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자화상 - 다시 종교개혁을 묻다

시편 119,97-104; 예레미야 31,27-34; 딤후 3,1-4,5; 루가 18,1-8

이 정 배 교수

(감리교 신학대학교)

누군가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면서 살라고 충고한 바 있으나 우리의 일상적 삶은 좀처럼 그리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권고를 따라 살지 못할 경우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한 해를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 데 벌써 10월, 서릿발이 치고 춥다고 몸을 웅클이며 햇볕 따스한 양지를 찾아 발길을 옮기는 때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10월의 끝자락에 있는 종교개혁일과 다시 맞닥트려야 한다는 부담감 역시 신학을 가르치는 자로서 적지 않습니다. 하여 세상보다 더 추한 꼴을 보이는 교회의 총체적 난맥상을 보면서 도둑같이 임한 10월의 마지막을 피하고만 싶습니다.

진보 신학자들의 로망이었던 WCC가 이 땅에서 열리건만 그가 줄 희망적 메시지보단 종료 후 후유증에 대한 걱정이 더욱 큰 것도 이 절기를 사는 우리를 쓸쓸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교회력에 따라 오늘 주신 말씀에 근거하여 희망을 전하고 말하는 것이 설교자의 소임이겠지요. 한국 교회의 슬픈 자화상 속에 희망의 단초를 찾아내라는 것을 하늘의 명령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신약성서 두 곳의 말씀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는 누가복음 18장의 말씀에서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권리를 잃고 소리를 빼앗겼으며 존재감을 상실한 많은 사람들의 현존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비유를 대개 옛 이야기나 우화처럼 가볍게 듣고 넘기곤 하나 성서학자들의 경우 비유야 말로 역사적 존재였던 예수 삶의 흔적을 가장 많이 담아낸 본문이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비유 속에서 우리는 교리(제도)화 되기 이전의 예수 상(像)과 그의 본 뜻(眞意)을 옳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하러 온 시간에 관계없이 동일한 품삯을 주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나 그것을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베푸는 잔치와 같은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오늘 본문이 말하듯 당대에도 살아야 할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말씀에 의하면 아무리 악하고 게으른 재판관, 심지어 그가 하느님을 믿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라도 억울한 과부가 끈질기게 자신의 권리를 찾고자 울부짖고 졸라댄다면 귀찮아서라도 권리를 찾아 주지 않겠는가? 를 반문합니다. 그리고는 누구라도 하느님에게 자신의 잃은 소리를 찾고자 소리친다면 하느님 역시 그 권리를 되찾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지요.

저는 여기서 언급된 과부라는 존재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남편을 잃었기에 상대적으로 자기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이었겠지요. 살 길도 막막하고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받아도 되갚을 힘이 결핍된 사람,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보장받을 수 없는 존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살면서 누구라도 이런 존재가 되고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이런 예외적 사건이 거듭 발생한다는 것이 진실이고 사실입니다 .따라서 일상적 틀, 통용되는 담론 밖의 운명과 마주할 할 이들의 통칭이 과부일 것이고 때론 그것이 이웃 종교인들, 동성애자가 될 것이며 해직자의 모습을 띨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기존 규칙과 담론, 일상적 범례를 강조하는 보수주의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이렇듯 거듭 새롭게 발생하는 예외적 사건들에 마음을 열릴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성서는 예외를 사유하고 그것을 존중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요. 심지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라도 그리 할 것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지금 ‘예외’를 멀리하고 소수자들을 배격하며 그들 권리에 귀 막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단식으로 소리를 쳐도, 수십 명이 목숨을 버려도 현장을 찾는 발길은 없었습니다. 어느덧 자신이 기득권자가 되어 예외자들의 자기주장을 아니 ‘예외적 사건’ 자체를 발생시키지 않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모르는 재판관도 허락하는 일을, 우리 사회의 통념이 인정하는 바를 하느님 이름으로 거부하는 것은 끊임없이 약자의 편에 섰던 예수를 배척하는 것이자 하느님 나라 비전을 폐기처분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탄식하는 자를 대신하여 탄식하신다는 것이 성서의 증언이건만 그를 거부한 채 자기소리만 내는 것은 성령을 모독, 훼방하는 일이기도 하겠지요. 이들의 탄식 소리를 듣는 것이 우리 시대의 성령체험인 것을 분명이 선포할 일입니다.

두 번째 본문 디모데 후서에 바로 우리 시대의 교회 상이 잘 언급되어 있습니다. 주지하듯 디모데 전후서는 바울서신으로서의 진정성이 의심될 만큼 제도화된 후대의 교회 상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사랑 장’으로 알려진 고린도 전서 13장이 교회의 분열상을 치유하려는 목적에서 쓰여 졌듯이 디모데 후서 역시 사람들의 감언이설의 공간, 사교장으로 변질된 교회를 향한 염려와 질타를 담고 있습니다.

본래 교회가 ‘에클레시아’ 곧 ‘내 보내짐을 받은 자들’이란 뜻이건만 자기들 귀 즐겁게 하고자 그것이 유일한 기준이 되어 자신들을 위한 설교자를 청하는 것이 당시 교회의 일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 디모데는 진리가 선포될 수 없는 현실을 고발하며 이를 바로 잡는 것이 전도자의 일이라 천명하였습니다. 바로 이 일이 바울이 말한 ‘선한 싸움’이었고 진리 선포를 통해서 자신의 믿음이 지켜질 수 있었다고 이어진 구절(7절)에서 고백한 것입니다. 이 일을 바로 잡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기에 본 서신은 우리에게 고난을 참고 그 임무를 완수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에서 보듯 전도자의 직무는 복음서가 말하는 ‘예외자’의 절규를 듣고 그들 권리를 찾는 데 있지 않고, 아니 그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고- 지금은 오로지 교회를 바로 잡는데 있게 되었습니다. 실상 교회가 바로 서지 않을 경우 내몰린(예외)자들- 당시로서는 죄인들-의 천국, 하느님 나라의 비전은 꿈 꿀 수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이 점에서 로만 가톨릭교회를 새롭게 했던 1963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50주년을 기념하며 한국 천주교회는 다음처럼 그 의미를 새겼답니다. ‘교회가 먼저 복음화 되지 못한다면 세상의 복음화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이미 신구교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사회적 평가가 있은 지 오래 되었지만 이런 가톨릭의 자기 성찰에 견줄 때 대다수 개신교는 아직도 ‘목사의 크기는 교회의 크기’에 있음을 뽐내며 세상과 불통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 교회처럼 이들은 건전한 교훈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신학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위한 애완견 되기를 바랄 뿐 자신을 견제하는 감시견의 역할을 허용치 않으려 하는 것이지요.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책임진다는 거대한 교회조직의 탄생, 그런 교회에 출석해야 구원받는 줄 아는 교인들이 느는 것은 이제 한국 교회가 그 운(運)을 다했다는 징조일 뿐입니다. 이미 한 세기 전 대중의 친교 장으로 변질된 덴마크 교회를 질타했던 키에르케고어, 나찌정권에 동조했던 독일 루터교회에 항거한 본회퍼와 같은 인물이 다시금 우리 한국 교회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어내지 못한 교회를 향해 예수를 한갓 신화나 이념으로 전락시킨 것이라 했던 본회퍼의 서릿발 같은 호령이 정말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디모데 후서가 말하듯 이제는 잘못된 교회와 싸우는 일이 전도자의 직분이자 사명이고 선한 싸움인 것을 종교개혁 절기에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구약성서의 말씀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본문을 보는 순간 ‘새 언약’이란 소제목이 불연 듯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택한 이스라엘 민족과 옛 계약을 폐하고 새로운 언약을 주시겠다는 것이지요. 굶주리며 종처럼 살았던 그들을 출애굽 시키는 과정에서 여호와 하느님을 잊지 말라고 돌 판에 새긴 십계명을 주었건만 위기를 모면한 이들이 그것을 헌신짝 버리듯 버려 버렸던 까닭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은 언제나 당면한 위기 모면(면피)용일 때가 많은 듯합니다. 하지만 이제 하느님은 돌 판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당신의 계명을 새겨 우리가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로써 우리와 하느님은 둘이 아닌(不二)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임마누엘’이란 말도 바로 이와 같은 뜻이겠지요.

저는 여기서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얻습니다. 그것은 시대정신 및 인간의 성패여부에 따라 하느님 계약이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神은 언제나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과 관계하신다는 사실이지요. 얼음덩어리와 같은 고체(교리)적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 물처럼 유연한 과정적 존재라는 말입니다. 율법에 청종하는 자에게 복 내리는 신명기의 하느님이 있었던가 하면 죄 없는 자의 고통을 지켜보는 욥기의 하느님도 있었습니다. 자연을 하느님의 합목적인 유기체로 본 중세기 가톨릭 신학이 있었던 반면 능동성, 유기체성을 부정하며 오로지 은총과 믿음을 강조한 개신교의 하느님도 존재했던 것이지요.

지금 우리 개신교는 500년 역사 앞에 서있습니다. 향후 4년이 지나는 2017년 종교개혁 500년이 될 것입니다. 주변에서는 500년의 역사가 지났다면 과거 불교, 유교가 그랬듯 개신교의 命이 다했다 생각하는 이들도 생겼습니다.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으려면 적어도 뿌리부터 달라져야 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다수입니다.

하지만 지금 개신교는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당시의 가톨릭만 생각하고 그곳에 구원이 있느니 없느니 하며 허세만 떨고 있지요. 당시 프로테스탄트의 도전에 직면한 가톨릭의 대응종교개혁이 얼마나 철저했고 달라졌는가를 알고자 하는 목회자들이 거의 없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실상 가톨릭교회 역시도 되살아 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디모데 후서의 말씀처럼 고난을 무릅쓰고 교회개혁을 위한 선한 싸움을 시작하는 전도자, 목회자 그리고 교회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말하지 않으나 누구라도 느끼듯이 두 번째 종교개혁을 위한 카이로스적 시점이 온 까닭입니다.

지금 신학계 안에서는 종교개혁의 원리였던 두 개의 ‘오직’(sola) 교리가 당시 가톨릭의 면죄부 보다 더 타락했다는 반성이 일고 있습니다. 믿음을 신조, 교리화 했고 은총을 거짓된 낙관론으로 변질시킨 탓입니다. 본회퍼의 말처럼 그것이 지금 예수를 신화나 이념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에 키에르케고어 역시 루터가 우리 시대 살았다면 그렇듯 ‘오직’ 이란 말을 삼갔을 것이라 했지요.

마찬가지로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 중에서도 종교개혁 신학이 예수는 물론 바울서신-특별히 로마서-에 대한 왜곡에서 비롯했다는 비판을 서슴지 않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이겠으나 실제로 있었던 경우를 말씀드려 보지요. 한 신도시에서 상당히 큰 규모의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가 동료 목사들 앞에서 어느 수련회 마지막 날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평신도들에게 윤리적으로 살라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절대로 교회에 헌금을 갖고 오질 않아요. 그냥 마음대로 죄짓고 살라고 놓아두세요. 그래야 뭉칫돈 갖고 교회에 헌금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부흥되지요...”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바울의 말을 왜곡했고 그리스도 대속을 천박하게 하면서까지 지켜 크게 만들고자 하는 교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교인들의 피와 땀인 헌금을 곧바로 은행이자로 지불하면서, 권력을 동원하고 법을 어기면서까지 세울 교회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너져야 할 성전 일 뿐이지요. 예레미아의 말씀처럼 버려질 ‘돌 판’에 세워진 계명과 결코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바울을 이처럼 천박하게 이해하고 있는 와중에 지난 달 두 명의 철학자들이 한국을 다녀갔지요. 바디유와 지젝, 이들은 모두 자신의 철학을 신학에 바탕 하였고 특히 사도바울에 주목했던 공통점을 갖고 있는 우리시대 최고의 사상가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힘들어도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고 창조할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체제를 벗어난 ‘불온한’ 사유라 하였습니다. 체제 안에서는 결코 희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곤 이런 사상의 원조가 예수였고 바울이었음을 결코 숨기지 않았습니다. 죄인들을 양산하는 성전(율법)지배 체제 하에서 예수는 앞서 보았듯 예외, 소수자의 권리가 지켜지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고 바울의 다메섹 체험의 본질 역시 지금껏 자신을 지탱했던 유대적 특권주의, 헬라적 보편주의와의 결별이었고 이들 담론 속에 없었던 새로운 길, 비천한 자들과 하나 된 삶을 사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하느님이 당신의 민족에게 새 언약을 주셨듯이 오늘의 기독교인에게 두 번째 종교개혁을 위해 새로운 복음(신학)을 주실 것입니다.

이제 기독교는 나/너를 편 가르고 영/육을 분리하는 편협한 속죄론,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진 맹목적 낙관주의로서의 은총론 그리고 제자가 아닌 신도를 양산하는 믿음의 율법화를 과감히 벗어나야 마땅한 일입니다. 대신 크게는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유대인과 기독교인, 좁게는 이방인 크리스찬과 유대인 크리스찬들을 하나로 묶어 내고자 했던 바울의 화해론에 입각하여 교회의 역할과 기능을 다시 생각해야 될 때입니다. 그것이 종교든지. 이념이든, 성별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은 지난한 과정이겠으나 불고 싶은 대로 부는 성령의 일이자 화해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역할 인 것을 명심할 일입니다.

일찍이 함석헌이 말했고 향린교회가 관심해온 남북분단의 극복, 통일 역시 기독교가 우리 민족에게 갚아야 할 빚으로 남아 있습니다. 3.1 독립운동 당시 천도교의 지원 없었더라면 민족대표 33인 중 절반을 낼 수 없을 만큼 기독교는 어린 종교였던 까닭이지요. 이를 위해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할 존재 일 뿐이며 아직도 이르지 못한 푯대를 향해 달려갈 사람들인 것을- 이를 일컬어 참여적 속죄론 이라 하지요- 시월의 끝자락에서 다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