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17+주일예배 설교 / 향린공동체 주일 / 임보라

이사야65:17-19; 데살로니카후서3:6-13; 루가21:5-6; 13-19

새로운 창조, 지금-여기에서부터

 

오랜만에 향린의 강단에 서니,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문득 이 보라색 옷을 입고 교회에 올때마다 제 옷매무새를 매만져주시던 도장로님 생각도 많이 납니다.

먼저, 1월 첫주 나눔과 세움 예배 바로 다음 주일, 문턱없는 밥집에서의 첫예배에 오셔서 힘을 북돋워주신 분들, 집들이와 분립공인예배 때 오셔서 축하해주셨던 분들, 뿐만 아니라, 청소년부를 비롯하여 일부러 시간을 내어 주일예배에 참여해주신 분들, 교회에 오시지는 못했어도, 현장기도회와 집회에서 만날 때마다 격려해주셨던 분들 모두께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은 향린공동체 주일을 맞아 향린 강단으로 부름을 받았으니, 이제 한 살이 다되어 가는 섬돌향린 이야기와 함께 교회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섬돌향린 좌충우돌 이야기]

섬돌향린 예배는 어린이, 청소년, 어른이들이 모두 함께 드립니다. 어린이 하늘뜻펴기는 저 뿐만 아니라, 교우들이 돌아가면서 맡고 있는데, 하늘뜻펴기가 끝나면 어린이들은 예배실에서 퇴장하여 어린이방으로 가서 별도의 활동시간을 갖습니다. 별도의 활동시간도 교우들이 준비합니다.

문턱없는 밥집이라는 식당공간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지난 4, 현재의 인권중심 사람 건물으로 들어가서 현재에 이르기 까지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요. 입주하고 나서 드린 첫 예배에서 어린이들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여러분께도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새 친구가 이사왔어요라고 하는 유태인 동화 인데요.

아름다운 골짜기에 예쁜 5층 집이 있었어요.

이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요?

1층에는 몸집이 크고 뚱뚱한 암탉이 살아요.

암탉은 너무 뚱뚱해서 걷기가 힘들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요.

2층에는 늘 바쁜 뻐꾸기가 살아요.

뻐꾸기는 먼 곳에 사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하루 종일 돌아다녀요.

3층에는 깔끔한 멋쟁이 검은 고양이가 살아요.

고양이는 언제나 목에 멋진 리본을 묶고 있어요.

4층에는 다람쥐가 살아요.

다람쥐는 노래를 흥얼대며, 하루 종일 도토리만 까먹고 있지요.

5층에는 생쥐가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며칠 전 한 마디 인사도 없이 떠나 버렸어요.

생쥐가 왜 떠났는지, 어디로 떠났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예쁜 5층 집의 맨 윗층은 비어 있어요.

그래서 그 집 앞에 이렇게 써서 달아 놓았어요. “방을 빌려 드립니다.”

 

이 광고를 보고 각종 동물들이 방을 보러 왔다가, 제각기 여기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말합니다.

 

개미가 말합니다. “같이 살 이웃이 마음에 안 들어요. 저는 늘 부지런히 일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게으른 암탉과 가까이서 살겠어요? 암탉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기만 하잖아요. 너무 뚱뚱해서 걷기고 힘들고요.” 암탉은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토끼가 말합니다. “같이 살 이웃이 마음에 안 들어요. 저는 아이들이 많지만 항상 제 곁에 두고 잘 보살피며 살아요. 그런데 어떻게 아이들을 딴 곳에 내버려 두고 혼자만 편하게 사는 뻐꾸기 엄마와 한집에서 살겠어요?” 뻐꾸기는 창피했어요.

 

돼지가 말합니다. “이렇게 하얗고 깨끗한 피부를 가진 제가 어떻게 새까만 고양이와 한집에서 살겠어요?” 저 검은 고양이를 내쫓으면 제가 이집에서 살죠검은 고양이는 창피해서 고개를 숙였어요.

 

꾀꼬리도 말합니다. “저는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며 살아요. 그런데 어ᄄᅠᇂ게 하루 종일 시끄럽게 도토리를 까는 다람쥐와 같이 살겠어요?” 다람쥐는 너무 창피했어요.

 

마지막으로 비둘기가 왔습니다.

방이 마음에 드나요?”라고 이웃들이 묻자, 비둘기는 말합니다.

아뇨, 방이 좁아요. 부엌도 좁구요.”

그럼 이 집에서 살지 않겠군요?”

! 아녜요. 저는 이 집에서 살고 싶어요.

왜냐하면 같이 살 이웃들이 마음에 들거든요. 암탉은 머리에 있는 볏이 아름다워요.

뻐꾸기는 아주 예쁘게 생겼어요. 검은 고양이는 깔끔해서 마음에 들고, 다람쥐는 부지런해서 좋아요. 저도 이렇게 좋은 이웃들과 함께 살고 싶답니다.”

 

같은 상황, 같은 사람일지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동화를 어린이들에게 들려준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 였습니다.

먼저는 교회는, 그곳에 모인 여러 사람들이 성전으로 자라나는 법인데, 향린교회에서 함께 지내던 사람들 뿐 아니라, 새롭게 섬돌향린에 오게 될 사람들에게 열린 마음을 갖자 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는 인권중심 사람이라는 건물 역시, 정해진 사람만이 드다드는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필요한 이유에 따라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간이기에 사람마다 갖고 있는 장점들을 먼저 찾아보고, 더 나아가 성미산 공동체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돌이 지역 주민께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아직은 섬돌이 지역을 파악하고, 돌아보는 탐색기간 중이기 때문에 지역주민들에게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을지 여부는 좀더 시간이 지나보아야 하겠지만, 적어도 이미 그 일대에 둥지를 틀고 있는 시민단체들에게는 어느덧 든든한 존재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는 협동조합으로 새롭게 꾸린 문턱없는 밥집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김장을 담구게 되는데, 배추 중 일부는 김동기집사님께서 농사지어주시고 헌물해 주신 것으로 김치를 담게 되고 그 김치를 강정마을에 보낼 예정으로 있습니다. 몇주 전에는 이미 성미산 마을 주민인 교우들이 길잡이가 되어 그 일대를 돌아보았는데, 마포 민중의 집, 성미산 마을극장, 다양한 생활협동조합을 비롯하여 오밀조밀 작은 마을을 일구어 온 좋은 이웃들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향린에서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80명이 분가선교에 참여했습니다. 자발적으로 분가에 참여한 분들 가운데는 해외, 지방에 계신 분들을 비롯하여, 주일에 출근을 하셔야 하는 분들, 냉담으로 장기결석 중인 분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현재까지 매주, 방문자가 5명에서 많을 때는 10명이 넘기도 합니다만, 방문자를 빼고, 적게는 50, 아주 많았을를 때는 90명에 육박한 인원이 주일 예배를 드린 적도 있습니다만, 평균적으로 60명에서 65명 정도가 매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섬돌에서도 한창 연말 정리와 새해준비 중에 있는데, 교적정리를 해보니 매주일 꾸준히 나오실 수 있는 정회원수가 어린이 8명에, 성인은 76명 정도 됩니다. 그 중 상당수는, 분가멤버가 아닌 섬돌향린으로 새롭게 등록하신 분들입니다. 물론 발길을 들이셨다가 떠난 분들도 계시고, 분립에 참여하셨다가 향린으로 다시 이명한 분들도 계십니다만, 현재 정착을 하고 계신 분들은 주로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교회를 오랫동안 쉬거나, 새로운 교회에서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고자 하시는 분들이기에 분립선교라는 것이 의미있는 선교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내 소리 내기에서 남의 소리를 듣기 까지] 

지난 교회개혁주일에는 그간 정착을 하신 분들 중에서 세분이 하늘말씀을 전해주셨는데, 그 가운데, 한분의 증언을 전합니다.

 

제가 어떻게 섬돌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신문에서 분가교회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작은교회를 지향하며 분가를 실행하는 2013년 새해 첫 주의 분가파송예배에 대한 사진과 기사였습니다. 그 분가교회가 성산동 문턱 없는 밥집에서 20131월 둘째 주부터 예배를 시작한다는 기사내용! 흥미로웠습니다. 모태기독교인(?)인 제가 10년 넘게 교회를 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제가 이 교회에 가봐야겠다는 결정을 한 것은 첫째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교회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성산동 옆 동네인 망원2동 주민입니다. 둘째는 작은교회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주변 사람들은 큰 교회가 익명성을 보장해주니 더 좋다고 했지만 저는 가족 같은 분위기의 작은교회에 다니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셋째는 새해의 시작과 함께 처음 문을 여는 교회니까 새해에 나도 우리 동네 교회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해보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는 섬돌에 와서 기존의 예배형태와 다른 예배와 찬송을 처음 접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항상 서구식 예배형식과 찬양이 주를 이루는 한국 교회의 예배와 찬양이 우리의 얼과 정신, 말과 정서를 자연스럽게 표현해 줄 수 있는 것으로 변화되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었기에 섬돌의 예배형식과 찬양은 마치 내 생각을 누군가 벌써 읽고 만든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새롭게 경험하는 예배의 형식과 내용 그것보다 제겐 예배 그 자체와 입을 열어 찬양을 부르는 그 순간순간들이 벅차오르는 기쁨과 감동을 경험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저 왔습니다!’ 예배를 드리며, 찬양을 부르며 저는 그렇게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새교우인 제가 느낀 섬돌교우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건강함입니다. 한 분 한 분 모두 개성과 생각이 뚜렷하고, 뭔지 모르게 당당하고, 꽤 열린 마음으로 사고가 자유롭고, 각자가 가진 크고 작은 고유한 재능들을 보이지 않는 이 구석, 저 구석들에서까지 잘 사용하며 작은 공동체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다양한 섬돌의 교우들 하나하나가 저는 섬돌공동체의 건강함과 고유성을 만들어내는 힘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작곡을 전공하신 분이신데, 예배 반주를 하기 위해 장구 렛슨을 받아가면서 섬돌의 장구 반주를 해주시고 계실 뿐 아니라, 예배 중 마지막 찬송으로 부르는 <우리는 향기로운 섬돌>을 만들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 노래에는 섬돌에 대한 바램을 담아주셨는데, 그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원래 이 노래를 돌림노래로 만들었습니다. 돌림노래 부르기를 통해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다름과 같음이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 돌림노래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노래를 부르지만 제각각 시차를 두고 따라오는 다른 성부들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합니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나의 소리를 서로의 소리에 맞추며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내 소리를 내기에도 정신이 없기 때문에 남의 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으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노래가 입에 붙으면 어느 순간 나와 다른 성부들의 소리가 자연스럽게 들리며 음정, 박자로부터 자유로워진 진정한 노래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노래가 끝난 성부는 끝내지 않고 다른 성부가 끝날 때까지 아주 조용하게 후렴을 반복하며 기다려줘야 합니다. 기다려 줘야만 마지막에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으니까요.”

 

향린에서 분가한 교우들끼리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는데 분립 직후부터 새로운 교우들이 합류했습니다. 분가교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조율을 위한 산고의 과정을 거치기도 했습니다만, 새교우들과의 사귐 과정은 섬돌의 교우의 표현대로 한 분 한 분 모두 개성과 생각이 뚜렷하여’ ‘내 소리를 내기에도 정신이 없기 때문에 남의 소리를 들을 여유를 갖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몇 달을 지내고 나니, 속이야기를 꺼내놓으며 기도를 요청하기도 하고, 조율과정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마음의 상처가 있기도 하지만, 한걸음씩 오늘까지 내딛어 왔습니다.

지난 주중에는 비로서 외부간판을 달았는데, 간판 설치까지 6개월 정도가 걸린 것 같습니다. 바로 앞에 교회가 있는데 교회이름 간판을 밖에 걸어야 하는 것인지, 아직 장소가 알려지지 않은 탓에 처음 오시는 분들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닌지 등을 논의하고, 누가 준비할 것인지,어떤 모양의 간판을 달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는지 등등을 결정하고 시행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저희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논의의 과정 자체가 섬돌의 역사를 써나가는 중요한 몸의 실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창조의 과정은 녹록하지만은 않습니다. 재정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공간마련과 살림살이를 안정적으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창조의 과정은 선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까지의 섬돌을 세워나가는 과정 속에서 다시금 깨닫습니다.

 

[뒤집어서 곱씹어 보는 이사야의 예언]


섬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에서도 여러 고비들을 넘겨왔지만, 교회가 속해 있는 이 사회는 현재 믿기지 않을만큼 암울한 상태입니다.

오늘의 제1성서 말씀인 이사야서를 읽어내려가면서, 희망의 메시지로 아멘으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김추자씨가 불렀던 거짓말이야! 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길이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기에는 우리의 주변상황이 너무나 힘겹고, 절망적입니다. 다시는 울음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그날이 정말 오는 것인지 의심도 듭니다.

이사야의 말씀을 죄다 반대로 바꾸면 오늘날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그려집니다.

몇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있고, 집을 지은 사람들은 자기가 지은 집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으며,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사는 일이 다반사이며, 수고는 하지만 번 것이 없으니, 번 것을 오래오래 누릴 일도 없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있으면 어린양은 잡아먹히우고, 사자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면서 먹잇감을 찾기에 바빠, 하느님의 거룩한 산에서 조차 서로 해치고, 상하게 하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납니다.’

이사야도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봅니다.

 

이러한 사회 안에 소속되어 있는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사회를 터전으로 하고 있는 교회로서 간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세상의 변혁을 위하여 이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교회의 선교는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는 것이고 우리의 세상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의 현존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이에 있는 분열과 긴장들을 극복하면서 일치 가운데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해야하며, “교회는 포용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이 세상에 치유와 화해를 가져오기 위해 존재한다.”

10WCC 부산총회에서 발표된 선교선언문에 담겨있는 내용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교회가 자신을 갱신하고, 생명의 충만함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 선교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사역을 어떻게, 어디에서 분별할 수 있을까?

- 우리는 오늘날 변화하는 다양한 세계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 선교에 대해 다시 비전을 가질 수 있을까?

- 우리는 어떻게 선교를 생명을 긍정하는 변혁적 영성을 요구할 수 있을까?

- 지구의 미래에 대한 위협들이 명백한 이때에 우리가 하나님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과 그것들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 글로벌 규모의 경제적, 생태적 부정의와 위기의 한가운데서 교회는 어떠한 선교적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 우리는 개인주의적이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세대를 향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선포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가 훼손되어 가는 것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욱 힘차게 뭉쳐져 울려나기 보다는 거대한 권력 조직에 의해 그 목소리가 집어 삼키워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국 사회를 분석하는 한 책(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매튜 A. 크렌슨,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후마니타스, 2013)에서는 시민의 역할이 줄어든 것은 시민들이 책임을 간과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과거보다 시민에게 덜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 ‘1960년대 후반 공화당 전략가들은 민주당 내에 분열을 조장하는 논쟁적 주제들인 쐐기 이슈’(wedge issues)를 개발하는데 능숙했다. 닉슨 행정부는 건설 업종에 적극적 차별 시정 정책을 도입함으로써, 노조와 흑인들 사이에 적대감을 부추겼다. 베트남 전쟁 기간에는,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적 블루칼라 노동자들을 이간하기 위해 애국심 이슈가 활용되었다.‘라고 합니다.

비단 미국만이 아닌 오늘날의 남한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적 시민권의 쇠락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생명력이 심각하게 손상된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미국 시민권이 회복될 수 있는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시민권의 회복인지조자도 확신하기 어렵다..’

물론 여기에 앉아있는 대다수의 교인들을 비롯하여, 매주 토요일 촛불집회를 비롯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 용산 참사 유가족들,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 밀양의 어르신들이 울고 계신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많은 분들은 당연히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정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지만, 아쉽게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처럼 보이는 또다른 한축의 시민들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경향신문의 칼럼([정동에서]공안통치, 박래용, 2013.11.13.)에서는 공안통치에 대한 경종을 울려주었습니다.

정권 유지의 최후 수단은 무장 군인이다. 현대 정치에서는 무력통치가 공안통치로 변형됐다. 총과 칼을 앞세운 무력보다 법과 질서를 내세운 공안통치가 더 넓고 깊고 위협적이다. 히틀러의 선전장관 괴벨스는 나에게 (그가 말한) 한마디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공안의 능력은 그만큼 무한하다. 현 집권세력의 국정운영 기조는 공안통치다. 공안으로 물타고, 공안으로 맞불 놓고, 공안 폭탄을 꽝 터뜨리는 식이다. 나라는 온통 전쟁터로 변하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국민이 아닌, 정부에 의한 소요(騷擾).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실을 국정운영의 중추기관으로, 김기춘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리 찢기고 저리 갈린 국민을 한데 모아 국민대통합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 기대했다. 지금 이런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럴 줄 몰랐느냐고 하면 할 말 없을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생명의 불을 놓는 교회들-향린공동체]

어떤 아이디어나 경향, 사회적 행동이 들풀처럼 번지는 결정적인 순간을 티핑 포인트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이러한 티핑 포인트는 의지의 반복적인 확인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바꾸고, 공간을 바꾸고, 무엇보다 내가 이제까지 갖고 있던 세계를 보는 직관, 다시 말해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고 합니다.

 

티핑 포인트를 이끌어 내는 요소들을 기독교 용어로 바꾸어보면, 생명 살리기 사역에 대한 분별력, 생명을 긍정하는 변혁적 영성,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대한 선포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망은 필수적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다 거짓말이야! 라고 외치고 싶은 유혹이 솟구쳐 오르지만, 새로운 창조를 이끄시는 그분을 또다시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 공안통치의 위력을 저지하기 위한 저항은 온갖 미움과 탄압과 박해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저항의 과정에서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을 하게 되더라도 결코 저항을 멈추어서는 안되는 것은, 목숨, , “생명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WCC선교선언문의 마지막 대목을 인용해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교하기 위해 교회를 움직이게 하며 권능을 주심을 확언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으로서 하나님의 선교를 계속 수행할 때에 역동적이고, 변화가 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 기독교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다양한 형태들의 공동증언이 일어나게 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교하면서 함께 여행하고, 사도들의 선교를 지속하면서, 실천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이 사실은 교회와 선교가 일치해야 하며, 서로 다른 교회와 선교단체들은 생명을 위해 함께 일해야 함을 의미한다.”

생명을 긍정하는 변혁적 영성을 바탕으로 한 생명 살리기 사역에 향린공동체를 불러주셨습니다. 향린공동체는 교회와 선교가 일치하고 다른 교회와 생명을 위해 함께 일하는 교회입니다. 같은 뿌리의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빛을 발하고 있는 강남향린, 들꽃향린, 향린, 그리고 섬돌향린은 먼저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새로운 창조는 오래 전에 이미 선언되었지만, 그 과정은 지금-여기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같은 시간에 강단교류를 하고 있는 향린공동체에 속한 각 교회에는 어려움도 있고, 넘어질 수 밖에 없는 돌부리가 요소요소에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위해 우리는 함께 일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과정에 있을 수 밖에 없는 내적, 외적 어려움을 이겨낼 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키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참고 견디는 가운데 너희의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섬돌의 이모저모를 사진으로 나누겠습니다.

20131117+hyang.pptx

돌을 앞두고 걸음마를 시작하는 섬돌향린을 위한 기도의 연대를 계속 이어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