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청지기의 현명한 판단

8:18-9:1; 79:1-5, 9 딤전 2:1-7; 16:1-13

                                                                                                                                           루가복음 161절로 13절까지의 청지기 비유만큼 다양한 해석과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씀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그는 불의한 청지기로서 해서는 안 되는 부정한 일을 행했는데, 그게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칭찬을 받고 있어 논리상 모순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우리가 너무 깊이 자본주의 사고방식에 젖어 있기 때문이고, 셋째는 이야기 말미에 비유의 결론으로 덧붙인 구절들이 일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 신도들에게 있어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비유입니다.

 

우선 이 비유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2천년 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당시에는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있었고, 귀족과 노예라는 계층이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빈부격차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목자 없이 떠돌아다니는 5천명을 먹이시고 4천명을 먹이신다는 얘기는 예수의 기적 능력을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세금으로 인해 이를 견딜 수가 없어 집을 떠나 유랑하는 무리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 미국이지만, 동시에 빈부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 또한 미국입니다. 그리고 2위가 우리나라입니다. 미국은 그래도 복지정책을 통해 이를 메꿔가고 있지만, 남한은 여기에 허점이 너무 많아 자살자가 세계 1위입니다. 보이지 않는 유랑민들입니다. 계속 이 상태로 가다가는 언젠가는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청지기와 빚 진 자들의 사회적 위치]

 

우리나라에도 땅 부자들이 있어 땅은 시골에 있지만, 사는 곳은 서울 중심이듯이 2천년 전 당시의 땅 부자들 또한 땅은 갈릴리에 있었지만, 살기는 예루살렘에 살았습니다. 교통이 쉽지 않았으니 도시에 사는 부자는 믿을만한 사람을 청지기로 임명하여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겼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을 대신하여 땅을 소작인들에게 빌려주고 추수 때에 수확물을 소작료로 받아 이를 판매함으로 재산을 증식시켜 나갔고 필요에 따라서는 은행과 같이 돈을 빌려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뇌물을 받는 등 약간의 부당 이득을 취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인의 귀에 이 청지기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어떤 형식으로 낭비를 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해고당한 후에 먹고 살 일을 걱정하는 것을 보면 주인의 재산을 착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술을 좋아했는지 아니면 도박에 정신이 팔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좋지 않은 소문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쓰인 소문이 났다는 그리스어는 diaballein 인데 이는 악의를 갖고 속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소문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에 대해 악한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 소문을 퍼뜨린 것입니다.

 

위록지마라고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말을 반복하면 주인은 그를 의심하게 되고 작은 의심은 큰 의심을 낳기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사이에 확신범이 되고 그래서 거꾸로 매달아 주머니를 털면 최소한의 먼지는 나는 법입니다. 그게 권력의 눈 밖에 난 사람을 언론을 통해 처리하는 방식입니다. 주인은 모월모일까지 맡은 일을 다 청산하여 다른 청지기에게 넘겨줄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자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땅을 파자니 나는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해서 못하겠구나.’ 여기서 땅을 판다는 것은 농부의 일이 아닌 광산에서 하는 일을 말하는데, 이는 노예가 하는 일이었기에 적어도 글깨나 아는 사람으로 동네에서 잘 알려진 재산관리자로 일했던 자기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빌어먹는 일도 그러했습니다. 집회서에는 빌어먹는 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들어라, 너희는 남에게 구걸을 하지 말아라. 빌어먹고 사는지 차라리 죽어라. 남의 식탁을 기웃거리는 사람은 제대로 산다고 할 수가 없다. 그는 남의 음식으로 자기 영혼을 더럽힌다.”(집회 40:28-29) 해고에 직면한 청지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음 직전의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자 한 꾀가 생각이 납니다.

 

기름 백 말과 밀 백 섬을 빚지고 있는 두 사람을 부릅니다. 이들은 단순한 농사꾼이 아닙니다. 기름 백말은 천 데나리온, 그리고 밀 백 섬은 2,5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큰 돈입니다. 그냥 숫자로 환산을 해도 각각 1억원, 이억오천만원인데, 이를 가치로 환산한다면 이보다 훨씬 많은 큰 금액입니다. 그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주인은 대기업의 회장, 이들 또한 중소기업 사장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10%미만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들은 사회의 지도계층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청지기는 기름 백 말을 빚진 사람에게는 오십 말로 고쳐 쓰도록 하고 밀 백 섬을 빚진 사람에게는 80말로 고쳐 쓰도록 합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가 갖는 첫 번째 질문은 왜 한 사람은 50%를 감해주고 다른 한 사람은 20%만 감해주는 차별이 일어난 것일까요? 사실 여기에도 이 비유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숨어 있습니다. 만약 이 청지기가 자신의 친분도에 따라 그런 차별을 했다면 지금 이 청지기는 위험을 스스로 부르는 어리석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20%만 탕감 받은 이 기업가가 다른 기업가에게는 50%나 감해준 사실을 알았다면 당연히 이 사람은 차별에 반발을 할 것이고 이 부정을 주인에게 고자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경제구조를 보면 이는 정당한 계산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기름은 올리브기름을 말하는데, 올리브기름은 상할 염려가 많았기에 이를 매입할 때에는 일어날 손해를 미리 계산해야 했습니다. 이는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짧은 우유나 빵에 붙이는 이익률과 유통기한이 긴 라면이나 쌀에 대한 이익률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당시 물건을 구입할 때, 기름에 대해서는 50%의 이익, 밀에 대해서는 20%의 이익을 자본가가 남기는 것이 통상적이었던 것입니다. 이 수치는 자본가의 폭리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두 가지 사회적 기준]

 

그런데 이 사실을 주인이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청지기를 고발하거나 함께 공모한 이 두 사람을 고발하지 않고, 오히려 청지기의 약삭빠름에 대해 칭찬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분명히 주인은 손해를 입었는데, 그것도 큰 손해를 입었는데, 왜 그는 불의한 일을 고발하지 않고 칭찬을 하였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자본주의 사고방식에서 생각하면 청지기와 두 상인들은 빚을 줄이는 문서 위조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2천년전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었고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그걸 범죄 행위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백성들은 그 청지기 일을 잘 처리했구만 하고 박수를 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사회는 로마제국이 운영하는 형법민법상 사회법제도가 있었지만, 동시에 유대인들은 모세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신앙의 경제 구조 또한 함께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2장에는 너희 가운데 누가 어렵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 주게 되거든 그에게 채권자 행세를 하거나 이자를 받지 말라. 만일 너희가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고,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 겉옷뿐인데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호소하면 자애로운 나는 그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레위기 25장에는 너희 동족 가운데 누가 옹색하게 되어, 너희에게 의탁해야 할 신세가 되거든, 너희는 그를 몸 붙여 사는 식객처럼 붙들어 주고 함께 데리고 살아라. 너희는 그에게서 세나 이자를 받지 못한다. 너희는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런 동족을 함께 데리고 살아야 한다. 너희는 그에게 이잣돈도 놓지 못하고, 그에게 양식을 장리로 꾸어 주지도 못한다. 나 야훼가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어 너희의 하느님이 되리라.”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모세 율법은 특히 가난한 자에 대한 자비와 사랑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가족같이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족에게 이자를 받지 않듯이 이자를 받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안식년 제도를 두었고,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은 희년이라 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은 모든 빚을 탕감하고 종들에게도 자유를 주도록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요즘 동양에서의 환갑이라는 말도 성서의 희년과 같이 본래에는 그런 자유와 해방의 뜻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봅니다. 혹 여러분이 책을 보다가 여기에 관련한 글을 찾게 되거든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탈취한 재물과 노예로 나라의 부를 키워간 로마의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청지기와 두 상인이 함께 도모한 행위는 사회적 범죄에 해당하지만, 당시 토라라 불리는 모세 율법을 또 하나의 법규로 갖고 있었던 유대인들 입장에서 본다면 실상 불의한 청지기가 탕감해준 분량은 자본가가 취하는 이익 달리 말하면 이자분에 해당하는 액수였으니 이자를 받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킨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벌인 주인이 이를 알았으면 최소한 잃어버린 재산에 불쾌해야 하는데, 이 청지기를 칭찬했던 것일까요? 예나 지금이나 재벌들은 돈이 생명이기에 자그마한 돈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습니다. 부정한 방식이라 하더라도 돈이 될 수 있다면 이를 택하는 것이 재벌들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길을 걸어왔다면 그는 결코 재벌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벌들이 저지르는 부정한 일들을 자주 보면서 왜 저럴까? 뭐가 아쉽다고 저런 부정을 저지를까? 하고 혀를 차기도 하고 의문을 갖지만, 그게 그 사람들이 걸어온 길이었고, 그 길이 아니면 자신의 부를 키워갈 수 없기에 그러다가 가는 게 그 사람들의 인생인 것입니다.

 

[뜻밖의 반응의 이유는?]

 

그러면 왜 주인은 청지기와 두 사람이 저지른 부정한 일을 알았으면서도 이를 고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칭찬을 한 것일까요? 주인이 그들을 법정에 고발하면 아마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잃을게 있습니다. 그건 지독한 수전노라는 사람들의 평가이자 사회 여론입니다. 두 상인은 청지기가 문서를 고치라고 할 때, 그건 주인의 뜻이라고 생각했지, 자신들이 공범자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 얼마 때문에 형을 살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주인의 너그로운 자비에 대해 이미 떠벌리고 다녔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은 주인은 이를 되돌릴 것은 너무나 엄청난 손해였습니다. 왜냐하면 부자에게 중요한 것은 돈에 못지않게 명예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이 생명과도 같은 돈을 기부하는 것은 바로 명예가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돈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금전상 손해를 보긴 했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명예를 대신 산 것입니다. 그 또한 이자를 받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청지기는 주인의 명예를 높여주는 일을 했고, 동시에 이자를 받지 말라는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도록 도왔고, 게다가 그는 자신이 어려울 때 자기를 도와 줄 친구를 마련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 이야기에는 불의한 청지기의 약삭빠름에 대한 칭찬이 주제가 되고 있지만, 실상 이 비유 이야기가 암시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생존을 위해 이자제도는 없어져야 한다는 하느님의 경제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는 로마제국의 기반을 뒤흔드는 일이기에 함부로 내세울 수는 없는 일이지요. 지금 우리가 아무리 자유를 외쳐도 이런 얘기를 함부로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당장 반자본주의자, 사회를 혼란시키는 빨갱이로 몰리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와 이슬람식 경제체제]

 

지금도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어 은행이 성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이자놀이를 하는 금융기관의 장들이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받고 거기에 주식 옵션까지 얹어 받고 있는 최고의 연봉자들이 되었는데, 회사는 망해도 그들은 수십 수백억 원의 거부가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오바마대통령도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금융자본가들의 전횡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보지만, 이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가 없는 것이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근본 시스템을 건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상은 이를 건들어서 잘못된 것을 고쳐야 되는데, 이미 그 시스템에서 갖가지 이익을 누리고 있는 권력과 자본의 기득권층과 맞서다가는 자신 또한 희생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이상을 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은 바보처럼 여기에 맞서다가 미움을 받았고, 그래서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오자 갖가지 모함에 걸려 자살을 택했지만, 따지고 보면 기득권층에 의해 살해당한 셈입니다.

 

여러분 이자가 꼭 필요한 것일까요? 전세는 매년 꼭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까? 물가는 꼭 올라가야만 하는 것입니까? 이자가 없으면 경제가 이루어지지 않나요? 가족끼리는 이자 없이 돈을 빌려주고 있지 않나요? 대부분의 정부가 돈을 빌려가며 국가사업을 벌입니다. 세금을 거둬도 그보다 더 많은 예산을 세우고 지출합니다. 매년 적자가 누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지출하는 이자만도 엄청납니다. 개인도 이자가 넘쳐나면 파산을 합니다. 그런데 국가는 공채니 국채니 하는 종이쪽지를 통해 이를 피해가고 있습니다만, 경제학자들은 이 또한 결국은 국가파산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고 이것이 자본주의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오늘날 북한을 포함한 이슬람권과 대결하는 미국을 중심한 서구의 대립 상황을 자유냐? 독재냐? 하는 정치 이념의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고, 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적인 경제시각에서 바라보면 이해가 훨씬 쉽게 됩니다. 과거 미국의 침략을 받아 정권이 무너진 이락, 리비아,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현재 미국의 지원으로 위태위태한 내전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이집트와 시리아 등은 그들이 이슬람 국가이기에 이런 일을 겪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자본주의 체체에 반하는 일종의 이슬람의 가르침에 근거한 사회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기업을 국유화하고 국민들에게는 골고루 복지 혜택을 나누어주는 방식을 선택했던 나라들입니다. 같은 이슬람 국가라 하더라도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인 국가는 독재를 행해도 건들지 않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적인 경우이고 무르시 정권 이전의 이집트가 그러했습니다.

 

왜 미국은 북한을 그렇게도 미워하고 대화를 끝까지 거부하며 무릎을 꿇을 것을 요구하는가? 왜 미국은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반대하는 반군에게 끊임없이 무기를 제공하고 화학무기 사용이라는 죄를 씌워 아사드 정권에 치명적인 손실을 가져오는 미사일 폭격을 시도하였는가? 왜 미국은 이집트가 정상정인 선거 절차에 의해 선출된 무르시대통령을 축출하도록 이집트 군부를 조종하였는가? 단순히 한 나라의 대통령이 누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미국을 움직이는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거세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은 미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들 또한 자신들이 그러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자본주의의 현대 사회는 인간을 매우 교묘하게 엮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왜 남한의 군부는 한반도와 같이 작은 땅에서는 전연 필요도 없는 공중급유기를 구입하는 것이고, 제 기능도 발휘할 수가 없는 신형전투기를 8조원이나 들여 구입하려고 하는가? 십년동안의 운영비와 부품비를 포함하면 30조원이 넘는 엄청난 돈을 들어가며 구입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게 없으면 북한과의 전쟁에서 필패하는 것인가요? 그게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 요인이 된다면 만사를 제쳐놓고 이를 구입하지 왜 지난 2년동안 예산액을 초과하느니마니 논란거리를 제공하면서 F15 SE로 결정되는듯 하더니, 결론은 흐지부지 안개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말았는가? 지금도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데, 왜 결국 이러저런 이유를 대면서 아직 생산도 되지 않은 F35 전투기로 낙찰되고야 말 것인가? 그건 세계 자본주의라는 큰 그림에서 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무기자본은 F 35 전투기 개발에 엄청난 재원을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개발 과정의 오류와 국방예산의 삭감으로 인해 개발이 늦어졌습니다. 무기 개발 자본가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투자비를 건져내야 합니다. 만약 실패하면 그건 한두 사람의 자본가의 죽음이 아닌 잘못하면 현재의 무기생산을 중심한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과거 미국정부가 무너지는 월가의 금융기관과 디트로이트 자동차산업에 엄청난 국민의 세금을 쏟아 붓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자유경쟁이라면 이들 기업이 무너지도록 가만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게 단순히 한 기업의 도산이 아니라, 이에 연결된 수많은 기업들이 무너지는 도미노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무기자본가들과 국방부는 수단방법을 동원해서 남한을 비롯한 일본 이태리 터키 등등 미군이 주둔하는 10여개의 국가와 F35 전투기 구매 가계약을 맺었습니다. 여기에 가장 만만한 나라가 남한입니다. 이미 8조원이 넘는 예산도 서 있습니다. 만약 남한을 놓치고 나면 다른 10여 개국과의 가계약 또한 물거품이 될 소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북의 대공 미사일 방어력을 과장하여 반드시 스텔스 기술을 갖고 있는 전투기여야만 한다고 우기면 됩니다. 군사작전권을 미국이 갖고 있으니 남한은 이를 거부할 논리를 펼 수가 없습니다. 그래 하는 말이 예산이 모자란다고 그러는 겁니다. 이 말은 사긴 사야 하는데, 비행기 값 깎아달라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커미션 더 달라는 얘기입니다. 국제무기 거래에서 보통이 10% 남한과 같은 경우는 20%에 해당하는 커미션이 장성들과 정치 권력자들에게 돌아오도록 되어 있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런 계획 중에 천안함 침몰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여기에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에 드러나지 않는 더 큰 음모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침몰사고라고 했던 해경의 발표나 결코 증명할 수 없었기에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발표했던 미국방성마저 후에 침묵하고 만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F35 전투기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남의 나라 허수아비를 끌어와 하느님을 대신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왜 제가 하늘뜻펴기 시간에 이런 얘기를 드리는가? 왜 예수께서는 맨 날 비유 얘기만 하면 돈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사실 예수께서 오늘 이 시대에 이 땅에 사셨다면 분명 이런 얘기를 하셨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 제 얘기가 일간지에 실린다고 한다면 권력자들이 저를 잡아먹기 위해 눈을 부라릴 것입니다. 하긴 지금도 저를 얼마나 견제하는지 모릅니다. 외부 초청 설교를 은근히 방해하기도 하고, 저와 가까운 어떤 목사님은 최근 북 조그련의 남한 교회 지도자의 초청을 남쪽 정부가 두 번이나 불허한 것은 제가 교회협 통일위원장으로 있어서 그렇다는 얘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70년대의 국가정보원의 개인 사찰이 이미 시작한 셈입니다.

 

[두 주인]

 

오늘 불의한 청지기 비유 말씀을 마치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헷갈리지 않습니까? 세속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었기에 재물이 없어지더라도 영원한 집으로 들어간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으로 그래서 큰일을 맡길만한 사람으로 암시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게 불의한 청지기를 두고 한 말이라면 정말 헷갈립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결론지으면서 왜 앞에서는 재물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친구를 사귀어 노면 영원한 집으로 갈 수 있다고 꿩도 먹고 알도 먹을 수 있다고 하는 모순된 얘기를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보여주는 루가의 편집입니다. 루가공동체 안에 다양한 계층이 있음으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말씀,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고 한 예수의 말씀 또한 해석이 매우 어려운 구절입니다. 약다고 하는 단어는 청지기를 칭찬하는데 쓰인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세속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고 하는 이 표현은 세속의 자녀를 칭찬하는 표현법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 속한 크리스챤들은 빛의 자녀이고 교회 밖의 사람들은 세속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빛의 자녀가 세상의 자녀보다 더 지혜롭고 현명한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세속의 자녀가 빛의 자녀보다 더 약다, 재물을 다룸에 있어서는 더 현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 예수께서 언급하는 세속의 자녀와 빛의 자녀가 오늘날 우리가 구분하는 것과는 그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빛의 자녀들은 예수님 당시의 에세네파 공동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에세네파들은 세상과 격리된 자신들만의 폐쇄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는 빛의 자녀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저들의 세상과 격리된 폐쇄된 생활방식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교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에 연연하면 하느님을 저버릴 수는 있지만, 재물을 적절히 이용함으로 오히려 더 적극적인 세상과의 교통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불의한 청지기 비유 이야기는 단순히 한 청지기의 약싹빠름에 대해 말하는 비유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약탈과 착취에 기초한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부익부 빈익빈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잘못을 고발하고 있고, 고로 비록 불의한 청지기라 할지라도 그가 보여준 지혜를 통해 이자 없는 경제 체제와 재산 나눔을 실현함으로 이땅 위에 진정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라는 명령이 담겨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언제나 단순한 문학적인 비유가 아닙니다. 그건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박수를 치게 하거나 아니면 비웃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듭니다. 오늘의 비유를 포함한 지난 시간의 잃어버린 양과 은전, 그리고 두 아들의 비유를 결론지으면서 14절과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를 비웃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옳은 체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보를 다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 나는 지금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가? 불가능한 일로 여기고 세상을 따라 갈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님이 지시하시는 그 길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갈 것인지? 자신을 깊게 성찰하시면서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