뜯어 고쳐라

시편 139,1-6, 13-18; 예레 18,1-11; 필레 1-21; 루가 14,25-33

한 문 덕 목사

[누가 무엇을 뜯어 고쳐야 하는가?]

오늘 우리가 다함께 읽은 예레미야의 말씀 “그러니 너는 이제 야훼의 말이라 하고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시민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는 너희에게 내릴 재앙을 옹기장이처럼 마련하여 두었다. 너희를 벌할 계획을 이미 꾸며놓았다. 그러니 모두들 악한 길을 버리고 돌아오너라. 너희 행실과 소행을 뜯어고쳐라.’” 특별히 마지막에 “모두들 악한 길을 버리고 돌아오너라. 너희 행실과 소행을 뜯어고쳐라”를 읽으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유다 백성 대신 대한민국 국민에게, 예루살렘 시민 대신 서울 시민에게 야훼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면 우리가 버려야 할 악한 길은 무엇이며, 뜯어 고쳐야 할 행실과 소행은 무엇일까요? 예레미야를 통해서 들려지는 하늘의 소리가, 진실과 공의의 그리고 생명의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백성들의 삶과 생명보다 애굽과 바벨론의 눈치를 보며 제 이익을 탐했던 유대 지도자들을 향한 경고의 소리라면, 오늘 이 소리를 가장 먼저 들어야 할 이들은 누구일까요? 지금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일까요? 아니면 이런 여론몰이를 통해서 자신의 죄악을 숨기고 적반하장을 통해 살아남으려는 국정원일까요? 기득권 편에 붙어서 사실을 전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눈치를 보며, 또 다른 권력을 휘두르며 제 입맛에 맞는 보도를 하는 보수 언론일까요?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선거에 활용한 적도 없다”고 뻔뻔스럽게 말한 박근혜 씨에게는 이 구절 또한 자신과 상관없는 남의 얘기로만 들리겠지만, 오늘 성서의 말씀은 “모두들 악한 길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말하고 있기에 우리 사회 전체를 생각하며 고민하게 됩니다.

왜 우리 사회는 소통의 시작점이 되는 합리적 의심을 갖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게 되었을까? 최근 <천안함 프로잭트>라는 다큐멘타리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외부의 압력으로 상영을 중단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번 국정원 조사에서 나온 CCTV의 수사관들의 대화를 여러분도 보셨겠지만, 왜 많은 이들은 눈앞에 보이는 뻔한 거짓말에 대해서도 못 본 체 하며 침묵하게 되었을까?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다가도 마구잡이 색깔 공세와 북풍 몰이에 쉽게 걸려드는가? 이승만을 영웅으로 묘사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는 교과서가 등장해도,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와 같은 사이버 공간에 쓰레기 글들이 넘쳐나도, 제 먹고 사는 것에만 몰두하다가, 그래서 지친 영혼을 TV의 예능 프로그램으로 달래며 하루하루 살게 되었을까? 대다수의 아빠들은 자신의 역할이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며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아이들은 아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데 왜 부모와 아이들은 동상이몽으로 살아가게 되었을까? 이제 먹고 살만하고, 명품들도 넘쳐나고, 세계를 선도하는 자리에 가끔 우리나라가 선다는 데 왜 자살률은 제일 높은 걸까?

[창조신앙과 사회와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

교우들 중에 어떤 분은 오늘의 예레미야의 본문을 앞뒤로 찬찬히 읽다가 또 다른 종교철학적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옹기장이가 자신의 뜻에 따라 그릇을 빚어내듯이 하느님은 우리들을 자신 맘대로 하신다는 이야기인가? 하느님의 주권 앞에 인간의 자유는 뭐란 말인가? 시편의 구절대로 나를 지으셨으니 속속들이 나를 아실 것이고, 내 형상이 생기기 전부터 나를 보고 계시며, 모두 당신 책에 기록하신 것처럼 모든 것이 정해진 것이라면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하고, 그렇게 만드신 하느님의 꿍꿍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래서 오늘날, 늘 나를 감시하고 그러다가 당신의 율법을 어기면 벌을 내리는 무시무시하고 심술꾸러기 같은 하느님을 떠나 더 이상 종교 그 자체가 의미 없고 필요 없다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는데, 오늘 향린교회 한문덕 목사는 이 구절을 가지고 뭐라 말할까?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인간의 노력이 좌절되고 거대한 폭력 앞에서 늘 절망하게 되는 역사적 경험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이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창조신앙을 통해 모든 우상을 타파하는 힘을 얻을 수 있고, 제 교만 때문에 제 발등을 찍는 피조물 인간의 어리석음을 성찰할 수 있으며, 내 마음 나도 모르는 부족함에서 오는 불안과 염려를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기자가 찬양하고 있듯이 나의 모든 것을 나보다 더 많이 아실 정도로 나와 친밀한 그 분은 정의와 사랑과 평등의 하느님이기에 그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우리는 불의와 증오와 차별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전달한 오늘의 말씀의 핵심도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여 하느님의 주권을 실현하겠다는 맥락이 아니라, 인간의 행실을 성찰하여 모든 생명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쁨의 삶을 충분히 누리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불의를 행하여 악과 폭력을 증가시키는 행위에서 되돌아서기만 한다면 하느님도 자신의 마음을 바꾸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못했기에 불의에도 분노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으신 하느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저는 예레미야의 이 구절을 다시금 우리들을 성찰하는 계기로 읽고 싶습니다. 위에서 던진 질문들, 우리 사회의 모순들과 그 사회 속에서 살다 보니 겪을 수밖에 없는 답답함, 억울함, 고통, 슬픔 등에 대해, 어떻게 하면 그 덫에서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을 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여러분과 함께 머리 맞대고 고민하고 싶은 것입니다. 서로 모여 고민하다 보면, 손발을 놀려 함께 애쓰며 노력할 일도 생기고, 때론 싸움도 해야겠고, 또 그렇게 해야만 지금보다는 더 나은 세상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자세와 방법]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두 가지를 진지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확고한 결단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그 결단을 실행하는 방법과 자세의 문제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야 하는데,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 심지어 자기 자신보다 예수를 더 우선시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경남에 그리스도교 정신에 따라 세워진 거창고등학교에는 직업 선택의 십계라는 것이 있는데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직업선택의 십계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춰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다투어 모여드는 곳에는 절대 가지마라. 아무도 가지 않은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취업준비생들에게 이 계명을 보여주면 얼마나 동의할지는 모르지만 그의 가족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특히 아홉번째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는 계명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거짓과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정의와 진실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고통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좋은 세상이 되기를 바라고 애쓰는 사람은 고통을 무릅쓰고,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연한 자세로 무던히 그 길을 가야합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은 자신의 광채를 드러내는 천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사도이기 때문이며(키에르케고르), 주님은 우리들에게 성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애쓰는 노력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마더 테레사).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성공했을 때만 기쁜 것이 아닙니다. 실패를 한다 해도 좋은 세상을 이루기 위한 노력 그 자체에서 오는 기쁨이 있고, 그런 노력을 통해서 인간으로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하는 이유와 삶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보람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이어지는 두 개의 비유 말씀은 결단을 내릴 때, 그리고 그 결단을 내려서 행동을 실행에 옮기려고 할 때, 차분히 앉아서 꼼꼼히 따져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험을 감행하기에 앞서 상황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해야 하고, 적절한 자원을 마련해서 만반의 태세를 갖추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뱀 보다 더 교묘하고 교활한 기득권자들의 정치 놀음과 모략에 맞서 대항하려면 우리 또한 그네들 못지않은 지혜와 바른 상황 판단, 준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위험을 감수하며...]

오늘 서신의 발신자인 바울은 예수를 만나 자신의 모든 정치적 삶의 방향을 180도로 바꾸었고, 삶을 마칠 때까지 로마제국의 악에 맞서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싸웠던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가 필레몬(19절)에게 보내는 편지는 한 장밖에 안되고 25절로 이루어진 짧은 편지이지만 오늘 우리들의 고민에 한 실마리를 던져주는 표지판이 됩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생생함과 역동성을 변질시켜 제도화하고 신학화하였다는 혐의를 늘 받고 있는 바울이지만 바울의 후예를 자처하며 바울을 그렇게 만든 이들과 역사적 바울을 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과 마커스 보그라는 학자가 함께 지은 <첫 번째 바울의 복음>이라는 책에서는 바울을 “급진적인 바울”, “보수적인 바울”, “반동적인 바울”로 구분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원래 급진적인 진보성향의 인물이었는데,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그를 보수적인 인물로 왜곡시켰고, 더 나아가 전혀 바울 같지 않은 반동적인 바울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 대해 이렇게 구분해서 보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울 사도가 예수와 달리 교회를 위해 애쓴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 전체의 변화를 위해 운동을 하셨다면 바울은 그 운동 때문에 로마제국 내에 여기저기에 생겨난 모임 즉 “교회”를 통하여 그 운동을 계속하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에 대한 오해도 생기게 되고 분석도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이 직면했던 현장, 그 현장에 뛰어들어 그의 고민을 깊게 살펴보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장의 고민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사건 자체는 달라도 그 사건을 이해하고 처리하는 기준과 방법, 태도와 자세, 그리스도인의 가치관 등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바울이 필레몬과 그의 집에 모이는 가정 교회 공동체에게 보내고 있는 이 한 장의 편지를 통해 그것을 살펴보려 하는 것입니다. 이 편지에는 그리스도인 한명의 노력이 교회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변혁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편지의 내용은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필레몬의 집에서 일하고 있던 오네시모라는 가사노예가 있었는데 뭔지는 몰라도 그가 그의 주인인 필레몬에게 손해를 입히고 도망쳐서 바울에게 왔습니다. 바울은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키고 그를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신앙적 동지, 사랑하는 교우로 받아달라고 요청합니다. 제3자적 관점에서 그냥 편지를 읽으면 별로 느낌이 살아나지 않을 수 있으니 우리 모두 상상력을 발휘하여 1세기 중반 로마로 날아가 봅시다.

오늘 한국의 경제적 발전이 수많은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노동착취라 말해야 하는 희생으로 가능했고, 오늘날도 전체 근로자의 50%를 왔다갔다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사회가 지탱되고 있듯이, 1세기 로마는 그 전부터 노예의 노동으로 문명을 이끌어 왔던 제국이었습니다. 물론 전쟁이 그치고 노예시장이 대폭 줄어들면서 1세기 중후반이 되면 노예값이 상승하고 노예를 구하기가 어려워지지만 노예제도는 로마사회의 틀을 유지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오늘 필레몬서를 읽을 때 우리는 바로 이러한 상황인식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필레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8-9절). 심지어 오네시모가 필레몬에게 끼쳤을 손해에 대한 배상도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하고(18-19), 필레몬이 바울 사도를 동지로 여긴다면 오네시모를 맞이할 때 바울을 맞이하는 것처럼 맞이해 달라고 합니다. 필레몬서를 꼼꼼히 읽어보면 필레몬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쓸 때 바울이 얼마나 고민했는지, 바울의 부탁이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는지, 필레몬이 이 편지를 읽고 거절하기는 무척 힘들겠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처럼 바울은 비용을 따져보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편지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써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는 주 내용이 필레몬에게 당부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4절 이하), 이 편지는 필레몬 뿐만 아니라 그의 가정에 모이는 교회공동체 전체가 함께 낭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필레몬에게 부탁하는 내용을 교인들 전부가 알게 되는 것이고, 필레몬은 자신의 선택이 공동체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다른 편지들과 달리 바울은 첫 구절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갇혀 있는 나 바울”이라고 소개하는데 이것 또한 은연 중에 필레몬을 압박하는 용어가 됩니다. 바울 사도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조차 감당하는데 필레몬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바울의 구금 상태는 면회도 가능하고 심지어 함께 감옥에 함께 살면서 돌보아 주는 일도 가능했습니다. 어쩌면 23절에 함께 갇혀 있다고 한 에바프라는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실을 필레몬이 안다면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필레몬은, 권력을 가지고 남을 박해하던 자에서 박해를 받는 자로 즉 권력자의 편에서 권력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편으로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던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필레몬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당시 권리 없는 자들, 삶의 터전에서 뽑힌 사람들, 사회적 모든 권력관계에서 배제되어 있는 자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한편으로 바울을 도와 바울의 선교에 동참하고 후원해야 함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필레몬이 자신의 스승이자 영적 아버지로 여기는 바울의 간청을 거절하기란 무척 힘듭니다. 특히 바울은 오네시모를 부탁하기에 앞서 필레몬의 신앙과 필레몬이 성도들을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칭찬을 하고 있는데, 칭찬을 듣고 난 후에 바로 이어지는 부탁을 거절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자신이 시도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해 수사학적 표현법을 동원하여 필레몬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필레몬에게 일체의 강요나 명령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필레몬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 이제 오네시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해 주고 그 숙고의 결과에 따라 자유로운 결정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 바울이 극진히 편지를 써야 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바로 이 문제는 단순히 필레몬 개인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렸듯이 노예제도에 기반한 문명! 바로 거기에 균열을 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노예제도는 바로 제 일을 자기가 하지 않고 남을 부려서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일을 남을 시키지 않고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늙어서도 자손들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고 만져주는 것을 바라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집집마다 손자들을 보고 몸을 쳐 달라지만 제 손으로 몸을 움직이고 만지고 쳐서 피를 돌려야 합니다. 제 손발이요 제 몸인데 왜 남에게 시킵니까? 늙어도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 제 혼자 맘대로 일어나고 앉아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제 힘으로 제 일을 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오늘날 노동자의 피땀 어린 노동력으로 배를 불리는 기업주들이나, 국민의 혈세를 거둬서 제 이익을 챙기고 권력을 누리는 권력자들은 여전히 노예에게 하듯이 노동자들과 국민을 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면 그들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노예제도에 기반하여 세워진 문명 속에서 지금 한 그리스도인 집안의 노예가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갔는데 이를 다시 받아들여 주는데 노예가 아니라 동등한 자유인으로 특별히 사랑하는 교우로 받아 주는 것은 당시의 생활양식과 사고습관이나 모든 것에서 보았을 때 매우 혁명적인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필레몬이 바울의 편지를 받고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교우로 받아들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필레몬의 집에 남아 있던 노예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들도 모두 도망가서 바울을 찾아가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필레몬에게 자유를 요청하지 않았을까요? 필레몬이 오네시모를 받아 준 사례가 노예들 사이에서 퍼졌을 때 노예들은 어땠을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노예들을 신앙 안에서 동등한 교우로, 자유인으로 풀어 주었을 때 노예노동 덕택에 살아가는 노예주인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어떻게 대했을까요? 내란음모까지는 아니겠지만 사회의 불순세력으로 여론몰이를 하지 않았을까요? 과연 필레몬이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잠깐 샛길로 새겠습니다.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일은 필레몬에게 매우 어려운 결단이었지만 오네시모가 바울의 편지를 들고 필레몬에게 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을 동반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필레몬이 바울의 편지대로 하지 않으면 당시의 법에 의해서 도망간 노예에게 행해지는 매우 심한 형벌을 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네시모 또한 바울 덕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 믿음으로 필레몬에게 갑니다. 또 바울은 어땠을까요? 도망간 노예가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찾아온다면, 로마의 노예법을 어긴 사람이 로마의 제국 어느 곳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찾아온다면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기쁜 소식일까요, 나쁜 소식일까요? 바울이 오네시모를 만나 그와 함께 지내는 것 또한 바울에게는 위험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노예제도에 균열을 내는 일은 그 당사자들 모두에게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 오네시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골로새서에 보면 오네시모가 바울의 동역자로 일했던 것을 추측할 수 있는 구절이 등장합니다(4:9). 이 편지가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필레몬은 바울이 바랐던 그 이상의 일(필레 21) 즉 바울 곁에 오네시모를 머물게 하여 그와 함께 동역자로 선교의 사역을 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초기 전승에 따르면 오네시모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됩니다(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가 2세기 초에 에페소에 보낸 서신). 주인과 노예의 관계 속에서 쓸모 없던 오네시모가 평등한 그리스도인 형제로서 자기의 이름답게(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은 "쓸모 있는"이다) 한 교회를 이끄는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이들에게 자유가 주어지고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를 되찾게 하는 이 작은 사건은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말했던 창세기 저자들의 통찰과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철학자들이 논했던 민주주의 이상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하기 위한 물꼬를 트는 것이었으며, 그 이후 줄기찬 투쟁 가운데 20세기 초 전세계적으로 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되기까지 2000년 동안 계속 반복 재현되며 이어져 왔던 것입니다.

우리 앞에 많은 문제들이 놓여 있습니다. 이 문제들에 직면하여 고치고자 할 때 우리는 늘 위험의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자신이 필레몬과 같은 처지라고 생각해 봅시다. 교인들 중에 사장님이 계시면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고 비정규직 사원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 자본의 노예가 된 사회에서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분이 계시다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는 참지 말고 나서야 합니다. 이 모두는 위험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사회부원들은 늘 재판을 받고, 벌금을 물어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반지성적이고 감정적으로 우경화된 사회에서, 또 그리스도교가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권력을 향유하려고 하는 분위기에서 향린교회의 교인은 이단이나 종북의 딱지를 받습니다. 향린교회에 다니다 보면 마냥 편하게 살 수 만은 없습니다.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다가 어느 교우에게 “향린교회에서 하늘뜻펴기를 하는 건 참 어려워요!”라고 얘기했더니, “예 목사님, 그런데 하늘뜻펴기를 듣는 것도 어려워요!”라고 얘기하더군요. 늘 깨어있는 정신으로 자신과 세상을 성찰하고 행동으로 나서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가끔은 나도 모르게 지쳐서 그만 여유를 잃고 짜증 섞인 분노를 이웃과 형제와 가족에게 내기도 합니다.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을 “뜯어 고쳐라”는 예레미야의 한 구절로 정했지만 뜯어 고쳐야 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에서부터 사회적인 문제까지 정말 다차원적이고 무척이나 많습니다. 그래서 뜯어 고치겠다는 다짐과 함께 그것을 이루기 위한 차분한 성찰과 전략도 필요한 것입니다. 또 오래도록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도록 우리의 힘들을 축적해야 합니다. 지난 주 청소년부의 낮꿈 공연이나, 어제 촛불집회에서 향기로운 이웃의 공연만 보아도 우리는 많은 능력을 이미 보유하고 있습니다. 문화적 힘은 사회정치적 투쟁 때문에 지친 이들에게 새로운 생기를 줍니다. 이런 힘들을 잘 모아내고 준비했다가 적절한 때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의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합시다. 오늘 바울 사도가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명령할 수도 있었던 것을 간곡한 부탁을 한 것처럼 말입니다. 무엇보다 행복의 비결은 사랑하는 데 있고, 사랑으로 얻은 행복은 쉽게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조언들 몇 가지를 읽어 드리려고 합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jl201&logNo=40196732938)

 이 조언들이 지쳐 있는 교우들에게는 위로가 되기를, 조금 나태해진 이들에게는 다시 분발할 기회가 되기를, 스스로 되돌아볼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 이들에게는 쉼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은 우리에게 성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은 다만 우리가 노력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매 순간 헛되게 살지 않으면 그만이지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기도할 시간을 가지며, 웃는 시간을 가지세요

그것은 영혼의 음악입니다.

친절한 얼굴, 친절한 눈, 친절한 미소로 사람을 대하세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변장한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의 몽당연필,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연필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불완전한 도구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것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십니다.

나는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실함을 위해 기도합니다.

바쁘고 성실하게 살면서 불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살아가면서 장애물에 직면하게 되면

그것은 신이 내려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기쁜 마음으로 풀어보세요

물질이 우리의 주인이 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참으로 빈곤해집니다.

저는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고

당신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힘을 합친다면 훌륭한 일들을 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을 위한, 친절을 위한, 이해를 위한, 평화를 위한

모금 활동을 추진합시다.

돈을 기부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랑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친절한 말은 짧고 말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그 메아리는 영원히 울려 퍼집니다.

만일 당신이 사람들을 평가한다면

당신은 사람들을 사랑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고통은 성장의 법칙이며,

우리의 인격은 거센 폭풍우와 긴장 속에서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