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 악령을 굴복시키는 평화의 영

열하 5:1-14; 시편 30;6:1-16; 10:1-11, 16-20

 

[죽음 준비]

 

지난 주일 꼭 이 시간에 저의 육신의 아버지이신 조웅래장로께서 우리 나이 88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무척 충격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도 평소와 다름없이 전화로 얘기를 주고 받았기에 충격이 컸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저와 함께 죽음에 대한 얘기를 자주 하여 왔었고,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유언장도 이미 준비를 잘 해놓으셨기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모든 장례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기도로 함께 하여 주신 교우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아버님 죽음을 통해 하느님께 더욱 감사드리는 것은 아버님께서는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일어나셔서 행동하시다가, 피곤하다며 잠시 의자에 앉아 계시다가 어머님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시었는데, 만약 아버님께서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였다면 한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저로서는 상당한 어려움을 치룰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님과 동생이 목사였기에 누구보다도 목회자의 공적인 삶을 잘 알고 계셨기에 저에게 그런 어려움을 주지 않으시기 위해 기도하여 오신 일이라 생각이 들고 또 그 소원을 들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한문덕목사님을 통해 들으셨지만, 지난 주 루가복음 본문은 예수께서 어떤 청년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하자 그 청년은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장례를 치루고 나서 따르겠다고 답을 하고 예수께서는 이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사실, 아무리 성서의 말씀을 잘 지키고자 애를 쓰는 목사라 하더라도 이 말씀 그대로를 실천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사실 이 구절로 인해 초기 선교 시절 기독교는 조상 제사를 무시하는 서양의 사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장례는커녕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예수를 따르겠다는 청마저 허락하지 않으시고 이는 곧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에 비유하셨습니다.

 

사실 이런 말씀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임박하여 제자들에게 남은 시간이 없음을 강조하는 종말론적인 표현이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하여간 옛날 같으면 3년을 무덤 곁에 있어야 하지만, 지금은 3시간도 부모님 무덤 곁에 머물지 아니하고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몇 년 전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가족에게 유언을 남기기를 제가 죽으면 화장을 하여 반은 한라산 백록담에 반은 백두산 천지 근처에 뿌려줄 것을 말씀드렸고, 옷도 검은 옷 대신에 평소의 밝은 옷을 입고 오시라는 부탁을 드린바 있습니다. 이번 장례식에서 자녀들을 만났을 때, 저의 유언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제가 아버님 죽음의 소식을 들었던 때는 기장 총회 평화통일공동체 목사 장로 30여명과 함께 백두산 천지를 막 올라갔다 내려온 때였습니다. 이번 백두산 기행은 통일을 염원하는 기도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저 개인으로는 저의 뼈가 뿌려질 화장자리를 한번 돌아보는 의미도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지만, 나이든 어르신들의 하나같은 소원은 가족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고, 깨끗하게 세상을 떠나고 싶은 것입니다. 그냥 잠을 자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고 싶은 것이 모든 이들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또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히트를 한 '아무르'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습니다. 치매에 걸린 부인을 돌보다가 힘에 지친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 스토리로만 본다면 비참한 영화이지만, 이를 예술적으로 잘 승화시켜 잔잔하고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 영화입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고민하게 했던 영화입니다.

 

어제와 그제 새 교우들과 함께 천안 디아코니아 영성의 집에서 가진 영성수련을 통해 유언장 작성 시간을 가졌지만, 사람은 누구나 젊든지 나이가 들었든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유언장 정도는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일단 이를 작성했으면 그 이후는 죽음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일을 찾아 힘 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아직 유언장을 작성하지 않으신 향린교회 어르신들은 유언장을 작성하시기를 부탁드리고 그 이후에는 청년의 기상을 갖고 이 땅이 보다 정의롭고 보다 평화로운 사회가 되도록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세계 구원과 민족 구원]

 

오늘 루가복음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비장한 각오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을 파송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이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든 복음서들이 동의하는 바이지만, 72명의 제자들이 있었다고 하는 기사는 루가복음에만 나오는 얘기입니다. 어떤 번역에서는 70명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헬라어 사본이 어떤 것은 72명 어떤 것은 7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72명 맞냐 혹은 70명이 맞느냐 하는 물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숫자가 상징하는 바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의 구원을 다루고 있는 반면 루가복음은 이방인들의 구원, 곧 온 세계 사람들의 구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족보에 있어 마태는 그 시작을 아브라함에 두고 있지만, 루가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하고 있고 그가 두 번째 복음서인 사도행전은 유대인 선교를 넘어 이방 선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70이라는 숫자는 모세 율법서를 보면 70 장로 혹은 나무 70그루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있고, 특히 창세기 10장에 노아의 홍수로 인해 세계 인류가 전멸을 하고 그의 세 아들들로부터 새로운 세계가 시작한다고 증언하는데, 10장에 기록된 그 아들과 손자들의 숫자가 70명입니다. 그래서 오늘 루가복음 본문 바로 앞장인 9장에 보면 예수께서 12제자를 파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파송의 얘기가 오늘 10장에서 72 제자를 파송하는 얘기와 거의 똑같습니다.

 

로마라고 하는 세계적 시각을 갖고 있던 루가에게 있어 12명을 파송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세계 선교를 위해 70명의 제자를 파송하는 장면을 넣은 것입니다. 70명 파송이 사실이냐 아니냐? 답변하기는 힘들지만, 성서학자들은 이는 루가의 창작일 것이라고 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루가복음 10장은 70명의 제자를 파송하며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미리 둘씩 짝지어 보냈다고 말한 반면, 마태복음 10장은 12명의 제자를 파송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마태는 맨 마지막 구절에서 모든 민족을 제자삼기 위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부활 예수의 선교 명령으로 결론을 맺고 있지만, 복음서 중간중간 예수를 매우 편협한 유대 민족주의자로 그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계구원과 민족구원은 서로 이율배반적인 것인가? 우리 민족의 통일을 얘기할 때, 주변 국가들은 이를 하나의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남북의 백성들은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통해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염원을 갖고 있습니다. 남북통일 없이 세계 평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잃어버린 양에게만 가라고 하는 명령은 일의 우선순위의 관점에서 얘기하는 것이지 다른 민족의 구원을 배타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샬롬의 평화]

 

그런데 루가복음 9장의 12제자의 파송 장면과 70 제자의 파송의 장면을 비교해 보면 기본 골자는 같지만, 몇 가지 다른 표현들이 나옵니다. 첫째는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 하는 표현과 둘째는 평화의 외침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세 번째는 12제자 파송장면에서는 복음을 선포하고 병을 고쳐주었다는 얘기만 나오는데 반해 72제자 파송 얘기에서는 제자들이 돌아와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뱀이나 전갈을 꺾는 능력을 주었다.“ 72제자 파송장면은 12제자 파송에 비해 훨씬 강도가 높고 평화를 반대하는 적대 세력이 강하게 반발할 것이라고 하는 의미심장한 암시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평화를 빌었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평화가 되돌아 올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의문이 생깁니다. 아니 평화라는 것은 좋은 것인데, 어떤 사람들이 평화를 원치 않는다는 말인가? 제가 여러분에게 평화를 빕니다!’ 라고 말하는데, 아니 나는 평화를 원치 않습니다.’ 라고 답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옛날이나 지금이나 평화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화를 원하다고 말하지만 실제 속으로는 평화를 원치 않고 분열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누구인가요? 분열을 통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과 집단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오셨지만, 예수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함하고 끝내는 군중소요죄와 신성모독죄로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한 세력이 있었습니다. 왜 세상은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려드는 것일까요? 평화가 무엇인가요? 평화롭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히브리어로 샬롬인 평화는 성서의 가장 핵심 내용입니다. 중동 사람들은 서로가 만날 때에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우리도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혹은 진지 잡수셨습니까? 라고 인사하는 것도 실은 평화의 인사입니다.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원합니다. 평화는 인류 역사 이래 모든 이들의 염원입니다.

 

평화가 무엇입니까? 그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이 제각기 부름을 받고 세상에 태어난 대로, 자기의 본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타인으로부터 강제받지도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타인을 억지로 강제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평화의 사전적 정의는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만, 성서가 말하는 평화, 히브리어로 샬롬은 단지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과 늑대, 송아지와 곰, 사자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세상이 가능할까요? 그건 이리와 곰과 사자가 약한 동물을 잡아먹어야 사는 육식으로 된 창자의 구조를 뜯어 고쳐 풀을 뜯어먹고 살아갈 수 있는 초식 창자의 구조로 바꿀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곧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고 창을 부셔 낫을 만들었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가 고기를 먹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고기 맛에 길들여진 우리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어렵듯이 약자들을 잡아먹음으로 자신의 힘을 유지하는 권세자들에게 있어 이러한 자기 포기는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 마을로 다니며 선포하라고 부탁하신 평화의 선포는 당시 로마 제국이 세상을 창과 칼로 다스리면서, 작은 나라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자유를 외치는 모든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몰아 죽이고 저들의 가족을 노예로 만들고 나서 평화가 임했다고 외치는 Pax Romana 곧 제국이 외치는 평화와 반대되는 또 다른 평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힘 있는 자들이 말하는 평화는 자신들만을 위한 평화이지 모두를 위한 평화가 아니다. 진정한 평화, 하느님의 정의에 기초한 진정한 평화는 약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평화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서는 이 약자를 병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Pax Americana의 실체]

 

오늘날 로마를 대신하는 세계 제국이 있는데, 그건 미국입니다. 제가 사용하는 미국의 미자는 아름다운 미()나 쌀 미()가 아닌 미혹할 미()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를 말하고 기독교를 표방하고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서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지만, 성서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행하는 정신상태가 비정상인 혼미(昏迷)한 나라이자, 4%의 인구로 세계 자산과 에너지의 거의 반을 사용하면서 그것이 경제성장이라고 말하고, 제 마음대로 달러를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작은 나라들 특히 남한과 같은 나라들을 경제 예속의 길로 이끄는 미혹(迷惑)의 나라가 미국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말하면서 뒤로는 엄청난 첨단 무기인 신예전투기들과 미사일들을 사들이도록 강제하는 악의 축이 곧 미혹의 나라 미국입니다. 앞에서는 대화를 말하고 뒤로는 키리졸브라고 하는 해괴한 이름으로 끊임없이 전쟁연습을 하여 상대방을 자극하고 그래서 상대방이 굴복하지 아니하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언론의 힘으로 악마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세계 평화가 온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이 말하는 평화의 참 모습의 비밀을 폭로한 스노우든이라는 정의로운 시민을 국가반역자로 몰아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고 그를 도우려는 모든 나라들에 정치적 경제적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 38개국 대사관의 전화와 팩스 이멜을 도청했다고 하여 다른 나라들은 모두 반발하고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는데, 우리나라만 꿀 먹은 벙어리입니다. 그러니까 북쪽에서 남한을 미국의 괴뢰정부라고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까? 상전이라도 잘못했으면 이를 비판할 줄 알아야지 청와대에는 종미(從迷) 꼭두각시들만 앉아 있습니다. 이것만입니까? 대통령 선거에 부정 개입한 국정원에 대해 바른 수사를 외치는 정의로운 시민들을 권력의 하수인이 된 세력들은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폭력집단으로 몰아가고 심지어는 빨갱이라는 극단적인 용어까지 쓰고 있는 형편입니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중대한 범죄행위가 일어났음에도 현재의 권력 집단들은 잘못하면 자신들이 현재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으로 인해 오히려 적반하장식의 물타기 곧 북방한계선 NLL을 들먹거리고 고 노무현대통령의 발언들을 왜곡 변형함으로 또 다른 매카시즘 북풍을 일으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현실의 질곡을 넘어서게 하는 믿음의 힘]

 

2천년 전 로마는 예수를 테러리스트로 국가반역자로 몰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복음서 저자들은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서는 전연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교 보고에서 제자들은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이름으로 복종시켰다는 마귀들은 누구인가요? 이 악한 영들의 실체는 무엇인가요? 단순히 한 인간의 육체를 병들게 하는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악한 영들의 실체인가요? 성서에서 육신의 질병 치유를 강조하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은 질병이 곧 하느님의 저주로 인한 악한 영들의 짓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질병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 아니라, 하느님의 저주로 인한 사탄의 지배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어떤 사람의 병을 고쳤다는 얘기는 오늘날의 병 치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탄의 지배 체제를 물리쳤다는 말입니다. 폭력으로 평화를 가져오려는 악한 세력에 대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와 생명의 힘으로 이들을 이겼다는 말입니다.

 

오늘 열왕기하 본문에서 말하는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의 병을 고쳐준 이야기는 단순히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한 인간의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하는 병 치유의 기적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야훼 하느님이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온 시리아의 신들보다 더 위대하다고 하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고백문인 것입니다.

 

실제는 반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이겼나요? 아니지요. 예수의 제자들이 로마나 그 시녀들인 예루살렘의 권력을 이겼나요? 아니지요. 예수는 살해당했고, 제자들은 그 권력의 칼 앞에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이 복종했다는 말은 거짓말인가요?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 세상에서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다.“는 말은 사실에 기초하지 않는 일종의 허풍인가요? 지금도 여전히 사탄의 세력들은 그 불의한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나요?

 

사실 세상이 제자들의 보고나 예수님의 말처럼, 정말 악령들이 굴복하고 그래서 평화가 넘치고 정의로운 세상이 되었다면, 그때는 신앙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된 것이지요. 더 이상 정의도 외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평화를 외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도 필요가 없고,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야훼 하느님께 나와 기도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지금 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이를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이미 그 나라는 와 있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인을 극진히 사랑합니다. 그런데 아직 결혼 약속은 없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더 열심히 그를 사랑하며 살아가거나 아니면 혹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염려로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을 심는 사람들]

 

저는 바울 선생의 유명한 본문 말씀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를 심는 사람은 육체에게서 멸망을 거두겠지만 성령에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둡니다.” 여기서 자기 육체란 개인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물질 욕망을 뜻하기도 하겠지만, 저는 더 깊은 차원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끝내 승리할 것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의심하고 주저하는 사람 또한 자기 육체를 심는 사람이라고 이해합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며 악한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이 내게 있다고 하는 믿음은 오직 성령을 심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하느님 자녀들의 특권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앙인은 40일동안 국정원 선거 개입을 비난하는 일인 시위를 하고 있고, 어떤 신앙인들은 함께 모여 이를 규탄하는 거리기도회를 갖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 선교는 단순히 서로를 향해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리떼 가운데 들어가는 양들과 같이 정치적 핍박과 탄압에 굴하지 않는 믿음의 행위를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옛 자기는 죽고 새로운 자기가 탄생했다고 말합니다. 그 새 자기는 어떤 자기입니까? 그건 바로 주님의 말씀하시는 사랑과 자비에 기초한 평화가 폭력에 기초한 제국의 평화를 대신하는 그런 세상이 오고 있음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가득찬 자기였습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확신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끝내 이긴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정말 확신하십니까?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정말 그렇다면 그렇게 믿고 자유의 혼이 되어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영원토록 함께 할 것입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