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희망이 없다 말하기 전에

시편 66,1-12; 예레미야 29,1, 4-7; 딤후 2,8-13; 루가 17,11-19

고 상 균 목사

날이 많이 차가워졌습니다. 옷깃 사이로 점차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올 해 환절기는 향린의 가족들에게 유달리 많은 아픔을 주는 듯합니다. 평화와 통일의 사도 홍근수 목사님과 지난 주 하늘 길에 오르신 김명숙 교우님을 포함해 참 많은 교우님들과 그 가족 분들의 장례가 있으니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모든 유가족들에게 하늘의 위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아무쪼록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하는 모든 분들, 그리고 이 순간 식당과 사무실에서 모두를 위해 분주히 손을 놀리고 계신 여러분들과, 향우실에서 예배를 드리고 계신 분 들, 영상으로 예배에 참여하고 계신 이들, 그리고 특히 존경하는 여러 어르신들과 병상에 계신 모든 지체들이 건강한 한 해 마무리를 하실 수 있기를 마음 다해 기원 드립니다.

[참 이상한 성서, 예레미야]

만군의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하시는 말씀이오. ‘나 야훼는 바빌론 왕의 멍에를 부수기로 하였다.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바빌론으로 약탈하여 간 내 집의 모든 기물을 이 년만 있으면 이곳으로 되돌려 오리라. 유다 왕 여호야킴의 아들 여고니야와 함께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간 유다인들도 모두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똑똑히 말해 둔다. 내가 바빌론의 멍에를 부수리라.’ (예레미야 28:2~4)

어떠신가요? 절대 객관적 능력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당시 고대 근동의 절대 강자 바빌로니아에 대해 야훼가 직접 나서 그 멍에를 부수고 한을 풀어주신다는 이야기가 참 힘있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들리지는 않으십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본문 예레미야에서는 위와 같은 신탁을 전한 예언자 하나냐를 거짓 예언자라 비판하고 나섭니다. 이건 어찌 된 영문일까요?

예레미야는 참 어려운 성서입니다. 일단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즉 슈투트가르트 비평판 히브리어성서를 기준으로 이사야서에 비해 무려 열 한쪽이나 많은, 예언서 중 가장 긴 장수도 독자를 압도합니다만, 무엇보다 읽는 이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의 일관된 ‘친 바빌로니아’ 사상입니다.

그러니 바빌론 왕이 씌워 주는 멍에를 메어라. 그 왕 느부갓네살을 섬겨라. 그러지않는 민족과 나라가 있으면, 나는 그 민족을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여서라도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주고 말 것이다. 이는 내 말이다. 어김이 없다.

(예레미야 27:8)

본문에서도 잘 드러나듯 예레미야는 본문의 거의 전편에서 바빌로니아를 맞이할 것을 강조합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일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이를 실행에 옮겼던 구한말 이완용의 주장과도 흡사합니다. ‘예레미야’라는 권위 있고 대표성 있는 이름으로 저술된 본문, 그리고 이후 수많은 첨삭과 편저를 통해 오늘날과 같은 형태와 내용을 가지게 된 이 성서에는 남 유다의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는데요, 남 유다의 중흥기이자 마지막 가능성이었던 요시야 왕의 요절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일찍이 근방의 소국 중 패권 국가였던 북이스라엘의 오랜 지배를 받던 유다는 그 속박을 끊기 위해 제국 앗시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이사야서의 비판에서도 볼 수 있듯, 이와 같은 행위는 북이스라엘 멸망이라는 성과를 거두는 듯 했지만, 곧바로 이스라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맹수 앗시리아의 잔인한 발톱아래 놓이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앗시리아의 변방 군소 정치집단으로 제국의 꼭두각시가 된 유다는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무엇보다 종교적으로도 독립국가의 모든 지위를 박탈당한 채, 가혹한 수탈과 간섭에 허덕이게 됩니다.

요시야는 바로 이러한 때에 불과 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하늘이 유다를 돕는 것일까요? 그렇게 등극한 어린 왕 요시야는 이후의 재위기간을 통해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도탄에 빠진 국가의 기틀을 바로 잡기 시작했고, 바로 그때 신바빌로니아의 도전 등에 직면한 앗시리아가 서쪽 지역에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되어 팔레스타인 지역이 정치적 진공상태가 되게 됨에 따라 유다는 꿈에 그리던 독립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아울러 이 젊은 왕 요시야는 앗시리아의 국운이 쇠하고, 바빌로니아의 시대가 온다는 것을 예리하게 간파하면서, 앗시리아에 반대하고 이집트와 거리를 두는 가운데 유다의 국가적, 종교적 기틀을 세우는데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젊음의 패기는 무한한 값어치와 함께 위험을 내포하는 것일까요? 신바빌로니아에 대항하여 앗시리아와 연합전선을 펼치기 위해 북상하는 이집트의 대군을 단독으로 막아내기 위해 출병했던 요시야는 그의 군대와 함께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싸움이 있었던 ‘므깃도’는 이후 유다인들에게 비참함과 공포의 대명사가 될 정도의 충격을 안기게 되는데요, 이후 유다는 가파른 쇄락의 길을 걷게 되고,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중 끝내 느부갓네살의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하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와 같은 격변의 시기에 모든 희망을 걸었던 왕의 허무한 죽음, 국제적 흐름을 전혀 읽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지배층의 무능력, 마침내 찾아온 국가의 비극적 멸망과 점령군의 학살과 파괴, 그리고 저 유명한 바빌로니아로의 집단 포로생활 등 단 한 점의 희망도 발견할 수 없는 비참함 앞에서 냉정하리만치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잘 되어간다’고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 말이 맞아야만 참으로 야훼께서 보내신 예언자인 것이 드러날 것이오!(예레미야 28:9)

유다의 전설에 의하면 친바빌로니아적 발언으로 유다 멸망 후 친이집트계 지배세력에 의해 강제로 이집트로 끌려간 후 끝내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비극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본문에서 야훼의 입을 빌어 도무지 헤어날 길 없는 비참함의 막다른 골목, 즉 바빌로니아의 1차 침공으로 왕과 주요 지배계층이 끌려간 때, 고고학적으로는 그렇게 끌려간 이들이 중심이 되어 결행되었던 수차례의 무력저항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이후 처형과 유배에 직면한 상황, 독립과 새 시대를 열어줄 한 가닥 희망과 한 줄기 기운도 모두 꺼진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 역설적이게도 다음을 준비하라 말합니다.

너희는 거기서 거기에서 집을 짓고 살아라. 과수원을 새로 마련하고 과일을 따 먹으며 살아라. 그리고 결혼도 하고 번성해라. 결코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예레미야 29:5~6)

유사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창세기 1장의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라는 신의 명령이 이제 다르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에게 누명이 되었던 친바빌로니아 사상은 마침내 그 이유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잘되어야 하기 때문(예레미야 29:7)’이라고 말입니다. 아마도 이건 그렁그렁한 눈물을 삼키며 나직이 내뱉었을 다음의 말들과 같지 않을까요?

‘그래 우리나라는 망했어. 더 이상의 희망은 없어 보이지. 그래 인정할게. 하지만 이 인정은 너희 지배자들에게 영원히 머리를 숙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을 견디어 다음을 보겠다는 거야. 우리.......살자! 함께 살아서 다음을 기약하자!’

[절망 너머의 희망,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지극한 절망의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 절망을 인정함을 통해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1성서 예레미야서의 간절한 염원은 2성서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도 강하고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로의 친필서신 여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도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채 다양한 견해와 연구를 끌어내고 있는 디모테오후서는 바울로의 투옥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바울의 다른 저서에서 등장하는 가택 연금의 상황과 같이 자유로운 접견과 활동이 보장되던 이전의 때와 달리 디모테오후서의 상황은 바울로에게 매우 위협적이었으며, 급기야 죽음의 가능성도 다음과 같이 강하게 드리워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미 피를 부어서 희생제물이 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가 왔습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켜왔습니다.(디모테오 후서 2:6~7)

이와 같이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 그리고 이와 같은 위기에서 더 이상 헤어날 방법이 없는 이 때 바울로는 마지막 서신을 통해 우리에게 가슴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힘 있는 이들에 의해, 진실을 은폐하려는 이들에 의해 정의가 꺾이고, 진실을 외치는 이들이 잡혀가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는 있지만, 이는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살아있다는 이 외침에서 우리는 바울로가 그 평생을 다해 살았던 신념, 즉 어려움의 때, 바로 그 순간 너머의 희망은 열리고 있다는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신앙과 만나게 됩니다.

[보아라! 한명이 살았다!]

지극한 절망의 순간, 바로 그 순간 시작되는 희망을 만난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의 마지막 본문, 루가복음의 이야기 속 열 명의 악성피부병 환자들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의 시대를 종교적 성결로 극복하려던 순수함은 사라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른바 규율만이 남아버린 당시의 율법적 관행으로 인해 ‘더러운 자’가 되어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버림받아야 했던 이들, 바로 이들에게 예수는 그와 같이 지극한 절망 가운데 나타난 한줄기 희망이었습니다.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요!” 그리고 그 희망은 마침내 현실이 되어 자신을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악성피부병은 거짓말같이 고쳐졌고, 그들은 너도나도 신나게 자신들의 성결을 증명하기 위해 사제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요? 그토록 깊은 고통의 구덩이에서 건져준 이에게 찾아와 감사를 표한 이는 열 명 중 단 한명, 그것도 이스라엘인들은 상종을 꺼려했던 무리 속 이방인, 즉 사마리아인 밖에 없었습니다. 피부병 환자들에게는 환희와 감격이 되었을 상황에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또 한 번 지극한 절망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지요. 하느님의 나라가 휘황찬란한 왕궁이나 성전에 있지 않고, 지극히 낮은 곳에서 시작된다는 갈릴리의 신앙은 결국 이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요? 하지만 이야기 속 예수는 이 몹시 힘 빠지는 사건 가운데에서 지극한 소망을 발견합니다. “열에 아홉은 돌아오지 않았구나. 하지만 이 작은 한 사람의 믿음이 그를 참으로 살렸다. 그는 살았구나!”

어렵게 독립을 했더니 남북이 갈라진 뒤 참혹한 전쟁이 이어지고, 이승만 독재 정권을 몰아낸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군홧발 소리가 전국을 유린하며, 박정희 정권에서 신군부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을 몰아내는가 싶었더니, 그 중 하나에게 다시 정권을 빼앗기고, 이어지는 문민정부 시대에도 한총련은 이적단체가 되고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렸으며,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등장으로 많은 이들이 한껏 기대를 가졌지만 굴욕적인 FTA로 경제주권을 빼앗기고, 안타깝게도 역대 가장 많은 노동열사가 배출되었으며, 국가보안법 하나 제대로 폐기시키지 못했고, 이제는 ‘이명박근혜’로 이어지는 시대를 맞이해 모든 것들이 더욱 저 멀리 과거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약한 이들의 절규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데도, 웬만한 언론에서는 기사 한 줄, 보도 한 번 내보내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도 그 작은이들이 한 번 속 시원하게 웃었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습니다. 한국은 그야말로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합니다. 그리고 정말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절망과 무기력감은 우리의 교회 공동체에 대한 혹은 구성원들에 대한 평가 속에서도 간혹 나타나곤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와 같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여겨질 때, 본문 속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어디에서도 다음의 가능성을 보기 어렵다고? 그렇다면 바로 그대가 다음을 준비하면 되겠군!’ 그리고 서신서를 통해 바울로는 우리에게 외칩니다. ‘상황이 너무 어둡다고 생각되나요? 바로 그곳에서 당신은 살 것입니다! 물러서지 말고 당신이 그 자리를 밝히세요!’ 너무 힘든 상황, 아무런 성과도, 기운도 얻어낼 수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 작고 작은 것에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있다. 그건 참으로 귀한 가능성 이니까!’

사랑하고 존경하는 향린의 여러 지체 여러분!

여러 삶의 자리에서 참으로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아울러 그 여러 가지 과정 속에서 겪었을 몸과 마음의 상처도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와 같은 여러 삶의 현장에서 차마 이제는 모든 희망이 없다 말하기 전에 오늘 나눈 말씀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희망은 그렇게 너머를 바라보는 이에 의해, 그 너머를 기억하며 지금 꼭 한 발을 내딛는 이들에 의해 시작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부끄럽게도 젊은 놈이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제가 허리에 병이 생겼습니다. 왼쪽 다리가 몹시 저리고, 한 자리에 오래 앉아있기도 쉽지 않습니다. 한 병원에서는 ‘수술 이외에는 답이 없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몹시 울적한 마음이 들어 페이스북에 그런 심정을 적었었는데요, 오늘의 하늘뜻은 그에 대해 한 신앙의 선배님께서 제게 답글로 남겨주신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람의 때가 끝나면 하느님의 때가 시작됩니다.” 그 때를 믿으며 우리 함께 각자와 공동체의 삶, 그리고 이 사회의 한구석을 밝힐 희망의 촛불 한 자루가 됩시다.

침묵 가운데 희망으로 오시는 야훼하느님을 만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