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과 의인의 전복

4;11-12, 22-28; 14; 딤전 1:12-17; 15:1-10

 

루가복음 15장에서 예수께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고 하는 비유는 모두 3개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100마리의 양들 가운데 잃어버린 한 마리의 비유, 열 개의 은전 가운데 잃어버린 은전 하나의 비유,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다루지 않고 있지만 바로 이어지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세 개의 비유를 가만히 비교해보면 백에서 열로 그리고 둘로 숫자가 점점 좁아짐으로 이야기의 극적 효과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비유 이야기를 관통하는 핵심?]

 

루가복음 15장을 읽을 때에 우리가 갖는 질문 하나는 예수께서는 이 세 비유를 오늘 본문에 기술되어 있듯이 한 자리에서 연속해서 하셨는지, 아니면 예수께서 따로따로 말씀하신 것을 저자 루가가 하나로 묶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이중 하나라도 나온다면 답이 쉽겠지만, 세 개 모두가 루가만이 전하고 있기에 이를 판단할만한 신학적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께서 처음부터 연속적으로 하셨던지, 아니면 루가가 하나로 묶었던지 중요한 것은 이 세 비유의 말씀들에 공통요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 비유에는 각기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지만, 이 셋을 내적으로 연결하는 끈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한 마리의 양의 비유,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하나의 은전의 비유, 잃었다가 다시 찾은 작은 아들, 이 세 개의 비유가 갖는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서 양과 은전의 비유가 어떤 점에서 서로 연결이 되는지 생각해 보신 분이 계신가요? 적어도 오늘 예배 시작 전에 집에서 미리 본문을 읽고 오셨든지 혹은 조금 일찍 오셔서 이 자리에서 읽으셨든지 한번이라도 읽어보신 분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공부도 예습을 하면 효과가 배가 되듯이 여러분이 미리 나름대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생각해 보고, 나는 이렇게 이해하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이해하시나 뭐 그런 긴장을 갖고 있을 때에 하늘뜻펴기가 재미있어지고, 거기서 신앙이 자라는 겁니다. 어디 여행을 가도 무작정 가는 것과 미리 책이나 인터넷을 뒤져 주요 관광지와 맛집을 알고 가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집에서 본문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한 다음 오신다면 제일 좋겠지만, 바빠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주일 아침이라도 조금 일찍 오셔서 읽고 묵상하기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회사 사장인데, 출근시간 맞춰 부랴부랴 자리에 앉는 사람과 2,30분전 미리 와서 하루 일과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에게 점수를 더 주겠습니까? 우리 주님의 마음 또한 그러지 않을까요? 자기하는 모습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왜 하느님은 남은 주면서 나에게는 좋은걸 주시지 않느냐고 한탄한다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양과 은전과 아들, 이 세 비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가 오늘의 퀴즈입니다. 어떤 퀴즈에나 힌트가 있게 마련인데, 힌트는 이미 드렸습니다. 어디에 힌트가 있느냐고요? 주보에 실린 하늘뜻펴기 제목이 힌트입니다. ‘죄인과 의인의 전복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목사님, 이건 힌트가 아니라 또 하나의 퀴즈네요라고 하실 분도 계십니다만, 의인과 죄인이 힌트입니다. 첫 번째 잃은 양 비유를 마치면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이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잃었다가 다시 찾은 주인의 기쁨입니다. 그런데 다시 찾았다고 하는 것을 죄인의 회개로 설명할 때, 돌아온 탕자의 경우에는 분명합니다만, 잃어버린 양이 죄인인가? 혹은 잃어버린 은전이 죄인인가? 하고 물으면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양의 경우는 어느 정도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이 양은 목자의 인도를 따라 앞서가는 동료들을 좇아가지 않고 자기 길을 고집하다가 길을 잃어버렸거나 구덩이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전은 무생물로서 자기 잘못이 아니라, 주인의 잘못으로 잃어버린 경우라, 죄인의 회개라는 주제와는 맞지가 않습니다.

 

[사랑의 관계인가? 소유의 관계인가?]

 

그러면 이 은전의 비유는 다른 두 비유와 무슨 관계가 있어 여기에 포함된 것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은전은 드라크마를 말하는데, 값어치는 양 한 마리에 해당합니다. 그리 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열 개 중에서 한 개를 잃어버린 것이고 그게 밖에서 잃은 것이 아닌 집에서 잃었으니 크게 상심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아침에 날이 밝은 다음에 찾으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밤중에 등불을 켜고 집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다 뒤져볼 것이라고 하였고 이 은전을 찾은 기쁨에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베푼다고 했습니다. 잔치가 양 한 마리 잡는 일로 그치지 않는다면, 잔치값이 찾은 은전보다 더 돈이 많이 들 수가 있습니다.

 

곧 여기서 말하는 드라크마 은전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어떤 다른 가치가 있는 은전인 것입니다. , 이는 남편으로부터 받은 결혼 예물입니다. 일종의 결혼반지입니다. 저는 학생시절 형편이 어려워 팔고 말았습니다만, 결혼반지는 보통 죽기까지 간직합니다. 이 여인은 아마도 멀리 여행을 떠난 남편의 안전을 기도하던 중, 머리 장식품으로 지니고 다녔던 은전 열 개 꾸러미의 실이 낡아 끊어지면서 한 개를 잃어버렸고 그래서 이를 찾기 위해 애를 쓴 것입니다. 곧 은전은 단순한 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양과 은전, 그리고 아들이라는 세 비유의 공통점이 무엇인지가 잘 잡힙니다. 그건 잃어버린 것들은 주인에게 있어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사랑으로 연결된 것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지금 여기로 말합니다. 사랑은 타산적일수가 없습니다. 백 마리 중에 하나를 잃었을 때, 나는 아직도 99마리가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사랑의 관계가 아닌 소유의 관계입니다. 백기완선생이 이런 얘기를 하시더군요. 한국전쟁 중 기차 지붕 위에 수많은 피난민들이 올라앉아 가는데, 캄캄한 밤중에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있던 한 아주머니가 갑자기 우리 아들 못 봤어요? 하고 울부짖더라는 겁니다. 잠깐 조는 사이에 옆에 누워 있던 대여섯난 아들이 그만 굴러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다짜고짜 그 갓난아기를 자기 앞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덥석 맡기더니 그 달리던 기차에서 뛰어내리더라는 겁니다.

 

그 이후 얘기는 모릅니다. 둘 다 무사해서 서로 만났는지, 아니면 뛰어내리다 부상을 당했는지, 그 후에 그 갓난아기는 어떻게 되었는지 그 후의 얘기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당시 엄마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달리는 기차 지붕에서 무작정 뛰어내렸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던졌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99마리의 양을 들판에 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떠난 목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늑대가 와서 십여 마리의 양들을 헤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목자가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가의 입장이었다면 그는 분명 자신이 한 마리를 찾으러 다니는 동안 일어날 수 있는 손해를 따져보았을 것이고, 그래서 그 한 마리를 포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목자에게 있어 그 한 마리는 자신의 분신이었기에 달리는 기차 위에서 생명부지의 사람에게 갓난아기를 맡기고 무작정 뛰어내리는 엄마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참 사랑은 지금 여기에 모든 것을 거는 행위입니다.

 

[양의 심정, 목자의 심정]

 

그런데 사람들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에서 이런 목자의 심정을 닮으려고 하는 주체적 관점에서 성서를 읽지 않고, 피동적으로 읽는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으로 읽습니다. 그리곤 하는 말이 우리 교회 목사는 내가 교회에 빠졌는데도 왜 전화 한번 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 교회 목사는 잃어버린 한 마리보다 99마리 양에 더 관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한사람만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데,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한번 물어봅시다. 내가 99마리에 속한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아니면 잃어버린 한 마리라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손 안 드시는 분은 다른 우리에 속한 분들로 간주하고 등록교인 명단에서 삭제하겠습니다. 평신도교회 평신도목회 운운하는데, 여러분이 정말 평신도목회를 한다고 한다면, 이런 질문을 받을 때에 목사님 저희들은요, 99마리의 양도 아니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도 아닙니다. 양의 숫자는 많지 않지만, 저희들도 목자입니다.” 라고 답을 하셔야 합니다.

 

매주일 고백하는 향린의 신앙고백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님 안에서 정의와 평등과 평화가 이뤄짐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뤄짐을 믿습니다. 우리는 해방을 위한 주님의 선교 속에서 이뤄지는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몸과 맘 이 땅의 향기로운 이웃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는 생명의 숨결 성문 밖으로 낮은 자리로 새 하늘 새 땅으로새 하늘 새 땅이 교회 안에서 이뤄진다고 고백합니까? 아니면 교회 밖 세상 안에서 이뤄진다고 고백합니까? 우리의 이웃들이 사는 세상 안이지요. 그리고 그 이웃은 성문 밖, 낮은 자리에 있는 이웃을 말합니다.

 

물론 이 고백은 향린교회가 만들어낸 독특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갈릴리목회로부터 출발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 또한 당시 유대주류 사회에서 죄인으로 정죄 받아 구원의 대상에서 밀려나 더럽다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세리, 거리의 여인들, 병자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고, 단순히 전했을 뿐더러 저들이야 말로 다가오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주체라고, 지금은 꼴찌이지만 이제 첫째가 될 것이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돌아오지 않은 탕자]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양의 비유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가리켜 회개할게 많은 죄인으로 말했지만, 예수께서 회개할게 많은 죄인으로 말씀하시는 대상은 누구를 두고 한 말씀인가요? 지금 예수님 주위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인과 세리.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 그러면 죄인과 세리가 회개의 대상입니까? 아니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회개의 대상입니까? 이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어요. 심증이 아닌 물증을 대세요.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이 듣는다는 행위는 단지 귀로 듣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듣는, 곧 예수에게 자신의 삶을 드리는 회개를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런 모습을 못마땅해 하고 있습니다.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에게 불만입니다. 따라서 문자로 본다면 회개의 대상은 예수와 함께 하는 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지만, 이 얘기를 읽는 독자들은 실제 회개를 해야 하는 부류는 그들이 아니라,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며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손가락질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어떤 사람들일까요? 오늘날로 말하면 청와대와 국정원과 의회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의 핵심계층입니다.

 

이는 두 아들의 비유에서 더 명확하게 밝혀집니다. 이 이야기에는 한 명의 탕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명의 탕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돌아온 탕자이고 다른 한명은 돌아오지 않은 탕자입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해서 외국에 나가 이를 모두 탕진한 둘째 아들은 분명 죄인입니다. 아버지 곁에서 집안일을 담당하여 온 첫째 아들 분명 동네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이렇게 굶다가 죽느니보다는 차라리 아버지 집에 돌아가 종이라도 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첫째 아들의 진심이 밝혀집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죽었던 아들이 살아났다고 기뻐하며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벌입니다. 밭일을 하다 집에 돌아오던 큰 아들은 그 잔치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자기 동생을 위한 잔치인 것을 알자 화를 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따집니다. ‘아버지, 저를 위해서는 염소 한 마리 잡지 않으시더니 저 몹쓸 놈을 위해서 송아지를 잡다니요.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그 놈 당장 내어 쫓으세요. 그놈 집안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놈입니다.’ ‘얘야, 네 동생이잖냐? 그리고 너는 내 것이 다 네 것인데, 뭐 그리 섭섭한 얘기를 하느냐? 어서 집에 들어가 네 동생을 반겨주어라.’ ‘아니오, 싫습니다. 그건 죽어도 못합니다.’ 그리고 얘기는 끝이 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신가요? 탕진할 재산이 없어서 돌아온 탕자 되기는 글렀다고요? 사실은 우리가 이 비유 이야기를 돌아온 탕자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상 이 비유는 돌아오지 않는 탕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 이야기의 대상은 세리와 죄인들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힘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가 되어 끊임없이 죄인과 세리들을 구별해내고 이들이야 말로 사회를 좀먹는 악의 축이라고 이들을 솎아내야 한다고 외치고 있으며 끝내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맙니다. 의인과 죄인의 전복 뒤집어짐이 일어난 것입니다.

[빨갱이 논쟁]

 

1994년 청와대 주최 대학총장 모임에서 박홍 서강대 총장은 주사파 뒤에 사노맹이 있고 그 뒤에 북한의 사노청과 김정일이 있다. 내가 그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함으로 남한 사회 내에 사상 검증의 칼바람을 일으켰고, 그 이후 계속 폭탄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북한에 초청돼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한국에 돌아와 대학교수가 됐다" "1987년 이후 주사파가 15000여 명 이상 배출됐다" "종교계와 언론계 정치권에까지 주사파가 침투했고 일부 야당에 750명 정도가 암약 중이다" 등등. 특히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박홍 총장의 인터뷰를 실으면서 "학생운동 내 유사시 요인암살 등을 위한 테러조직이 구성돼 있다, 보안을 위해 점조직으로 구성된 이들은 폭력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완수를 위해 비밀훈련까지 받고 있다, 조직원을 포섭하기 위해 대학신입생들을 상대로 미인계까지 동원하고 있다" "공산당에 가입한 학생이 200~300명 정도 된다"는 주장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박 총장은 어떤 분명한 근거나 증거를 내놓지 못했고, 실제 폭력조직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저 수백 명의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을 잡아가두는 공안정국만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로 인한 당사자는 물론이요 가족들이 겪는 피눈물만 있었습니다. 박홍 그는 신부였고 총장이었기에 하느님께서는 분명 그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아니 단연코 물어야 합니다. 의인과 죄인의 전복은 어느 때나 일어나고 있습니다.

 

1946년에 위스콘신 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조지프 매카시는 경력위조, 명예훼손, 금품수수, 음주추태 등으로 사면초가로 몰렸습니다. 이 상황에서 매카시는 1950년 공화당 당원대회에서 "미국에선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나는 297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갖고 있다."고 종이쪽지를 흔들어 대자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 구소련과 핵무기경쟁과 스파이 전쟁을 하던 시기라 신문들은 그의 얘기를 헤드라인으로 삼았으며 이후 계속되는 매카시의 폭로에 신문은 떼돈을 벌었고,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덕에 매카시는 대중적인 인지도와 지지를 확고하게 늘려나갔습니다.

 

그 이후 공안바람이 불어 수천 명의 공무원, 연예인, 교육자, 노동조합 활동가 등이 조사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경력을 망쳤으며,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간첩은 한명도 나오지 않았고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도 한명도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평결은 나중에 번복되었습니다. 결국 4년이 지난 195439CBS에서 방영한 미국의 전설적인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우 기자의 <See It Now>라는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맥카시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주장했으며, 이후 미국인들은 국가안보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독재자의 방법으로 자유를 지켜서는 안된다."고 개탄했습니다. 그가 297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이 있다고 흔든 그 종이에는 실상 아무런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론이 이를 깨닫기까지에는 너무나 많은 손실과 인명 손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의인과 죄인의 전복입니다.

 

[도둑이 도둑을 지키는 세상]

 

지금 이 남한사회에 또 다시 맥카시 선풍이 불어 닥치고 있습니다. 김대중 노무현정권을 지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여겼지만, 먹고살기에 바쁘다는 핑계로 진리를 소홀리한 우매한 백성들은 여기에 다시금 동조하고 있고, 이 나라에는 또 다시 국가내란과 국가보안법의 먹구름이 짓게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나마 정신을 차린 소수의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교리에 지나치면 종교이단이 생겨나듯이 정치교리에 지나치면 정치이단아가 생겨나는데, 제가 보기에 이석기의원은 정치적 이단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130명이라고 하는 사람들, 약간의 영웅심리와 전쟁위기 공포로 인해 현실감각을 상실하고 몇 사람이 지나친 발언을 한 것입니다. 이를 국정원이 부풀려서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위기에 몰린 맥카시마냥 대선조작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국정원개혁의 촛불민심이 커지자 여기에 위기를 느껴 국가내란조작사건을 터트린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국가내란입니다.

 

여기에 채동욱검찰총장이 국정원의 조작사건의 주범으로 원세훈 전국정원장과 김용판전서울경찰총장을 고발하자 남재준현국정원장이 불법적으로 NLL 관련 비밀문서를 그것도 악의적으로 뒤틀어서 폭로하더니 이것마저 약발이 다하자 검찰총장에게 혼외아들이 있다는 악소문을 퍼트리고 이를 빌미로 결국 그 자리에서 내쫓고 말았습니다. 본인은 유전자검사까지 받겠다고 나섰습니다만 그렇게 되어 진실이 밝혀지면 이제는 역공을 받아 대선조작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국정원은 물론이요 대통령자리까지 위험하다고 느껴 황교안법무부장관을 통해 청와대가 감찰 명령을 지시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인가요? 칼자루를 쥔 쪽이 정의가 되는 불의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원했던 검찰독립이 또 다시 물 건너 간 것입니다. 도둑놈이 도둑놈을 감싸고도는 세상이 또 다시 된 것입니다. 도대체 이 땅의 정의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법정에서 찾을 수 있나요? 판사들이 바르게 하려고 해도 검찰이 기소를 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이 다 아는 도둑놈이래도 경찰이 수사를 하고 검찰이 기소하지 않으면 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경찰청장 검찰총장에게 독립권이 없으면 사법권 독립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고 국회의사당도 있으나마나 한 것입니다. 선거도 그 절차가 법적으로 보장을 받았을 때 선거 결과가 정당한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파괴이기에 그 결과에 승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 국민이 나서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6월 민주항쟁과 같이 국민들이 직접 나서서 자신들의 민주주주 권리를 지키고 정의를 바로 세우지 않는다면 이 나라가 또 다시 독재공안정국으로 말려드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저들을 빗대어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들, 제 속으로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말들 하면서, 썩은 일 추한 일에 모두 빠져서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저 악한들, 떡 먹듯 나의 백성 집어삼키고 야훼는 부르지도 않는구나.” 그리고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계속 말씀하십니다. “나도 이제는 결판을 내야겠다. 내 백성은 참으로 어리석구나. 나쁜 일 하는 데는 명석한데 좋은 일은 할 생각조차 없구나. 나는 세상을 멸망시키기로 하였다.”

 

예수는 오늘 잃었다가 다시 찾는 비유 말씀을 통해 권력자들의 회개를 촉구하셨고, 그러한 회개의 예로 사도바울은 자신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앞으로 당신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나를 본보기로 보여주시려고 먼저 나에게 한량없는 관용을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느님의 한량없는 관용과 사랑을 받은 사도 바울이 그 이후 어떤 선교 활동을 하였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는 적대자들에게 붙잡혀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사자의 위협과 파선 등으로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던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남한 사회를 향한 야훼 하느님의 심판의 분노는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향린인들은 지금 정의가 침몰하고 약자들이 어쩌지 못해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 분명하게 깃발을 들고 하느님의 평화의 복음을 외쳐야 할 것입니다.

 

한 교우께서 히틀러 나찌 독재시대에 처음에는 침묵하다 후에 저항하다 고초를 겪은 니뮐러목사님의 기도를 우리 상황에 맞춰 이렇게 바꾸었더군요.

 

안기부가 빨갱이를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국가 안전이 위협 당한다니까.

 

중앙정보부가 운동권 학생들을 가뒀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주사파가 아니었으니까.

 

경찰이 노동자를 잡아갔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과격한 투쟁에 동의하지 않으니까.

 

국정원이 이석기를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그는 너무 많이 나갔으니까.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누구든 잡아가야 하니까.

 

오늘이 한가위감사주일입니다. 본래 한가위는 단순히 조상제사를 위한 종교적 명절이 아니라, 씨족 마을의 모든 구성원들이 한 조상을 가진 한 가족임을 깨닫고 가진 것을 나누는 공동체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 아니라 재산을 나누는 절기였습니다. 성서로 말하면 희년실천의 날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에는 수많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고통스러운 사람은 하느님의 의를 위해 일하다 불의한 권력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억울한 사람들입니다. 국정원이 조작한 내란음모사건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가족들, 아내들과 자식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어떤 아내는 자고 일어났더니 자동차 유리에 빨간 페인트로 빨갱이라고 표시를 써놓았다고 하더군요. ‘빨갱이몰이의 희생자들, 저는 이 한가위에 그분들이 위로받는 절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인과 의인이 전복되는 세상, 그게 새 하늘 새 땅 곧 우리가 기도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