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몫’- 오해와 진실

8:1-12; 시편 52; 1:15-20; 루가 10:38-42

 

[통일의 과제와 한국교회]

 

남북화해와 통일의 과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서 가장 먼저 실현해야 할 과제입니다. 특별히 올해는 휴전협정 60주년인데다, 세계교회협의회 10차 총회가 부산에서 열리게 되어 있어 세계 기독교인들의 기도의 힘으로 통일의 과제를 한발자국 앞당길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해입니다. 오늘 목회자마당에도 실려 있지만, 제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장직을 맡고 있어 지난주에는 총무 김영주목사와 부위원장인 노정선교수와 함께 워싱톤을 방문하여 한반도 정책에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미국무성 고위관리를 만나 우리들의 평화를 염원하는 목소리를 전하면서 북조선에 대한 적대 정책을 대화 정책으로 바꾸고, 한미군사훈련을 중지하고 경제봉쇄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어 뉴욕으로 가서 유엔과 미국 의회를 상대로 평화운동을 하는 미국교회협의회 대표들과 개신교 각 교단 대표들을 만나 평화협정 실현과 평화운동에 관한 정책들을 함께 논의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에도 대 여섯번의 회담을 진행하는 강행군이었습니다. 7,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교회 대표들 그것도 주로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목사님들이 백악관이나 국무성 고위관리들을 만난 경우는 있지만, 한국인이 통일문제를 갖고 미국의 고위관리와 대화를 나누고 직접 문서를 전달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하였다고 하여 미국의 외교정책이 하루아침에 바뀔리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국 민중을 대표하여 평화의 목소리를 전하고, 미국의 주요교단 대표들과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의지를 모았다는데, 이번 여행의 의의가 있습니다.

 

이번 방문 길에 또 하나의 수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엔 대표부의 두 참사관이 미국 메노타이트 교단에서 평화운동을 하는 분의 중재에 의해 우리 모임에 참석을 하게 되어 한국교회가 계획하고 있는 평화열차를 설명하고 이것이 실현될 수 있도록 북쪽 정부가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평화열차는 10월말 부산에서 개최되는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를 앞두고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교회의 평화 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독일 분단의 벽이 최초로 허물어진 브란덴부르크 광장에서 첫 예배를 드린 이후 모스크바와 이르쿠주크까지 러시아대륙을 횡단하여 북경, 그리고 평양을 거쳐 부산까지 기차로 22일 간을 여행하는 여정입니다. 현재 100명 등록이 되어 있고, 한국인과 외국인이 절반씩입니다. 독일교회나 러시아정교회는 이에 적극 협력하고 있고, 중국교회 또한 돕고 있어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는데, 문제가 되는 부분은 평양 통과입니다. 평양에서 남북의 기독교인들과 세계교회 지도자들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한 목소리로 기도하고 평화를 다짐할 때만이, 7년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근 50년 만에 열리는 이번 부산 총회의 의의가 확실해질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잘 진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그러나 언제 다시금 남북관계가 얼어붙을지 몰라 긴장 속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또한 이 평화열차 실현을 위해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정의에 기초한 평화는 창세기로부터 요한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성서의 중심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입니다. 미국은 헌법에 정교분리를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의 주요개신교단들은 워싱톤 국회의사당 바로 앞과 유엔본부 앞에 각기 사무실을 마련하고 교단 대표자들을 파송하여 평화를 지향하는 성서의 말씀들이 국제정치나 국내정치에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적극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한국교회는 전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히려 한국교회는 정교분리라는 말을 잘못 해석하여 독재와 사회 부정과 타락에 대해 눈을 감아 왔습니다. 지금도 국정원 대선개입으로 사회가 소란하고 쌍용차를 비롯한 노동문제가 우리 사회의 중심 과제가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보수교회는 여기에 대해 잠잠하고 해외단기선교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제 나라가 썩어가고 자신의 아들들이 만난 적은 없지만, 사촌이나 다름없는 북의 형제자매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데, 이는 못 본 체 하고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의 바른 뜻인지에 대해서는 전 자신할 수 없습니다.

 

[골로사이교회와 남한교회]

 

오늘의 본문 말씀들은 루가복음을 제외하고 모두 사회 정의와 평화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시편과 아모스는 말할 것도 없고, 골로사이서 또한 한 교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핵심은 평화입니다. 이천년 전 골로사이는 오늘날의 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의 작은 도시였고, 바울로의 제자 에바프라는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작은 신앙공동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서신을 보면 매번 그러하듯이 골로사이 교인들 또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점이나 미신같은 이교적 전통들을 따랐고 세상적인 명예나 권력도 여전히 추구했습니다. 남한의 점집도 기독교인이 오지 않으면 망한다는 말이 있으니 어쩌면 이런 점에서 골로사이 교회와 별반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골로사이 교회는 신앙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내분이 잦았습니다. 이 얘기를 전해 듣고 바울로가 목회서신을 보낸 것입니다. 편지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다. 그러기에 세상에 보이는 모든 왕권과 권세 그리고 보이지 않는 모든 영적 권세들도 그분 아래에 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러분은 그런 잘못된 이교적 전통이나 관습, 세상 권력이 주는 유혹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어 하느님과 화해하는 사람이 되고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남한 교회가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으로는 큰 병이 들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교인을 자랑하는 여의도의 S교회의 원로목사는 자식들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의 주식을 비싼 값에 매입하는 방식을 통해 교인들의 헌금을 빼돌려 장로들에 의해 공금횡령죄로 고발된 상태이고 강남의 대표적인 대형교회인 S교회는 그간 건축문제로 시끄럽더니 얼마 전에는 담임목사의 박사논문 표절 문제가 터졌습니다. 처음에 그냥 잘못했다 시인했으면 되었을 문제를 이를 감추려다 결국 목사는 6개월간 강단에 설수 없게 되었고, 이에 실망한 교인들이 계속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다른 교회로 옮겨 간다면 다양한 신앙경험을 위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만, 이런 식으로 떠나가는 교인의 상당수는 아예 교회를 등진다는 사실입니다. 문제없는 개인이 없듯이 문제없는 교회 또한 없지만, 남한의 장로교단이 문공부에 등록된 교단만도 230개가 넘고, 감리교단 또한 수많은 법정 싸움과 내부 분열을 겪고 나서 비로소 5년 만에 감독회장을 선출했다는 사실은 남한교회의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교단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교리에 근거해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교리에도 큰 교리가 있고 작은 교리가 있습니다. 큰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다라는 모든 것을 품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기적 유전인자를 갖고 있는지라 자기만의 성서 해석만이 옳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리들은 작은 교리입니다. 큰 교리 앞에서 작은 교리는 자연히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신의 이름이 작동을 하게 되면 작은 교리가 큰 교리를 집어 삼켜 자기 외에 모든 사람들은 사탄이 되는 자기 의인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 분쟁이 일면 교인들은 편이 갈려 더욱 열심인데, 오히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됩니다. 손가락질을 받게 되면 회개하고 화해와 일치를 도모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현실이 제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신앙의 수수께끼입니다.

 

[남한교회의 근본 문제점]

 

역사적으로 보면 남한 교회가 이렇게 분열과 분쟁을 일삼는 것은 우선은 선교사들의 분할선교정책과 신자 우민화정책에 그 첫째 원인이 있고, 둘째는 일제 식민지 지배로 인한 교회 탄압과 유혹이고, 세 번째는 조선 유학의 영향으로 인한 문자주의 성서해석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지만, 이 문자주의 성서해석은 지금도 한국교회를 좀먹는 큰 문제입니다. 남한교회만큼 성경공부에 열심인 교회도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무조건 성경을 읽고 쓰고 그러면 하느님이 기뻐하신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내려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서공부는 주로 암기식으로 초등학교 구구단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고등비평적 성서해석을 신에 대한 불경죄 내지는 인본주의로 보는 유아적 태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세계 어느 교회를 가도 성경책을 펴놓을 수 있는 책받이가 달려있는 구조를 갖고 있는 교회는 남한 교회 외에는 제가 아는 한 없습니다. 북한에 가면 봉수교회도 그렇게 되어 있는데, 이는 남쪽에서 그런 의자를 갖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옛날 의자라 그렇게 되어 있지 않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성경책을 펴놓고 밑줄을 긋고 노트를 할 수 있는 책받침 장의자로 되어 있습니다. 일어섰다 앉았다 혹은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예배드리는 장소라기보다는 일종의 세미나룸 형태입니다.

 

세계개신교회의 절반에 해당하는 정교회는 우리보다 훨씬 길게 예배드리지만, 의자조차도 없습니다. 서서 예배드립니다. 사실 우리가 아주 높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서서 만납니다. 하물며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를 드림에 있어 의자에 앉는다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는 것이 정교회의 생각입니다. 계속 앉아 있다 보면 자연히 자세가 흐트러집니다. 몇 년 전에 어느 독일개신교회를 가보니 책받침이 의자 뒤에 붙어 있지 않고 앞에 붙어 있었습니다. 뽀족한 판딱이가 앞으로 나와 있으니 앉아 있어도 등을 의자에 댈 수가 없고,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있어야 합니다. 졸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한 백 년 전까지만 해도 긴 막대기를 들고 조는 사람들을 깨웠다고 하는데, 나중에 예배당을 만들면 그렇게까지는 못해도 예배당 한 가운데에는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의자에도 뒤가 아닌 앞에다 판딱이를 댈 예정입니다.(동의하시는 분 손 좀 들어주세요.) 예전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거룩의 가식을 조장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남한교회와 같이 문자에 매인 지식 신앙도 문제입니다. 사람은 지식이 많아지면 따지게 되어 있고, 따지다보면 분열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바울로 사도도 사랑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지만,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고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해석의 기본 기준]

 

이와 관련된 성서 해석을 함에 있어 잘못을 범하게 되는 큰 예 중의 하나가 오늘 루가복음 본문의 말씀입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집을 방문하는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의 발아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고, 언니 마르타는 차를 내오고 과일을 내어오고 식사를 준비하는 일에 경황이 없었다. 마음이 급했던 마르타가 예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는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칭찬하시는 것은 마리아가 선택한 곧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 곧 성서공부다라는 결론을 쉽게 내립니다. 제가 아는 한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그렇게 합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목회를 보다 쉽게 하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성서에 관해서는 목사들이 많이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물론 이 구절만 갖고 본다면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것을 아주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 구절을 해석할 때는 보다 폭넓은 관점이 필요합니다. 다른 구절과 마찰은 없는지, 성서 전체가 지향하는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지를 잘 살펴보고 해석을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본문에 근거하여 마리아가 선택한 말씀을 듣고 배우는 지적인 일이 마르타가 선택한 손님을 접대하는 실천이나 행동보다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짓게 되면 곤혹한 일이 당장 생깁니다. 우선 식당 봉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은 예수께서 별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일에 흥이 나질 않습니다. 그러면 음식 맛이 떨어지겠지요. 그러면 먹는 사람들이 불평이 일게 될 것이고, 그러면 교회 식당은 불평으로 가득 차게 되고 이 불평은 점차 4층에서 3층으로 3층에서 2층으로 1층으로 내려오게 되어 교회는 불평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일차적으로 하느님께 예배하는 곳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배나 하느님의 말씀이 책상 위에 성서를 펴놓고 공부하는 지적인 활동만으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삶으로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깨달음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서구의 교회들은 구원을 몇 개의 성서 구절에 연계하여 이를 암송하면 마치 구원을 이룬 것처럼 착각하는 초등학교식의 믿음의 과정을 다 겪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는 헌금도 적게 하고 새벽기도도 없고 철야기도도 없는 뜨뜨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겉만 보는 잘못입니다. 적어도 죽을 때에 재산들은 교회에 남길 줄도 알고, 교회 출석은 열심히 안 해도 환경운동이나 제3세계를 위한 평화운동에 자신의 시간을 투여합니다.

 

제 처남이 지금 독일 여행 중인데, 첫날 비행장에서 역까지 택시를 타고 갔는데, 그만 지갑을 택시 좌석에 놓고 내린 것입니다. 물건을 사고 돈을 지불하려다가 지갑을 놓고 나온 것을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내렸던 곳으로 갔는데, 아까 그 택시 운전사가 자기를 보고 손을 흔들더라는 것입니다. 이 택시 운전사 또한 가다보니 지갑이 보여 가던 길을 돌아 다시 그 자리로 와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 고마워서 지갑 속에서 10유로 한 장과 20 유로 한 장해서 30유로를 꺼내 건넸더니 안 받겠다고 해서, 처남이 보다 강한 어조로 받아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럼 하나만 받겠다고 하면서 10유로만 가져가더라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나라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앙은 삶으로 행동으로 말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믿음의 끝은 행동]

 

여러분 마르타와 마리아 얘기 바로 앞에 있는 성서 구절이 무슨 말씀인지 아세요? 예수께서 한 율법교사에게 한 말씀입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율법서에 기록이라고 정답을 사뭇 자랑스럽게 답하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입으로 말하는 답은 맞으니 이제는 이를 손과 발로 실천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자 본래 몰라서 예수에게 질문을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자 했던 이 율법교사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라는 약간은 도전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 하나도 어려운 질문이 아닙니다만, 당시의 유대의 율법 교사들에게 있어서 이웃이 누구냐?‘ 라는 질문은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질문이었습니다. 선한 것이 전혀 나올 수 없는 갈릴리 사람들은 우리의 이웃인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한때 형제자매였지만, 지금은 피가 더러워진 사마리아인들은 우리들의 이웃인가? 아닌가? 초대교회 안에서도 논란이 되었지만, 성전을 더럽히고 자신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로마인들 또한 사랑의 대상인 이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수많은 논쟁이 있어왔던 것입니다.

 

지금 남한의 기독교인들에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 이웃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삼부자를 포함한 북한 공산당원들은 포함됩니까? 포함되지 않습니까? 라는 앙케이트 조사를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진보적이라는 우리 향린교회 안에서도 상당한 논쟁이 될 수 있는 질문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수많은 함정이 숨어 있는 까다로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는 하나의 얘기를 합니다. 한 사람이 길에서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흠뻑 두들겨 맞아 피를 흘리고 신음하여 쓰러져 있는데, 사랑을 전문으로 가르쳐온 사제나 성전에서 일하던 레위인은 그냥 못 본 채 지나갔는데, 유대인들이 사람 취급조차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를 해주었을 뿐더러 다음날 떠나면서 여관주인에게 돈을 따로 주면서 잘 돌봐줄 것을 부탁하고 돈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주겠다는 얘기를 하고 떠났다는 얘기를 합니다. 사실 이 얘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진 실화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얘기를 듣는 청중이나 이 율법교사가 반발할 가능성이 많거든요.

 

이렇게 얘기를 하고 나서 예수는 율법교사에게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를 곤혹스럽게 하고자 질문을 던졌던 율법교사는 여기서 크게 한방을 먹습니다. 그런데 율법교사가 정말 배움의 사람이었다면 그는 돌아가면서 세 가지의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을 것입니다. 첫째 이웃을 얘기할 때는 사랑을 베푼다는 것을 전제로 얘기해야지, 머리로 이웃을 규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깨달음이고 두 번째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음을 던질 때는 나를 중심에 놓고 이웃을 묻지 않고, 강도 만난 사람 곧 지금 당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물음의 중심에 놓는 피해자 중심의 주객전도의 사고전환이 필요하고 세 번째로 신앙은 물음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은 결단으로 결론지어지는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마지막으로 더 나아가서 야훼 하느님은 애굽에서 고통당하던 노예들의 신음소리에 응답하셨던 분임을 깨닫고 하느님은 고통당하는 이웃 속에 이미 함께 아파하고 계시니 결국 하느님 사랑이 이웃사랑이요 이웃사랑이 하느님 사랑이라고 하는 논리로는 구별이 되지만 실제에서는 하나라고 하는 진리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땅과 집을 빼앗기고 아파하고 저항하는 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고, 우리 남한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미국과 남한, 일본이 합작하여 지난 60년동안 줄기차게 가한 경제봉쇄정책과 군사훈련으로 인한 북한 주민들의 고통 속에 우리가 믿는 야훼 하느님께서 함께 아파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관심하는 궁극적인 질문 영원한 생명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답은 언제나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는 예수님의 실천 명령으로 마치는 것임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좋은 몫의 오해]

 

그런데 이렇게 실천 명령에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에서 마리아의 말씀 듣는 행위가 마르타의 봉사하는 일보다 더 좋은 것이었다고 결론을 짓게 되면 말씀의 모순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마리아가 택한 참 좋은 몫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말씀을 듣는 그 행위 자체를 두고 한 말인지 아니면 좀 더 다른 의미가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그 성품과 기질에 따라 마리아형이 있고 마르타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성적이어 책읽기와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색형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외향적이어 사람들 대접하기를 즐겨하는 행동형이 있습니다. 성품이나 기질들은 타고난 것입니다. 타고났다면 이는 하느님이 주신 개성인데, 어떤 개성은 좋은 것이고 어떤 개성은 나쁜 것이라고 하는 비교나 평가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사고형, 마르타를 행동형으로 구별하는 것은 괜찮지만, 이를 비교하여 우열을 따지는 식으로 오늘의 성서 구절을 해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마르타가 예수께로부터 야단을 받았던 것은 마르타가 말씀을 듣지 않고 부엌에 들어가 시중을 들었다는 행위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접대를 준비하면서 가졌던 마음의 상태였던 것임을 누구나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마르타를 향해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고 있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마리아가 택한 성서공부로 해석하지 않고, ‘걱정에 반대되는 평안한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만약 마르타가 오랜만에 오신 스승 예수께서 자신이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그리면서 룰---- 휘파람을 불며 기쁜 마음으로 준비하였다면 오히려 더 큰 칭찬을 받지 않았을까요?

 

경황이 없다.’ ‘많은 일에 마음을 쓰다라는 말은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이리저리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분주하다 영어로 business 다 그런 뜻입니다. ‘나 바빠! 말 걸지 말아!’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하늘뜻을 준비하는 토요일 저녁 제 어린 자녀들이 접근하여 함께 놀아주기를 원했을 때, 저의 대답이 그러했는데, ‘아빠 지금 바빠요. 너희들끼리 저기 가서 놀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태도였다고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건 제 마음이 분주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꾸중하시는 부분은 마르타의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분주한 상태였습니다. 저는 예배란 이곳 을지로 2가 향린교회 3층 예배당에서 일요일 아침 11시에서 12시 사이에 드리는 이 예배가 참 예배가 아니라,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온 마음과 뜻을 다하여 그래서 흐트러진 마음이 아닌 하나의 마음이 되어 그래서 보이지 않는 이웃의 신음소리 속에 하느님이 함께 아파하시는 소리가 어우러져 내 귀에 들렸다면 그게 바로 참 예배요 진정한 예배라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생각이 딴 곳에 가 있다면, 예배 후에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거나, 월례회나 다른 모임에 마음이 가 있어 마음 따로 몸 따로 분리가 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몫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여러분이 거기에 집중하고 그래서 자신을 제 3자의 입장에서 조명할 수 있다면 그래서 목표 달성에 일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그때 여러분은 좋은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해방적 관점]

 

그리고 더 나아가 마리아가 택한 좋은 몫을 여성 해방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마르타가 하는 손님 접대하는 일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몫입니다. 당시 여성은 남성에 비해 현저하게 격이 낮았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그러했지만, 여자들은 공부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이 잘 낳고 살림 잘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면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유대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의 발치 앞에 앉았다고 오늘의 성서 구절은 말합니다. 이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설명하는 관용어구입니다. 마리아가 남성들만이 제자로 인정받는 사회에서 여성으로 제자가 된 것입니다. 당시의 여성에 대한 인식을 바꾼 매우 혁명적인 일입니다. 3백년 전 조선시대에 여자 아이가 마을 서당에서 남자 아이들과 함께 천자문을 공부하고 논어 맹자를 공부한다. 이는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2천년 전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는 엄청난 혁명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택한 좋은 몫이란 마르타가 택한 몫과 비교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가 추구했던 양성평등, 여성해방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바르게 이해되는 것입니다.

시편과 아모스의 본문 말씀들은 근 3천년 전 저 유대 땅에서 외쳐진 글이지만 어쩜 오늘 우리 시대에 그대로 맞는지 저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악명 높은 영웅이여, 네 어찌 악한 일을 자랑하느냐? 너는 자나 깨나 해악을 꾸미고 속임수의 명수로구나. 해치는 소리라면 모두 좋아하는 사기꾼아, 하느님께서 너를 박살내어 영영 없애버리시리라. 장막에서 너를 끌어내어 인간 세상에서 뿌리 채 뽑아버리시리라.“ 이 구절은 지금의 전두환씨의 운명과 그대로 일치합니다. 악명 높은 영웅이지요. 광주학살의 원흉이고 정권을 잡아 수많은 정적을 국가내란죄로 몰아 가두고 고문하고, 대학생들을 삼청대로 끌고 가 폭행을 가하는 등 엄청난 악을 저질렀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골프장을 드나들고 비싼 음식에 집에는 고가의 미술품과 골동품으로 장식되어 있지만, 29만원밖에 없다고 말하는 세상이 웃을 수밖에 없는 희대의 사기꾼입니다. 지금은 시민들의 눈이 있으니 밖으로 나올 수도 없는 감옥 아닌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박근혜씨를 홀대한 대가에 국정원 대선조작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눈길을 돌리기 위해 전두환을 다시금 광장으로 끌어내고 있지만, 하여간 악은 잠시 승리하는 것 같아도 결국 패망을 가져온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 전두환을 감옥에 다시금 집어넣는다고 해서 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오늘날 시세로 환산하면 수십조 원에 해당하는 재산을 함께 나눠 가진 가족 친지를 포함한 그 일당들이 엄청난 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약자의 설움은 나라 멸망의 새벽닭 울음]

 

아모스는 성서 안에서 가진 자의 횡포를 가장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예언자입니다. 모든 예언자들이 다 그러하지만, 우리의 잠자는 양심을 콕콕 찌르는 불편한 예언자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흙에 묻혀 사는 천더기의 숨통을 끊는 자들아, 겨우 한다는 소리가, 곡식을 팔아야 하겠는데 초하루 축제는 언제 지나지, 밀을 팔아야 하겠는데 안식일은 언제 지나지? 되는 작게, 추는 크게 만들고 가짜 저울로 속이며 등겨까지 팔아먹어야지. 빚돈을 이용하여 종으로 삼고 미투리 한 컬레 값에 가난한 자, 종으로 부려먹어야지 하는 자들아.” 미투리는 요즘 말로 하면 신발이나 구두를 말합니다. 구두 한 켤레 값이 비싸면 얼마나 비싸 설마하면 사람 목숨과 바꾸겠는가? 하고 서민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만, 수 천 만원하는 고가의 핸드백이 있는 것처럼, 그런 정도의 고가의 구두가 있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여간 28백년 전 유대 땅의 빈부의 격차나 지금 남한 땅의 빈부의 격차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모스 예언자를 통해 주시는 말씀은 사회가 그렇게 되어 없는 자들이 가진 자들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면 그렇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될 것이다라는 경고이고 실제로 유대나라는 그렇게 망했습니다. 나라가 망하면 부자도 권세 있는 자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나라가 어떠한가요? 물론 지금 구두 한 켤레 값에 사람이 노예로 팔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만한 돈이 없어 괴로운 나머지 자기 목숨을 끊는다면, 노예와 같이 살수는 없다 하여 차라리 자기 목숨을 끊는 사람이 여기저기 있다고 한다면 우리 사회의 종말 또한 그리 멀지 않은 것입니다.

 

쌍용자동차가 회계조작을 통해 2,300명 이상을 해고시켰고, 이 때문에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중 24명은 암담한 현실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물론 지금 이시간도 어디에선가 자기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루 평균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암담한 현실에 절망하여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세계 제1의 자살률 국가가 바로 이 내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남한 땅인 것입니다.

 

여기 쌍용차 자살자들이 남긴 유서의 일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같은 꿈과 희망을 쫓았던 분들에게 전 그 꿈과 희망마저 버리고 가는 비겁한 겁쟁이로 불러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로 인해 꿈과 희망을 찾는 끈을 놓지 마시고 꼭 이루시길... 그동안 모든 이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2013.7.15. 박정식

 

이제 더 이상 좁은 방에서 갇혀서 흐느끼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양심이 허물어진 삶은 의미 없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지들 가는 길에 희망만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2012.12.22. 이운남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내가 못가진게 한이 된다. 꼭 돌아와서 승리해 주십시오,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 2012. 12. 20 최강서

 

- 주 야훼의 말씀이시다.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 소위 말하는 야훼의 말씀이라는 성서의 구절들은 오늘 이 남한 땅 5만 곳이 넘는 교회 안에서 장엄한 파이프 올갠 소리와 찬송소리에 맞춰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다만 거리에서 피 흘리며 신음하는 자들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싸매어 주고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에 데려다 치료를 해주는 행동하는 야훼의 말씀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