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교육주일

함께 하는 정의

시편 71,1-6; 이사 65,17-19,25; 1 고린토 12,19-27; 마태 18,10-14

고 상 균 목사

향린의 꿈과 미래들을 향하여 아낌없는 박수와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지금 여러분께서는 한 자리에서 네 번 진행되는 하늘뜻펴기에 참여하시는, 참으로 놀라운 현장에 함께하고 계십니다. 좀 전까지 진행된 내용이 교육부의 아이들과 나누는 하늘뜻펴기이긴 하지만, 분명 함께 하고 계신 어른 공동체에도 깊은 신앙의 울림이 있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교회교육주일예배인데 정작 교육부는 다 나가서 이상하신가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진도 앞바다를 지키던 이순신 장군에게는 열 두 척이 있었듯 지금 이 자리에는 청소년부가 있습니다. 향린의 꿈과 미래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아낌없는 박수와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생명, 정의, 그리고 평화]

2013년 여름을 맞이해서 향린교회 교육부는 “생명의 하느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라는 세계교회 및 기장총회의 올해 주제에 따라 총회교육원이 제안한 “생명의 하느님, 정의의 그리스도, 평화를 위해 일하시는 성령”이라는 머릿글을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청소년부는 이에 대한 실천적 측면에서 “벗과 더불어 신명나는 공동체”라는 주제로 세우고 ‘공동체와 이웃의 벗’되는 삶을 생각하고 느끼는 시간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어울려 살아가는 새 하늘 새 땅]

“정의란 무엇인가?”이 말이 너무 거창하다면, “정의롭다는 것은 혹은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면 이렇게도 볼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비단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제목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삶을 통해 한 번쯤 생각해 보았음직한, 혹은 생각해 보아야 할 화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 오늘의 본문 중 하나인 이사야서는 정의로운 세상을 한 마디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명명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염원했던 그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이 실상을 들여다보면 소박하기 그지 없습니다. “거기에서는 저마다 천수를 누릴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꾸민 집에서 살며, 자신이 재배한 포도를 맛 볼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것들을 닳도록 쓸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 함께 나눈 본문과 연한 말씀에서는 무슨 으리으리한 이상향이나 어려운 수사어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 것을 본인이 사용한다는, 어찌 보면 참 당연한 것이 새 세상이라는 이 외침... 이는 그토록 당연한 상식이 힘에 의해 말살되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빌로니아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고 눈앞에서 신앙의 중심이자 마음의 고향인 성전이 불타오르는 것을 보아야 하는 것도 모자라 정처 없는 타향 노예살이 길에 강제로 올라야 했던 유다 멸망 후 포로기의 상황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후금, 즉 청제국의 침입 앞에서 국왕이 머리를 조아리며 목숨을 구걸했던 병자호란의 패배 이후, 굴욕적 항복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청에 의해 정치적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끌려가야 했던 김상헌의 시와 같이 기약 없었던 유다의 타향살이는 시편137편에 그 슬픔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위에 우리의 수금 걸어놓고서.

우리를 잡아 온 그 사람들이 그 곳에서 노래하라 청하였지만,

우리를 끌어 온 그 사람들이 기뻐하라고 졸라대면서

“한 가락 시온 노래 불러라.”고 하였지만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낮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버릴 것이다.

내 생각 내 기억에서 잊혀진다면

내 만일 너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염원했던 세상은 ‘함께 살아감’이었습니다. 국가 공동체와 그에 속한 개인들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해 버린 적대자들을 향해 이글거리는 분노를 드러내고 그들에 대한 저주를 외치는 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싶은 상황에서 말입니다. 비록 그들이 늑대와 같이 일시에 달려들어 약소공동체를 와해시켰던 유목 전투집단이거나, 사자로 상징되는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제국군, 또는 지혜로운 뱀으로 우월감을 드러냈던 당시 이집트 파라오일지언정, 주님의 나라, 하느님의 새 세상에서는 해치는 일 없이 서로 어울려살아간다는 믿음, 바로 이것이 이사야서의 최종 저자가 지녔던 신학적, 그리고 사회학적 신앙이 아니었을까합니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

이와 같은 ‘함께 살아감의 정신’은 두 번째 본문인 고린토전서에서도 그대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 도시국가 연맹 중 가장 부유했던 도시 중 하나였고, 연맹 최후의 맹주로 대로마전을 수행했다는 것이 괘씸죄가 되어 전후 복구금지 명령 속에서 100년을 살아야했던 고린토... 이후 재건된 고린토는 재건 후 얼마 되지 않아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만큼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바울로에 의해 예수신앙 공동체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돈이 많은 곳에 바람 잘 날 없는 것일까요? 경제적으로, 또 그래서 학적으로도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던 고린토 공동체는 자신의 우월함과 자존감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이들이 많았던 바, 분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바울로파, 아폴로파, 심지어 그토록 분열을 조장하고선 자신들을 예수파라고까지 지칭하던 자들까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던 고린토 공동체를 향해 바울은 애타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요. 우리는 다릅니다. 능력이나 출신도 다양하지요. 하지만 다른 모습 그대로 우리는 공동체입니다. 비록 머리가 없으면 전신이 움직일 수 없지만, 팔 다리가 없다면 머리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금방 더럽게 되는 발이지만, 그 소중한 발이 없다면, 전체 몸은 금방 지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연결되어 있고, 다양합니다.’ 바울로는 고린토의 안타까운 상황을 접하면서 ‘모두가 같은 생각, 같은 마음, 같은 수준’ 등과 같은 기계적이고 획일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 ‘바울로파는 아폴로파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아폴로파는 예수파의 귀함을 느낌’으로 마침내 온 공동체가 서로서로를 있는 그대로 껴안고 연결되는 모습을 소원했던 것 같습니다.

[작은 이의 존재감을 크게 느끼는 마음]

그리고 이런 생각과 정신은 마침내 복음서에서 분명 공존하고 있으나 작다는 이유로 평가절하되는 존재, 즉 한 마리 양에 대한 관심으로 극대화됩니다. 백 마리 중 한 마리... 물론 그 자체가 버리기에는 참 아까운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잃어버린 상황에서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를 안전하게 챙기는 편이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임을 모르지 않을 것임에도 복음서 이야기 속 목자는 과감하게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거대한 것들에 의해 가려지고 보이지 않게 되는 작은 것들, 거대담론 앞에서 개인의 의견이, 다수에 의해서 소수가, 권력을 지닌 이들에 의해 서민대중이, 목소리가 큰 사람들에 의해 소심한 이들이, 성 다수자에 의해 분명 있는데도 없는 존재, 아니 없어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성소수자가, 일방적인 어른들과 부모들에 의해 아이들이 묻히고 가려질 때, 이야기 속 목자로 상징되는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존재들 가운데 하나라도 상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

[함께 하는 정의]

사랑하고 존경하는 향린 공동체 여러분! 정의란 무엇인가? 교회교육주일을 맞이하여 함께 생각해 본 이 주제에 대해 저는 끝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것은 옆의 존재를 깊이 느끼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옆과 앞 뒤에 앉아 있는 이들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공동체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깊이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가족입니다. 안타까워 절규하는 이들의 마음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두는 함께 살고 있는, 아니 살아야 할 소중한 이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그리고 이 모든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가슴 벅차게 알아 가시기 바랍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며, 그 삶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 세상입니다.

침묵 가운데 옆에 계시는 야훼 하느님을 만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