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유익

32:1-3a, 6-15 91:1-6, 14-16; 딤전 6:6-19; 16:19-31

 

예수님의 비유말씀 가운데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하는 유일한 비유가 오늘 읽어드린 루가복음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입니다. 아마도 천국지옥 이야기가 나오지 후세 사람들로부터 꾸며낸 이야기라고 비난을 받자 사실성을 담보하기 위해 이름이 실려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야기인즉, 부자는 세상에서 매우 사치하고 호화로운 생을 즐기고 죽은 반면 그 문밖에 거주했던 거지 라자로는 병들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다 죽었는데, 죽은 다음에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져서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 안에서 평화로운 삶을 즐기고 있었던 반면 부자는 뜨거운 불이 타오르는 지옥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라자로가 보이자 아브라함에게 저 라자로를 통해 제 타는 목에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서 갈증을 잠시나마 면하게 해달라고 애걸을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쪽과 이쪽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 오고 갈수가 없다고 답하자 그러면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들에게 라자로를 보내어 이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라도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 라고 답을 하고 부자는 그것만으로는 그들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가서 얘기해야만 들을 것입니다.’ 라고 애걸을 하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라는 답변으로 비유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큰 틀에서는 우리가 어렸을 때 자주 들었던 콩쥐팥쥐나 흥부놀부 이야기에서와 같이 권선징악을 장려하기 위한 하나의 동화 같은 얘기이기도 합니다.

 

[긍정도 부정도]

 

그런데 이게 예수께서 말씀하셨고 복음서에 기록이 되어 있어 불신지옥 예수천당이라는 밀어붙이기 막판 구원 교리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 천당지옥 이야기가 우리가 어렸을 때 도깨비나 산타클로스 얘기를 들으면 그들이 실재한다고 믿지만, 커서는 믿지 않게 되는 그런 비유 성격의 얘기인지, 아니면 사후에 펼쳐질 만고불변의 진리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단순하게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서 간다고 하는 이야기를 현대인들 다수가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쉽사리 부정 또한 하지 못하는 것이, 그랬다가 만일 죽어서 가보니 만에 하나 있기라도 한다면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꼴이 되어, 너 없다고 말했다며? 그래 그럼 있는지 없는지 한번 지옥 불에 들어가 좀 살아봐라 하면 곤란하니 적극적인 부정도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을 떠나 천당지옥은 부정도 긍정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난감한 과제입니다. 더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말씀한 천국과 지옥을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있다고 믿자니 자신의 신앙이 너무 천박해지는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게 현대과학기술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거의 대부분 성서가 주장하는 세상에서 의롭게 산 사람은 영생의 삶을 살아가고 악인은 영벌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전제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면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가? 나는 살인이나 큰 도둑질을 하지 않았으니 의인에 속하는가? 성서에는 의인은 한명도 없다고 했는데, 거꾸로 매달아 호주머니 털어 먼지나지 않는 사람이 어찌 있겠는가? 예수는 마음으로 지은 생각만으로도 행실의 죄와 같다고 했는데, 내가 어찌 의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법을 어겨 감옥에 가지도 않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악한 일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교회까지 열심히 나가고 있으니 지옥을 가는 악인일리야 만무하지 않은가? 게다가 바울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의인으로 인정함을 받는다고 했으니 난 의인이지 않는가? 그런데 또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으니 나는 행동하는 기독교인인가? 이리 보면 의인 같고 저리 보면 악인과 별 다른 차이가 없어 보여 지옥행은 아닌게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천국행을 자신할 수도 없어 죽어봐야 안다가 대부분의 결론입니다.

 

이렇듯 사후의 천국과 지옥을 설정해 놓고 나면 신앙생활의 기준이 모호해질뿐더러 신앙이 주는 자유와 해방의 기쁨은 사라지고 뭔가에 억매이게 되는 의무 신앙인으로 변하게 됩니다. 천국을 가겠다고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잘못하면 자기도 모르게 일종의 공로주의와 율법주의라는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비유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자신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아주 곧이곧대로 지킨다고 자부했지만, 돌이켜보면 바로 그런 죄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땅에서 선하게 산 사람과 악하게 산 사람이 죽어서 별다른 차이 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사후의 세계를 천국과 지옥이라는 단순설정에도 찬성하지 않습니다. 제가 천국과 지옥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주일마다 이런 얘기를 한다면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시지요라고 말씀하실 분도 많을 것이고, 청년들의 경우는 이제 식상해서 못듣겠다 하고 교회를 나오지 않게 나올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과거에 그렇게 말씀하셨다 할지라도 오늘 이 시대에 다시 오신다면 현대인들의 지식과 상식에 맞게 말씀을 전하실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말씀을 전하시면서 옛 사람들은 이렇게 가르쳤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며 새 시대에 맞는 해석을 하셨던 것입니다.

 

[부자의 죄]

 

천국지옥 얘기는 비유 이야기의 핵심이 아닌 핵심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입니다. 사실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은 명백합니다. 메시야의 시대가 오면 권력자들은 쫓겨나고 부자는 빈손이 되는 전복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의 복을 얘기하고 나아가서 부자에게는 화가 임할 것임을 선포합니다. 그러니 그 시대가 지금 오고 있으니 아니 어떻게 보면 지금 도끼나 나무 뿌리에 닿아 있으니 빨리 부자들은 자신들이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 재물을 잠시 관리하도록 책임이 맡겨진 청지지임을 깨달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에서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문간에서 구걸을 하던 라자로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 자체가 죄가 아니라, 그가 매일같이 문을 드나들면서도 그 문에 앉아 있는 거지 라자로를 전연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즐거움에만 정신이 팔려 바로 코앞에 있는 타인의 고통은 전연 깨닫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여러분이 이 비유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집 앞에는 그런 거지와 같은 사람이 없으니 괜찮구나 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큰 착각입니다. 여러분이 매일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매주 일요일이 되면 교인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간혹 이런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래? 그 사람에게 그런 어려운 일이 있는지, 난 몰랐네. 항상 웃으시니까 정말 몰랐어.’ 지금 부자와 라자로의 얘기는 항상 만나는 사람의 웃음 뒤에 감추어져 있는 그 형제자매의 고민과 고통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부자는 적어도 2,30억원의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매일 만나는 이웃의 고통을 읽어낼 줄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이 곧 자기에 몰두해 있는 부자인 것입니다.

 

[시간의 복]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부자에게 화가 있다고 한 말씀의 핵심은 여기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복이라는 말보다는 행복이라는 말이 더 자주 쓰입니다. 국가의 경제수치를 비교할 때에도 단순히 국민소득만을 비교하지 않고, 건강, 교육, 장수 등등을 포함한 행복지수를 말합니다. 국민소득이 세계 1위라 하더라도 동시에 자살률 세계 최고라면 그 나라는 복이 있는 나라는 되겠지만, 행복한 나라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즐겨 쓰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일본에서 수입된 말이라고 합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이 영어의 happy를 번역하면서 사치에 해당하는 과 복()을 묶어 행복이란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도 일본인은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을 우미노사치 곧 바다의 행복, 산에서 잡은 짐승·산나물·열매들을 야마노사치 곧 산의 행복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자연의 영령들이 인간에게 뭔가를 주는 것을 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원적으로 보면 행복이란 하늘의 축복이 전제된 말인데, 요즘 쓰는 복이란 단어에는 이런 의미가 들어가 있지만, 행복이란 단어에는 그런 의미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본래 영어의 happyhappen에서 온 말로 예상치 않게 오는 신의 은총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행복이 본래는 물질적인 것 보다는 시간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서에 등장하는 떠돌이를 조상으로 하는 히브리인들의 역사관의 영향이라고 하겠습니다. 서양에는 시간과 관련한 금언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금이다. 시간은 화살같다. 우리말에는 황금을 돌같이 여기라는 말은 있지만, 시간을 복과 연계시키는 말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코리아타임이라는 말도 생겨났고, 복을 받겠다고 여러분이 교회에 오지만 예배 시간을 지키는 모습 속에서도 이런 생각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을 복이라고 여긴다면 예배 시간에 늦을 수는 없지요. 우리는 복을 시간이 아닌 물질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거나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가능하면 물질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시간이라는 현존성에 충실하는 일, 곧 자기 깨어있음이 진정한 복이요, 행복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예수께서 재물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은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재물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재물을 하느님 자리에 올려놓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바로 섬기면 재물을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재물을 섬기면 하느님도 사람도 사라지고 오직 재물만이 남게 되고 그는 결국 재물의 주인이 아닌 재물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SK재벌의 회장 부회장 형제가 수백억원을 부정한 방식으로 모으다가 4년 형을 선고받고 구속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평생 사용해도 다 쓰지 못할 돈을 이미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부정한 방식을 선택했던 것은 삶은 수단이 되고 돈이 목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시간이 목적이고 물질이 수단인데, 이게 전도된 것입니다. 곧 돈의 노예가 되어 더 많이!를 외치다가 종말을 맞이한 것입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탐욕과 허황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계열사 자금을 동원해 죄질이 불량하다. 일확천금 획득을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 사회적 책임과 윤리가 중요한 기업에 대한 신뢰를 저해하고 경제의 근간을 흔들어 엄히 처벌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악령 들린 자의 모습입니다. 숫자의 차이만 있지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새로운 가치]

 

프랑스의 세계적인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존재하는 유일한 보편적 가치는 돈입니다. 우리는 다른 보편적 가치, 사적이 이익에 대항하는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야 합니다. 내가 철학을 통해 주체와 진리에 대해 이야기해온 것은 이런 보편적 가치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전투였습니다.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야 합니다. 새로운 생각없이 새로운 세계는 없습니다.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는 젊은이들에게 시장에서 소비자가 돼라는 것 이외에는 어떤 가치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 내 생각에 다른 가치는 다른 형태의 집단적인 삶에 있습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인 개인주의, 이기주의에 반하는 가치를 찾아 살아가야 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오늘 천국과 지옥의 틀을 이용하여 부자와 라자로의 삶을 이야기하는 예수님 또한 로마제국이 주도하는 더 크게! 더 많이! 라는 개인주의적인 자본주의 가치에 대항하는 새로운 가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가치, 이는 곧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고 성문 밖 낮은 자리에로 나아가는 십자가의 가치인 것입니다. 소외된 자, 차별받는 자들과 함께 사시면서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세계를 바라는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 하지 말고 낮은 자리에 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범을 보이신 것은 다 로마제국을 대신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최근 남한을 방문한 바디우는 앞으로 건설할 통일 한반도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남한, 통제된 사회주의의 북조선도 아닌 새로운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 금융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는 정말 절망적이지만, 우리는 이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희망을 가져야 한다. 절대로 절망을 선전하는 프로파간다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2천년 전 십자가 처형 뒤에 절망하여 귀향하는 엠마오 제자에게 나타나신 부활 예수의 말씀과 같습니다.

 

예수가 로마에 의해 처형당한 뒤 바울은 로마제국과 정면 대결하는 민중적 방식을 버리고 인간의 내면화 과정을 통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하는데, 그중 하나가 사랑하는 아들 제자 디모테오에게 보낸 오늘의 말씀입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종교가 크게 유익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이 그대는 이런 것들을 멀리하고 정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시오. 또 착한 일을 하여 선행을 풍부히 쌓고 있는 것을 남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라고 하시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미래를 위하여 기초를 쌓아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라고 이르시오.”

 

별다른 설명이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가 이 말씀에는 아멘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래 인생은 공수래공수거야 라고 말을 하지만, 예배가 끝나고 문밖만 나서면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성서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오늘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천국지옥 얘기를 들었으면서도... 우리는 천국행이 보장되어 있는 거지 라자로의 길을 선택하기 보다는 거의 대부분이 비록 지옥행이 된다하더라도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부자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혹 나는 아니다 나는 그래도 라자로의 길을 선택하겠다는 분 계시면 손을 들어 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지금 걸어가는 삶의 길을 바꾸라고 얘기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 아브라함 할아버지의 얘기는 그대로 진리인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가는 사람이 적다.’ 수십 번 수백 번 듣지만, 여전히 우리는 우리 앞길에 좁고 험한 길과 크고 넓은 두 길이 놓여 있다면 크고 넓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19세기 미국의 기독교 사상가인 채닝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어떤 큰 악에서 해방시켰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지옥에서, 내세의 형벌에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대답에서 볼 수 있듯이 구원이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 할 지옥은 자기 밖에 있는 지옥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지옥이다. 우리에게는 지옥의 형벌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 그것은 신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 곧 동물적인 욕망에 자신을 내어맡긴 정신 상태, 신을 눈앞에 보면서도 인간의 위협과 분노를 두려워하고, 자신의 선을 의식하는 조용한 기쁨보다 세속적인 명예를 좋아하는 정신 상태이다. 인간에게 그 이상의 파멸은 없다.”

 

뜨거운 불이 있는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악행을 저지른 악인들이 가는 죽음 이후의 장소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영혼이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좁은 야욕의 세계 속에 갇혀서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보지 못한 채, 인생을 채 바퀴 돌아가는 눈 먼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인 것입니다.

 

이제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입니다. 우리 인생의 겨울을 바라보며 나 자신의 가을을 돌아보는 성찰의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이라는 시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