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8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교회(2)-서로에게 사랑의 종이 되자
창 13, 1-9; 갈 5,13-26

[진실과 거짓]

최영희 시인의 <촛불>이란 시의 한 구절입니다.

얼음이 아무리 두꺼운들
실날같은 봄바람을 어찌 이기며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천지를 구름이 삼킬 것 같아도
구름이란 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무게를 못 이기어 빗방울이 되고 마는 법.

국가독재 권력에 의해 조작된 인혁당 간첩단 사건에 연류되어 사형을 당한 8명의 억울한 누명이 지난 수요일 사형당한지 32년 만에 무죄로 선고되고 그 거짓이 낱낱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방금 읽은 시구처럼 구름이란 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어둠은 짙어지지만, 결국 그 무게를 못 이기어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고 하늘은 맑아지듯이 거짓은 물러나고 진실은 드러났습니다.

그분들이 사형당할 때 저는 당시 한국신학대학 졸업반으로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간간이 데모도 참가하고 그분들이 사형당하기 몇 달 전에는 사복형사들의 눈을 피해 모인 40여명의 기숙사 거주 학생들이 아침 9시에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기습데모를 벌렸고, 그로 인해 참여자 모두가 최소 구류 한 달을 살았습니다. 출근길에 광화문에서 벌어진 이 데모는 잠깐이지만 권력 핵심의 허를 찌르는 사건이 되었고, 이것이 그 후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기습거리 데모의 효시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신학대학은 그 이전에도 잦은 데모로 교실문을 닫는 휴업령은 물론이고 정문을 닫는 휴교령도 당해야 했고, 같은 해에는 71년도에 있었던 서승,서준식형제의 서울대 재일교포 학원간첩단 사건과 유사한 한국신학대학 재일교포학원간첩단 사건을 고문 조작해서 여러 학생들을 감옥으로 몰아넣고 폐교를 시도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이 사건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국가가 100% 거짓말이야 하겠는가? 뭔가 조금이라도 북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간첩활동이 1%는 있었을 것이다라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저는 국가가 말하는 간첩이라고 하는 것은 100% 완전 조작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도 그 이전 인혁당의 하부조직으로 발표된 민청련사건에 연류될뻔 하였다가 함께 활동하던 친구의 아버지가 치안국 간부여서 그 올가미에서 벗어난 일도 있었기에 정부가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유신정권하에서의 국가권력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지에 대해 언론에 나오고 있습니다. 어느 엿장수는 길거리에서 ’대통령은 개XX다 여당은 빨갱이들만 모인 집단이다.‘라고 고함을 쳤다가 지나가던 경찰이 붙잡아 징역8개월을 산 경우도 있고, 비누행상을 하던 어떤 여인은 동네 부녀자들에게 ’3년 뒤면 이북 김일성이가 내려올 텐데, 비누 한 장 팔아주면 축원을 하겠다.‘고 말했다가 징역2년을 살았다. 막노동을 하던 김아무개씨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박정희대통령은 종신대통령도 아닌데 주민등록법과 민방위조직을 만들어 국민을 옴싹달싹 못하게 한다.”라고 말했다가 징역2년을 살았다. 요즘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조지오웰의 <1984년>의 소설 같이 국가권력이 개인 한사람한사람의 활동과 생각을 통제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 깊은 상처를 누가 회복시켜 줄 것인가?]

아니 조지오웰의 소설에 나오는 소름끼치는 얘기보다 우리의 현실은 더 참혹했습니다.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하재완씨의 아내 이영교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난생 처음 행상과 외판원을 하며 전전했고 밤새 옷을 만들어 내다 팔기도 했다. 하지만 아침에 눈 뜨는 것이 두려울 만큼의 가난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주변의 냉대와 핍박이었다. 갑자기 친척들의 왕래가 뚝 끊겼다. 동네 아이들마저 일곱 살짜리 아들의 목에 새끼줄을 묶고 빨갱이 자식이라며 충살놀이를 할 정도로 이웃들의 반응은 무서웠다.’ 물론 우리는 김낙중선생님과 김남기집사님의 가정이 당한 얘기를 알고 있어 새삼스럽지는 않습니다.

어제 한겨레 독자란에는 인혁당사건 관련자 아들인 황세영씨의 글이 실렸습니다. ‘30여년 전 어머니는 인혁당 사건으로 광주 교도소에 복역중이던 아버지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광주 시내에서 ’박정희는 참 나쁜 X이다.‘라고 외치셨다. 그러자 바로 경찰서에 끌려가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온몸을 구타당한 뒤 노숙자 시설 같은 곳에 몇 달 동안 방치되셨다. 그러다가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었던 형사가 택시에 어머니를 태우고 우리 어린 형제들에게 데려왔다. 그때 어머니는 우리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그 뒤 병원에서 몇 해를 보내시다가 내가 중2(1981년) 여름방학 때 퇴원해서 나와 함께 시골 큰댁에서 주무시다가 내 품에서 고통을 호소하시며 돌아가셨다. 30년 전 한 여인은 대통령을 욕했다는 이유로 맞아 병원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나의 어머니에게 욕먹은 그 대통령의 딸은 현직 대통령을 욕하고도 오히려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최근 인혁당 사건이 법원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30여년 전, 어머니와 추운 겨울날 손을 꼭 붙잡고 새벽기도회를 갔었다. 그때 큰 보름달이 언덕 위에 걸려 있었다. 어머니께서 저희에게 저 달을 보면서 각자의 소원을 빌어보자고 하셨다. 그때 어머니의 소원이 바로 며칠 전 법원에서 판결한 아버지의 무죄 아니었겠는가?

구약성서 문학적 구성으로 본다면 야훼 하느님은 천지창조에서 그 모습을 처음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야훼 하느님은 출애굽 사건에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야훼 하느님은 양을 치던 모세를 불러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울부짖는 그 소리를 들었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소리가 들려온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이란 어떤 마음입니까? 이는 어버이의 마음이며, 고통 받는 백성들의 아우성소리를 듣고 괴로워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신앙 좋다. 믿음 좋다. 라는 말은 얼마나 기도를 유창하게 하고 얼마나 많이 성경말씀을 암송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자들의 아우성소리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교인됨의 근본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들 주위의 고통 받는 소리에 귀를 기우리는 것입니다. 물론 인생이 苦(고) 자체인데, 고통 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병으로 인한 고통, 인간관계로 인한 고통, 경제적인 고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의 고통, 누구나가 다 별의별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나도 목회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먼저 관심하고 성서가 말하는 고통은 의로 인한 고통, 억울한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시작한 <평화나눔 작은공동체> 운동은 바로 이러한 고통의 소리를 관심하고 찾아내자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니면 아무도 관심하지 않을 그런 사람 곧 황세영씨 같은 사람을 찾아내어 기도와 말씀으로 위로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특권이자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실날같은 기도 밧줄같은 응답]

지난 주 수요일 우리는 인혁당 관련자들의 무죄 소식을 들은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강정구교우 2심 판결 선고가 미루어지고 대신 한달 후에 재심리로 들어간다는 기쁨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할렐루야!’로 시작되는 문자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모든 것이 우리의 뜻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일을 위해 40일 금식기도회를 이어왔고 그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우리는 정의실현을 향한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환호의 함성을 울렸던 것입니다. 지난 12월 14일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이라는 터무니없는 검사의 구형이 있은 직후 법원 계단에서 20여명의 동지들이 모여 서로의 각오를 다짐할 때, 우리는 국가보안법에 관한한 법원은 꿀 먹은 벙어리들이니 금방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자가 판사의 판결까지는 40여일이 남았다는 그 소리에 저의 영혼은 번쩍 눈이 뜨였고 이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의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임을 깨닫고 여러분에게 40일 금식기도를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전 향린교인들이 54년 만에 교회 생기고 처음 갖는 이 40일 연속금식기도에 그것도 자신들의 기도제목이 아닌 국가보안법 폐지와 강정구교우 무죄선고라는 도저히 불가능한 기도제목에 얼마나 동참할는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참가자가 없으면 난 본래 아침은 안 먹으니까 아침 금식은 내가 전적으로 담당하고 저녁은 임보라목사나 조명숙집사가 다이어트 삼아 가끔 저녁을 안 먹기도 하니 이 두 사람에게 전담을 시키고 점심은 노재열집사께서 하시면 되겠지 하는 궁여지책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넘치는 성원으로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전 두끼 금식만으로 충분했고 오히려 여러분들이 저보다 더 많이 금식했습니다. 반신반의로 시작한 우리의 기도 그러나 희망을 잃지 않은 실날같은 기도에 야훼 하느님께서는 밧줄 같은 응답을 주신 것입니다. 모두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느님은 우리가 마음만 합치면 실날같은 기도라도 밧줄같이 응답하신다.>

물론 이것이 마지막은 아닙니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32년 전 남편과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한 저 인혁당 가족들의 애달픈 외침이 당시로는 어느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 미미한 소리였지만, 역사의 거센 물결을 계속 막을 수는 없었던 것과 같이 강정구교수의 외침 또한 머지않아 우리 민족 구성원 모두의 양심과 지성에 울려 퍼질 것을 확신합니다.

[이념과 신앙]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정치 이념과 종교 신앙의 구분이 모호해질 때가 있습니다. 이념이나 신앙은 한 개인 혹은 집단이 옳다고 여기는 개인적 사회적 가치 개념이라는 점에서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 국가보안법 폐지와 같이 정치적 이슈에 관심하는 활동은 종교 신앙의 활동이 아니다 라고 말하기도 하고 종교적 교리나 활동으로 인해 교회가 두 패로 나누어 싸울 때 이를 종교 신앙의 활동이라 말하지 않고 정치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결국 정치 이념활동이냐? 아니면 종교 신앙활동이냐?를 구분 짓는 잣대는 그 사안이 정치적 사안이냐? 아니면 종교적 사안이냐? 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와의 관련성에 따라 개인마다 다르게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사안이 어떠하든 공동체의 분열을 불구하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를 끝까지 관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정치 이념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주장하지만, 그것이 공동체의 분열을 가져올 때, 자기주장을 거기서 멈춥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장 보다는 공동체가 깨지면 자기주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종교 신앙인입니다.

이념인은 사물 판단에 매우 냉철하고 계산적입니다. 인간을 수치로 보는 일에 능합니다. 한 인간의 가치를 봉급이나 사회적 지위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내 편 네 편으로 가릅니다. 반대로 신앙인은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이 담긴 고유한 인격체로 이해합니다. 한 인간을 겉으로 드러난 능력이나 재능으로 그를 판단하지 않고 그를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입니다. 그도 나도 똑같이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에게만 햇빛을 더 비추시고 나에게만 비를 더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셨지요. ‘공중에 나는 저 보잘 것 없는 참새 한 마리도 다 하느님이 관리하고 계시는데, 너희 인간들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지. 너희들 알아! 하느님께서는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헤아리시고 계셔.’ 저 같은 대머리들은 하느님의 시선이 머무는 헤아리는 시간이 다른 사람에 비하면 월등 짧으니까, 왜 하필이면 머리카락이냐? 턱수염은 안 되냐? 하고 반문하지만, 그러나 하여간 머리카락 하나 떨어지는 것조차도 하늘 아버지께서 다 아시고 계시다는 말씀에 위로를 받습니다. 여러분 머리감고 머리카락 빠진 걸 보면 그걸 보고 안타까워하지 마시고, 아! 하느님은 이걸 다 세고 계시겠지 많이 빠졌으니까 더 오래 세시겠지 하고 위로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러한 하느님의 돌보심을 에페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이야 말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영어성경에는 작품이란 말을 masterpiece다 라고 했습니다. master 곧 주인의 작품이다 라는 말인데,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걸작품이다 이런 말입니다. 진선미 그 자체이신 하느님이 최고의 정성과 최선의 노력과 최대의 예술성을 발휘해 만드신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한 최상의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얼굴 그리고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이건 하느님의 걸작품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미리 예정하신바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만드신 걸작품입니다.”(2장 10절) 여러분 지금 주위를 한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휙! 하고 둘러보지 마시고 한사람 한사람 자세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얘기하세요. ‘당신은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너무 멋있어요!’

[사랑의 종이 되십시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 시험이 들었습니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고 시작한 이 교회가 그만 할례문제로 논쟁이 붙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아니다! 육체의 할례보다는 마음의 할례가 더 중요하다! 아니다! 마음이 있다면 육체적으로 못할 이유가 없다. 한 교인이 말합니다. ‘너희들은 부모가 모두 유대인들이고 유대인 공동체에서 태어나서 어렸을 때 자연스럽게 할례를 받았지만, 내 경우는 아버지만 유대인이어 그런 할례를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육십이 넘은 나이에 그런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냐?’ 우리는 흔히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그냥 율법주의자라고 단정하지만, 어떤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고 해서 그를 그냥 율법주의자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전통의 중요성을 지켜나가려는 그들의 주장은 일면 타당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할례는 세례일수 있습니다. 우리도 정관을 만들면서 세례를 받은 사람만을 정회원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등록교인이면 모두 정회원으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기점으로 삼았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헌금도 잘 하고 봉사도 선교활동도 열심히 하지만, 당신은 세례를 받지 않았으니 투표권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이 사람은 향린교회를 율법주의자들의 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쉽게 그 사람 율법주의자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피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지금도 그러하지만, 유대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민중을 억누르는 교권의 억압적인 틀을 깨는 개혁운동을 하기는 했지만, 유대교 자체를 파괴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성전을 숙청하셨지 성전 자체를 거부하신 것은 아닙니다.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 어디에도 할례를 거부하셨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받으셨지만, 태어나자 8일 만에 남성 성기의 일부를 잘라내는 할례는 하느님의 선택된 사람이라는 표식으로 그리고 유대교의 성원이 되는 매우 중요한 종교의식이자 민족의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유대 땅 안에서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할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 땅 밖에서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방지역을 선교하던 사도 바울로에게는 이는 큰 문제였고, 그래서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겉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교인들이 모여 특별심령부흥회를 열었는데, 이 강사가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설교한 것입니다. 그래 그만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파와 비할례파, 유대인파와 헬라인파 등 두 패로 갈려 교리 논쟁이 붙었고, 그 싸움이 교리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개인 비리에 모함까지 덧붙여지면서 붕괴 직전까지 간 것입니다.

그래 사도 바울로는 이 얘기를 듣고 이 편지를 썼는데, 그 어조에 분노가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장 1절로 5절까지는 평화의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로가 쓴 다른 서신들을 보면 이 인사말이 1장 전부 아니면 2장까지 계속되고 칭찬의 얘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책망할 것이 있다면 이 얘기는 편지 말미에 가서 언급합니다. 그런데 이 갈라디아서에서는 5절의 매우 짧은 인사치례를 하자마자 바로 이어 6절에서부터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하느님을 외면하고 또 다른 복음을 따라가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망과 분함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복음을’ 흔히 많은 목사님들이 이를 ‘율법’ 혹은 ‘행위의 복음’이라고 단적으로 결론을 내려버리는데 이런 해석은 매우 위험하기도 하고 그분들 스스로에게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행위나 율법을 비판하는 목사들일수록 성수주일을 강조하고 십일조를 강조하고 새벽기도를 강조하는데, 성수와 십일조와 새벽기도회 또한 율법이 되기도 하고 행위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활동을 은혜로 알고 감사하게 기쁨으로 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아니 저 사람은 교회를 그리 오래 다니고도 왜 십일조도 안 해? 왜 저 사람은 집사라면서 주일에 예배도 안 드리고 딴 데를 가? 이때에는 성수주일과 십일조와 새벽기도는 모두 율법이 되는 것이고 구원의 조건이 되는 행위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이냐 복음이냐?는 논쟁의 초점은 아까 정치 이념인과 종교 신앙인을 구분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와의 관련성에서 나오는 가변적인 것이지, 겉만 보고 무조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로가 말하는 또 ‘다른 복음’이란 공동체에 분열을 가져오는 그 어떤 종교적 교리나 주장을 말하는 것이고 지금 갈라디아공동체 내에서는 할례가 된 것입니다. 다른 공동체 곧 모두가 할례를 받은 공동체나 모두가 할례를 받지 않는 공동체내에서는 이 할례가 율법 조항이나 다른 복음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모두가 바로 이러한 열린 신앙 태도 성숙한 신앙인들이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 편지 말미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할례를 받았다든지 받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5장 6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하나됨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확신과 논리에 가득 찬 개인의 주장이나 이념이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하나 됨을 위하여 자기주장을 꺾을 줄 아는 신앙인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쳤고 그래서 세상에 큰일을 하리라고 믿었던 갈라디아 교회가 그 쩨쩨하기 짝이 없는 할례로 인해 교인들이 떠나가고 교회가 분열에 처한 것을 보고 그만 화가 치민 것입니다. 그래 그만 우리 귀로 의심할만한 충격적인 얘기를 하는데, 그 얘기가 오늘 읽은 본문 바로 앞 절에 나옵니다. ‘할례를 주장하여 여러분을 선동하는 자들은 그 지체를 아예 잘라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도 성전을 허물라는 과격 발언을 하셨지만, 그래도 그건 다시 세우면 되는 건물이지만, 사도 바울로는 도대체 한번 자르면 회복이 안 되는 요즘말로 하면 ‘거시기를 잘라버리라.’는 과격 발언을 하신 것입니다. 전 예수님이나 바울로와 같이 과격한 사람은 되지 못해 여러분들에게 뭐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만약 그 무엇무엇 때문에 형제를 형제로 보지 못하고 자매를 자매로 보지 못한다면, 그래서 그가 가진 고유한 성품과 인격 대신에 내편인가 아닌가로 갈리게 만든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것이 자신의 확신이든 신념이든 이념이든 신앙이든 교리이든 상관없이 아예 잘라버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를 자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만약 자나깨나 여러분을 괴롭히는 무슨 생각이 있다면 그건 여러분을 노예로 만드는 일이니까 그건 진리가 아닙니다. 떡잎부터 잘라내시고 뿌리 채 뽑으시기 바랍니다.

[좋은 쪽을 먼저 선택하라.]

요즘 아브라함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친아들과 같이 여기고 이국땅 가나안에 와서 서로 의지하고 살아왔는데, 우물을 두고 하인들끼리 자주 다툰다는 얘기를 들은 것입니다. 헤어지기 섭섭하지만, 이제 분가를 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래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니 기도를 했겠지요.

그리고는 롯을 데리고 산 정상위로 올라갑니다. ‘너와 나는 한 골육이 아니냐? 네 목자들과 내 목자들이 서로 다투어서야 되겠느냐? 네 앞에 얼마든지 땅이 있으니 따로 나가서 살림을 차려라. 네가 왼쪽을 차지하면 나는 오른쪽을 가지겠고 네가 오른쪽을 원하면 나는 왼쪽을 택하겠다.’ 아마 나중에 이 얘기를 들은 아내 사라나 그 목자들은 아브라함을 마구 비난했을 것입니다. 아니 삼촌이 먼저 선택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어떻게 조카에게 선택권을 주는 법이 있느냐고? 그리고 우리가 훨씬 양도 많고 목자도 많으니까 우리가 먼저 좋은 쪽을 선택해야지 어떻게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하게 하였느냐고. 그리고 그놈은 아직도 나이가 젊으니까 어디나 개척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아! 롯 그 놈은 좋은 땅은 삼촌에게 양보를 해야지!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 본문 기자는 이 순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롯은 요르단 분지를 다 차지하기로 하고 그리로 옮겨갔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헤어졌다. 롯은 요르단 분지에 있는 여러 도시에 살다가 마침내 소돔으로 천막을 옮겼다.> 우리는 이후 소돔이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으며 롯은 자기 두 딸과 관계를 맺고 비극의 씨앗을 낳고 유랑하는 사람이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어 성서기자는 계속 말합니다. <롯이 떠나간 다음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고개를 들어 동서남북을 둘러보아라. 네 눈에 비치는 온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고하고 자신의 이념에 따라 산 롯은 처음에는 승리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멸망으로 갔고, 재산이나 땅보다 사람을 중시하고 관계를 소중히 여겼던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손해를 보는 듯 했지만, 결국은 땅도 사람도 다 함께 얻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아브람을 믿음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축복이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땅을 포기했을 때 얻어진 역설의 신앙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자신을 죽이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를 드렸던 것과 같이 치열한 자기 투쟁을 겪은 후에 자기 포기를 통해 얻어진 축복이었음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신앙축복의 비결이 그냥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자기 투쟁과 기도 후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자기 포기에 있었다고 하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로는 권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여러분의 육정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마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삼키고 하면 피차 멸망할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어찌 혼자 남아 쌀밥 먹겠는가?]

우리 진보적 생각을 가진 신앙인들은 상당수가 북한에 대해 일방적으로 비난하기 보다는 일단 사랑으로 품고 나아가는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우리가 북의 공산주의 체제나 독재체제를 옹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우리와 한 피를 나눈 골육이자 형제이고 자매이고 우리보다 힘이 약한 약자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북을 두 번 방문해본 사람으로서 그 사회가 갖고 있는 체제의 단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핏줄을 나눈 한 골육이기에 ‘먼저 선택하라.’고 양보하는 것이고, 물어뜯고 삼키면 피차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의 말씀은 상대에게 양보하라!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에게 종이 되라!고 말합니다. 당시의 종은 주인이 말하는 모든 명령 그대로를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위치에 있었고 주인이 죽으면 같이 관에 묻히기도 했습니다. 서로에게 종이 되라는 말씀에서 이 서로는 지금 적으로 알고 싸우는 상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상대 앞에서 죽으라는 말입니다. 자존심이고 인격이고 뭐고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거시기도 자르는 판에 안 될 건 없지요.

제가 서두에서 한국신학대학 3학년 때인 1974년 가을에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기습거리데모를 하였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어깨동무를 하고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종로 길을 건너자 경찰 병력이 나타나서 우리를 에워쌌습니다. 그래 출근길의 시민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우리는 바닥에 앉아 구호를 외치면서 한명한명 순순히 경찰트럭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트럭이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동료 한명이 달리는 트럭을 향해 뛰어왔습니다. 우리가 손을 붙잡아 겨우 올라타고 나서 숨을 헐떡거리며 <버스를 잘못 타서 늦었네. 친구들이 감옥 가는데 어찌 혼자 남아 공부하고 쌀밥 먹겠느냐?> 고 그랬습니다. 그리곤 한 달을 함께 콩밥 먹었습니다.

이런 게 함께 신앙하는 맛이 아니겠습니까?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