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길을 닦는 사람들

11:1-10; 72:1-7, 18-19; 15:4-13; 3:1-12

 

1성서와 제2성서는 모두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께서 직접 통치하는 그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세히 들어가면 내용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지만, 시제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1성서는 그 나라가 올 것이라고 미래 시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 공동번역 이사야 본문은 이를 시적인 운율로 표현하고 있기에 미래 시제가 분명하지 않지만, 개역판으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야훼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야훼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여호와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가 꿈꾸는 하느님 나라는 미래에 일어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실현된 종말]

 

반면 제2성서 루가복음 4장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러자 이 소리를 들은 청중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저 사람이 정말 그들이 알고 있는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어리둥절할 수밖에도 없었지만, 더 어리둥절 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미래에 펼쳐질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실현되고 있다는 선포에 더 어리둥절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여기에 더 이상의 의문이 생기지 않도록 쐐기 발언을 하십니다. “이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종말은 세상 마지막 때에 오는 것인데, 예수께서는 지금 여기에 이미 임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이를 현재적 종말 혹은 실현된 종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직 안 온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여전히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었고, 저들은 억눌린 상태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전연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미 종말 곧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은 전연 변화가 없는데, 이미 왔다고 선포하는 예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중간에 뭐가 필요한 것인가요? 미래를 현재로 만드는 촉매제는 무엇인가요? 남녀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다 보면 결혼도 하지 않았고, 부모님께 인사도 하지 않았지만, 저들은 마치 함께 살고 있는 부부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부부로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얘기합니다. 그게 현실이 될 수도 있고, 하나의 꿈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깊게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있어서 미래는 이미 현실이 되었고, 미래를 현실화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합니다.

 

[유토피아와 하느님 나라]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라는 이상적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를 우리는 하느님 나라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해서 유토피아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만 관심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이상적 사회가 너무나 생생하게 보이기에 이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 현실의 벽을 깨기 위해 노력합니다. 대체로 누구나 젊었을 때에는 이상을 향한 꿈과 열정이 가득 차 있지만,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현실에 순응해갑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걸 몰랐을까요? 현실의 벽을 몰랐을까요? 성전에 들어가 상을 엎고 채찍을 들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 것인가를 몰랐을까요? 세례 요한은 권력자들을 향해서 이 독사의 자식들아!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라고 소리치면 자신이 감옥에 갇히고 결국 참수형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몰라서 그렇게 외쳤을까요?

 

예언자 이사야는 유토피아의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하나의 초장에서 늑대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는모습입니다. 여기서 늑대나 표범 사자는 무엇을 상징하고, 새끼 양과 염소와 송아지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강자와 약자,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이사야의 꿈을 이어받았습니다. 단순한 꿈이 아니라 이를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늑대와 새끼양이 어울리고 표범과 염소가 함께 뒹굴 수 있을까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양과 염소에게 강한 발톱과 이빨을 주어 대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반대로 늑대와 표범의 강한 발톱과 이빨을 빼내 폭력의 근원을 없애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라셨던 이 평화 공존의 길은 전자일까요? 후자일까요? 아니면 둘 다일까요?

 

예수께서는 먼저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곤 저들에게 하느님 말씀으로 아침 일찍 농장에 온 강한 일군이나 오후 늦게 농장에 올 수밖에 없었던 약자들에게 똑같은 임금을 주는 경제정의의 복음으로 저들을 깨우치셨습니다. 단순한 경제평등이 아니라 꼴찌가 첫째 되는 세상이 전복되는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억눌린 하느님의 아들들의 해방을 위해, 가난하고 힘없는 하느님의 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권세 있는 자들과 맞섰습니다.

 

[예수 이름의 두 갈래 길]

 

오순절 방언사건 이후 초대교인들은 거리로 나서 예수의 이름을 선포했고, 그때 권력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지 말라고 방해하고 핍박했습니다. 명동에 나가면 예수 이름을 선포합니다만, 거기에 경찰이 나서서 하지 못하도록 막지는 않습니다. 제가 지나가다 너무 시끄러우니 좀 작게 해달라고 요청을 해도 자기들의 소관이 아니라고 발뺌을 합니다. 그러나 향린교회 교우들이 광화문이나 대한문이나 재능빌딩 앞에 가서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면 거기에 경찰들과 사복경찰들이 무선 마이크를 들고 등장합니다.

 

명동에서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 한가운데 서서 큰 스피커로 예수 이름을 말해도 경찰은 종교행사라서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도, 향린교회가 길거리에 나가서 예수 이름을 말하면 이를 제지하고 도로교통법으로 구속하고 벌금을 때립니다. 종교행사냐? 아니냐?는 같은 예수 이름을 선포해도 그 내용이 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를 구분하는 잣대가 성서가 아니라 정부의 권력이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왜 명동의 종교행사는 가만히 둘뿐더러 시민들이 항의해도 방치하고 있습니까? 그건 저들이 외치는 예수는 정치와 전연 무관하고 서민들이 겪는 아픔과도 무관한 죽어 천국 가는 영혼만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을 바보와 현실의 노예로 만들어 가기에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하에 가만히 놔둡니다. 그러나 향린교회가 외치는 예수는 안보논리에 눈이 먼 백성들을 눈 뜨게 하고 종북과 빨갱이 논리에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기 때문에 정권 유지에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방해를 합니다. 여러분 어느게 진짜 종교행사입니까? 세상적 기준, 권력의 기준이 아니라, 성서의 기준, 예수의 기준에 따르면 어느 것이 진짜 종교행사입니까?

 

브라질의 유명한 사회운동가이자 신부였던 돔 헬더 까마라 주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말하며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자 나를 성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내가 가난의 원인을 따지며 가난을 만드는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하자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했다.” 얼마 전 박창신신부님의 연평도 발언을 비틀어서 종북주의자로 매도했습니다. 박창신신부님은 까마라주교의 얘기를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내가 죽은 연평도 주민들을 위해 성금을 거두고 그들을 위해 추모미사를 베풀자고 하자 그들은 나를 참 사제라고 불렀다. 그러나 내가 그들은 어떻게 해서 죽게 되었는가? 라고 원인을 묻자 그들은 나를 종북이며 빨갱이라고 불렀다.”

 

[위기의 민주주의]

 

오늘의 시편 기자는 솔로몬 왕의 기도를 빗대어 청와대 권력이 해야 할 일을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리고 약한 자의 권리를 세워주게 하소서. 백성에게 평화와 정의를 안겨주고 빈민들을 구하게 하소서”. 4년 전 회계조작을 통해 쌍용자동차는 3천명을 해고하고 이를 중국에 헐값에 팔았습니다. 30년간 젊음을 바쳐 일한 노동자들은 아무 이유없이 구조조정이라는 미명하에 해고되고 자본주는 엄청난 이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투쟁이 일어났고 과잉진압으로 수많은 사람이 구속이 되고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해고자 23명은 견디다 못해 자살을 했고 노조는 국정감사를 요구했습니다. 후보시절 국정감사를 약속했던 박근혜씨는 그건 표를 얻기 위한 인기 발언이었을 따름이었다고 모른 채 하고 있습니다. 권력의 눈치를 본 판사는 회사와 정부의 편을 들어 해고노동자들에게 46억원이라는 손배상 선고를 내렸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일하게 해달라고 지난 4년동안 투쟁하던 노동자들에게 그동안 밀린 월급을 주지 못할망정 저들의 남은 재산마저 압수하겠다는 억울하고 불의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곤 김정우지부장에게는 10개월 징역을 때렸습니다.

세계적 사회역사학자인 찰스 틸리는 위기의 민주주의’(2010)라는 책에서 국가는 가장 조직적인 폭력 집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국가와 조폭의 차이는 간단합니다. 국가는 합법적 폭력을 독점하는 공공기관의 총체이며, 조폭은 비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익집단일 뿐입니다. 처음 국정원 직원 한두명이 개인적으로 했다고 하는 댓글은 수백 건에서 수천 건으로 불어나더니만, 급기야는 210만 건을 넘어섰고, 검찰은 시간과 인력이 없어 증거로 채택할 수 없었지만, 2100만 건을 넘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수억 건이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일이 너무 엄청나기에 설마 정말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고 의심합니다.

 

히틀러 나치정권의 선전장관 괴벨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 거짓말을 계속 반복하면 사람들은 결국 믿게 된다.” 이석기의원 국가보안법 위반죄 그러면 사람들은 잘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국가내란음모죄이렇게 한방을 크게 터트려야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6,70년대에 국가내란이 죄목이 붙은 숱한 간첩단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인혁당간첩사건, 민청련학원간첩단사건, 재일동포간첩단사건, 재미동포간첩단사건 유럽간첩단사건, 광주항쟁간첩독침사건, 80년대의 서울물바다침모설에 이은 평화댐건설 국가사기사건이 있었고, 2000년대에는 북에 의한 천안함침몰조작사건과 농협해킹사건이 있었습니다.

 

박창신신부님의 대선공작댓글쿠데타에 의한 대통령퇴진 요구가 과연 종교인으로서 금기를 넘어선 정치개입인가? 아니면 정의사회 구현을 위한 자유 시민으로서의 정당한 발언인가? 이는 안중근은 독립투사인가 아니면 테러암살범인가? 31운동은 정당한 독립만세사건인가 아니면 반정부빨갱이들의 정부전복사건인가? 이 모든 판단은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유의 착각? 착각의 자유?]

 

인간은 자유를 진리에 근거해서 말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습관에 근거해서 말합니다. 인간은 익숙한 것에 대해 자유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으면 그게 불편하기에 부자유하다고 말합니다.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을 받은 히브리인들은 불과 얼마 전 자유를 달라고 울부짖었던 사실을 잊은 채, 광야생활에서 먹을 것 마실 것이 부족하자 애굽으로 차라리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뭔가 힘들고 미래가 불확실해보이면 과거를 들먹입니다. 박정희의 향수 그것도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들은 이를 자유라고 말합니다. 열 살짜리 자녀들은 부모님이 하지 못하게 하면 그건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가지만,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던 유대지도자들은 스스로 자유인이라고 말합니다.

 

성서에서 메시야라는 칭호를 받는 페르시아의 고레스황제는 소아시아의 리디아를 점령하고 국왕 크라수스를 끌고 간 뒤 리디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자, 그는 당장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끌고 갔지만, 아름다운 도시를 파괴하기가 아까웠고, 그렇다고 계속 군대를 주둔시킬 수도 없어 그는 다른 방법을 고안해냈는데, 그 도시에 술집과 유곽, 극장같은 다양한 유흥시설을 만들고 주민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얼마가지 않아 리디아인들은 더 이상 반란을 꾀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 소일하다’ ‘별 볼일 없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ludi 라는 단어가 나왔고, 우스꽝스럽고 바보같다는 의미를 가진 ludicrous 라는 영어 단어가 나왔습니다. 요즘 종편들이 등장한 이후 TV 프로그램들과 언론보도가 얼마나 저질스럽게 되었는지는 특히 프랑스와 같은 국영방송들과 비교해보면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또 다른 리디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계 사람들이 코리안 그러면 떠오르는 첫 번째 단어가 무엇일까요?

 

일제 지배에 저항하던 지식인들은 일제가 문화정치라고 일컫는 유화정책을 펴자 수없이 돌아섰습니다. 또한 저들은 만주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역사가 담긴 서적들을 불태우고 이 역사를 신화로 바꾸었습니다. 터키의 술탄 군주는 책과 학자들이 민중의 자각을 촉구하고 전제정치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긴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필요로 하는 학자 외에는 모두 제거했습니다. 그러자 얼마가지 않아 백성들은 무엇이 진정한 자유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권력이 언론을 장악하여 반복적으로 학습을 시키면 백성들은 언론의 자유가 무엇인지는 고사하고 생각의 자유마저 빼앗기고 살아가는 현실에 무감각한 노예들이 되고 맙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남한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47%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하위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못 먹고 못 입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비하 인식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경제적 수치가 아니라 정신적 수치입니다.

 

자신을 하위층이라고 여기면 왜 수출은 늘고 국민소득이 늘어난다는데 왜 나는 열심히 일하는데도 계속 가난해야 하는가? 하고 질문하고 그 원인을 찾아나서야 하는데, 그걸 물으면 빨갱이가 되니까 입을 다물고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10년째 세계 제1위의 자살률 국가로 살아가고 있고, 별다른 변화가 없는 한 앞으로 최소한 10년 이상 세계 1위의 자살률 국가의 오명을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민족 힐링이 필요한 때]

 

저는 경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자존감이 낮으면 그는 계속 불평 속에서 살아갈 수 밖는 불행한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반백성이 갖는 자존감은 개인의 노력도 중요합니다만, 우선 국가와 민족의 자존감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요즘 힐링이라는 단어가 불길처럼 유행하고 있습니다만, 그 힐링이 개인의 영역 안에 머물고 있으니 그런 책 수십 권을 읽어도 조금 나아지는 듯 하지만, 조금 지나고 나면 거기서 거기입니다. 먼저 국가와 민족의 힐링이 일어나야 합니다.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엊그제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청와대를 방문하여 한 말 가운데 베팅이라는 단어를 세 번 썼습니다. ‘미국에 맞서는 편에 베팅을 하는 것은 결코 좋은 베팅이 아니다. 미국은 계속 한국에 베팅할 것이다.’ 베팅이라는 단어는 도박판에서 판돈을 걸 때 쓰는 말입니다. 아이들끼리 너 내기할래?’ 그럴 때 쓰는 단어입니다. 저의 상식에 따르면 국제외교에서는 매우 결례가 되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뒤집어 보면 이는 미국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됩니다.

 

미국에 있어 한반도는 일종의 도박판입니다. 그곳에 살아가는 칠천만 백성들의 목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베팅을 해서 판돈을 키워가는 도박판입니다. 과거역사를 보면 그러합니다. 106년 전 미국의 육군사령관 테프트와 일본의 해군제독 가츠라가 비밀리에 만나 도박판에서 같은 패를 지닌 두 사람이 나눠 갖듯이 조선과 필리핀을 나눠가졌습니다. 19458월 갑자기 전쟁에 참여한 소련군이 한반도로 내려오자 준비가 덜된 미국은 도박판에서 하듯, 한반도를 38선을 기준으로 둘로 나눠 한쪽씩 갖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곤 남북이 서로 잡아먹겠다고 으르렁대자 상대의 패를 다 읽은 미국은 난 이번 판은 좀 쉴거야 하고 화장실을 가는 척 하더니 북조선이 그 사이에 모든 판돈을 걸고 올베팅을 하자 갑자기 돌아와서 625내전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사이의 국제전쟁으로 판을 키웠습니다. 그 이후 60년 동안 한반도는 수많은 미국 무기를 팔아먹는 나오지 않는 제품도 팔아먹는 말하자면 무한정 베팅을 할 수 있는 엄청난 도박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삼성과 현대의 제품을 사면서 뒤로는 인간의 생명을 한꺼번에 수천 수만명씩 죽이는 무기를 신무기라고 팔아먹는 하이드와 지킬박사가 된 것입니다. 저는 바이든이라는 인간의 약소국을 키워서 잡아먹는 제국논리에도 환멸을 느끼지만, 미국은 계속 한국에 베팅한다는 말에 좋아라고 희희닥거리는 청와대의 지도자들을 보노라면 역겹기 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른 말을 하는 박창신신부님을 향해 사제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그는 신부로 위장한 종북주의자라고 빨갱이몰이를 하는 짓을 생각하면 더욱 분노가 치밉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보수교인들이 신부님 탄핵을 교황청에 요구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고 이는 국가적 망신입니다. 왜냐하면 최근 프란시스코 교황은 한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치인) 그들이 통치하니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통치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그들이 더 잘 통치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능력껏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교리에 따르면 정치란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입니다. 정치가 공공의 선에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처럼) 손을 씻고 뒤로 물러나 있을 수 없습니다. 좋은 신자라면 정치에 관여해야 합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참여함으로써 통치자들이 제대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성서의 예언자들은 단순한 참여가 아니라, 눈을 부릅뜨고 있다가 왕이 불의를 저지를 때에 가차 없이 하느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은 세계인권선언 일을 앞둔 인권주일입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2013년 한국교회 인권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는 인간은 그 자체로서 존엄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는 물론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의 인권을 지켜주는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의 상황을 너무나 슬픈 현실이라 규정하며 다음의 6가지를 내걸었습니다. 1.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당사자들은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2. 정부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합니다. 3. 정부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합니다. 4. 정부는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합니다. 5. 정부는 각종 차별을 시정하여야 합니다. 6. 국가 인권 보장을 위한 법적 제도를 강화하여야 합니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대림절은 그냥 기다리는 절기가 아닙니다. 평화의 왕으로 정의의 임금으로 오시는 그의 앞길을 닦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구부러진 것을 바로 펴고 뒤집어진 것을 바로 세우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은 권력자들을 향해 너희는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써 보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행실이란 단순히 도덕적으로 조금 더 깨끗해지는 그런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끝으로 저는 우리가 주의 길을 예비하며 닦는 사람으로 지난 목요일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넬슨 만델라 대통령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주의 길을 닦는 사람: 넬슨 만델라]

 

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인권변호사로 인종차별에 저항하다 46세에 그는 국가내란죄란 죄목으로 28년간 감옥에 갇혀 살았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수많은 핍박과 어떠한 회유에도 굴복하지 아니하고 자유와 양심을 지켜냈습니다. 국제사회의 압박에 의해 석방이 되고 76세에 흑인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지만,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통해 과거 정부가 저지른 폭력과 살인 등등의 잘못을 철저하게 밝혀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화해와 관용이라는 정신에 따라 잘못을 인정하는 백인인종차별주의자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노력에 대해 세계는 노벨평화상을 러시아에서는 레닌평화상을 미국에서는 루즈벨트자유상을 그리고 영국에서는 작위를 중국에서는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함으로 명실공히 인권과 평화의 영역에서 21세기에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두 번 다녀갔고, 비슷한 길을 걸어온 김대중대통령과는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그는 언론의 자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판적이고 독립적이며 탐사적인 보도는 민주주의의 활력소다. 언론은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언론은 정부 관리에 맞설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능력을 갖춰야 한다. 언론은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충분히 독립적이어야 한다. 언론은 헌법의 보호를 누려야 한다. 그래야 언론이 시민으로서 우리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권력에 비위에 어긋나는 발언을 하면 그 방송이나 신문사는 권력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구성된 방송위원들에 의해 제재를 당합니다. 십년 전의 방송과 현재의 방송을 비교해보면 언론이 얼마나 퇴보했는지 알 것입니다. 심지어는 개그프로를 비롯한 모든 프로그램이 제재를 받고 있습니다. 유신독재정권하에서의 상황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노벨평화상 수상식에서 남긴 말은 계속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무관심과 냉소, 이기심 탓에 휴머니즘이라는 이상에 부끄럽게 살았다는 말이 미래세대에게서 나오지 않도록 하십시다. 인도주의가 더 이상 인종차별과 전쟁이라는 별이 없는 한밤중에 묶여 있을 수 없다고 한 마르틴 루터 킹목사의 말이 옳았음을 증명하도록 노력하십시다. 진실한 형제애와 평화가 금과 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값지다고 말한 그가 단순한 몽상가가 아니었음을 우리 모두가 증명하도록 노력합시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보냄의 말]

 

희망의 바깥은 없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튼다

얼고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 속에서 씀바귀 새잎 자란다

희망도 그렇게 쓰디쓴 향으로 제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지금 인간의 얼굴을 한 희망은 온다

가장 많이 고뇌하고 가장 많이 싸운 곪은 상처 그 밑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은 스스로 균열하는 절망의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자라난다.

안에서 절망을 끌어안고 뒹굴어라

희망의 바깥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