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통일의 사도 홍근수목사 통일사회장]

 

 

홍근수목사 부활증언예배 1

(20131010일 목요일 저녁 8시 고려대 안암식장 특303호실)

 

한겨례 신문 전면 광고에 실린 부고 글이 홍목사님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민족 자주와 민주주의 민족생존권을

광야에서 온 몸으로 외쳐 온 평화와 통일의 사도

 

모든 성역과 경계와 금기를 뛰어 넘어

오로지 진리와 정의에 몸을 맡긴 영원한 자유인

 

소탈한 성품과 천진난만한 미소로

민중해방과 대동사회를 위해 싸우는 이들의 버팀목이 된

향기로운 이웃

 

저는 세계10차 총회 개회식에 맞춰 베를린에서부터 부산까지 23일간 총 131명이 참가하는 평화열차를 타기 위해 지난 토요일 독일 베를린으로 출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은 독일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로 오전에는 유명한 돔 루터교회에서 오후에는 베를린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이후 외국 참가자 50여명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고 브란데부르크 광장에서의 첫날 행사를 위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리에 누우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간혹 커피를 오후에 먹거나 미원이 들어간 음식을 먹었을 때, 그런 현상이 잠시 있긴 합니다만, 당일에는 그런 일이 없었기에 전연 뜻밖이었습니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 새벽 2시 반 시간을 보고 깜빡 잠이 들었는데, 잠시 후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직감적으로 저는 홍목사님께서 하느님의 부름을 받으셨음을 알았습니다. 제가 잠 못 이룬 그 시간 홍목사님께서는 이 땅을 떠나면서 뭔가를 제게 부탁하고자 하셨던 것은 아닌가? 사무엘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엘리 사제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하고 세 번이나 우문을 던졌듯이 저 또한 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 하고 우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헤아려 보니 그때 저도 화장실을 세 번 드나들었던 것 같습니다.

 

떠나기 전 담당의사로부터 임종을 준비하라는 얘기가 있었기에 가족들과 함께 임종예배를 드렸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희들이 왔다고 눈을 크게 뜨셨기에 저는 일정을 다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살아계실 것을 기대했었습니다만, 긴 시간의 병상 생활도 그러하였듯이 이번에도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다른 곳에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영목사님께서 친히 전화를 주셔서 평화열차야 말로 홍목사님이 원하셨던 일이고 그 일이 더 중요하니 장례를 위해 올 필요가 없다고 강하게 말씀하셨지만, 제게 있어 홍목사님의 장례에 참여하는 것은 민족화해와 통일을 향한 또 다른 저의 신앙고백입니다.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 목사님 두 분과 함께 얘기를 나누는 중, 한 분이 홍목사님 병세를 물으시면서 홍목사님께서는 건강만 허락하였다면 분명히 우리와 동행하셨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마음으로는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저를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엿들으셨는지 홍목사님께서는 평화열차 공식 행사가 시작하는 첫 날 당신이 76년 몸담았던 육신을 떠나시기로 마음을 작정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게 있어 2013년 한해는 잊지 못할 특별한 해가 되었습니다. 향린교회 60주년과 저의 향린목회 10년을 갈음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 해이기도 하지만, 제 생애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세 분을 떠나보내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세 경우가 공교롭게도 제가 한국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장의 직임으로 공적인 행사를 위해 3번 해외에 나가게 되었는데, 모두 그 때를 맞춰서 돌아가시었습니다.

 

5월에는 아틀란타에서 미국 교회와 한국교회 대표들이 모여 평화통일 컨퍼런스를 진행하던 중 1년여 투병 생활을 하시던 박영숙권사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예비하시며 장시간의 대화를 나눈바 있고, 또 안병무선생님 기념 사업회 회장직을 맡고 있어 각별한 관계를 갖고 있었는데, 그런데 권사님과의 관계는 여기서 그치질 않고 여성계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재산 유증을 교회에 하셨는데, 그 일까지 제가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향린교회 목회자라는 직임 때문에 두 가지 책임을 동시에 지게 되었는데, 앞으로 몇 년 동안은 박영숙권사님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어 6월 달에 들어 기장 총회에서 주최한 백두산 평화통일 기행을 참가하였는데, 미국에서 그간 건강하게 지내셨던 아버님께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은 제가 목사가 되도록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평생 저의 목회를 기도로 후원하여 오셨던 분이셨고, 자나 깨나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의 의를 먼저 구할 것을 가르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3년 가까이 병상에서 계셨으니 평화열차 시작 전 혹은 끝난 후에 얼마든지 부름을 받을 수도 있었고, 인간적으로 본다면 그게 떠나시는 홍목사님이나 떠나보내는 제게나 더 편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훼 하느님은 홍목사님을 통해 다시 한 번 홍목사님이 평생 추구하여 오셨고, 현재 제가 일정한 책임을 지고 진행하는 평화통일 일을 간섭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저와 홍목사님과의 만남은 80년대 초 미국에서 민주화와 통일운동 모임인 북미주기독학자회와 목요기도회 활동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다가 향린교회 부름을 받아 귀국하셨고 얼마 있지 않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저는 그때 워싱톤의 한 작은 교회에 부임하여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당시 저는 홍목사님 큰딸인 정화선생과 함께 워싱톤에서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하고 있었기에 홍목사님의 부당한 투옥을 서방에 알리기 위해 한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저는 5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참가를 하였는데, 그때 제 얼굴이 주요 일간지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6년간 제가 워싱톤에서 목회하며 목요기도회 활동을 하는 동안 정치목사, 심지어는 빨갱이 목사라는 딱지가 붙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2001년 안식년을 맞아 서울에 들렀다가 홍목사님께 전화로 문안 인사를 드렸는데, 그때 설교 부탁을 받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홍목사님의 뒤를 이어 향린교회의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불가에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사실 저와 홍목사님은 신학교의 선후배에 민주화와 통일운동으로 가까운 사이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겨우 일 년에 한번 성탄절 카드 챙겨드리는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향린교회에 부름을 받기 1년 전 제가 섬기던 한어 회중과 미국인 회중이 공식적으로 통합을 한 미국장로교 첫 번째 교회로서 이민교회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언론이 특필로 다루고 있었기에 저는 여기에 저의 남은 생을 향한 하느님의 뜻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여기가 나의 마지막 정착지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던 아브라함에게 지금 있는 곳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길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향린이라는 또 다른 길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미국 방문 길에 홍목사님께서는 자녀들이 어리기에 귀국을 반대하고 있던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저희 집에 오셨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사람에게는 수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짧은 시간 영향을 주는 만남도 있고, 긴 시간 영향을 주는 만남도 있고, 어떤 만남은 아예 한 사람의 생애 자체를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하는 만남이 있습니다. 그날 밤의 홍목사님과의 짧은 만남은 사실 저의 인생뿐 아니라, 저의 가족의 인생의 행로까지 바꿔버린 결정적인 만남이었던 셈입니다.

 

지금부터 들려드리는 하늘뜻은 홍목사님의 첫 번째 책인 예수와 정치에 실린 ,부활사건을 보는 관점>이란 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죽어서 무덤에 묻혔던 예수님이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 이 부활산건은 과학적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현대인에게는 거침돌이고 어리석으며 황당무계한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당시 살았던 바울은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에게 멱살을 잡히기 전까지는 논리와 철학과 신학에 도통했던 사람이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지성인의 대표였다. 그래서 그도 부활사건을 어리석은 소리로 듣고, 부활을 선포하는 사람들을 미신으로 사회를 교란하는 자로 간주하고 일선에 나서 박해하던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첫 열매가 되셨다고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필자는 황당무계하게 들리는 이 부활사건을 세가지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말해 보려고 한다.

 

첫째로 심청전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아버지의 눈을 뜨기 위해 청춘을 바다에 던지는 심청이의 죽음은 단순히 효도의 한계를 넘는 종교적 구원의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그래서 60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자연의 역설적 이치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기 목숨을 건지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자기 목숨을 잃기를 불사하는 자는 생명을 건지리라.’는 말씀의 빛에서 십자가의 부활을 이해할 수 있다.

 

둘째로 출애굽사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노예로 살아가던 히브리인들이 고통 가운데 울부짖었을 때, 야훼 하느님은 저들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 애굽에서의 400년간의 노예생활과 이의 축소판인 40년간의 물과 양식이 없는 거친 사막에서의 방랑은 죄와 죽음의 멍에 아래서 허덕이는 고뇌에 찬 인생의 처절한 실존의 운명을 상징하는 듯 하다. 예수가 무덤문을 박차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애굽의 노예생활과 40년의 수난과 방랑을 넘어 구원의 땅에 이른 것과 같다. 곧 부활사건은 인간을 궁극적으로 해방하는 구원의 사건이다.

 

마지막으로, 부활사건을 심판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매사에 시시비비가 있듯이 하늘 아래 모든 일의 잘잘못은 판가름이 나야 한다. 인류사회가 의례 그랬듯이 예수께서 살던 시대도 인권과 정의가 땅에 떨어진 사회였다. 예수는 착취와 압박당하는 사람들을 편들고 인간을 노예화하는 모든 세력에 대하여 규탄하는 설교를 가차 없이 행하였다. 이 세상의 권력가들은 그들의 권세를 위협하고 훼방하는 골치 덩어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이 불의한 통치자들의 방자한 짓에 대해 하늘 옥좌에 앉으신 이가 가소로워 웃으신사건이 부활 사건이다. 부활은 내가 너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권한이 있다고 방자한 말을 한 빌라도가 대표했던 불의한 세상 권력에 대한 하늘 심판의 사건이다.

 

사실 오늘날도 세계적인 지성인들은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솔직히 모른다고 하면 좋겠지만, 대체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건 우선 내세를 믿는다고 하는 종교인들의 현실을 외면하는 타계 신앙 태도 때문이기도 하고, 둘째는 그 스스로 자신이 학문의 체계로 세워 온 그 이성에 기초한 인식론적 기준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내세와 부활을 단순히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홍목사님과 같이 정의와 심판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분명히 내세와 부활은 있을 것이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본문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1224-25)]

 

 

홍근수목사 부활증언 하늘뜻펴기 2

(2013. 1011일 오전 9시 향린교회 발인예배)

 

저와 홍목사님과의 만남은 80년대 초 미국에서 민주화와 통일운동 모임인 북미주기독학자회와 목요기도회 활동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다가 향린교회 부름을 받아 귀국하셨고 얼마 있지 않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저는 그때 워싱톤의 한 작은 교회에 부임하여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당시 저는 홍목사님 큰딸인 정화선생과 함께 워싱톤에서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하고 있었기에 홍목사님의 부당한 투옥을 서방에 알리기 위해 한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저는 5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참가를 하였는데, 그때 제 얼굴이 주요 일간지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6년간 제가 워싱톤에서 목회하는 동안 교회 안에서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평화운동에 더욱 매진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고, 그런 인연이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저는 3주 후에 부산에서 있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 개회식에 맞춰 베를린에서 출발하여 모스크바와 이르쿠츠크, 그리고 북경과 단둥 서울 부산을 거치는 22일간의 평화열차를 위해 지난 토요일 출국하였다가 유럽의 분단과 분열 이제는 화해와 통일의 상징이 된 브란데부르크 광장에서의 첫날 행사를 마치고 급히 귀국하였습니다. 지금 평화열차는 베를린을 출발하여 모스크바에 정차해 있고, 러시아 정교회와 함께 일정을 지내고 계시는 한인 목사님들 50여명은 모두 홍근수목사님의 뒤를 따라 분단된 조국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일하시고 계시는 목사님들입니다. 그분들은 평화열차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참여할 분들입니다.

 

홍목사님께서 평화열차가 시작하는 첫날 아침에 76년간 동고동락하던 육신을 떠난 것은 평화열차에 영으로 함께 참가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냥 혼자 오셔서 중간에 합류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공식적으로 분명히 하기 위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장으로 있는 저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홍목사님은 서울의 병상에서 그리고 제가 베를린에서 따로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국가보안법 철폐와 정전협정을 평화헌법으로 바꾸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홍목사님의 16년의 땀과 열정과 그리고 저의 10년간의 목회의 꿈이 담겨 있는 향린교회로부터 함께 출발하자고 저를 부른 것입니다. 저는 이 발인예배가 끝나면 바로 공항으로 가서 모스크바에 정차하고 있는 평화열차에 다시금 올라타게 되는데, 이번에는 저 혼자가 아닌 홍근수목사님과 함께 갈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남북경색으로 거의 불가능하게 된 신의주와 평양 통과를 가능하도록 하여 남과 북의 화해의 통로를 만들어내고야 말 것입니다.

 

박노해 시인이 방문한 터키의 악세히르 마을의 입구에 위치한 묘지의 무덤에는 그 무덤의 주인이 살았던 세월을 숫자로 표기해놓았는데, 대부분이 3,5,8,10 정도였다고 합니다. 가장 큰 숫자가 20년 정도였습니다. 그래 이 나그네는 그 숫자를 보고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거나 큰 재난이 있어서 많은 아이들이 죽었나보다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마을의 한 노인이 그에게 무덤에 새겨 있는 숫자의 의미를 이렇게 알려줍니다.

 

우리 마을에는 묘비에 나이를 새기지 않는다오.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오. 사는 동안 사랑을 하거나 깊은 깨달음을 얻었거나 혹은 잊지 못할 삶의 경험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 집 문기둥에 금을 하나씩 긋는다오. 그가 이 지상을 떠날 때 문기둥의 금을 세어 이렇게 묘비에 새겨준다오. 그러니까 여기 묘비에 새긴 숫자가 참 삶의 나이라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우리의 실제 나이는 몇 살이 될까요? 그렇게 본다면 홍근수목사님의 참 나이는 몇 살이나 될까요? 홍목사님은 단지 그 자신에게만 의미 있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잠든 민중들을 흔들어 깨운 선각자이자 이 시대의 예언자이셨습니다. 문익환목사님이 북을 방문하여 김일성주석을 품에 껴안음으로 수십년간 남과 북의 백성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던 38선의 철조망을 한순간에 거두어버렸듯이, 홍목사님은 20여년 전 KBS TV 토론에서 남한이 유럽마냥 공산당을 허락했을 때에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얘기도 했고, 남쪽 사람 대부분이 북의 공산주의자들 머리 위에는 빨간 뿔이 하나씩 돋아 있다고 여겼을 때, 그들 또한 사랑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정을 나누는 휴머니스트들이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지금은 수십만이 북을 방문하여 우리와 하나 다를 바 없는 형제자매들임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정부가 모든 정보를 통제하고 있던 시기였기에 이런 발언들은 남한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습니다. 그 이후 홍목사님은 여러 통로를 통해 발언을 자제하는 권유를 받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감옥에 갈수도 있다는 경고를 받았지만, 그의 예어자적 발언과 설교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누르면 누를수록 더 강해지는 스프링마냥 강도 높은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저도 1997부터 평양을 네 번 방문했습니다만, 어쩌면 북의 형제자매들이야말로 자본주의 욕망과 물질 틀에 사로 잡혀 있지 않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휴머니스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군비에 모든 힘을 쏟다보니 잘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 있는 자에게 무릎을 꿇고 비겁하게 사느니, 떳떳하고 당당하게 사는 삶을 더 소중히 여기듯이 북의 형제자매들은 바로 그렇게 세계 제1의 군사경제대국 미국을 향해 떳떳하고 당당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 남쪽은 어떠합니까? 한미FTA는 물론이요, 쇠고기협정은 다른 어느 나라 보다 비굴한 협정을 맺고 있고, 이것뿐인가요? 군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 사령관에게 맡겨놓을뿐더러 돌려받겠다고 하는 협정까지 연기해가며 더 갖고 있어달라고 애원하는 필요하다면 미사일이든 MD방어체제든 뭐든지 사주겠다는 세계 유일의 비정상 국가입니다. 50년 후 100년 후의 역사가들은 오늘의 남과 북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한 인간의 삶도 그러하거니와 한 나라의 진정한 평가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뤄지는 것입니다.

 

몇 년 전 핵보유를 의심하며 이를 확인하기 위해 북을 방문한 한 미국 정치인에게 우리는 핵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고 말했을 때, 현실적이고 타산적인 미국인들은 그 말을 핵폭탄보다 기술적으로 더 앞선 무슨 수소폭탄이나 중성자탄을 생각했을지 모릅니다만, 북에서 말한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민의 단결된 힘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전투에서 사람은 총알 하나에 쓰러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몸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뭉쳐진 사람들이 핵보다 더 무섭다는 얘기는 진정한 휴머니스트가 아니고는 발언하기 어려운 얘기입니다. 왜 우리는 이런 얘기를 못하는 것일까요? 양키고홈을 말하지 않는 유일한 국가라고 세계 사람들이 비웃고, 미국사람들이 돌아서서 비아냥거립니다. 그래 이를 견디지 못한 홍목사님은 그의 마지막 책의 제목을 [양키고홈]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런 정도만으로도 홍목사님은 한 오백년쯤 사신 셈입니다.

 

이것뿐인가요? 오늘의 향린교회가 갖고 있는 목회의 독자성의 기틀을 마련하신 분또한 홍목사님이십니다. 목사장로 임기제, 국악예배의 도입, 목회운영위원회의 신설 분가교회 등은 홍목사님이 아니고서는 감히 실천하기 힘든 교회개혁의 금자탑입니다. 다음 달 세계교회협의회 10차 총회가 부산에서 열립니다만, 진정 한국교회의 독특함을 세계 교회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교회 건물 큰 것과 사람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애를 씁니다만, 사실 유럽을 방문해보면 저들의 웅장한 건물과 휘황찬란한 모습에 입이 닫히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크기로는 우리가 결코 그들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내용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기독교 역사가 짧다보니 보여줄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를 향해 보여주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향린교회의 국악예배 시연 마당입니다. 저는 제가 향린교회의 목사이기에 자화자찬을 하기 위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정말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백미는 저는 향린교회의 신앙고백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전통 가락에 맞춘 노래와 음송으로 함께 고백하는 것은 그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가히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입니다.

 

그것뿐인가요? 20년 전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시민단체를 문규현신부님과 함께 시작하여 우리 민족 자주에 기초한 평화적 통일운동을 펼치는 일 또한 너무나 큰일이자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만약 평통사라는 조직과 활동이 없었다면 세계인들은 우리를 향해 과거 광주항쟁 때에 우리 민족을 들쥐와 같다고 폄하했던 미국의 워컴 소장과 같은 멸시와 조롱을 계속하여 오고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전시작전통제권을 계속 맡아달라고 요청하는 이런 노예와 같은 지도자가 다스리는 나라가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요? 도대체 전력이 열세하다면 제가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경제력이 50배가 높은 것은 물론이요, 객관적인 군사력 또한 남이 북에 비해 훨씬 높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정신 나간 짓이 계속 되는 것일까요? 남한의 군장성들이나 정치인들이 누리는 혜택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혜택입니까? 마치 우리가 북한에 비해 열세인 것처럼 해야 군비를 계속 늘려갈 수 있고, 그래야 장성들의 높은 비율의 숫자도 계속 유지할 수 있고, 여기에 덧붙여 미국으로 수입하는 무기구입을 통해 엄청난 떡고물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좁은 한반도 땅덩어리에 저 남해에서 삼팔선까지 불과 몇 분이면 날아가는 초고속전투기를 위해 공중급유기는 왜 필요한가요? 알라스카나 시베리아까지 날아갈 필요가 없다면 그 비싼 공중급유기는 구입할 필요가 전연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들이 군사작전을 세우고, 그 작전에 따라서 공중급유기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슬슬 고장이 일기 시작하는 중고 급유기를 우리에게 팔아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구입비의 최소 20%에서 30%의 거액이 스위스 비밀은행을 통해 군장성들과 청와대 권력층들에게 나눠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3년 전 천안함조작 사건이 터지고 난 직후 미국 국회에서 외교국방위원장이 국방장관에게 국방비 예산 삭감으로 가장 첫 번째 포기해야 할 사업이 F35전투기 개발이라고 말했을 때, 장관의 답이 미국의 국방예산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이를 계속할 수 있다고 답변했을 때, 저는 직감적으로 남한이 가장 첫 번째 구매자였음을 알았고, 거기에 왜 애초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말했던 미정부가 입을 다물었는지 그 이유를 안 것입니다. 2년전 국방부가 3개의 기종을 놓고 연구하고 있다고 할 때에도, 얼마 전 최종 후보기가 F15 SE 하나 밖에 없다고 말할 때에도 저는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F35 전투기가 될 수밖에 없다고 선언을 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이에 노예와 같이 예속되어 있는 한미군사협정, 이 과정에서 군장성과 청와대 권력가들의 돈 나눠먹기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타개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주입니다. 그리고 자주는 자유와 해방이라는 신앙 정신에서 나오는데, 홍목사님은 바로 이 정신을 성서의 출애굽 사건과 갈릴리 예수 정신의 핵심임을 발견했고, 이를 평생에 걸쳐 온 몸으로 줄기차게 구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줄기참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지속이 되어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광장에 가 있던 저를 다시금 불러들여 함께 타고 가자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저는 12시 비행기를 타고 다시금 모스크바로 가서 평화열차에 합류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6일전과 달리 이번에는 홍목사님의 혼과 함께 갈 것입니다. 그 육신은 오늘 땅에 묻히지만, 그 영혼은 자유와 해방의 그 혼은 평화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즈크로 북경으로 그래서 막힌 담을 헐고 신의주로 평양을 통과하여 서울로 부산으로 향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홍목사님의 첫 번째 책 <예수와 정치>에 실린 글의 한 부분을 읽어드림으로 하늘 뜻을 끝맺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나 하느님의 정치는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을 위해 약속되고 주어지는 것이지 내세나 죽은 인간을 위해 약속되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정치의 이상의 빛에서 인간의 정치를 보고 비판하고 필요하면 항거하고 혁명을 하는 사명이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국가나 정치권력을 잡은 자들에게 대하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언자적 사명이라는 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정치가 하느님의 정치에 가까이 실현되는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인의 정치적 사명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주기도문의 구절이 의미하는 바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정치란 관점에서 볼 때 세계 평화의 위협은 물론 한국사회의 모든 악과 모순, 즉 억압과 착취, 인권유린과 불평등, 군사주의와 군부독재 등의 원인과 온상이 되고 있는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사명이요, 한구교회의 사명일 것이다. 여러 가지 한국적 상황 (,북을 망라하여)을 고려할 때 현 집권자들이 통일을 진정으로 원하지도 않지만 통일을 성취할 능력 또한 없다. 오직 통일을 실현할 의사와 능력을 가진 통일의 주체는 민중이다. 교회는 이 민중들과 더불어 민족 화해와 통일의 당위성과 방향을 제시하고 이의 성취를 위해 매진해야 한다.“

 

이어지는 노제와 하관예배 순서를 통해 이러한 홍목사님의 삶과 뜻을 생각하고 이를 계속 이어가기 위한 구체적인 일들을 성찰해보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