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이야기(사 40:1-11, 벧후 3:8-15, 막 1:1-8)

2017. 12. 10. 대림절2


오늘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그리고 2017년 마지막 달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2017년 이 순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제가 요즈음 생각한 것을 부족하지만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을 흔히 이야기의 연속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태어나 우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몸짓 하나하나가 부모의 이야기 거리가 되고, 자라면서 죽음을 맞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누군가에게 이야기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우리와 가까이 했던 사람들도 우리에게 이야기로 남겨집니다. 내 삶의 곁을 지켰던 사람으로, 스치고 지나갔지만 내 인생을 풍족하게 채워준 사람으로, 물론 때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기억되기도 합니다.


원하건 원치 않건 우리는 나와 무관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도 듣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즐겁고 행복한 이야기입니다. 지치고 힘든 삶속에서 또다시 누군가의 아픈 이야기를 듣는 것이 힘에 겹기 때문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삶을 우리는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만 듣고 싶고, 알고 싶지 않고,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만하라고 막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우리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일터에서 억울하게 차별을 경험했던 이야기부터 가정에서 폭력으로 만신창이가 된 이야기,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과의 이별 이야기부터 사회에서 겪었던 아픔의 이야기.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둘러싸여 출구를 찾을 수 없어 막막한 이야기. 그런데 막상 나의 억울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들어줄 사람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데 하지 말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부끄러워 숨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여 답답함과 절망으로 결국 삶의 끈을 놓기도 합니다. 그나마 살아있는 그 누군가는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절망 속에서, 어둠속에서 한 줄기 빛이 되어줄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사야서 40장의 이야기는 기다린다는 것조차 힘에 겨웠던 사람들,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기다림이란 것, 똑같은 기다림이지만 때를 알고 기다린다는 것과 언제인지 때를 알 수 없는 기다림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정된 기다림 속에는 불안하지만 희망이 있습니다. 설령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결과가 오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에 설레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때를 모르는 기다림 속에는 초조와 공포, 두려움이 더 크게 우리를 덮쳐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이 시간이 지속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빌론 포로들의 기다림이 이런 기다림이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의 멸망을 목도한 사람들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하느님은 우리를 버린 것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었던 하느님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은 아닌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성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신이 졌다는 것, 즉 자신들의 신의 존재가 부정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집트의 노예였던 자신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그들을 이끌어 냈던 하느님. 그들과 함께 있다고 또 영원히 함께 한다고 믿었던 그들의 하느님. 그러나 힘든 시간 속에서 포로민들이 본 것은 시들 수밖에 없는 한낱 풀포기, 질 수 밖에 없는 꽃에 불과한 나약하고 처참한 자신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외치라’는 말씀을 받은 이사야도 백성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에게 보이는 것도 절망뿐이었습니다.


이사야는 반문합니다. ‘무엇을 외칠까요?’ 풀과 같은 우리의 삶속에서 외칠 수 있는 말씀이 무엇이란 말입니까?라는 극도의 낙담이 이사야의 응답 속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한줄기 희망이 없는, 기다림조차 포기한 이들에게, 이사야에게 하느님은 외칩니다. 모든 것이 스러져도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바로 이제 모든 복역의 때가 끝났다는 선포입니다. 더 이상 기다림은 없다는 것입니다. 고향으로 귀환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할 일은 이제 사막에 길을 내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포로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했던 하느님은 그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첫 대림절을 보내며, 대림절을 상징하는 색깔은 보라색이고, 이 색은 기다림이란 의미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에는 여성신학회에서 세월호를 주제로 특강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주제강연을 오신 분은 오현선 교수님이신데 세월호 참사때부터 유가족과 시간을 함께 하셨고 지금도 미수습자 가족분들 곁에 머무는 분입니다. 이 날 이제까지의 과정을 들려주시면서 이제는 이런 이야기를 그만 듣고 싶어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아직도 미수습된 가족들을 기다리는 그 분들의 기다림이란 어떤 것일까, 그 마음의 일부를 내가 과연 헤아릴 수는 있을까,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과 함께 이 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머리 속에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가진 많은 분들, 아직 이야기를 끝맺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아픔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분들의 이야기가 하나, 둘씩 떠올랐습니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막연한 시간을 기다리는 분들의 아픔.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말하지 못하는 분들, 말하지 말라고 강요당하는 분들. 47년전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외치며 분신했던 전태일 열사,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아들의 끝나지 않았던 이야기를 계속 전해주었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세상이 들어주지 않아 스스로 세상을 등지며 외로이 가신 많은 해고 노동자분들과 가족분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 광주의 끝나지 않은 아픔들, 군대에서 복부하던 중 의문사한 분들과 유가족분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 언론에조차도 알려지지 않아 아직도 억울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분들. 이야기를 하여도 들려지지 않는 우리시대의 고통을 지고 가는 많은 분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 속에서 누군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할 그 누군가를 기다리며 계신 분들.


대림절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이사야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옴을 전하며 사막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칩니다.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고,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벌판에 큰 길을 만들라”고 외칩니다. 하느님이 여기에 오시기 때문입니다. 노예들의 억울함과 한탄을 들어주셨던 그 분, 그들의 목소리를 기억하셨던 그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길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막에 길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막에 길을 내고 벌판에 큰 길을 닦는다는 것은 당시 바빌론의 큰 길과 너무도 대조되는 길입니다.


바빌론의 신과 왕의 웅장한 행차를 거행했던 대로와는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한 길입니다. 사막과 허허벌판, 메말라 생명이 없는 곳, 모든 것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곳에 길을 내라는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고, 이 길을 이제 해방의 길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하느님은 오시며 이곳은 낙심과 절망으로 하느님은 우리를 버렸다고 믿는 포로민들에게 이제 위로의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직 그들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길을 통해 새로운 출발, 새 역사의 장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바빌론 포로민을 위로하라는 이사야에게 주는 하느님의 말씀은 흥미롭게도 신약성서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세례요한의 삶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세례요한은 광야, 사막에서 회개를 촉구하는, 우리를 성찰하도록 외치는 목소리였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을 외쳤던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였습니다. 선택받았다는 안일함이 불러온 가식적인 종교행위들, 종교인의 모습을 하고 부끄러운 행동을 일삼는 종교지도자들, 이웃을 외면하고 그들의 목소리 듣기를 거부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돌아서야만, 오시는 예수님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우리에게는  두가지 목소리가 모두 필요합니다. 위로의 목소리와 우리의 마음과 삶을 일깨우는 성찰의 목소리. 이것이 우리를 살리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방법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곳, 위로의 목소리가 울려야 할 곳, 들어줄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는 곳, 이곳에 우리는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 하느님이 오실 수 있도록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그곳에 새로운 길을 내어야 합니다. 동시에 들어야 할 말씀이 필요한 곳에는 과감히 비판의 목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돌아서서 눈감고 귀막고, 들어야 할 이야기를 외면하고 거부하는 곳에 회개의 촉구를 외쳐야 합니다. 사막과 같이 생명이 살 수 없는 그곳에 외치는 자의 소리를 통해 물이 흐르고 길이 뚫리는 역사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 때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는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의 목소리, 그들의 이야기, “다음 생애에는 내 자녀로 태어나지 말고 돈 많고 권력있는 집의 자녀로 태어나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말라는” 군대에서 의문사한 유족들, 이들 어머니들의 목소리, 47년 전 한 노동자의 죽음이 아직도 여러 곳에서 우리 청춘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이 현실들. 모두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입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의 이야기들이 잊혀지고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의 이야기들이 끝나지 않았는데 잊혀지기를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의 이야기들이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오셨던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우리는 이들의 외롭고 목마른 길을 넓혀주어야 합니다. 이들의 이야기에 우리도 함께 등장해야합니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불안하고 답답한 이들의 기다림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역사, 해방의 역사, 진실이 밝혀지는 시간이 오도록 우리가 위로자가 되어야합니다. 이곳에, 그들 곁에, 같이 가자고 누군가의 양심을 일깨우는 세례요한의 목소리가 되어야합니다.


촛불혁명이 벌써 1주년을 맞았고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불의와 죽음이 덮쳐 어둡고 추웠던 그곳을 함께 걸으며 길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가끔 대학 때 읽었던 중국 소설가 루쉰(1881-1936년)이 <고향>이라는 책에서 말했던 희망에 대해 생각하곤 합니다. 루쉰은 말합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2017년 겨울, 대림절을 이곳 향린에서 보내며 저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이 들려지고, 알려지고, 전해지고, 그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에 그들과 함께,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길을 만들어갔으면 합니다. 그곳에 임마누엘의 하느님, 2000년 전 갈릴리에 희망과 생명으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