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시대적 역할: 도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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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행역시(倒行逆施)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라는 뜻의 사자성어가 대학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말입니다. 이에 대해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의장을 지낸 이도흠교수는 많은 교수들이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선거 부정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 박근혜 정부에 실망해서 이를 꼽은 것 같다.'고 말했고, 또 다른 교수는 유신체제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억압적인 국가권력과 심화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더욱 강화하는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이라고 말했습니다.

 

[과도한 공권력은 또 하나의 폭력]

 

박근혜정부는 수서발 KTX 면허를 통한 민영화 문제로 인해 20일을 넘는 철도노조 파업에 대해 8천명의 철도노동자들을 즉시로 직위해제하고 우리가 평화롭게 예배드리던 지난 일요일에는 9명의 노조지도부를 잡겠다고 최루탄과 5천볼트의 고압전기봉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투복장으로 무장한 경찰 5천명을 민주노총 건물로 투입시키는 불법과 파행을 저질렀습니다. 경찰에게 체포영장만을 발부하고 수색영장을 법원이 기각한 것은 체포는 하되 이를 위해 과도한 공권력을 행사하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었는데, 청와대로부터 지시를 받은 경찰청장은 경향신문 건물 현관 유리창을 깨고 막아서는 조합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잡아들이는 폭력을 동원하였지만, 체포 결과는 꽝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경찰청장의 대답인즉, 민주노총 사무실에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강행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는 체포를 핑계로 민주노총 사무실을 완전히 헤집어 놓겠다는 악마적 심보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노조위원장이 지금 민주노총에 다시 들어왔다고 하는데, 왜 지금은 체포를 강행하지 않는 것일까? 그건 체포가 본래 목적이 아니라, 민주노총 사무실을 박살내겠다는 본래의 목적을 이미 실현했기 때문입니다. 찰스텔리라는 미국 컬럼비아대의 사회학자는 국가 또한 공권력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폭력집단이라고 말했는데, 현 정부가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말았습니다.

 

1년 전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와 보훈처의 총체적인 관권개입이라는 부정선거로 당선된 박근혜댓글정부는 시작부터 자신들의 불의를 감추기 위해 역으로 모든 민주세력들을 깡그리 없애겠다는 전략을 갖고 일을 진행하여 왔습니다. 그래 첫 번째로 터뜨린 사건이 이석기의원 국가내란음모죄입니다. 처음 국정원이 언론에 발표했던 말과 실제 법원에 제출한 조서 사이에는 무려 272곳에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히 홀씨정도 바뀐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절두산 성지결전 성지, ‘구체적으로 준비하자전쟁을 준비하자, ‘사상누각사상전으로 전쟁반대투쟁을 호소하고전쟁에 관한 주제를 호소하고180도 말을 비틀어서 언론에 발표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날조입니다. 그렇게 날조문서를 통해 국민을 국가내란이라는 공포 속으로 몰아놓고는 즉시 정부는 진보당 해산을 법원에 청구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지요. 전교조와 전국공무원노조를 불법으로 몰아갔고, 철도노조와 민주노총을 마비상태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민영화가 필요한 곳]

 

지금 이 정부는 경영 효율화를 내세우며 철도 의료 교육 전반에 걸쳐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자유경쟁을 원칙으로 하는 민영화라는 말은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이는 결국 재벌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사기업화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엄청난 떡고물이 현 정부 관료들에게 뿌려지는 것입니다. 공기업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을 하니 손해가 나도 계속 운영이 되지만, 사기업은 손해가 나면 즉각 직원을 줄이거나 값을 올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열차나 의료는 직원을 줄이면 사고가 많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영국은 민영화를 했다 큰 사고를 두 번이나 일으킨 이후 다시금 공영화시켰습니다. 현재 서울서 부산까지 고속철 운임이 57천원인데, 같은 거리를 일본은 20만원, 영국에서는 28만원합니다. 모든 물가가 그러하듯이 한번 오른 운임은 내려가지는 않습니다. 미국에 사는 교포들이 우리보다 삶의 수준은 높아도 값비싼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한국에 들어와서 수술을 받고 가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저는 박근혜정부가 만약 민영화를 굳이 해야겠다면 먼저 말썽 많은 국정원과 무능한 경찰청부터 민영화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5천명의 경찰을 투입해서 하지 못할 일도 그 정도의 전투장비라면 사기업을 이용하면 오 백명이면 될 것이고, 국정원 또한 입찰 자유경쟁을 통해 일을 추진하면 훨씬 효과적인 운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국정원은 비밀유지가 생명이라고 말하겠지요. 그런데 국정원장부터 국가비밀문서인 남북정상 대화록을 제 마음대로 공개하는데, 비밀이 무슨 생명입니까? 요즘 비밀 없습니다. 인터넷 뒤지면 모든게 다 나옵니다. 국정원에서 간첩을 잡았다고 훈장도 주고 일계급 특진까지 합니다. 그런데 2,30년이 지나 이 모든 것이 고문에 의한 조작라고 판결이 나도 이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왜요? 공기업이니까요. 이걸 민영화를 통해 사기업으로 해놔야 시간이 흐른 뒤에라도 조작이라고 판결이 나면 개인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책임을 물을 수가 없으니까 간첩조작사건이 계속해서 터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국정원과 경찰청을 먼저 민영화하여 사회정의를 바로 세울뿐더러 국가재정을 튼튼하게 만들어 가십시다.

 

청와대 안주인께서는 법에 따른 정당한 노조파업도 불법이라 말하고, 국정의 원칙이 흔들리면 안 된다고 말하는데 그 원칙은 어디에 근거한 원칙인가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만 원칙이라고 우기면, 이건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한 루이 14세와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현 정부는 본래 하지 않겠다던 민영화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고, 본래 하겠다던 차별없는 어르신연금, 대학생반값등록비, 무상보육, 4대 중증질환 무상의료, 서민주택건설 등등의 서민복지 약속은 이전 정부와 별 차이가 없는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오늘의 도피성?]

 

그런데 제가 오늘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철도민영화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철도노조지도자들이 23일 민주노총 건물에서 소리없이 사라졌다가 25일 성탄절에 다시 나타났는데, 그게 조계사였습니다. 이걸 두고 기독교인 몇 사람들이 자조 섞인 목소리로 아기 예수가 조계사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방송이 인터뷰를 하자고 그래요. 무슨 인터뷰입니까? 그랬더니 왜 7,80년대에는 이런 일들이 생기면 교회로 피신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명동성당 아니면 조계사입니까? 향린교회도 예전에는 이런 시국 농성이나 노동자 파업할 때, 많이 왔는데, 이번에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참 창피했습니다. 왜 개신교로는 이런 피신자들이 오지 않는 것일까? 교회 건물이 70년대에 비하면 엄청 많아지고 높아졌는데, 왜 이런 사람 받아줄 교회는 없는 것인가? 아기 예수는 눌 장소를 찾지 못해 마굿간 말구유에 누었는데, 지금도 예수가 서울에 오시면 말구유, 말밥통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수많은 십자가의 빨간 불빛은 과연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불빛인가?

 

고대 이스라엘 시대에는 도피성 제도가 있었습니다. 지역별로 6개의 성을 정해 실수로 사람을 죽여 자신이 죽게 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피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당시의 법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동형보복이 원칙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가족이 누군가로 인해 죽었을 때, 그것이 실수든 고의든 죽음으로 보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수일 경우 강자들은 자신을 변호하기가 쉬웠지만, 약자들은 실수라 하더라도 자신들을 보호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도피성은 일종의 약자보호법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도피성은 높은 곳에 위치했는데, 일 년에 한 번 마을 사람들은 그 길을 잘 닦아놓도록 되어 있습니다. 눈에 잘 띄게 하여 빨리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밤에 켜진 빨간 십자가는 누울 곳 없는 사람들을 향해 빨리 찾아오라고 하는 불빛이 아닌가요?

 

헤롯왕은 아기 예수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유대인의 왕으로 왔다는 동방박사의 말을 오해하여 베들레헴 일대의 두 살 이하의 남아들을 모두 살해하고 맙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하는데 대해서는 의문점이 남아 있지만, 권력 유지를 위해 아내도 자식도 죽였던 헤롯의 포악함을 간주하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현대는 법이 있긴 하지만, 법이 국가의 공권력에 기초하고 있기에 국가 자체가 불의한 정부에 의해 가동될 때에는 정부에 반대하는 의로운 사람들을 보호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OECD 국가 중 남한만이 유일하게 노조파업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법으로는 파업이 보장되어 있지만, 이를 근로조건에 한정하고 있어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전에는 시국농성자들이 간혹 향린교회를 이용하기를 원해 빌려준 적도 있고 지금도 밀양 송전탑 반대하는 할매 할배들이 서울에 올라오면 며칠씩 묵고 가지만, 일요일이 겹치는 경우는 어려움이 많아 빌려주지 않다보니 이제는 접촉조차 없습니다. 앞으로 향린교회가 건축을 하게 된다면 도피방을 하나 마련하여 국가폭력으로 인한 억울한 희생자들을 보호하는 시설을 갖추면 좋겠습니다.

 

[멍들고 더러워진 교회]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프란시스코 교황은 교회가 자신의 존속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관습과, 관행과, 스케줄과, 용어들과 구조 등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를 꿈꾸고 있으며, 따뜻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뛰쳐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러워진 교회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교회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교회개혁으로 인해 길을 잃을까봐걱정하는 것보다 잘못된 안정감을 주는 구조 안에, 냉혹한 판단을 내리게 하는 규율 안에, 편안한 느낌을 주는 습관 안에 스스로가 갇히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요즘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을 지닌 저항을 신앙의 상징으로 삼았던 개신교가 21세기 남한 땅에서는 오히려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개혁하는 교회 그래서 새로운 교회라는 뜻을 지닌 개신교는 이제 구교가 되었고 구교라 불리던 천주교가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는 프로테스탄트들의 신교로 그 처지가 뒤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개신교인 숫자는 계속 줄지만, 천주교는 계속 늘어가고 있는 것이 이를 명백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사람을 죽이는 폭정이라는 가혹한 비판은 맑스의 자본론에 나오는 글이 아니라, 최근 교황이 발표한 복음의 기쁨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본래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신앙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증언한 초대교회는 재산을 함께 소유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나눔 공동체, 사회학적 용어로 말하면 공산주의 이념에 기초해서 시작하였다고 사도행전 2장과 4장 두 곳에 걸쳐 명백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의 국가들이 기독교국가라 자처하며 국가 주도의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개인 경쟁의 시장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여 왔고 이 서구의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생성한 남한 자본주의 안에 갇힌 교회는 남북분단에 따른 반북이라는 정치군사적 대결구조로 인해 성서의 본래 가르침인 공산주의를 반성서적이요 반기독교 사상으로 여기는 모순에 가득 찬 기형적인 교회가 된 것입니다. 성서를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절대 신봉하면서도 동시에 성서에 있는 핵심 가르침을 반성서적으로 해석하는 신앙 모순 속에 갇히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존재론적으로 남북통일을 이루지 않는 한, 남한 땅에서의 참 교회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런 모순은 맑스와 엥겔스가 주창한 공산주의가 신을 부정하면서 생겨난 현상이지만, 평등을 핵심가치로 삼는 공산주의야 말로 제1성서에서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고, 이웃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임을 강조하며 나눔을 중요시 여기는 제2성서의 핵심 사상과도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성서는 신의 말씀에 순종하여 개인이 자발적으로 한다는 것이고 공산주의는 국가의 주도하에 집단적으로 한다는 그 방법에만 있고, 내용에 있어서는 하나인 것입니다. 요즘 모두들 안녕하지 못하다고 소리를 치고 있는데, 대자보의 내용은 제각각이지만, 그 저변을 흐르는 생각은 하나입니다. 그건 자유 경쟁이라는 미명 하에 움직이는 이 시장 자본주의 구조는 다수를 아예 출발선에서부터 경쟁에서 탈락시키고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는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한 악한 제도라는 것입니다. 지금 남한 재벌 집안은 아들손자며느리 모두 하나씩 회장 자리를 껴 차고 있습니다. 일당 독점체제, 한 가족이 삼대 사대를 넘어 영원토록 부를 세습하는 형태는 귀족 왕정국가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그들 앞에만 가면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고 말씀에 귀를 기우립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죽도록 순종합니다. 맘몬이 곧 신이 되었습니다.

 

[지배 없는 착취]

 

오늘 이 사회는 살아 움직이는 수직인이 아닌 관에 누어있는 수평인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노조는 개인의 파편화를 거부하고 연대를 통한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가와 권력은 이런 연대를 불법이라 말하고 체제의 길들이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자본주의 하의 노동사회는 익명적 삶의 과정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이라고 단정하며 그래서 다윈 이래 인간은 동물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제는 다시 동물로 변신하는 중인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재인용 한병철 <피로사회> 42)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조 파업은 단순히 임금보장과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쟁의투쟁이 아니라 저항을 통한 인간다움의 실현입니다. 나날이 가속화되어가는 정규직의 비정규화는 (사실 민영화의 속내는 이것이다)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노동의 극대화이지만,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인간을 기계화 내지는 부속(附屬)화 하는 비인간화 작업인 것입니다. 현대를 성과사회로 그래서 긍정의 과다로 인한 우울증 환자가 넘쳐난다고 해서 <피로사회>라는 책을 낸 한병철교수는 이익극대화의 강제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 안에 산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위의 책 43) ‘지배 없는 착취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신자유주의의 실상입니다.

 

2007모두 부자되세요라는 새해 인사가 유행한지 6년이 지나 여러분은 모두들 안녕하십니까?’ 라는 본래의 인사말로 되돌아온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입니다. 안녕 대자보의 열풍이 단순히 대학교에서 멈추지 않고 고등학교를 비롯한 사회주변부로 번져가고 있으며, 어제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거부하는 정부의 폭력적 권위에 저항하며 철도노조를 지지하는 노동자 시민 10만 명이 모여 거리 행진을 하였다는 사실과 노무현전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그린 변호인영화가 주제나 예술성에 있어 그리 탁월하지는 않지만, 천만을 향한 시민들이 관람하고 있다는 사실에 저는 인간다움을 향한 남한 사회의 변화의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인간, 사색하는 인간 그래서 자신이 주체로 서는 자유인이야 말로 예수께서 추구했던 안식일의 주인으로, 하느님의 딸과 아들로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현재의 노동사회, 피로사회에서 우리가 이를 이겨내는 한 가지 방식은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통해 나의 오늘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과연 수십년 후에 닥쳐올 죽음 앞에서 오늘을 후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까? 성도추모주일은 단순히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 일에서 그치는 예식이 아니라, 돌아가신 분들의 삶을 이어가기 위한 자기 성찰인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예수께서는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성도 추모]

 

올해는 특히 여러 교우들이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박영숙권사님, 양수남권사님, 이정순권사님, 김명숙교우님 그리고 홍근수목사님 이외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나보내신 분도 많이 계십니다. 저도 아버님을 떠나보냈습니다. 허학범집사께서는 어머님가 누님을 열흘 간격으로 동시에 떠나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번 추모성도 명단을 보면 하나 특이한 점이 있는데, 그건 저와 함께 10년을 일하던 임보라목사와 한문덕목사 대신 고상균목사와 조은화목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우리 세 목회자의 아버님들이 모두 올해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이건 무슨 뜻일까요? 아마도 하늘나라에서 향린교회를 위해 힘써 기도하자고 서로 공모를 하신 것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여기에 세 분의 권사님과 홍근수목사님을 더하면 일곱분이 되네요. 일곱은 요한묵시록에서 하늘을 상징하는데, 이제 닥아 오는 한해가 향린교회에게 있어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가는 중요한 한해가 될 것임을 상징한다고 보는데, 이에 동의하시면 아멘이라고 해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간다고 하는 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통해 우리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하고 그래서 영원을 바라보게 되고 나의 죽음을 준비합니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포기할 때 포기할 수 있고, 영원이 있기에 우리는 정의를 외칠 때에 두려워하지 않고 외칠 수가 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예수께서도 우리와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한 해를 마감하는 이 송년주일에 바울선생이 외쳤듯이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갔느냐?”라 담대히 외치며 새해에는 더욱 말씀에 굳건히 서서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할 것을 다짐하기를 바랍니다.

 

앞서간 성도들의 죽음과 부활이 오늘 나의 죽음과 부활로 되살아나는 모습을 그리면서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