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기도와 유혹의 기도

1:2-9; 시편 86: 2:6-19; 11:1-13

 

통일을 주제로 인도에서 유학 중 정부 허락없이 북한 사람들을 만나고 북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간첩이 되어 8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이병진교수께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광장으로! 광장으로!]

 

향린교회 6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매월 보내주시는 향린 강단을 꼭 챙겨서 읽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쉽게 맥락을 살펴 가시면서 짚어주시기에 목사님 말씀에 공감도 가고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왜 내가 감옥에 갇혀 지내야 하는지 분노와 절망감에서 방황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보니 그분은 얼마나 아프셨겠는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불살라 빛을 내어야 하고 자신을 녹여야 비로소 소금 구실을 할 수 있다는 바로 그런게 교회의 사명이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이제는 제 아픔보다는 저의 시련과 고난이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4년이라는 감옥생활이 이런 성찰을 갖게 하였습니다. 국가정보원은 저를 가둠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을거라 생각하겠지만, 저는 오히려 진리와 정의를 분명히 깨닫고 정보원을 뛰어넘는 거인이 되고자 합니다. 처절한 절박감, 그 힘이 저를 강인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제 사건을 돌이켜 보면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국가정보원은 제가 인도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오래 전부터 저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정보원이 2009년 들어 감시활동을 강화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궁금했습니다. 최근에 드러나고 있는 국가정보원의 정치개입 사건을 보면서 조금씩 의문이 풀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대규모간첩단 사건을 기획 조작하려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저를 이용한 것이구요.

대통령 정상회담록도 의도적으로 발췌하여 종북이념으로 몰아 공작을 벌이는 국가정보원은 우리의 상식과 윤리를 뛰어넘는 괴물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수지배세력의 정권유지 명분을 만들려고 시민을 잡아다가 억압적이고 위협적인 공포분위기에서 간첩으로 낙인찍고 감옥에 가두는 인간 백정들입니다. 정의와 양심의 목소리가 작아서 크게 외칠 수는 없지만 저는 제가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을 생생히 기록하고 역사 앞에 증언할 것입니다. 저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와 주신 목사님의 배려와 사랑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를 믿고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짊어지시려는 목사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칠흙같은 어둠의 시간이었지만 신 새벽의 아침이 밝아옵니다. 다시 한번 진리의 힘이 강함을 깨닫습니다. 향린공동체 신도님들께서 정의로운 길에 함께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거짓을 반대하고 참 진리의 길을 가는 목사님과 향린공동체 신도님들께 존경과 신뢰를 드립니다. 지금 지배세력은 촛불을 칼과 방패로 누르려하지만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우리 가슴속의 촛불을 끌 수 없습니다. 저도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목사님과 신도님들과 함께 가슴 속의 촛불을 켜고 광장으로! 광장으로 달려갑니다.

 

이와 같은 승리의 열정과 기쁨으로 향린교회 6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손잡고 만나 뵐 날을 소망합니다. 사랑의 마음 가득 담아서 이병진 올림

 

오늘의 시편 구절은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보리라.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가리라.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라는 매우 친근하면서도 그러나 그 뜻이 너무 커서 함부로 말하기 힘든 이 단어들을 사랑하는 연인 관계로, 하늘과 땅이라는 우리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감싸 안는 포근한 단어로, 그리고 이것들이 다름 아닌 신의 존재 양식임을 놀라운 시적 상상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짓이 판을 치고 정의가 구부러진 사회에 살아가기에, 휴전협정 60년을 맞이하지만 평화협정은커녕 권력 유지를 위해 또 다시 적대 관계로 몰아가려는 위정자들의 가식과 허위에 분노하면서 이 시인의 확신하는 마음이 척박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는 주문(呪文)인가?]

 

간혹 교우들 가운데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건 기도를 몰라서 질문을 한다기보다 과연 나 개인 혹은 내 가족만을 위한 기도가 과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기도인지 확신할 수 없어 나온 성찰의 질문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같은 질문을 묻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도를 배워온 사람들입니다. 여러 기도문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세례 요한의 기도문이 따로 있었던 걸 보면 당시 스승과 제자라고 하는 그룹이 형성되어 있는 집단에서는 그 집단을 대표하는 기도문이 따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한 제자의 요청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주의 기도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주의 기도는 가장 잘 알려진 기도문이면서 동시에 가장 오해가 많은 기도문이기도 합니다. 그 오해는 역설적이게도 익숙함에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가까우면 그 사람을 잘 모르듯이 실제는 신이 주인이 되는 주기도의 내용과는 달리 인간이 주인이 되는 하나의 주문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의 기도는 마태복음과 루가복음 두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의 기도는 길고 루가의 기도는 짧습니다. 학자들은 루가의 기도문이 본래의 기도문에 더 가까운 기도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만 영원히 있사옵니다.”라는 우리가 아는 주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루가에는 없고 마태에만 나옵니다. 이 부분은 성전 예배에 익숙한 초대 교회 유대인들이 주기도를 개인기도가 아닌 예배에 사용하면서 당시 유대교의 형식을 따라 첨가하게 된 것입니다.

 

골방에서 드리는 개인기도야 별다른 형식이 필요 없지만, 대표기도와 같은 공중기도는 보통 4가지의 요소가 차례대로 들어갑니다. 주의 기도 또한 이 순서대로 되어 있습니다. 찬양, 고백, 감사, 청원입니다. 한번 따라 하세요. 영어를 조금 아시는 분들은 이 순서를 외우기가 아주 쉽습니다. 사도행전을 영어로 ACTS입니다. Aadoration, Cconfession Tthanksgiving Ssupplication 흔히 기도하면 마지막 단계의 청원기도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는 찬양과 고백과 감사를 하고나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격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서너 살짜리 아이들이 부모님께 요구하는 방식과 10, 20대의 방식은 다릅니다. 떼를 쓰며 무조건 요구하는 방식과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요구하는 것이 다릅니다. 게다가 3040대가 넘으면 부모님께 무언가를 요청하기 보다는 오히려 부모님께 무언가를 드리게 됩니다. 청원기도라고 하더라도 신앙의 성숙함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130년을 넘었다면 이제는 어린아이마냥 보채기만 하는 이기적 신앙에서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성숙한 청원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오늘 말씀을 인용하여 반박할 수 있습니다. “아니 목사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악한 자식에게도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어버이께서야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얘기를 끝까지 다 듣지 않고 중간에 말을 가로채면 안되듯이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하는 최종 선물이 뭡니까? 생선입니까? 달걀입니까? 요즘 말로 하면 돈입니까? 세상 성공입니까? 아니지요.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오늘부로 우리 향린교우들은 이점을 분명히 하십시다.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분명히 열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할 것이 무엇이고 찾을 것이 무엇이고 두드려할 목표가 무엇입니까? 가장 좋은 것 성령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뭡니까?

 

성령의 반대는 악령입니다. 오늘 말씀 바로 이어지는 내용이 예수와 악령의 두목이라는 바엘제불과의 싸움입니다. 20절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성령은 하느님의 나라를 불러오는 능력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나라는 뭡니까? 아까 시편기자가 노래했듯이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세상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

 

이제 주의 기도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암송하는 마태복음의 주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시작하지만, 오늘 루가복음은 그냥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요즘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으면 하늘을 가리키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늘에는 수천개의 인공위성이 떠다니고 있고 달나라도 갔다왔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첫 번째로 우주 공간을 난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여기에 와서 보니 신은 없다.’라는 말을 했다고 말하는데, 이는 확인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 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라는 고전적 신 이해는 끝났다라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유리가가린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초월이라는 단어를 높은 공간 하늘을 연상하였지만, 그 이후 현대인들에게 있어 초월은 우리 마음속이라는 내면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 이천년 전에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단어가 의미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아버지!’라는 호칭이 더 적절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아버지라는 단어 또한 시대적으로 그 의미가 맞는지 확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어떤 여성 교우께서 자기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기에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에 거부감이 있다고 말씀하시기에, 그래 제가 하느님 어머니라고 불러도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30여 년 전 서구 여성신학계에서는 하느님 아버지라는 단어보다는 하느님 어머니라는 단어가 성서의 정신에 더 맞는다는 주장을 했었고, 보수교회에서는 이를 이단이라고 펄펄 뛰었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하느님 아버지는 맞고 하느님 어머니는 틀린다는 주장은 너무 좁은 소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남성이기에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보다 친밀한 인간관계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 주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저 높은 하늘에서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는 심판의 하느님이 아닌 인간을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분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입니다. 아버지는 당시의 가부장적 사회를 보여주는 단어일 따름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사셨다면 다른 표현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고아로 자라 아버님도 모르고 어머님도 모르고 그냥 자기를 사랑해주시는 누님 한분만 계신다고 한다면, 이분은 하느님 아버님! 보다는 하느님 누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하느님을 훨씬 더 가깝게 여기는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저 개인으로는 하느님 아버지라는 표현을 이제는 조금씩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친근한 것은 좋지만 너무 자주 사용함으로 마치 옆집 아저씨 부르는 듯 한 태도는 지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2천년 전에는 하느님을 지나치게 거리감을 두었기에 아버지라는 표현이 신선하였지만, 요즘은 하느님을 지나치게 의인화함으로 인해 절대 타자성에 대한 거룩의 경외심이 많이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래 전부터 주기도를 드리는 경우에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라고 말하고 입술로는 하늘을 말하지만 머리속으로는 영혼을 생각하며 말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오늘 공동번역에서는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희랍어 성경에는 아버지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당신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아버지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수 없어도, 그 이후에도 원어에도 없는 아버지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당신이라는 표현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라는 단어를 넣고 있지만, 국문학적으로 보면 당신은 낮춤도 되지만, 또 최고의 높임도 됩니다. 당신이라는 용어가 마음에 안 든다면 그냥 하느님이라고 부르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그 이름 속에 능력이 함께 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다른 신들에 비해 뛰어남을 찬양하는 기도입니다.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기도라고 하는 것은 그냥 입으로만 드리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그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녀가 내일 시험이 있는데, 책은 보지 않고, 성적이 잘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만 하면 뭐라고 얘기합니까? “야 이 맹꽁아 기도만 하면 되냐? 책을 봐야지.”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하려면 기도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진실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정의를 행하고,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오늘날이라는 말은 얼마간의 기간을 말합니까? 문맥에 따라 한 달도 되고 일 년도 됩니다. 원어는 그냥 오늘입니다. 내일이 아닌 오늘을 말합니다. ‘오늘 나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입니다. 이 기도는 내가 오늘 음식을 먹었음에 감사하는 기도이면서 동시에 오늘 음식만으로 만족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문 속에는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기도문의 주체가 나 개인이 아니라,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우리는 자꾸 나 혼자 개인을 주체자로 생각하는데, 주의 기도의 주체는 개인이 아닙니다. 우리입니다. 공동체입니다. 지금 사회는 물론이고 교회도 개인주의가 너무 심각합니다. 기도를 잘못하다보면 서로서로는 적대관계로 변합니다. 우산장수 아들과 아이스크림 장수 아들을 둔 부모님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오전에는 비를 주시고 오후에는 해를 주시고 이렇게 기도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여야 하겠지요, 다만 구름 끼는 날은 주지마세요.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라는 기도문을 깊게 묵상하면 이 기도문 또한 쉽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만약 나에게 이틀치의 양식이 있다면, 이는 오늘 먹지 못하는 형제자매에게 나머지 하루치를 나눠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라는 기도의 내용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저는 이 부분은 이제는 원어에 맞게 제대로 번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헬라어 원어로 보면 마태나 루가가 말하는 우리가 우리에게 지은 죄나 잘못은 단순히 지금 우리가 말하는 어떤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이 아닙니다. 원어의 뜻은 빚입니다. 그냥 죄인이 아니라 빚쟁이입니다. 원어의 뜻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하오니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소서.’ 이렇게 이해할 때만이 그 이후에 이어지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에서 유혹의 뜻이 분명해집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는데, 보이는 것마다 갖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세상이 유혹덩어리입니다. 그렇다면 유혹에 빠지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죽는 길입니다. 주의 기도에서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유혹은 부자의 유혹입니다. 가난한 자의 빚을 이용하여 그를 종으로 만들고 그의 딸과 아들을 노예로 만드는 유혹입니다. 인간이 인간 위에 올라서는 유혹입니다.

 

[기독교(종교)는 강자의 기독교(종교)가 아니다.]

 

313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기독교는 로마의 종교가 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기독교는 이때로부터 타락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전까지 기독교는 박해받는 종교였고, 약자와 가난한 자의 종교였습니다. 신자들은 순수했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소망 속에서 순교당하고 희생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의 재산은 불어나기 시작했고, 교황이 황제를 임명하는 세상 권력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중세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와 교황 이노센트 4세의 다음과 같은 대화는 유명합니다. 교황은 라테란 성당 문으로 보물을 가득 담은 자루들이 옮겨지는 모습을 보며 아퀴나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젠 교회가 은과 금은 없어도란 말을 하던 시대는 지나갔네. 저 보물들을 보게.” 그러자 아퀴나스가 한숨을 쉬며 말합니다. “,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교황님! 오늘의 교회는 은과 금은 있지만 대신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당시 덴마크 국교 교회를 향해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더 위대한 능력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그 포도주를 다시 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일본의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인 우찌무라 간조는 나는 가롯 유다가 부럽다. 그는 팔아먹을 예수라도 있었지만 지금 교회는 팔아먹을 예수조차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기독교는 강자의 기독교, 부자의 기독교가 될수록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교회 안의 99마리에 만족하고 교회 밖의 한 마리 양에는 관심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루과이에 있는 작은 성당 벽에 주의 기도문이 실려 있는데,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하지 말아라.

늘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

 

우리라고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

 

아버지라고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 산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늘 안간 힘을 쓰면서 ...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며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지 말아라.

항상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너는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고 하지 않느냐?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옵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넌 누군가에게 아직도 앙갚음을 하려고 하지 않느냐?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너는 늘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고 있지 않느냐?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못 듣지 않았느냐?

 

아멘! 이라고 하지도 말아라.

주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면서 ...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