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석습(朝花夕拾)

이사야 7:10-17; 시편 80:4-7; 로마서 1:1-7; 마태오 1:18-25

 

고 상 균 목사

 

[날씨가 춥습니다]

매일 매일 날이 참 차가워집니다. 개인적으로는 겨울추위의 위력은 점점 무섭게 늘어가는 도시가스 고지서를 통해 더욱 절실하게 느껴는데요, 이렇게 몸과 마음에 느껴지는 추위는 비단 수은주 하락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소통의 부재, 불통을 넘어 이제는 아예 듣는 귀의 기능 자체가 없어진 듯 여겨지는 힘 있는 자들의 모습이 일상으로 여겨지고, 이로 인해 상처받고 아파하며 끝내 생을 마감 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절규가 온 하늘에 울리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또 하나의 한파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한파의 현장 중 하나인 밀양 송전탑 건설의 상황을 안타까워하시며 끝내 스스로 목숨을 거두신 고 유한숙 어르신의 분향소가 차려진 시청광장 한 켠에서 어제 저녁 추모기도회가 있었는데요, 광장 전체를 차지하는 스케이트장의 신나는 음악에서도,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크리스마스트리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따뜻한 주님의 위로를 저는 성가대의 소박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르는 귀한 찬양에서, 음향, 진행, 사진 촬영 등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던 교우 여러분들의 곱은 손에서, 그리고 바쁜 일상 속에서 그 자리를 기억하며 기꺼이 시간을 내어 분향소를 찾아 슬픔을 함께 나눠주신 향린 공동체 구성원들의 마음자락에서 세미하지만 분명하게 다가오는 봄의 소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무쪼록 깊어가는 겨울, 추위의 한 중간에서 존경하는 여러 어르신들을 포함한 향린 공동체 여러분, 그리고 특별히 시대의 어두움으로 인해 차가운 감방에서 연말과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 분들 모두에게 대림의 절기, 우리에게 힘차게 주님의 온기가 가득 스미고 느끼는 절기가 되시기를 마음 다해 기원 드립니다.

 

[임마누엘 신탁의 배경과 의미]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사야 7:14)

 

오늘 함께 모신 말씀 중 이사야서의 내용은 해마다 대림절이 되면 익숙하게 등장하는 성서구절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그건 마태오공동체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본문에서 그 임마누엘이 예수그리스도라고 선언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는 그리스도교, 예수를 신앙의 중심에 두는 우리 기독교의 대표적 특성상 그분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삶과 신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무엇일 것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마음 속 깊이 사랑하는 그 존재가 오래 전부터 선언된 바로 그 오실 이라는 신념은 여러 삶의 자리에서 위기에 직면했던 초기 그리스도교를 말 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굳건히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어 주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사유 없는 맹신이나 제 판단이 없는 맹종은 앞서 언급했던 젊은 여자가 아이를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는 저 유명한 신탁을 전체 이사야서의 내용과 의미에서 분리시켰고, ‘젊은 여자라는 단어에 대한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그리고 극히 제한된 해석인 처녀권력화된 종교에서 이른바 동정이데올로기로 재탄생되었으며, 이는 다시 예수의 신성을 강화하는 이론으로, 혹은 수천 년 기독교 교리의 금과옥조(金科玉條) 확정되어 오랜 시간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저 믿을 것을 강요해 왔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임마누엘 신탁은 어떤 상황에서 등장하게 된 것이고, 이를 포함한 이사야서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 것일까요? ‘이사야의 계시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사야서는 66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유다 말기에서 포로기 혹은 포로기 이후까지의 긴 역사적 정황이 담겨진 내용, 그리고 수시로 바뀌는 인칭과 주제로 인해 우리들에게 그야말로 전체적 의미와 해석에 어려움을 안기는 문서입니다. 게다가 오늘 주어진 내용은 기이하기까지 합니다. 신이 직접 나서 내게 징표를 달라하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들은 왕은 징표를 요구하여 야훼를 시험하지 않겠다는 무척 신앙인스러운(?)’ 답변을 합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왕은 왜 신을 성가시게 하는가?’(이사야 7:13)

 

그리고는 앞서 언급했던 임마누엘 신탁이 등장합니다. 신께 아무런 징표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즉 원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왕에게 왜 이사야는 난데없이 성가시게 군다고 핀잔을 주는 것일까요? 그리고 여기에 이어지는 신탁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이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는 본문에 선행하는 단락과 함께, 본문의 역사적 정황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성서의 또 다른 부분, 즉 열왕기와 역대기를 살펴봄을 통해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7장은 우울한 전쟁의 시대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합니다.

 

시리아 왕 르신이 르말리야의 아들이 이스라엘 왕 베가와 함께 예루살렘을 치러왔으나 점령하지는 못했다. ~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은 바람에 휩쓸린 수풀처럼 흔들렸다.(이사야 7:1~2)

 

이사야서는 이 급박한 전쟁위협에 대해 좀 전 언급했던 내용으로 짧게 서술하고 있습니다만, ‘역사를 중심으로 신앙과 지금의 삶을 성찰하려했던 열왕기, 역대기 등 이른바 역사서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하즈는 아시리아의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간청하였다. “나는 왕의 신하이며 아들입니다. 내가 지금 시리아 왕과 이스라엘 왕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셔서 나를 그들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시기 바랍니다.” 아하즈는 야훼의 전과 왕실 금고에 있는 금은을 있는대로 다 모아서 아시리아 왕에게 뇌물로 보냈다 (열왕기하 16:7~8)

 

주전 8세기 경 유다왕국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일대는 격변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절대강국 앗시리아가 동쪽의 골칫거리인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제국의 서쪽에 집중하지 못하는 시기를 이용해 풍요로움을 구가했던 북이스라엘, 시리아 등은 이를 바탕으로 군사동맹협정을 맺고, 비록 상기 이유로 전력을 다하지 않은 앗시리아이기는 했지만 동맹을 깨기 위한 패권제국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앗시리아가 바빌로니아를 제압하는데 성공한 후, 마침내 꿈에 그리던 이집트 원정을 단행함에 따라 이 지역의 평화는 깨지고 맙니다. 이집트 진출을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통로이자 보급지역인 팔레스타인은 앗시리아에게 있어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지역이었고, 이로 인해 이 일대는 비극적 전쟁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한편 이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지역의 맹주였던 시리아, 북이스라엘은 주변 소국들에게 연합군 가담을 제안하면서 가까이 다가온 앗시리아가 두려워 선뜻 나서지 않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7장의 전쟁 기사는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앗시리아도 두려웠지만, 가까이에 있는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은 다 합쳐봐야 경상남도 크기 남짓한 유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두려움 속에서 유다의 왕 아하즈는 통제력을 잃어버렸고, 앞서 살펴보았듯 앗시리아에 도움을 청하는가 하면, 정신없이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장기농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식수보급로 공사를 위해 백성들을 가혹한 노동현장으로 내몰아갔습니다.

 

야훼께서 이사야에게 분부하셨다. “너는 네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표백물 건조장에 이르는 길사 윗 저수지의 수로 끝으로 가서 아하즈를 만나 그에게 일러라. (이사야7:3)

 

왕궁에 있어야 할 아하즈 왕을 배수로 끝에 가야 볼 수 있다는 이 대목은 식수보급공사에 대한 당시 정황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신의 사자는 왕에게 다음과 같은 신탁을 전합니다.

 

진정하여라. 안심하여라. 겁내지 말아라. (이사야 7:4)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

(이사야 7:9)

 

국운이 결정되는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가만있으라니요! 보기에 따라 태평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이에게 겁내지 마라고 말 하는 것은 격려와 응원의 표현일 것이고, 소위 쫄지 말라는 청유형의 언어일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히브리어 본문은 격려도, 응원도, 청유도 아닌 명령입니다. 지금 신은 두려움에 정신을 잃고 동분서주하고 있는 왕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해, 진정해, 겁내지 말고 차분히 있어!’

그리고 우리말 성서에서 진정과 안심으로 번역된 단어들의 히브리적 의미는 단순히 안도하고 있는 것이나 두려움을 외면하고 유유자적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역사의 실존, 두려움을 일으키고 있는 삶의 자리 속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의미로서의 정지 뜻합니다. 1성서는 이와 같은 명령으로서의 평안을 간혹 언급하고 있는데요, 대표적인 예가 뒤따라온 이집트군 앞에서 두려워 흔들리는 히브리인들에게 모세가 신의 이름으로 외쳤던 장면입니다.

 

두려워 말라. 움직이지 말고 오늘 야훼께서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보아라!(출애굽기 14:13)

 

이와 같은 야훼의 명령과 격려에도 아하즈가 공사를 중단했다거나 앗시리아에게 기대려던 마음을 돌이켰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답답한 야훼의 내게 징표를 보이라고 해라라는 말에 냉소하는 왕의 모습이 그려질 뿐입니다. 야훼를 시험하지 않겠다는 그럴싸한 답변은 기실 되었습니다. 그런 징표로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답변, 승리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사라진 마음을 숨기는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안타깝기 그지없는 왕에게 이사야는 마침내 신의 신탁을 내립니다. 어리석은 왕이여! 도무지 뜻을 돌이키지 않으니 내 징표를 보이겠소. 그건 한 젊은 여성이 출산으로 하며 그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르는 것이오!’ 역사적으로 그 여인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이름 없는, 그리고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짓는 것으로 보아 남편이 없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임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여인과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아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야기 속 이사야는 이를 통해 왕에게 외칩니다. ‘아직도 모르겠소? 신의 약속은 거대 제국의 힘이나, 백성을 수탈하는 전 국가적 전쟁 준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위기 앞에서 정신을 잃고 동분서주할 때, 비록 아무도 관심기울이지 않을지언정 출산이라는 자신의 삶의 자리를 지키고, 바로 그 자리에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신앙을 아로새기는 여인의 자리지킴에 있다는 것을 말이요!’

 

[위기의 순간에 기억된 임마누엘의 신앙]

 

이와 같은 이사야의 신앙을 기억하는 로마서의 바울과 마태 공동체는 서신의 처음과 공동체가 지닌 복음서의 서장,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임마누엘의 신앙을 떠올립니다.

 

이 복음은 성서에 있는 바와 같이 일찍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1:2)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마태오 1:23)

 

바울의 활동 전체를 집대성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로마서에는 자신의 마지막 여정인 스페인 선교를 준비하는 바울의 고뇌가 담겨있습니다. 자신의 멀고도 험한 여정이 그 시작과 성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중간 기착지 로마교회의 지원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던 반면, 소아시아 및 그리스 지역과는 달리 로마교회는 자신과의 인연이 거의 없는 곳이었던 터라 당시의 바울은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불안함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마침내 집어든 붓을 통해 그는 앞서 언급했던 신앙고백을 하기에 이릅니다. ‘내 앞날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함께 믿는 그분은 오래전 위기의 상황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예언자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바로 그분이라는 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분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 길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깃들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 ‘나는 그 분을 믿는다!’라는 단순하지만 분명한, 소박하지만 가슴 떨리는 고백은 마태오 공동체에게도 이어집니다. 유대인 공동체로 여타의 유대인들과 함께 삶을 공유했지만, 주후70년대에 벌어진 유대 독립전쟁의 비극적 패배로 터전에서 쫓겨나 여러 곳으로 흩어져야했던 이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공동체 재건 노력 속에서 이단으로 지목되어 내몰려야 하는 이중의 수난에 직면했습니다. 군대에 의한 방화와 살상(마태오 22), 회당 안에서 당하는 폭력(마태오 23:34) 등 공동체가 내/외부로부터 당해야 했던 폭력의 정황들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는 마태오복음서는 그 위기와 상황, 공동체 와해 아니 극단적인 생존의 위협 앞에서 놀라운 신앙의 성찰에 이릅니다. ‘우리 구주가 그렇게 위협적인 상황에서 출산한 이가 자신의 아이를 임마누엘이라 부른다는 예언이시다! 우리는 쓰러지지 않아! 자 살아가자!’

 

[조화석습]

오늘 함께 나누는 이야기의 제목으로 정한 조화석습은 중국근대문학의 창시자로 칭송되는 루신의 회고문집 제목입니다.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문장은 천하를 호령하던 자신의 국가 청의 몰락과 몰려드는 서구 열강 앞에서 무너져가는 민중의 삶의 현장 앞에서 자칭 선각자라는 이들이 저마다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겠다 외치고, 정신을 잃은 채 무리지어 휩쓸고 다니던 상황을 목도하며 남긴 글입니다. 이는 잘나가는 이들, 많은 이들이 돌아보지 않아도 꽃은 여전히 꽃이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통해 화려하게 향기와 빛깔을 내품는 아침이 아니라 아무도 관심하지 않는 저녁나절 떨어져 밟히고 나뒹구는 꽃을 살피는 마음으로, 현상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해가 떨어져 모든 것이 어두워 보이는 시간에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켜나가자는 루신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국가멸망의 직전에서 그 자리를 지키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나를 발견하라는 야훼의 목소리와 위기의 순간에 그와 같은 목소리를 기억하며 삶의 자리를 당당히 살아갔던 신앙의 선배들의 그것과도 같다 하겠습니다.

이제 대림의 절기는 성탄절을 앞두고 있으며 한 주를 더 넘기면 갑오년 새해가 밝아옵니다. 새해 첫달력에 등장하는 1월의 영어 "January"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두 얼굴의 신 야누스에서 기원합니다. 뒤를 돌아보는 찡그린 얼굴과 웃음 띤 앞 얼굴을 가진 야누스...

 

존경하고 사랑하는 향린의 교우 여러분!

지금을 살아가는 여러분은 이 순간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바라보며 깊은 한기에 어깨가 움추려 들 수도 있겠습니다. 또 귀한 삶의 자리인 가정과 직장 학교 등의 다양한 공간 속에서 소외, 섭섭함, 두려움, 분노, 근심으로 인해 그만 다른 곳을 바라보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울러 이렇게 함께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의 여러 모습에서 희망과 신명보다는 우려를 넘은 허탈함과 속상함을 지난 마음 닫음의 자리로 인해 얼굴이 굳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당연하지요.

 

하지만 여러분! 이러한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께서 오늘의 하늘말씀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계실지 모릅니다. ‘수고했어. 이제는 진정해. 겁내지 않아도 돼. 그리고 안심해!’ 이제 새롭게 펼쳐질 시간들은 아직 우리가 그 지극한 정지통해 만난 하느님의 기운으로 삶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음으로, 다시 한 번 힘을 내고 좌우에 있는 동료, 교우, 가족, 동지들의 얼굴을 보며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그 지극히 약한 너희 삶의 자리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징표에서 새 하늘 새 땅의 서막이 열린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 마음으로 잠시 침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