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감래(苦盡甘來)

35:1-10; 146:5-10; 5:7-10; 11:2-11

 

한해의 끝자락에 서서 오늘의 하늘뜻펴기 제목을 야고보의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의 말씀에 기초해서 고진감래(苦盡甘來)’ ‘쓴 맛이 다하면 단 맛이 온다고 하는 한자 숙어 제목을 붙였습니다만, 이사야의 말씀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황무지야 내 기쁨을 꽃피워라에 기초해서 황무지에 꽃 피우기로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가끔 언급하는 미국의 영성신학자 유진피터슨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성서 말씀과 자신의 목회 경험에 기초해서 어려운 신학과 철학을 이야기체로 글을 쓰는 목회자의 목회자라고 불립니다. 그가 3년 전쯤 부르심을 따라 걸어 온 나의 순례길이라는 목회 회고록을 폈는데, 한 시기를 황무지라고 부릅니다. 저는 이분이 교회를 개척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마도 교인도 없고 건물도 없는 개척 시절일 것이라 추측했는데, 그가 말하는 황무지는 교인들이 힘을 합쳐 교회 건축을 끝내고 난 뒤를 말하였는데, 무슨 이유였는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조직하고 힘든 건축을 마치고 나면 거기에서 더 힘을 받아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함께 사는 교회라고 하는 새로 형성된 자신의 정체성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그렇게 변화된 모습으로 기쁨으로 다른 사람들도 초대하고 섬길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틀렸다. 일종의 사회적 질병 같은 것이 회중 안에 퍼지자 나도 힘이 쭉 빠졌다....... 당시에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때 나는 훗날 내가 황무지라고 이름붙인 시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곳에 얼마나 오래 머물게 될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그동안 자신을 후원하여 온 노회의 담당 목사님을 찾아갑니다. 그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또 다른 건축 프로그램을 시작하세요.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구체적인 것,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필요해요. 어떤 도전이나 목표 같은 것 말이에요. 나도 겪은 일입니다. 그게 바로 미국식이에요.” 그런데 피터슨목사는 그의 조언을 따르지 않습니다. 대신 신이 죽었다고 말한 니체의 글을 읽다 깨달음을 얻습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땅에 충실하라.

하늘나라의 희망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은 믿지 마라.

그런 것을 말하는 사람들은 의식이 있든 없든 모두가 독을 넣어 주는 사람들이다.

모든 생명에 힘을 주는 땅에 충실하라.

당신이 베푸는 사랑과 당신이 알게 된 지식은 땅의 의미에 기여할 것이다. 사랑과 인식을 땅에서 날려보내지 말고 그것을 영원한 생명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넣고 살아가라.

 

니체 또한 모순에 가득 차 있고 질병과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어떻게 해방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족쇄를 어떻게 깨뜨리고 나갈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다만 그는 하늘로부터 질문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땅으로부터 출발을 한 것입니다. 피터슨목사는 또 다른 외적인 프로젝트를 시작하라는 선배목사의 조언 대신 보다 니체를 따라 보다 본질적인 구원의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또한 흔히 성공이라고 부르는 외부에 우리의 목표를 설정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성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또 다른 일을 시작하게 되는데, 내면의 동기보다는 세상 기준에 따른 목표를 세우다보니 자연히 무리가 따라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소위 성공했다고 말하는 재벌 회장들이 감옥에 갇히는 기사를 종종 접하게 되는 것은 전연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황무지를 또 다른 프로젝트로 대신하는 것은 마치 사랑이나 우정을 돈으로 사겠다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황무지]

 

올 한해 향린교회를 돌아보면 대단한 일들을 했습니다. 새해 첫 주일에 섬돌향린교회가 출발하는 세움과 나눔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60주년을 맞아 자유인의 교회국악연주곡집이라는 독특한 책도 내고, 사회선교센터인 길목협동조합도 만들어내고, 교인 사회신앙실천선언도 발표하는 등 매우 분주하고 결실 있는 전반기를 보냈습니다. 동료목사들과 세상은 향린교회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지난 9월 장로 선출을 위한 1차 투표를 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가시적인 일만을 추구하다보니 우리 안에 틈이 생긴 것입니다. 물론 이런 틈이 이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60주년이라고 어깨에 힘을 주는 순간 그간 누적되어 오던 틈과 간격이 겉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는 누구 한 사람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굳이 책임을 묻자면 그건 담임목사인 저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3개월간의 성찰의 시간을 갖고 오늘 2차 투표를 갖게 됩니다. 잠언 말씀에도 있듯이, 계획은 인간이 세우지만, 결과는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말씀과 같이 오늘 어느 분이 피택이 되든지 우리는 그가 하느님께서 세우시는 분으로 알고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저 또한 목회 회고록을 쓴다고 한다면 올해를 황무지로 말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저 자신을 향해 그리고 여러분을 향해 하느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황무지야, 내 기쁨을 꽃피워라.’ 장로선거가 내가 선택한 사람이 뽑혔다 뽑히지 않았다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향린교회를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사람을 세우는 축제와 환희의 기쁨의 시간이 될 수 없을까, 오늘 6년간의 시무를 마치신 노재열장로님을 그간 수고하셨다고 포옹하며 기뻐하듯이 새로운 사람을 축하하는 기쁨의 장으로 만들어 낼 때, 진정 이웃에 향기를 품는 향린교회가 될 것입니다. 틈과 간격이 왜 생깁니까? 그건 교회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려는 주인 의식 곧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낮은 자를 세우시는 목회의 근본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향린교회를 오년을 다녔던 십년을 다녔던 혹은 60년을 다녔던 우리는 언젠가 이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나그네들입니다. 역사의 주인이 하느님이시듯이,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애를 쓴다 하더라도 부모가 자녀의 삶을 대신할 수 없듯이 향린교회의 미래 또한 오로지 하느님께 있는 것이지, 우리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씨앗을 심는다고 황무지에 꽃을 피울 수 있나요? 씨앗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하듯이 농부의 심정을 품어야 합니다. 씨앗을 뿌리고 가을비와 봄비로 때를 따라 비를 주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신앙 창조성의 회복]

 

그러면 황무지에 꽃을 피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높은 교회 건물과 같이 눈에 보이는 프로젝트가 아니라면 그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저는 비유적으로 이런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피터슨목사의 또 다른 책, <하나님의 신비에 눈 뜨는 영성>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동료목회자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가 너무 많아서 시나 소설 같은 것은 읽을 시간이 없어라고 말할 때 나는 서글퍼진다. 그들의 말 속에는 정해진 일과에만 집중하고 창조적인 증상에는 관심을 기우리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필독서란 없다. 자양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라지 못하며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것은 홀로 설 수 없고 양육받지 않으면 성장하지 않는다.” 시나 소설이 우리에게 돈을 벌어주지는 않습니다. 그 시간에 전공서적을 읽거나 주식투자에 관련한 책을 읽는 것이 보다 현실적입니다. 그러나 시나 소설이 주는 창조성을 상실한 인간은 결국 메말라 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일도 가만히 보면 전공서적과 같은 일이 있고, 시나 소설과 같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간 분가나 60주년 행사에 매여 회의나 일에만 몰두하는 바람에 진정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시나 소설과 같은 작은 일에 소홀했던 것은 아닐까요?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교회에 오래 다니고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일종의 전공서적과 같고, 교회에 등록하신지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은 시나 소설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옆에 앉아 있는 사람 이름도 잘 모르지만, 같은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는 오늘을 인연 삼아 따뜻한 차를 나누며 이런저런 삶의 얘기를 나누는 일에 무관심하여 온 것은 아닐까요? 교회에 오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는 것은 아닌가요? 옆에 사람 얼굴 한번 쳐다보세요. 찻집에 앉아 시 한편을 읽는 편한 얼굴인가요? 아니면 어떤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긴 여유 없는 얼굴인가요? 일에 파묻히기 쉬운 일상을 시와 소설을 읽는 듯 여유 있는 기도와 묵상을 통해 우리 안에 하느님의 창조성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예배당에 들어올 때, 복도에 큰 거울이 있습니다. 그때 내 얼굴이 찻집을 들어오는 듯이 여유가 있는 기쁨의 얼굴인지 아니면 뭔가에 쫓기는 듯 굳은 얼굴인지 다음 주부터 꼭 한번 확인하시고 이 예배실에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공포정치]

 

요즘 세상 너무 각박하지 않나요? 지난 백년동안 한번도 평안했던 적이 없습니다만, 최근 두세 달을 돌아보면, 이석기의원 국가내란음모 사건으로 세상을 뒤집더니 곧 바로 청와대는 진보당 해산 청구 소송을 걸어 민주진보세력을 말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대선관권선거 개입이 명백히 드러나자 대통령 퇴진이라는 용어가 종교인들로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일상적 구호가 되었고, 내일은 저희 교회에서 전국의 기장 목회자과 신도 수백 명이 모여 시국기도회를 갖고 대한문까지 행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정치영역만이 아니라 사회경제 분야에서도 재능과 쌍용차에 이어 밀양송전탑반대운동과 코레일철도노조 파업으로 정신 차리기가 힘들더니 이제는 북쪽에서 들여오는 이야기로 더 정신이 없습니다. 김정은의 이모부 장성택, 부침은 있었지만, 지난 40년간 북의 제2의 실권자로 행사하던 그가 갑작스레 반역자로 낙인찍혀 회의 도중 끌러나가고 나흘 만에 군사재판을 통해 처형이 되었다는 숨 가쁜 이야기로 인해 멍멍해지고 말았습니다. 공포정치의 전형이자 권력의 비정함과 무상함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습니다.

 

공포정치를 뜻하는 테러리즘이라는 용어는 불란서 혁명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혁명가 로베스피에르는 집권 1년동안 무려 30만명의 정적을 체포하고 15천명을 단두대에 처형시켰습니다. 이 독재를 테러리즘이라고 부릅니다. 근대에 와서는 소련의 스탈린이나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일제시대의 총독 통치는 모두 백성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킴으로 정권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포정치는 최근 우리 역사에도 있었습니다. 북조선의 김일성이 정적들을 제거한 방식이나 남한에서 이승만이 김구나 조봉암선생 등의 정적을 제거한 방식. 박정희가 정적 장준하선생을 제거한 방식이나 김대중선생을 토쿄 호텔에서 납치하여 바닷물에 수장시키려 했던 방식은 모두 공포정치의 일환입니다. 박근혜씨는 국무회의에서 '북한은 현재 김정은의 권력 강화를 위해 숙청을 감행하면서 공포정치를 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같은 날 새누리당은 국가권력의 대선 개입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는 장하나의원에 대한 제명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청와대의 심복 코레일사장은 민영화반대를 내세우며 파업에 들어간 철도노조원 7,000명을 곧 바로 직위해제했습니다. 정부시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제거하겠다는 공포정치입니다. 그래 새누리당 비대위원을 맡았던 이준석씨마저 공포정치가 과연 '북한만의 이야기인지 미지수"라는 답글을 달았습니다. 이는 청와대의 안주인을 향해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만 보는 행태를 지적한 것입니다. 자기만이 옳고 자기는 오직 국가만을 위해 일하고 있기에 자기를 반대하는 것은 곧 국가에 대한 반대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학지인 현대문학이 9월호에 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의 글을 실어 독자들로 질타를 받았는데, 그건 다음의 글 때문입니다.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에세이 대부분은 우리들의 삶에 등불이 되는 아포리즘들이 가득한, 어둠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진주와도 같다." 누구의 에세이를 두고 한 말일까요? 수필가 피천득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박근혜씨를 두고 한 말입니다. 저는 그분이 수필가였다는 얘기도 금시초문이지만, 설사 수필집을 한 두권 내었다 하더라도 현재의 권력자를 향해 북한에서나 들어봄직한 찬양의 소리가 현대문학이라는 우리나라 대표적 문예지에 버젓이 실렸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일만 있지 않았습니다. 지난달에는 어느 작가가 현대문학의 요청으로 한국으로 귀화한 선교사의 일생을 주제로 한 장편 소설을 쓰기로 하고 첫 회분을 보냈는데, 그만 첫 회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인즉 그 시대적 배경이 60년대 박정희 유신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이외 두 명의 문학인 또한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청와대 권력은 TV와 방송, 신문 등 언론을 다 장악하고 나자 이제 문학을 비롯한 예술계로 그 손을 뻗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역사의 퇴행반복설?]

 

지난 주 전두환씨의 미납추징금 환수를 위하여 아들이 소유하고 있던 미술품들을 검찰이 압수하여 이를 옥션을 통해 처분했는데, 그중 한 서예작품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苦盡甘來 忍行沈着 야고보사도가 말한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이기도 합니다. 어느 유명 서예가가 썼겠느니 하고 들여다보았더니 낙관에 새겨진 이름이 전두환입니다. 아버지의 글을 아들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전두환씨가 이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참으며 침착하라.’는 이 한자말을 무슨 뜻으로 썼는지 궁금했습니다. 군대생활 고생 끝에 박정희 밑에서 행동을 참고 침착했더니 결국 대통령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뜻인지 아니면 쿠데타와 살인죄로 감옥에 갔지만, 그 후에 29만원 재산에도 만족할 줄 아는 자족의 기쁨이 왔다는 뜻인지, 비자금 숨길 때는 고생이지만, 지나가면 낙이 오니 검찰이 와도 침착하게 행동하라는 뜻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 작품이 80만원에 시작했는데, 무려 1,100만원에 누군가가 사갔다고 하는데, 다음의 8글자를 그 옆에 한 쌍으로 함께 붙여놓으면 좋겠습니다. “賊反荷杖 腰折腹痛

 

2013년 한해도 저물어 가는데, 이명박정부로부터 지난 6년동안 평화통일을 향한 남북대화는커녕 남과 북은 각각 끝을 알 수 없는 내부의 정치적 문제들로 인해 한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안개정국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제 초등학교 시절에 박정희와 김일성이 서로 대결하며 남북의 전쟁 위협을 미끼로 백성들을 공포로 협박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더니만, 공교롭게도 환갑의 나이에서 또 다시 김일성의 손자와 박정희의 딸이 각각 남북의 권력의 정점에 서서 공포정치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역사는 과거로 퇴행할 수도 있다는 퇴행반복 가설이 현실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야고보 기자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고, 농부가 봄비와 가을비를 기다리듯이 남 탓하지 말고 굳게 기다리라고, 이사야는 힘이 빠진 백성들에게 늘어진 두 팔에 힘을 주어라. 휘청거리는 두 무릎을 꼿꼿이 세워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마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진 일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헤롯왕의 비행을 공개 비판함으로 옥에 갇혔던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듣고 저분이 정말 하느님께서 보낸 메시야가 맞는지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 제자를 보내 물어봅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듣고 본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리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지금 이 일을 문자대로 해석하면 예수께서 하시는 일은 오늘날 의사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병든 현상,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죽은 사람들이란 신체적 불구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불구 현상으로 민중들이 죽어가고 있는 불의한 체제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려대 경제학과의 한 학생이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나는 안녕했던 사람입니다. 내가 입학하던 해 용산에서 여섯명애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교수님은 선배들은 그리고 친구들은 아무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 이렇게 사는가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나는 안녕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시험을 치고, 영어를 공부해도 내가 사는 세상은 나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내가 사는 세상이 곧 내가 살 세상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사는 세상이 지금 분명 안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안녕하지 않습니다.]

 

로마가 지배했던 어둠의 시절, 갈릴리에서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들과 꿈꾸었던 예수님의 그 하느님 나라의 대망을, 2천년이 지난 오늘, 한반도 남과 북에 어둠이 짙게 깔려있는 오늘 또 다시 꿈꾸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나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 중 가장 작은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떠오르는 해는

낮은 구석 자리도

남기지 않고 비추고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얕은 웅덩이만 채우고

앞만 보고 달려나가는

그런 강이 되지 말아라

 

높은 자리만 비추고

그늘만 드리우는

그런 해가 되지 말아라.

 

(박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