하게 널려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알아보았더니 그 기관들은 독일의 개신교인들이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디아코니아 기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기관이 독일 전역에 3만 1천개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민중신학과 민중교회 실천에 관심하면서 신학을 해온 저에게 그러한 사실은 개인적으로 눈이 펄쩍 띄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것은 신학도서관에 가서보니 그러한 디아코니아 실천을 위한 이론인 디아코니아신학에 대한 서적이 몇 개의 벽면을 꽉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바로 독일의 디아코니아 실천운동과 신학이론운동이 15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체계화되고 조직화되었다는 사실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어학시험을 패스하고 저는 지체않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있는 디아코니아연구소로 갔습니다. 그리고 디아코니아학 디플롬과정을 통하여 디아코니아의 이론과 실천 그리고 현장들을 돌아보며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제게 계속적으로 확인되었던 것은 디아코니아신학이 우리의 민중신학과 아주 유사한 신학이며 디아코니아실천이 민중교회실천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디플롬을 마치고 박사논문 주제를 독일의 디아코니아 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과의 상관성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지난 3년 전 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지나간 한국에서의 3년간의 생활, 많은 것을 질문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을 한 기간이었습니다. 3년간 지속적인 저의 질문은 한가지였습니다. 교권주의와 성직자 중심주의 그리고 배금주의와 교회성장 이데오로기에 잠식해 있는 한국교회에서 디아코니아를 실천할 수 있는가? 신자유주의에 의해 양극화가 하늘 끝까지 벌어져있고, 분배보다 성장을 생명으로 아는 한국사회에서 섬김과 연대가 실현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서는 목사까지도 삭발을 하면서까지 사학법 수호를 외쳐대며 기름진 얼굴로 투쟁(?)하는 이 사회는 연대나 섬김과는 전혀 거리가 먼 동네처럼 느껴집니다. 비단 이 문제 뿐만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나라 전체가 탈세와 신용불량 그리고 투기와 돈버는데 미쳐있습니다. 출생률 저하 세계1위, 교통사고 발생률 세계 1위, 이혼률 세계 1위, 사교육비 세계 1위 이것이 우리네들 현재 성적표입니다. 이 네 가지 세계 1등이 가진 공통점을 태백산맥을 쓴 작가 조정래씨는 한국사회가 나만을 앞세운 이기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OECD국가의 사회복지 예산이 GNP의 평균 25%라 합니다. 우리나라는 10%도 않됩니다. 사회적 안전망이 유아기적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예로 교육복지면에서만 보아도 거의 절망적 수준입니다. 독일에서 10년간 학생으로 있으면서 저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3자녀를 기르고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 등록금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복지적인 혜택이 다양하게 있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합니까? 대학 등록금이 한해 1000만원 대에 올랐습니다. 돈없는 사람들은 이제 아무리 공부하고 싶어도 뜻을 접어야 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비록 최근에 조금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다른 복지 영역에서도 아주 천착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복지 비용을 더 늘이고 분배정책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면 좌경으로 몰리는 것이 2007년 새 천년 오늘의 한국 현실입니다. 지나온 우리 역사가운데 지난 20-30년간의 변화는 그야말로 급격한 변조를 동반한 기간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입니까? 연대적 삶을 다시금 세우는 것 아닐까요?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구체적 희생과 실천적 대안을 가지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섬김의 문화’를 아래로부터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오늘의 본문은 예수가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모습을 섬기는 존재로 드러낸 핵심적인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의 중간에 위치합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하고 근본적인 의미를 담지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란 주제어로 시작되는 마가복음서는 구약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의 통치를 시작하는 의미로 서술된 복음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구약성서 본문인 이사야서 52장 7절을 봅시다: “놀랍고도 반가와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고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구나’ 하는구나.” 구약에 나타난 “희소식”, “복음”으로 표현되고 이제 곧 하나님께서 오시고 하나님께서 통치를 시작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마가복음의 주제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야훼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안에서 야훼 하나님은 그의 통치를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바로 그렇게 행동했고 십자가와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마가복음에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가 누구냐에 관한 부분입니다. 8.27이하에 보면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섰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요약해서 대답합니다. “세례요한, 엘리야, 예언자중 한분으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인식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리스도, 기름부음 받은 이, 메시야, 그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는 행해져야 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은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이 실제로 오시는가... 그 방식과 방법에 있어 커다란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8.31에 예수는 자신이 장로들과 대제사장 그리고 율법학자들에 의해 많은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부활한다고 말을 합니다. 예수는 이것을 드러내 놓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그리스도됨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럴 수 없고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보내심에 대한 근본적 오해를 제기하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서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사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34절에 하나님의 통치가 어떻게 오는가에 대해 말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의 생각에 대한 분명한 수정을 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더 나아가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이는 잃을 것이고 목숨을 잃는 사람이 목숨을 구할 것이라 말을 예수는 덧붙입니다. 이것은 9.33의 두 번째 고난 예고에 연결이 된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이해 못하는 제자들 간에 “누가 크냐”하는 주제로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에 대해 예수는 첫째가 되려면 꼴찌되어 모든 이들 섬길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 세우고 그를 껴안으며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날 영접하는 이는 나를 보내신 야훼를 영접하는 것이라 말씀을 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면 무엇인가 하고자 했고 갖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아이들, 여자들, 남자들과 서로 서로 받아들이고 어우러지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부자 젊은 청년과의 논쟁에서 이 세상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는 말합니다: “날 위해, 복음을 위해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 논 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자녀, 논밭을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서 8장부터 삶을 내던지는 헌신이라는 주제가 구체화 됩니다. 삶을 내던지는 것은 얻기위한 것이라는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 것들 전체를 버림으로 영생을 얻는 다고 말씀을 합니다. 3번째 고난 예고는 이러한 논조로 마무리 짓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오늘의 본문이 나옵니다.
우리가 좀 더 주의를 기울여 성서를 봅시다. 세베대의 두 아들들은 하나님 통치가 이루어지면 예수를 따름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합니다. 하기야 이 세베대의 두 아들들은 아주 특별난 이들이었습니다. 예수가 그들을 불렀을 때, 그들은 지체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선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12명의 제자단에 확실하게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제자들 중 몇 명에게 별칭을 주었는데 시몬은 베드로, 그리고 세베데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천둥의 아들’이라 별칭을 지어주었습니다. 이들에게 무게가 실려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아들들은 하나님 통치가 곧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길에 대해 오해가 아니라 정확한 이해력에 바탕을 두고 열정적으로 따랐던 것입니다.
세베대 아들들의 요청에 대해 예수는 별로 비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는 그들이 예수의 영광속에 동참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좀 다른 것을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10.38)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여기서 예수가 말하는 잔과 세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시에는 성만찬이 없었고 교회에서의 세례도 있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즉 부활절 이전의 상황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단어는 당시 유대교적 상황에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습니까?
잔을 마신다는 것의 의미는 순교를 받아들인다는 말이었습니다. 신앙을 위한 순교는 당시 헬레니즘 영향권안에 있었던 유대교내에서 많이 확산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순교를 의미하는 잔이었습니다. 즉 이것은 예수가 고안해낸 언어용법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의 민족으로부터 나온 언어 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게세마네 동산에서도 “아버지여, 당신이 원하신다면,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리스어로 ”Baptizesthai"는 "아래로 내려가다“ ”침수되다“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함께 견디어 낼 수 있느냐? 예수는 묻습니다. 너희는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느냐? 두 아들은 예수가 말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는 그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 한 가지 수정을 요구합니다. 영광받았을 때 자리를 예수가 허락할 수 없고 하나님 나라의 논리, 즉 영원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비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는 하나님 통치가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수행된다고 말씀합니다. 즉 여기저기 개별적으로 개입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에게 예수는 말합니다: 너희가 요청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그 자리는 하나님통치의 자가 논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너희들이 미리 주문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의 나머지 제자들은 이것을 듣고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와 세베대 아들들간의 은밀한 관계에 대하여 시기하며 잘못 이해하고 있는 우선권문제에 대해 시비를 겁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러한 질문을 하는 예수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면서도 아주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너희가 아는대로 민족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권력관에 대하여 볼 수 있는데, 권력의 생리는 지배하려 한다는 것을 예수가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 주권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헌신, 즉 자신의 삶을 던져 섬기는 사람, 다른 이들의 짐을 져주는 종으로서 살아가게 된다고 예수는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원칙이 이루어지는 곳은 사람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독일 디아코니아의 영웅 요한 힌리히 비헤른은 자신의 디아코니아 신학의 핵심을 다음으로 표현합니다: “인간에게 깊이 들어가 인간의 고난을 깊이 알고 그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기위하여 야훼 하나님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야훼 하나님으로 깊이 들어가 야훼가 내안에 살아 운동하는 이들은 섬김의 장으로 자연스레 나가는 것이 자명한 이치입니다.
우리는 이 단어 즉 섬김(diakonia)이라는 단어가 두 번째 세 번째 예수의 고난 예고 이후에 등장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아래 살아가는 삶은 바로 섬김을 행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섬김, diakonia의 실천에서 드러난다고 예수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헌신하는 것. 구체적으로 사람사이의 관계속에서 이러한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이 일어나는 곳에는 사람들을 향한 섬김이 구체적으로 일어나야하고 지배하려는 사고가 해체된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단순히 자기부정이 아니라 삶을 실제로 나누고 주어야 한다고 예수는 말합니다. 즉 다른 이들과의 올바른 관계속에서 섬김의 실천이 자연스레 흘러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일에는 평생을 섬김을 위해 디아코니아 자매회 언님들처럼 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디아콘과 디아코닌 그리고 디아코니세라 불리웁니다. 안병무 선생님은 그분의 독일 체류시 이러한 디아코니아 공동체에서 섬김을 실천하는 이들을 보면서 ‘어떻게 끊임없이 기쁨을 가지고 섬김의 일에 열정적으로 임할 수가 있을까!’ 하는 물음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안박사님의 그 물음이 한국에 디아코니아 자매회를 태동하게 한 것입니다.
지난 학기에 디아코니아 학교 학생들과 디아코니아 현장탐방을 목포 디아코니아 한살림의 집에 다녀왔습니다. 저와 학생들은 1박2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언님들께서 하시는 실천현장에서 함께 디아코니아 실천을 하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의탁할 곳이 없는 노인분들을 모시고 살면서 돌보는 그분들의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장애를 가지신 노인분을 목욕시켜 드리면서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목포의 달동네 현장을 방문하며 섬기는 일, 농민들에게 수지침 봉사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언님들과 자원봉사자들의 하나하나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많은 감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배하고 통치하는 의미로서의 하나님 나라, 그것은 몰트만이 말하는 저 먼 곳으로부터 종말적으로 다가오는 식의 애매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나라가 아니라 아주 현실속에서 인지가능한 섬김의 실천으로 만나는 구체적인 것입니다. 섬김의 현장에서 만나는 이들에게는 건강한 웃음이 있습니다. 이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는 보상심리에서 벗어나 섬김 그 자체에서 오는 기쁨이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과 삶이 일치하는 삶입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가 아니라 현실 자체가 삶에서 드러나는 삶입니다.
디아코니아는 초자연적인 표식을 구했던 바리새인들같은 고정된 시각에서가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디아코니아적 삶의 방식에 반대되는 삶은 삶의 이익을 위해 자리를 차지하려는 자연스럽지 못한 노력들에서 발견됩니다. 거기에는 무언가를 이 세상에서 얻고 가지려하는 욕망들이 다른 이들 위에서 더 큰 능력을 가지고 행사하려 작용합니다. 이것은 욕망에 경도된 잘못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내어주는 섬김의 삶!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살아있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기 부정이나 무아지경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향린교회가 평화나눔 작은공동체 운동을 시작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섬김 운동이 다양한 섬김현장에서 역동적으로 일어나는 것, 참으로 귀중한 일입니다. 저도 디아코니아 연구소에서 그저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실천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번 달 말부터 디아코니아 공동체 운동을 청주에서 시작하려 준비중에 있습니다. 디아코니아 자매회 언님들과 연대하여 디아코니아 영성과 신학을 기반으로 섬김을 실천하는 운동인데 이는 향린교회 여러분들이 계획하는 일과 동일한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향린교회는 지난날 이 땅의 어두운 역사속에서 정의의 산실로 귀중한 역할을 하여 온 터입니다. 이제 변화된 상황속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되어 이 땅에 또 다른 지표를 제시하는 교회로 우뚝 서기를 저는 소망합니다. 스위스의 어느 디아코니아 신학자는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머리는 체게바라가 되고 몸은 머더 테레사가 되어야 한다”. 이는 정의와 사랑이 한 몸 안에서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하늘 뜻 나누기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섬김이 자연스레 일어나는 곳,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이루어집니다. 섬김의 실천을 가져오게 하는 섬김의 영성은 어디서 올까요? 아마도 그것은 나를 비어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스스로 예수의 잔과 세례에 동참하고, 섬기는 종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늘 뜻은 무엇입니까? 바로 섬김의 삶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침묵으로 말씀을 묵상합시다.
이사야 52, 7 ; 마가복음 10, 35- 45
홍 주 민 목사
부족한 제가 이 귀한 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를 드립니다. 조헌정 목사님을 통해 설교와 특강을 부탁받고 지금 이 순간까지 계속해서 향린교회에 대한 생각이 내 머릿속에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제게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향린교회는 우리나라에서 아주 분명한 프로테스탄트적 교회, 즉 개신교 교회라는 것이었습니다.
개신교라함은 두개의 원칙위에 선 교회를 말합니다. 그 하나는 만인사제직 위에 기초한 교회요, 다른 하나는 믿음에서 우러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수많은 개신교회가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만인사제직이 실현되어 있는 교회가 과연 얼마나 됩니까? 또한 믿습니다 하면서 믿음만으로만 강조하며, 실천의 열매에 까지는 가지 못하는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한국교회의 상황속에서 야훼 하나님께서 이 향린교회를 통하여 이제 더 큰 하늘 뜻을 이루려는 운동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우선 저에 대한 소개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독일에서 10년간 공부하다가 지난 3년 전 바로 오늘 2월 4일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청주에 기거하면서 한신대 연구교수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년 전에는 디아코니아학교를 설립해 청주에서 디아코니아 실천가를 교육하고 있습니다. 2년제 학교인데, 사회복지학과 디아코니아신학을 통해 교회현장에서 디아코니아 실천을 하는 전문인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 섬김 전문인들을 독일에서는 디아콘/디아코닌/디아코니세라 부르는데 한국땅에서 이러한 시도는 그 첫 번째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난 해 2월 18일에는 한국디아코니아 연구소를 청주에 설립해 디아코니아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실천을 함께 모색하고 있습니다.
간략한 저의 소개를 드리면서 계속해서 디아코니아라는 단어가 많이 나왔는데 이에 대해 설명을 드리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실은 제가 독일에 공부하러 가기 전에는 이 디아코니아라는 단어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저의 삶의 가장 중심부에 이론과 실천의 장으로서 디아코니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 해에는 MBC 방송사 피디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종교개혁과 디아코니아에 대한 저의 논문을 보고 연결이 되어, 디아코니아에 대한 특집방송을 두어 달간 공동으로 제작해서 지난 성탄 전야에 55분간 방송된 사례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이 길로 들어서게 된 과정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1987년 그러니까 6.10항쟁이 일어났던 해에 한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신대원 시절, 저는 철거민 동네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고 시골교회에서 전도사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마쳤습니다. 그 후 저는 좀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동료들과 민중신학연구소를 설립하는데 함께 하면서 막일터와 공장에서 실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 말에 독일 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독일에 갈 때, 신대원에서 신약학으로 논문을 썼고 성서신학에 관심이 있었기에 막연히 성서신학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처음에 하였지만, 저의 학문적 방향은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있었던 어학과정 기간동안 새로이 결정되었습니다. 저는 마인츠 시내를 가끔 나갔는데, 그 때마다 궁금한 곳이 눈에 띄었습니다. 바로 디아코니아기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관이 한 두개가 아니고 즐비하게 널려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알아보았더니 그 기관들은 독일의 개신교인들이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디아코니아 기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기관이 독일 전역에 3만 1천개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민중신학과 민중교회 실천에 관심하면서 신학을 해온 저에게 그러한 사실은 개인적으로 눈이 펄쩍 띄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것은 신학도서관에 가서보니 그러한 디아코니아 실천을 위한 이론인 디아코니아신학에 대한 서적이 몇 개의 벽면을 꽉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바로 독일의 디아코니아 실천운동과 신학이론운동이 15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체계화되고 조직화되었다는 사실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어학시험을 패스하고 저는 지체않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있는 디아코니아연구소로 갔습니다. 그리고 디아코니아학 디플롬과정을 통하여 디아코니아의 이론과 실천 그리고 현장들을 돌아보며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제게 계속적으로 확인되었던 것은 디아코니아신학이 우리의 민중신학과 아주 유사한 신학이며 디아코니아실천이 민중교회실천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디플롬을 마치고 박사논문 주제를 독일의 디아코니아 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과의 상관성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지난 3년 전 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지나간 한국에서의 3년간의 생활, 많은 것을 질문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을 한 기간이었습니다. 3년간 지속적인 저의 질문은 한가지였습니다. 교권주의와 성직자 중심주의 그리고 배금주의와 교회성장 이데오로기에 잠식해 있는 한국교회에서 디아코니아를 실천할 수 있는가? 신자유주의에 의해 양극화가 하늘 끝까지 벌어져있고, 분배보다 성장을 생명으로 아는 한국사회에서 섬김과 연대가 실현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서는 목사까지도 삭발을 하면서까지 사학법 수호를 외쳐대며 기름진 얼굴로 투쟁(?)하는 이 사회는 연대나 섬김과는 전혀 거리가 먼 동네처럼 느껴집니다. 비단 이 문제 뿐만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나라 전체가 탈세와 신용불량 그리고 투기와 돈버는데 미쳐있습니다. 출생률 저하 세계1위, 교통사고 발생률 세계 1위, 이혼률 세계 1위, 사교육비 세계 1위 이것이 우리네들 현재 성적표입니다. 이 네 가지 세계 1등이 가진 공통점을 태백산맥을 쓴 작가 조정래씨는 한국사회가 나만을 앞세운 이기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OECD국가의 사회복지 예산이 GNP의 평균 25%라 합니다. 우리나라는 10%도 않됩니다. 사회적 안전망이 유아기적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예로 교육복지면에서만 보아도 거의 절망적 수준입니다. 독일에서 10년간 학생으로 있으면서 저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3자녀를 기르고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 등록금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복지적인 혜택이 다양하게 있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합니까? 대학 등록금이 한해 1000만원 대에 올랐습니다. 돈없는 사람들은 이제 아무리 공부하고 싶어도 뜻을 접어야 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비록 최근에 조금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다른 복지 영역에서도 아주 천착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복지 비용을 더 늘이고 분배정책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면 좌경으로 몰리는 것이 2007년 새 천년 오늘의 한국 현실입니다. 지나온 우리 역사가운데 지난 20-30년간의 변화는 그야말로 급격한 변조를 동반한 기간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입니까? 연대적 삶을 다시금 세우는 것 아닐까요?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구체적 희생과 실천적 대안을 가지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섬김의 문화’를 아래로부터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오늘의 본문은 예수가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모습을 섬기는 존재로 드러낸 핵심적인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의 중간에 위치합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하고 근본적인 의미를 담지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란 주제어로 시작되는 마가복음서는 구약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의 통치를 시작하는 의미로 서술된 복음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구약성서 본문인 이사야서 52장 7절을 봅시다: “놀랍고도 반가와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고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구나’ 하는구나.” 구약에 나타난 “희소식”, “복음”으로 표현되고 이제 곧 하나님께서 오시고 하나님께서 통치를 시작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마가복음의 주제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야훼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안에서 야훼 하나님은 그의 통치를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바로 그렇게 행동했고 십자가와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마가복음에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가 누구냐에 관한 부분입니다. 8.27이하에 보면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섰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요약해서 대답합니다. “세례요한, 엘리야, 예언자중 한분으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인식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리스도, 기름부음 받은 이, 메시야, 그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는 행해져야 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은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이 실제로 오시는가... 그 방식과 방법에 있어 커다란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8.31에 예수는 자신이 장로들과 대제사장 그리고 율법학자들에 의해 많은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부활한다고 말을 합니다. 예수는 이것을 드러내 놓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그리스도됨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럴 수 없고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보내심에 대한 근본적 오해를 제기하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서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사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34절에 하나님의 통치가 어떻게 오는가에 대해 말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의 생각에 대한 분명한 수정을 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더 나아가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이는 잃을 것이고 목숨을 잃는 사람이 목숨을 구할 것이라 말을 예수는 덧붙입니다. 이것은 9.33의 두 번째 고난 예고에 연결이 된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이해 못하는 제자들 간에 “누가 크냐”하는 주제로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에 대해 예수는 첫째가 되려면 꼴찌되어 모든 이들 섬길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 세우고 그를 껴안으며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날 영접하는 이는 나를 보내신 야훼를 영접하는 것이라 말씀을 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면 무엇인가 하고자 했고 갖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아이들, 여자들, 남자들과 서로 서로 받아들이고 어우러지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부자 젊은 청년과의 논쟁에서 이 세상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는 말합니다: “날 위해, 복음을 위해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 논 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자녀, 논밭을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서 8장부터 삶을 내던지는 헌신이라는 주제가 구체화 됩니다. 삶을 내던지는 것은 얻기위한 것이라는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 것들 전체를 버림으로 영생을 얻는 다고 말씀을 합니다. 3번째 고난 예고는 이러한 논조로 마무리 짓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오늘의 본문이 나옵니다.
우리가 좀 더 주의를 기울여 성서를 봅시다. 세베대의 두 아들들은 하나님 통치가 이루어지면 예수를 따름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합니다. 하기야 이 세베대의 두 아들들은 아주 특별난 이들이었습니다. 예수가 그들을 불렀을 때, 그들은 지체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선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12명의 제자단에 확실하게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제자들 중 몇 명에게 별칭을 주었는데 시몬은 베드로, 그리고 세베데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천둥의 아들’이라 별칭을 지어주었습니다. 이들에게 무게가 실려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아들들은 하나님 통치가 곧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길에 대해 오해가 아니라 정확한 이해력에 바탕을 두고 열정적으로 따랐던 것입니다.
세베대 아들들의 요청에 대해 예수는 별로 비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는 그들이 예수의 영광속에 동참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좀 다른 것을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10.38)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여기서 예수가 말하는 잔과 세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시에는 성만찬이 없었고 교회에서의 세례도 있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즉 부활절 이전의 상황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단어는 당시 유대교적 상황에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습니까?
잔을 마신다는 것의 의미는 순교를 받아들인다는 말이었습니다. 신앙을 위한 순교는 당시 헬레니즘 영향권안에 있었던 유대교내에서 많이 확산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순교를 의미하는 잔이었습니다. 즉 이것은 예수가 고안해낸 언어용법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의 민족으로부터 나온 언어 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게세마네 동산에서도 “아버지여, 당신이 원하신다면,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리스어로 ”Baptizesthai"는 "아래로 내려가다“ ”침수되다“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함께 견디어 낼 수 있느냐? 예수는 묻습니다. 너희는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느냐? 두 아들은 예수가 말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는 그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 한 가지 수정을 요구합니다. 영광받았을 때 자리를 예수가 허락할 수 없고 하나님 나라의 논리, 즉 영원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비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는 하나님 통치가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수행된다고 말씀합니다. 즉 여기저기 개별적으로 개입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에게 예수는 말합니다: 너희가 요청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그 자리는 하나님통치의 자가 논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너희들이 미리 주문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의 나머지 제자들은 이것을 듣고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와 세베대 아들들간의 은밀한 관계에 대하여 시기하며 잘못 이해하고 있는 우선권문제에 대해 시비를 겁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러한 질문을 하는 예수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면서도 아주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너희가 아는대로 민족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권력관에 대하여 볼 수 있는데, 권력의 생리는 지배하려 한다는 것을 예수가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 주권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헌신, 즉 자신의 삶을 던져 섬기는 사람, 다른 이들의 짐을 져주는 종으로서 살아가게 된다고 예수는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원칙이 이루어지는 곳은 사람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독일 디아코니아의 영웅 요한 힌리히 비헤른은 자신의 디아코니아 신학의 핵심을 다음으로 표현합니다: “인간에게 깊이 들어가 인간의 고난을 깊이 알고 그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기위하여 야훼 하나님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야훼 하나님으로 깊이 들어가 야훼가 내안에 살아 운동하는 이들은 섬김의 장으로 자연스레 나가는 것이 자명한 이치입니다.
우리는 이 단어 즉 섬김(diakonia)이라는 단어가 두 번째 세 번째 예수의 고난 예고 이후에 등장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아래 살아가는 삶은 바로 섬김을 행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섬김, diakonia의 실천에서 드러난다고 예수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헌신하는 것. 구체적으로 사람사이의 관계속에서 이러한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이 일어나는 곳에는 사람들을 향한 섬김이 구체적으로 일어나야하고 지배하려는 사고가 해체된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단순히 자기부정이 아니라 삶을 실제로 나누고 주어야 한다고 예수는 말합니다. 즉 다른 이들과의 올바른 관계속에서 섬김의 실천이 자연스레 흘러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일에는 평생을 섬김을 위해 디아코니아 자매회 언님들처럼 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디아콘과 디아코닌 그리고 디아코니세라 불리웁니다. 안병무 선생님은 그분의 독일 체류시 이러한 디아코니아 공동체에서 섬김을 실천하는 이들을 보면서 ‘어떻게 끊임없이 기쁨을 가지고 섬김의 일에 열정적으로 임할 수가 있을까!’ 하는 물음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안박사님의 그 물음이 한국에 디아코니아 자매회를 태동하게 한 것입니다.
지난 학기에 디아코니아 학교 학생들과 디아코니아 현장탐방을 목포 디아코니아 한살림의 집에 다녀왔습니다. 저와 학생들은 1박2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언님들께서 하시는 실천현장에서 함께 디아코니아 실천을 하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의탁할 곳이 없는 노인분들을 모시고 살면서 돌보는 그분들의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장애를 가지신 노인분을 목욕시켜 드리면서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목포의 달동네 현장을 방문하며 섬기는 일, 농민들에게 수지침 봉사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언님들과 자원봉사자들의 하나하나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많은 감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배하고 통치하는 의미로서의 하나님 나라, 그것은 몰트만이 말하는 저 먼 곳으로부터 종말적으로 다가오는 식의 애매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나라가 아니라 아주 현실속에서 인지가능한 섬김의 실천으로 만나는 구체적인 것입니다. 섬김의 현장에서 만나는 이들에게는 건강한 웃음이 있습니다. 이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는 보상심리에서 벗어나 섬김 그 자체에서 오는 기쁨이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과 삶이 일치하는 삶입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가 아니라 현실 자체가 삶에서 드러나는 삶입니다.
디아코니아는 초자연적인 표식을 구했던 바리새인들같은 고정된 시각에서가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디아코니아적 삶의 방식에 반대되는 삶은 삶의 이익을 위해 자리를 차지하려는 자연스럽지 못한 노력들에서 발견됩니다. 거기에는 무언가를 이 세상에서 얻고 가지려하는 욕망들이 다른 이들 위에서 더 큰 능력을 가지고 행사하려 작용합니다. 이것은 욕망에 경도된 잘못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내어주는 섬김의 삶!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살아있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기 부정이나 무아지경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향린교회가 평화나눔 작은공동체 운동을 시작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섬김 운동이 다양한 섬김현장에서 역동적으로 일어나는 것, 참으로 귀중한 일입니다. 저도 디아코니아 연구소에서 그저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실천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번 달 말부터 디아코니아 공동체 운동을 청주에서 시작하려 준비중에 있습니다. 디아코니아 자매회 언님들과 연대하여 디아코니아 영성과 신학을 기반으로 섬김을 실천하는 운동인데 이는 향린교회 여러분들이 계획하는 일과 동일한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향린교회는 지난날 이 땅의 어두운 역사속에서 정의의 산실로 귀중한 역할을 하여 온 터입니다. 이제 변화된 상황속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되어 이 땅에 또 다른 지표를 제시하는 교회로 우뚝 서기를 저는 소망합니다. 스위스의 어느 디아코니아 신학자는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머리는 체게바라가 되고 몸은 머더 테레사가 되어야 한다”. 이는 정의와 사랑이 한 몸 안에서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하늘 뜻 나누기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섬김이 자연스레 일어나는 곳,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이루어집니다. 섬김의 실천을 가져오게 하는 섬김의 영성은 어디서 올까요? 아마도 그것은 나를 비어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스스로 예수의 잔과 세례에 동참하고, 섬기는 종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늘 뜻은 무엇입니까? 바로 섬김의 삶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침묵으로 말씀을 묵상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