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도구! 우리 밤의 그림자를 뛰어넘기 위해...”

(시편 89:1-2/15-16, 예레 28:5-9; 로마 6:12-23; 마태 10:40-42)

조 은 화 목사

 

[평화의 다른 두 얼굴]

 

지난 주 저는 한국샬렘 영성목회 수료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성공회, 감리교, 기장 등 개신교 목회자들이 만나 1년 동안 영성훈련을 받았고, 마지막 수료피정을 23일간 제주도에서 가졌습니다. 그 기간 중 강정마을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피정이 진행된 첫날 저녁에, 다음날인 620일 오전에 미군함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급히 접했습니다. 하여 피정 일정을 급히 바꿔서 강정마을에서 연대하기로 했습니다. 다행이 새벽에 미군함은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날 오전11시 강정마을에서 문정현 신부님이 집전하시는 기도회와 성찬에 참여했고, 군기지 정문에서 강정평화를 위한 연대 시위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그곳에 살면서 직접 일하고 계시는 활동가를 통해 최근 강정마을의 분위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정마을은 해군기지가 다 세워져 모든 문제가 끝난 것 같지만, 실상 강정마을의 폐해는 계속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안타까웠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강정에는 초등학교가 있는데 학교를 다니고 있는 초등학생은 강정마을을 지키고자 애썼던 주민들의 자녀와, 강정해군기지에서 살고 있는 해군, 경찰의 자녀가 함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마을의 특수성 때문인지 45살 어린 아이들의 입에서도 쉽게 평화라는 말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생각하는 평화가 서로 다른 개념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강정마을 지키기 위해 해군과 맞서는 것이 평화라 생각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해군기지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서로의 생각이 다른 만큼 관계도 갈라진 다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초등학생 중에서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끼리 뭉치고, 집단끼리 서로 뭉쳐 따돌림을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강정 해군기지는 단순히 기지를 세우고 안세우고, 자연의 훼손을 하고 안하고를 떠나 그 이상의 문제가 벌어지고 있던 것이지요. 분열의 양상은 마을 전체 특히 그 어린 자녀들의 사고까지도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독단적 방법으로 지은 해군기지 하나는 그 하나로 끝나지 않고, 결국 제주의 한 마을의 미래, 더 나아가서는 한 나라의 어린 새싹들의 평화의 마음까지도 갉아 먹은 셈입니다.

 

 

[미순 효순 사건! 아직도 파행은 진행되고 있다.]

 

지난 610, 효순미선 15주기를 3일 앞두고 미2사단 창설 10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었으나 파행된 일이 있습니다. 두 명의 중학생은 2002613일 미2사단 장갑차에 깔려 숨졌지만 현재까지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주한미군 제2사단 창설 100주년 기념일은 오는 1026일임에도 미2사단 지휘부의 요청으로 3개월이나 빠른 그것도 효순미선 15주기를 앞두고 일을 저질렀습니다. 현재 의정부시는 경전차로 인해 막대한 세금의 손실을 감행해야하는 상황임에도 예산 57천만원을 들여, 8군 군악대와 의정부시 시립 무용단을 비롯해 인기 가수들의 공연을 준비했습니다. 이유는 한미우호증진과 국가안보강화에 기여한 미2사단 장병과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한미동맹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대내외에 알리고자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주한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두 학생의 참사를 앞두고, 나서서 진상규명을 나서도 부족 할 판에, 의정부시가 사건의 가해자인 이들을 위한 위안잔치를 자청해서 나선 것은 분노를 금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시의회와 시민단체의 경고와 반대를 무시하고 진행한 미국을 향한 조공잔치는 연예인들의 대거 불참으로 파행되었습니다.

 

무대에 올랐던 인순이씨의 멘트가 인상적입니다. "의정부시민에게 죄송하지만, 이 행사를 안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해주십시오."라고 관객들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노래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크라잉넛 또한 사과의 말을 전한 후 무대에서 내려왔습니다. 이날 초대된 유명 가수들이 공연을 취소한 이유는 이 공연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모두가 함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행태는 종교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종교의 분열 부추김: 이단시비]

 

최근 예장합동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차별에 반대하며 성소수자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임보라 목사님에 대해 이단 운운하며 해명과 소명자료를 제출할 것을 요구한 일이 있었습니다. 급기야 8개 교단의 이단대책위원회가 함께하기로 결의한 것을 보면서, 도대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뭔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성소수자에게 인권은 목숨인 만큼 혐오 없는 정의로운 교회를 위해 애쓰고 있는 목소리에 이단성 검열을 들이대며 정죄하는 이 작태는 그야말로 미개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이면에 진리추구보다는 자신들 나름의 분열을 막기 위한 이슈파이팅하기 위한 정치적 판단이 선 행동으로 보이긴 합니다만, 적을 규정하는 식으로 자신들의 갈등을 풀어보고자 하는 얄팍한 수야말로 적폐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 율법이 아닌 믿음]

 

오늘 이런 면에서 우리는 바울이 왜 율법이 아닌 믿음을 이야기 하는지를 더욱 생각하게 합니다. 갈등과 혐오를 부추기는 이 부패한 상황에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운동에 대한 박해자이자 열렬한 유대주의자였던 바울이 예수 운동가가 되는 삶의 극적인 변화는 어디서 왔을까요? 대략 전향 시기인 주후 36년에서 처형당한 시기로 알려진 62년까지가 그가 박해를 무릅쓰고 예수의 사도로서 무려 30년간이나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삶의 열정을 불어넣어준 계기는 바로 예수운동의 부활을 향한 분투였습니다. 그것에 그는 새로운 혁명의 눈을 떴습니다.

 

오늘의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교회를 향한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갖고 일을 하고 있는지 자세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사건을 통해 얻게 된 놀라운 실존체험은 새로운 삶을 열어주었습니다. 여기서 그가 왜 율법이 아닌 믿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알게 합니다. 로마의 권력 안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계급의식, 그리고 가부장제, 노예제도, 무엇보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 권력을 유지하고 갈등을 양산하여 한쪽을 적으로 규정하고, 비인권적 삶을 살게 하는 이 세상 앞에서, 바울은 율법의 잣대가 아닌, 믿음을 통해 보게 되는 새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아닌, 은총 안에 있다. 그 어떤 이도 사람을 어떤 잣대로든 노예로, 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과히 체제를 뒤엎는 변혁의 삶을 제시합니다.

 

이같은 고백은 로마제국의 혜택을 비판적 안목으로 보게 합니다. 비록 체제에 저항하느라 고난은 당하겠지만 그것 너머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모두가 희망을 안고 분열을 넘은 부활의 삶, 평화세상을 보게 합니다.

 

[정의의 도구]

 

우리는 오늘을 삽니다. 정부가 바뀌었으니 다 되었다고 보시는지요. 향린교회가 이제 할 일이 없어졌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명박박근혜 보다야 낫겠다는 생각은 당연히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의 목적이 끝난 것은 아니겠지요. 그간 두 정권이 10여 년간 파헤쳐 놓은 분열의 자리를 치유하고 잇는 시간이 그만큼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우리에게는 많이 남았음을 기억하고 정진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정의의 도구로 선 예레미야]

 

많은 예언자들 가운데 예레미야만큼 파란만장한 생애를 산 예언자가 없습니다. 그는 나일 강가에 이름도 없이 묻히기까지 피눈물 나는 외로운 인생이었습니다. 민족의 비운을 짊어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간 예언자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겨레가 알아주지 않는 것이 그지없이 서글펐으나 그래도 하는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느님의 뜻만이 절대적이었다. 그 뜻을 따라 정의를 세워 사회다운 사회를 이룩할 사명을 띠고 탄생한 나라가 그 사명을 저버릴 때 이미 그 나라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신념이었기에 말이지요. 그 사명을 저버릴 때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선포하고서 어찌 외롭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렇게 전합니다, 권력의 편에 서서 강대국에 빌붙으면 다 잘 될 것이라는 거짓예언자 앞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결국 모든 이들에게 외면당하고 조롱과 비난 속에서 버티는 그는 그 자신의 일을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25백년이 지난 오늘 더욱 힘차게 우리의 마음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 진정 살 길은 시대의 흐름을 내다보고 깨어있음의 정신으로 정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그 정의의 도구로 살아감은 쉽지는 않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말씀을 빌어 우리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사는 삶이 어떤가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뜻이 있는 곳에 시련이 있게 마련이다. 그 시련을 물리치면서 살아 나가는 데 생이 있고 미래를 향해 밀고 나가는데 역사가 있다.” (문익환 전집/설교집 109)

주님의 은총을 알지만, 그 뜻이 이뤄지도록 정의의 도구로 사는데 왜 시련이 왜 없겠습니까? 좀 더 편하게 살고 싶고, 기존 체제에 머물면서 누리고 살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생각이겠지요, 그래도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거기에 승부를 걸었으니까요.

 

강남순 교수의 말을 통해 우리의 자리에서 정의롭게 사는 길을 정리해 봅니다. “미소 없는 정의는 그 정의의 이름으로 또 다른 종류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비판적 인류의 역사는 저항으로서 보여주고 있다. 좋은 종교는 타자들에 대한 책임, 환대, 포용, 연민, 연대, 평등, 평화, 정의의 가치를 실천하고 확산하고자 한다. 종교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 종교인들, 신을 향한 사랑이 타자들을 향한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이해하는 종교인들이 바로 좋은 종교를 만들어가는 이들이다. 이러한 좋은 종교를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모든 종교의 과제이다.

 

철학자 존 카푸토는 종교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자신과 타자를 사랑하는 이들만이 신을 사랑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성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물음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아봅니다. (강남순, 정의를 위하여143)

 

화합을 깨뜨리고 사람을 정죄하고 분열시키는 악의 힘은 계속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악에 저항하고 막아섬으로 사람이 사람다운 삶, 평화의 길을 위해 진정한 정의의 도구로 쓰여 져야 하겠습니다.

지난번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논문표절부터 이념 성향까지 청문하는 자리가 열렸습니다. 야당의 억지스러운 사상검증 공격에 맞서 표창원 의원의 발언이 기억에 남습니다. ‘매카시즘을 우리 사회에서 일소시키자고 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더 이상 대한민국에 매카시즘, 종북몰이, 색깔론으로 양심의 자유를 짓밟고 정부의 행정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의 주장은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밤의 그림자를 뛰어넘기 위하여]

일본군 성노예 피해 보상을 위한 수요시위에 참석했었습니다. 전체여신도회와 사회부가 함께 주관한 이번 시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어린이들의 자유발언을 통해 깨달은 바는 지난 시간 매주 수요일마다 수요시위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간 어려움 속에서 저항했던 일은 결국, 이 어린이들이 진실을 볼 수 있도록 했음을 느꼈습니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그래서 평화를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누구보다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정의의 도구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그 영향으로 새로움이 피어오르고 그래서 우리가 참 자유인의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신 여러분! 아직 우리에게는 사랑, 포용, 환대, 연대로 좋은 이웃의 삶을 실천해야 하는 긴급한 시대적 요청이 있습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쉽게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도처에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함께 맛본 우리가, 아직도 존재하는 우리 밤의 어두운 그림자를 뛰어넘기 위해 부단히 정의의 도구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힘내십시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절실하게 내 뜻이면서도 나를 넘어가는 뜻에 눈이 떠지고, 그것이 나와 여러분의 가슴속에서 발동이 걸려 앞으로 밀고 나가는 곳에 역사가 있다... 예수라는 젊은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뜻을 가지고 생을 살아버린 영원한 젊은이가 인류의 가슴속에 심어준 값진 씨알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 우리는 바로 씨알의 삶을 살아간다!” (문익환)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정의의 도구로 이 밤의 그림자를 뛰어넘기 위한 애씀을 계속 이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