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뜻을 알자

80:14-19; 5:1-7; 11:36-12:2; 12:49-56

 

[지구온난화]

 

올 여름 한반도는 장마도 꽤나 길었지만, 그 이후 이어지는 폭염 또한 매우 높아 종전의 최고기록을 갈아치워 버렸습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미국 남부지방에 오는 돌풍이나 서부지방의 산불 또한 그 빈도와 강도가 점점 심해지면서 많은 재산과 인명 피해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중국 상해에서는 뜨거워진 아스팔트에 돼지 삽겹살을 구워 먹는 모습까지 해외토픽에 등장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지구온난화로 인한 앞으로 다가올 재앙의 전조들입니다. 30년 후면 북극에 있는 얼음들이 반 이상 사라지면서 먹이를 찾아 이동을 할 수 없게 된 백곰들의 절반이 굶어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백곰의 다음 차례는 어떤 동물일까요? 설국열차에서처럼 마지막 차례는 이성을 자랑하는 인간이 되겠습니다만, 그러나 약간의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이 상태로 계속 가다가는 인간 또한 종말을 맞이할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일갈하십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날씨가 몹시 덥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그런데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오늘날로 용어로 바꾼다면, 이런 얘기도 가능하겠습니다. “너희는 일본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원전 사고로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자연 파괴가 일어났고, 이는 지금도 진행형이고 너희 중 과학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하는 말대로 이미 회복 불구의 상황이 되었다. 핵은 외폭 보다 내폭이 더 큰 법인데, 진짜 피해는 오십년 백년이 지나면 더 세세히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미 히로시마에 터진 원자폭탄의 위력을 보았지 않느냐? 고엽제 하나만 갖고도 그리 난리를 치면서 핵재앙에 대해서는 왜 그리도 무심하단 말이냐? 일본은 그래도 지진과 해일이 잦아 이를 대비를 하느라고 하였다만, 너희 남한인들아, 너희는 돈에 눈이 어두워 그동안 엉터리 부속을 갖다 끼우는 등, 자연 재해에 대한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지 않느냐? 그렇다면 만에 하나, 그래 느네들이 즐겨 쓰는 문자 그대로, 만에 하나, 남한에 있는 24개의 핵발전소 중 하나만이라도 지진이든 해일이든 기계 고장이든 아니면 포탄이 날아와 폭발한다면 너희가 사는 땅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느냐? 이 위선자들아!”

 

사실,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합니다만, 그 이성이라고 하는게, 항상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고, 기술과 과학이 필수불가결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문제는 통제되지 않는 과학 기술은 핵과 같이 언제나 인간 존재 자체를 말살할 위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차에 비하면 자동차는 훨씬 편합니다. 그러나 마차에 부딪히는 사고는 생명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지만, 자동차에 부딪히면 생명에 직결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자고 모두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정작 큰 것은 눈에 안보입니다.

 

[불을 지르고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매 주일 하늘뜻펴기를 하는 목사들에게 본문 말씀으로 다루고 싶지 않은 성서 구절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의 목사들이 첫 번째로 뽑을 성서 구절이 오늘 우리가 읽은 루가복음 12장의 말씀일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만합니다. 불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의 제자들에게 임했던 교회의 태동을 알렸던 오순절 성령의 불로 해석한다면 이거야 말로 목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불이 화해와 일치의 성령의 불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세례는 물세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물세례는 이미 받았기에 앞으로 받아야 하는 괴로움의 세례는 죽음의 세례, 곧 십자가의 처형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이제부터가 문제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 아니 루가 자신도 1장 서두에서 즈가리야 사제를 통해 아기 예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고 예언하였듯이 예수는 평화의 왕으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마지막 장 24장에서는 부활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처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예수님이야 말로 이 땅에 평화를 약속하신 분이 아니신가요? 저 또한 매번 이 자리에 서서 주일 예배를 시작하면서 평화의 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환영하고 있고, 제 이메일 이름이 조샬롬 조평화이고 이멜을 시작할 때는 평화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사합니다!’라고 시작하고 끝맺음을 할 때 또한 평화!’라고 씁니다.

 

그런데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조평화란 제 이메일의 이름을 조분열로 바꿔야 할까요? 참으로 곤혹한 말씀입니다.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니? 여러분 제가 향린교인 여러분, 제가 이 교회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아십니까? 아닙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려 왔습니다.’ 왜 아멘!이 없어요? 제가 예수님을 따라 말하고 있는데요? 다시 하겠습니다.

 

그런데 분열도 분열 나름입니다. 하필이면 예로 드는 게 가족입니까? 정당이나 기업을 예로 들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한 가정에 다섯 식구가 있다면 이제부터는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반대하여 갈라질 것이고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하고 딸이 어머니를 반대할 것이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반대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반대하여 갈라질 것이다.” 이 말씀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예는 사람에 따라 찬성반대 논란이 있을 수 있으니 오늘 저의 해석에서는 빼겠습니다. 오늘 말씀이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남편과 아내가 빠져 있는 것은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불을 지르러 왔고, 그 불은 다름 아닌 가족끼리 서로 맞서는 일이라고 하는 본문의 말씀은 참으로 당혹하기 그지없는 말씀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여기서 말하는 가족을 민족으로 확대 해석해서 나라와 민족간의 전쟁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신앙을 기준으로 하여 가족 안에서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일어나는 분열을 말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상 제사로 인해 가족 안에서 분열이 일어날 때, 이 구절을 인용하기도 하고 혹은 교회 분쟁이 일어 믿는 자들끼리 서로 갈라졌을 때에도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하기도 합니다만, 이는 자파 이기주의 혹은 기독교 절대주의에 기초한 자의적인 해석이지 바른 해석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실은 여기에 대해 마태복음이 어느 정도 답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분열이라는 단어 대신에 칼을 주러왔다고 말하고, 집안 식구가 자기 원수다라는 직접적인 언급을 한 다음에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그리고 딸이나 아들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곧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서라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예를 들면 전두환씨가 불법재산을 은닉하여 가족, 친지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는 가족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이렇게 하였을 것이고 자식들은 부모님의 사랑의 은덕으로 이를 감사히 받았을 것입니다. 이는 가족이기주의의 전형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적용한다면, 자식이라도 이런 경우에는 아버지를 고발해서라도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가족 안에 분열이 일어나는 이유?]

 

그런데 루가는 이렇게 마태가 취한 탈가족이기주의적 관점을 넘어서서 시대의 징조와 뜻이라는 보다 큰 관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우리 안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맞서고 어머니와 딸이 맞서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맞서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라, 나라가 분단됨으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원수가 되면서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원수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비극적인 경험을 한 가족들이 있습니다. 큰 누나와 작은 누나가 각각 인민군과 국군의 장교가 됨으로 적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이집트나 시리아 또한 내전으로 인해 가족이 원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시리아도 내전으로 10만 이상의 사람들이 살해당했지만 이집트 또한 겉잡을수 없는 유혈사태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태가 이렇게까지 번지게 된 배경에는 미국이 있습니다. 이슬람형제단의 후원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된 무르시정권을 견제하던 미국은 실상 우리 광주민주항쟁 때와 마찬가지로 군부쿠데타를 묵인한 것입니다. 매년 10억불 이상의 군사원조를 받고 있고 대부분의 이집트 장교들이 미국에서 군사훈련을 받기에 남한 군부와 같이 이집트 군부 또한 미국의 동의 없이 결코 쿠데타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오바마가 미국은 여기에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려고 하는 부끄러운 행위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족 안의 분열은 개인적인 사유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외국군의 지배나 침략 혹은 내란으로 인한 경우를 두고 하는 말씀이고, 그래서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시대의 징조란 다름 아닌 이제 곧 30년 후에 있게 될 로마의 침략으로 인한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두고 한 말인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예루살렘은 외세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받았지만, 이때가 가장 비참했습니다. 1년이 넘는 포위로 말미암아 자중지란이 일어 서로 간에 살육이 일어났고, 결국 모든 주민이 살해당하는 참담한 비극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곧 일어날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정신을 차려 이 땅에 하느님의 정의를 행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너희들이 하나가 되어 외부의 적을 이겨내지 않겠느냐?는 의도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을 지르러 왔고,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려 오셨다는 이 말은 분열을 극복하여 진정한 평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한 반어법이자 하나의 충격 요법인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사야서의 말씀 또한 보다 분명해집니다. 야훼는 포도밭을 가꾸는 주인으로, 이스라엘은 포도밭으로 말해지고 있는데, 그 포도밭이 짐승들에게 뜯기고 담이 허물어져 마구 짓밟히게 되고 순을 치지도 김을 매지도 않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여지고 말았습니다. 주인이 밭을 일구고 돌도 골라내면서 잘 가꾸었는데도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지막 구절에서 명백하게 말합니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 이는 법관들이 부자들의 뇌물을 먹고 공평하지 못한 판결을 내리기 때문이고, 권력자들은 약자를 보호하는 복지정책을 잘 펴야 하는데, 자신들의 배만 불리는데 열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을 히브리어로 읽어보면 운율이 맞아 떨어지는 하나의 시구가 됩니다. 공평은 히브리어로 mispat 이고 유혈은 mispah, 정의는 tsedaqah, 아우성은 tseaqah입니다. 이사야는 시편 80편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와 약자들이 당하는 피를 흘리고 아우성을 치는 부당한 현실이 계속되면 결국 포도밭이 망가지듯이 나라 자체가 멸망당할 것임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민주화]

 

저는 이 말씀들이야 말로 오늘 대한민국 지도자들이 명심하여 들어야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심장은 서울이고 서울의 중심은 시청 광장이고 광화문이고 청계천이고 대한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시청광장은 국정원 대선 댓글조작사건을 고발하고 민주주의의 회복을 염원하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매 토요일마다 촛불을 켜고 있으며 대한문에는 지금 2년째 24명의 쌍용차 자살자 영정 사진을 걸어 놓고 불법으로 해고한 노동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거리농성이 진행 중이고 그 길 건너편에는 재능해고자 거리농성이 5년째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요 언론이 입을 다물고 있지만, 이게 남한의 심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금 남한은 보이지 않는 유혈 자살율이 세계 최고입니다. 자살의 30% 이상은 경제적인 이유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복지공약을 실천하겠다고 지난 주 세법개정안을 냈는데, 서민과 중산층 봉급생활자들의 반발이 컸습니다. 부족한 복지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 조금 더 내는 것은 찬성하지만, 진짜 부자들인 재벌이나 최고 연봉을 받는 슈퍼 부자들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명박정권 때에 낮춘 법인세 3%만 회복해도 지금의 세법개정보다 훨씬 많은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데 대해 서민들의 불만이 터진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큰일에는 묵묵무답으로 일관하던 대통령이 하루 만에 재빨리 대응을 하긴 했는데, 그게 그겁니다. 대통령후보시절에는 서민 운운하며 경제민주화를 말하면서 신규순환출자금지 등 재벌 규제를 하겠다고 하더니 지금은 재벌의 위협에 눌려 경제민주화를 역행하는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재래시장을 오고가며 상인들의 손도 잡고 직접 지갑을 열어 돈을 주고 식료재료도 삽니다만, 나라의 정책은 전연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장면을 보면 본인이 실제로 그 재료로 직접 음식을 해먹는지 아니면 그냥 청와대 주방장이 알아서 하라고 그냥 주고 마는지 아니면 주방장은 대통령이 직접 구입한 식품 재료이니 귀하게 여겨 그날 저녁은 거기에 맞춰 메뉴를 바꾸는지가 조금 궁금합니다.

 

[미국의 번영과 복지세]

 

지난 달 미국의 노동전문가인 샘 피치게티가 지은 [부의 독점은 어떻게 무너지는가?]라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영어 제목은 The Rich Don't Always Win ‘부자가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미국의 중산층 중심의 자본복지주의가 지난 백년동안 어떻게 무너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그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남한이 미국의 자본주의 경제를 숭배하고 미국을 배우기 위해 애를 쓰고 있기에 저는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고 미국의 환상에서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1920년대 대공황 이전의 미국 경제는 최상위 1퍼센트의 슈퍼 부자들이 전체 국민소득의 4분의 1을 가져갔고 그 이후에는 최상위 1퍼센트 중 상위 10퍼센트, 0.1퍼센트의 부자들이 상위 1퍼센트가 벌어들인 수입의 절반을 가져가면서 소득의 불평등이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1950년대 들어서서는 재벌들의 몫이 더 커진 것이 아니라 반대로 4분지 1에서 10분의 1로 대폭 줄어듭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생겼는가 하면 당시 강력한 힘을 가진 노조가 2차세계 대전과 한국전쟁을 통해 얻어진 엄청난 부를 고용주와 고용인이 적당한 비율로 나눠 갖도록 압박을 하였고, 정부 또한 소련의 공산주의가 갖는 보편적 복지에 대항하기 위해 서민복지정책을 강하게 펴서, 많이 벌수록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하는 누진세를 확실하게 적용하였기 때문입니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까지가 미국 중산층의 최고의 호황기였는데, 그때 부자들이 내야 하는 최고 세율이 얼마였는지 아십니까? 요즘 우리나라 최고 세율은 얼마인지 아세요? 38%입니다, 3억원 버는 사람이 한 1억정도 세금내고 2억을 가져갑니다. 그러면 금융권에서 가장 많이 번다고 하는 조정호메리츠회장이 작년 급여만 62억에 주식배당을 합치면 100억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더 많이 버니 더 많이 내는 것이 합당합니다만, 최고세율이 정해져 있다 보니 38억 이상 더 거둘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조정호회장이 1950년대 미국에 살았다면 그가 얼마를 세금으로 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번 추측을 해보세요? 얼마쯤 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시 최고 세율이 91%였습니다. 90억쯤 세금으로 내고 10억쯤 실수입으로 가져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미국이 왜 그때가 호황이라고 부르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요즈음 재벌들은 자신들의 재산이 자본주의 자유시장에서 성공한 데 따른 정당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미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성서가 말하는 공동체 평등의 가치를 따라 부를 사회적 공유물로 인식했고 그래서 누진세를 통한 분배 속에서 공동의 번영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평등과 분배 정신은 1970년대부터 흐지부지되기 시작해 소련연방이 해체되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1970년대 뉴욕 시 공립학교의 신임 교사는 월스트리트의 신임 변호사보다 급여가 2천 달러 정도 적었는데, 선생은 긴 여름방학이 있었으니 실상은 차이가 없는 셈입니다. 그런데 40년 뒤 오늘날 신임변호사는 신임 교사보다 한해 평균 115천 달러를 더 벌고 있습니다. 40년 전에는 연봉에 별 차이가 없었는데, 지금은 서너배 차이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도나도 변호사를 하려하고, 변호사가 많아지다 보니 별별 사소한 것들까지도 다 소송을 하는 소송국가가 되고 말았고, 반대로 선생의 질이 떨어지다 보니 학생의 질도 떨어지고 결국 사회는 점점 더 열악해져서 현재 미국은 인구비례에 따른 죄수 비율이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되고 만 것입니다. 20대 미국 흑인 남성의 경우 대학에 다니는 숫자와 감옥에 있는 숫자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미국의 퇴보는 실상 근원을 찾아보면 부의 독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평등이 답이다]

 

1950년대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인 중 어느 누구도 세금을 내고 난 후 한 해 25000달러 이상의 순 소득을 가져가선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한국인 중 어느 누구도 세금을 내고 10억 이상을 가져가서는 안 된다고 대통령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그렇게 말했다가는 빨갱이로 몰립니다. 1960년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어떤 나라에서는 몇몇 가문이 엄청난 부를 소유하면서도 내야 할 세금을 내지 않고 절대 다수의 국민이 빈곤에 신음하는 데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함으로 실은 미국의 부자들에게 지나친 부가 만들어내는 부패로 말미암아 미국 사회 또한 파멸될 것임을 경고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는 패망한 모든 나라가 말해주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엄청난 국고 수입에도 불구하고 90% 이상의 최고세율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부자가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다]라는 책의 저자는 현재 세계의 경제 논리는 소득분배보다 경제성장이 더 중요한 이슈가 되었고, 저소득층의 소비증대가 전체 경기를 부양한다는 분수효과보다 부유층의 투자, 소비 증가가 저소득층의 소득 증대를 이끈다는 낙수효과가 인기를 얻게 됐다고 지적하면서 최고 소득세율 90% 정책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영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윌킨슨 또한 <평등이 답이다, The Spirit Level>라는 책에서 불평등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감옥에 갈 확률이 5배나 높고, 병적 비만에 고통 받을 확률은 6배나 높다"고 말합니다. 현재 미국의 부자들은 헬리콥터로 출근하고, 중무장한 고급차를 이용합니다. 유괴범들이 돈을 요구하면서 아이들의 귀를 잘라 부모에게 보내기 때문에 귀만 전문으로 재생시키는 성형 의사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민생이라고 하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격이 필요합니다. 장돌뱅이마냥 돈이 된다고 해서 아무거나 마구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재벌들을 불러놓고 어려운 일 있으면 직접 전화하라고 말하고, 세금 감면해 줄테니 제발 고용 좀 해달라고 읍소를 했습니다. 세금감면 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용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본래대로 돌려놔야 하는데, 그냥 퇴임했습니다. 오히려 지금도 국민의 세금을 빨아먹는 사대강 사업한다고 20조원을 처넣었습니다. 미국에 가서 기업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뭐라고 자신을 소개하였습니까? I'm a CEO of Korea Incoporation. 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 주식회사의 사장입니다.' 그 순간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가 다 회사 사장의 명령에 따라 돈 버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회복을 위해 '세일즈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뭘 세일즈 하겠다는 것인지, 그 이후에 이어지는 말이 없습니다. 자동차를 세일즈하겠다는 것인지, 스마트폰을 세일즈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기업인들이 하는 것이니까 아버지 박정희마냥 국민을 세일즈 대상으로 하여 독일의 광부로 간호원으로 베트남의 총알받이 보내겠다는 뜻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나라의 수장이 써도 되는 단어가 있고 쓰지 않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격의 언어가 있습니다. '세일즈대통령'이라는 단어는 결코 써서는 안 되는 매우 천박한 단어입니다. 가게에서도 격조 있는 가게에서는 절대 세일즈란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3자가 써서도 안 되는 단어를 본인 스스로 썼다는데 대해 정말 부끄럽고, 저는 이럴 때마다 외국 언론에 나올까봐 가슴이 두근두근 합니다.

 

저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경제관련 일은 경제 관료에게 맡기고 민족의 백년대계를 세우는 교육체계나 국민들의 역사 인식을 바로 세우는 일에 치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징조]

 

요즘 남한 사회의 시대 징조가 심각합니다. 국정원의 불법대선공작운동에 대해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촛불은 계속 타오르고 있고, 전 국정원장과 경찰청장은 국회청문회에서 증인선서를 거부하고 답변을 거부하는 등 국회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국회를 모독하는 일은 곧 국민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이에 항의하는 개신교 목사님들의 목요거리기도회는 18회를 넘어섰고, 가톨릭 사제단의 시국선언 또한 전국적으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대구경북 지역의 사제단 수백 명이 시국선언을 했는데, 이 교구에서 이는 1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70년도 전태일 노동자의 분신사건이 한국노동운동에 본격적인 시발점이 되었고, 목요기도회와 민중신학과 같은 시대참여적인 신학운동과 기도운동이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불러왔던 것과 같이, 이 모든 징조들은 이 사회가 제2의 새로운 변혁운동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시대적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위선자들만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엊그제가 815, 광복절이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는 자신을 잊은 사람에게 앙갚음을 한다는 이런 교훈은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를 비롯하여 지구상 모든 나라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말입니다. 지금 아베 정권은 침략의 과거사를 망각하거나 정신대를 왜곡하면서 거짓말을 일삼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경계함과 동시에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끝으로 일제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가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고 1945912일 떠나면서 한 마지막 연설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아베 노부유키의 마지막 업무 연설문]

 

일본은 졌다. 그러나 조선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란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국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사관을 심어 놓았다. 결국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여 노예적 사람으로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 일본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 올 것이다.

 

개인 아베 노부유키는 죽었지만, 우리 안에 외세에 의존하는 제 2, 3의 아베 노부유키는 살아서 활동하고 있지 않나요? 남북 분단 또한 식민사관이 원인이 아닌가요? 지금 우리는 정말 역사의 주체자로 살아가고 있나요?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