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성만찬주일 향린공동체 연합예배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 향린공동체의 목회

루가 7,24-27

김 경 호 목사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떠난 뒤에, 예수께서 요한에 대하여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비단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사스럽게 사는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이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

서남동 목사는 “죄는 지배자의 용어이고 민중의 언어는 한(恨)이다.”고 하셨습니다. 죄를 지으면 피해자가 있습니다. 살인을 하건 도둑질을 하건 강간을 하건, 사기를 치건 모두 다 그 행위로 인해 피해를 입는 피해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교회의 신학은 피해자가 입은 한 덩어리 그들이 가진 응어리를 풀어주는 목회는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고백을 시키고 사죄를 선언하는 것은 죄를 지은 가해자의 죄책만을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최소한 갖는 양심의 가책을 재빠르게 사해주고 용서하고 새롭다고 선언해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가해자에 대한 서비스입니다. 죄는 사람들에게 지고, 용서는 하나님께 받는 행위를 통해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아도 편안할 수 있습니다. 신학이 잘못될 때, 최소한의 양심의 가책까지도 면제해 주는 파렴치 한 사람들을 만듭니다. 이들은 아무리 범죄를 해도 늘 하나님께서 새롭게 해주시고 자유롭게 해주시는 은총 아래 살아갑니다.

첫째, 향린공동체의 목회의 중심점은 피해자가 당한 아픔, 사회적으로 고통받는 자의 한(恨)이 우리 목회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죄나 죄의식에 대한 목회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면에서는 피해자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해자가 됩니다. 예를 들면 지극히 가난한 가정입니다. 그들은 사회적 피해자이지만 가정 안에서는 가부장권을 휘두르는 가해자 일 수 있습니다. 삶의 여러 면에서 피해와 가해가 중첩적으로 나타나기에 죄에 대한 목회도 필요한 부분이지만 우리의 목회의 중심점은 피해자가 당한 아픔, 사회적으로 고통받는 자의 한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지만 그 용서를 인간에게 위임하신 죄가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범죄하고 서로에게 한을 남기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권한을 그 아픔을 당한 사람에게 위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단에 제물을 바치기 전에 형제와 불화한 것이 생각나거든 가서 먼저 화해하고 와서 제물을 드리라”(마태 5,24)고 하신 것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겠으나 명백한 피해자가 아직 존재하고 있는 경우 먼저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선결 조건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신학이 가해자를 위한 신학이 되다보니 간과했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의 용서를 인간에게 위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엄청난 하나님의 위임을 간과하고 우리끼리 신학(기독교 신앙)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사회와는 불통케 되고 지탄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둘째 향린공동체의 목회는 자유와 해방의 목회여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지배자들이 그랬고, 중세시대에 교회가 그랬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죄를 강조하고 그들을 죄인으로 묶어 놓으려 했습니다. 예수 시대에 당시의 민중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율법들을 부과했습니다. 그 법의 용도는 지키라는데 있기보다는 일단 모두를 죄인으로 만들어 놓고 자기들이 잡아들이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나 잡아들이고 풀고 싶은 사람들은 제멋대로 풀게하는 용도였습니다. 이것으로 지배자들은 민중의 가슴에 자기 검열의 칼을 스스로 심어 놓게 하고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중세 때도 우리의 모든 삶을 성례라는 제도로 묶어버렸습니다. 모두를 죄인으로 만들어 놓고 통치하려 했습니다. 그래야 통제가 용이하니까.

마틴루터는 지배자들이 심어 논 죄의식으로부터 자유케 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제도가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묶어 놓고 그들을 통치하려고 했던 사슬로부터 은총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써서 인간을 정죄하고 죄인으로 묶어 놓는 하나님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켜주시는 강한 성으로서의 하나님으로 선포하였습니다. 향린공동체의 목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받아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목회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향린공동체의 목회는 본래 예수님의 복음, 말씀의 사회적 차원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의 기독교 복음이라는 것은 본래의 예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회를 뒤집는 혁명의 말씀이었는데 지금의 기독교는 사회의 변화를 싫어하고 도전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의 이야기로 내세화 시켜버렸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놀라운 혁명이었지만 그것의 한계가 있습니다. 루터가 본 하나님의 구원과 의는 자신의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회적 차원의 죄는 사라지고 인간의 내면적 죄책이 대신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루터는 끊임없이 수도원 안에서도 죄책으로 괴로워했으나 사실 수도원 안에서 격리된 생활, 노동과 예배, 학습을 반복하는 상황에서 뭐 그리 죄를 지을 것이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죄 대신 죄책이 신학의 주요한 문제가 되었기에 역시 구원 대신 구원의 확신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회적 삶의 차원은 다 깨져버리고 지극히 내면적인 기독교가 된 것입니다.

향린공동체의 목회는 내면화된 기독교에서 구원의 사회적 측면을 회복해야 합니다. 향린공동체는 목회자와 평신도가 하나가 되어서 거리에서 예배도 드리고 성명도 발표할 수 있는 유일한 교회입니다. 우리가 거리에 나가는 것은 세력을 형성해서 지배자들을 꺾고 그들을 제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비단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사스럽게 사는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답합니다.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다.”고, 그는 메시아의 길을 닦는 사람이요. 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입니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예수의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예언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광야는 우리 시대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광야이며 그들을 위로하는 소리가 우리들의 외침이고 예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열려있어야 하며 서로를 향해 용서하고 받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누구보다도 비판의식이 높은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지만 또한 가장 큰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 비판의 칼을 보다 큰 마당에서 펼쳐야지 우리 내부를 향해 서로에게 난도질 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입니다.

나하고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세히 따져 보면 결국 모두가 나의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멀고 험합니다. 보다 멀리 넓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 교회마다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나서 내적으로 강한 공동체 의식, 끈끈한 인간적 이해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그 단결력으로 한국 사회와 기독교를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곧 로마의 박해를 받았고 모든 사도들과 교우들이 순교하며 죽음의 형장에 끌려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박해 속에서도 그들은 세상과 타협하거나 꺾이지 않았고 세상의 권력과 투쟁하며 복음의 내용을 지켰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내적으로는 형제와 자매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모든 교인들을 공동의 몸으로, 하나의 영으로 이해하며 하나됨을 강력히 유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밖으로는 보다 큰 적과 투쟁하였으나 내적으로는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는 서로 다른 원칙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초대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기독교에서 향린 공동체가 없다고 가정해봅시다. 기독교가 기독교이겠습니까? 더 더욱이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그나마 무너져 가는 한국교회를 지키는 버팀목이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향린 공동체의 역할은 실로 중요한 역할입니다.

여러분! 적은 너무 강하고 우리는 그 숫자가 너무 적다고 실망하지 맙시다. 일제 때 그 말기로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친일로 넘어갔습니다. 그 때 끝까지 독립의 의지를 가지고 민족정신을 지킨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몇 퍼센트나 될까요? 독일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의 대부분의 교회는 히틀러의 손을 들어 주고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공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수십명에 달하는 양심있는 목회자들이 모여서 고백교회 선언을 하고 국가 교회로부터 독립된 의지를 천명하였습니다. 그들의 숫자나 비율은 극히 미미한 정도입니다. 당시에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바다에 모래 한줌 던지는 정도, 거대한 태풍을 입김으로 막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민족은 남이건 북이건 3.1 정신을, 민족정기를 이야기 하면서 항일독립의 의지를 이어받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까? 만약 소수라도 독립의 소리가 전혀 없었다면 우리는 그 시대를 어찌 말하겠습니까? 우리의 역사가 단절된 부끄러움을 어찌 내어 놓겠습니까? 당시는 아주 적은 무리였지만 지금의 독일교회는 자기들이 고백교회의 정신을 이어간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 나마 없었다면 그 부끄러운 교회는 모두 문을 닫아야지요.

그 소리가 존재하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여러분 큰 눈으로 보십시오. 지금 향린공동체는 미래의 역사를 써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역사가 기댈 언덕을, 한국 기독교가 다시 태어날 그루터기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광야라는 것은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옳은 소리지만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고 새 시대를 여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 자체가 있고 없는 것은 미래의 우리들의 역사가, 우리들의 이야기가 존재하느냐 아니냐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향린공동체는 지금 그 미래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실로 중요한 예언의 소리, 광야의 외침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