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된 자유인

시편 77, 1-2, 11-20 ; 왕하 2,1-2, 6-14 ; 갈라 5,1, 13-25 ; 루가 9,51-62

한 문 덕 목사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제1성서와 복음서의 말씀은 제자가 스승의 뒤를 잇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스승인 엘리야의 진정한 후계자가 되기를 원하고(두 몫을 달라고 하는 것은 맏아들에게 주는 몫이다. 신명 21:17), 엘리야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그를 따라가 그 소망을 이루게 됩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를 따를 때 어떤 각오를 해야 하는지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죽음 이후 루가공동체가 예수의 후계자로써 어떠한 각오로 살았는지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서신은 그리스도의 제자 된 자의 삶의 태도와 열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제1성서에 대해서는 지난 주에 고상균 목사께서 많은 깨달음을 주셨고, 또한 제가 2012년 2월 19일에 동일한 본문으로 길게 하늘뜻펴기를 한 적이 있기에 오늘은 복음서를 중심으로 살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루가복음서 본문은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실 날이 가까워져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정하셨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늘에 오르실 날이란 십자가 죽음과 더 나아가 승천을 함께 포함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예수께서 죽음의 길을 가기로 결정한 것에 더 초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살다보면 인생의 큰 변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전환의 국면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예루살렘 행은 생명을 거는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루가복음서 9장 28절 이하를 보면 산에 오르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눌 때도 이 문제를 가지고 의논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오경과 예언서의 모든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이 서야할 역사적 자리를 확정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루가공동체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에 가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기억하면서 예수의 제자공동체로서 자신들이 가야할 길은 무엇이며, 또 어떤 각오를 가지고 가야 하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따라 가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의 길을 바로 알고 따르는 것입니다. 루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19장 10절).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두고, 온 산을 헤매는 목자이신 예수님, 집 떠난 작은 아들이 돌아오자 잔치를 베풀고, 또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한 큰 아들을 달래는 자상한 아버지 같은 분이었던 예수는 그렇게 잃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에 가는 길에 또한 당대 잃어버린 이들로 취급받았던 사마리아에 들러 거기에서도 선교를 하시려고 제자들을 시켜 미리 준비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구원의 초청을 거절하는 이들을 보고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예전 엘리야가 이방인을 섬기던 아하지야 왕의 오십인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인에게 하였듯이(왕하 1장 10절, 12절)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들을 불살라 버리게 하자고 제안하지만 예수는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많은 다른 사본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한 자인지 알지 못하느냐?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목숨을 잃게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구하려고 온 것이다.” 루가가 전하는 예수의 길의 첫째 원칙은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는 포용성입니다. 자신들을 반대하거나 예수의 복음을 수용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을 박해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보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는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제1성서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보복이 갈수록 커지고 심각하게 되어 악순환의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며, 살인을 저지르거나 상해를 입히고도 돈으로 해결하여 사람의 가치를 물건으로 취급하는 가진 자들의 횡포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 좋은 법입니다. 그러나 이 법은 용서라고 하는 하느님의 무조건적 은총의 경험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악과 고통이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이미 악에 의해 발생한 고통에 대해 고스란히 그 고통을 주는 것으로 되갚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원칙은 모든 생명을 구하는 것이며, 오로지 용서를 통해 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선으로 악을 대하여 악을 줄여 나가고 결국은 악을 소멸시키는 매우 높은 수준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우리에게 죄진 자를 사해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피해자가 자신에게 해를 끼친 가해자를 용서하면서 그렇게 한 것처럼 하느님께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피해를 자신이 고스란히 받아 안고서, 선으로 악을 갚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이것이 가능하려면 우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진리를 내 삶에 체현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본 회퍼 목사님께서 옥중에서 쓰신 한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인간을 경멸하는 자는 결코 인간으로부터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것은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달성하려는 것 이상을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고 있는가? 왜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이 유혹에 빠지기 쉬운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생각하지 못했던가? 우리는 인간을 그들의 성취가 아니라, 그들이 당하는 고난 속에서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에 대한 -바로 약한 자들과의- 유일한 관계는 사랑, 즉 그들과의 사귐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다. 하느님은 인간을 멸시하지 않고 인간을 위해서 인간이 되셨다.

이 짧은 글은 그리스도교적 인간 이해와 그러한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해 명료하게 그러면서도 깊이 있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유혹에 빠지기 쉬운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 또 한편으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이루지 못하는 것 그 이상을 늘 남에게 기대한다는 것!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의 악함을 보시지 않고, 그들의 연약함을 보시며 그들을 끝내 놓지 않는다는 사실, 그래서 인간이 이뤄낸 성취 속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당하는 고난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면 악한 행위조차도 연약함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을 선으로써 갚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 서신에는 인간이 저지르는 15가지의 악덕 목록이 나오는데 그것은 크게 성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 종교적인 것,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것, 자신을 절제하지 못해 생겨난 것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모두는 인간의 연약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모든 고통의 원인을 바로 무명(無明), 밝지 못함 즉 어리석음에서 찾고 있는데, 정말로 어리석음이야말로 인간을 악마적으로 오용하도록 하는 가장 큰 연약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 회퍼 목사님의 또 다른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한 사람의 권력은 다른 사람의 어리석음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한 인간이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과정은 인간의 특정한 -따라서 뭔가 지적인- 소질이 갑자기 위축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넓히려는 어떤 이들의 거대한 힘 앞에서 자신의 내적 자립성을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하며, -다소간 무의식적으로- 굴욕적인 상황 속에 있는 자신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을 말한다. 어리석은 사람이 고집이 센 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어리석인 사람이 자립성을 박탈당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어리석은 사람과의 대화해 보면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대화 속에서 우리는 그 사람 자신을 온전한 개인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강하게 다가온 표제어나 선전문구 등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속박 가운데 있고, 현혹되어 있으며, 본질상 오용되고 악용된다. 따라서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잃은 채 타인의 도구가 됨으로써 온갖 악에 동원될 수 있고 동시에 그것을 악으로 깨닫지도 못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악마적으로 오용될 수 있는 위험이 놓여있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들은 영원히 파멸의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다.

본 회퍼 목사님이 보기에 어리석음이란 어떤 개인의 지적인 소질이나 능력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것이라기보다는 권력 아래에서 자신의 내적 자립성을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다보면 그 사람이 억지를 부리거나 고집이 세서 도대체 대화가 안 통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 사람 자체가 고집불통이라서기보다 폭력이 만연한 사회, 특히 국가나 기업과 같은 거대 권력이 한 개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주입된 것이 드러난 것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말만 했다하면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며 말하는 어버이 연합 할아버지들을 볼 때 우리는 그들 또한 전쟁과 같은 거대한 폭력의 피해자임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주체성을 가지고 설 수 없었던 사람, 권력의 눈치를 보며 늘 휘둘려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 없이 악을 소멸하는 일, 선으로 악을 갚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예수의 길이 어떤 길인가를 알았으면 이제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본문 이후에 연결되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이야기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하고, 그 각각 예수님은 다른 처방을 내림으로써, 제자로 예수님의 뒤를 이을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첫 번째 등장하는 이는 당당하게 나서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르겠다고 장담합니다. 말과 행동이 앞서는 사람의 부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이 말씀은 어떤 보호막이나 고향이나 집이 없는 처지에 자신을 내어 놓을 수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안정도 기대하지 못하는 불확실함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과연 이 사람이 이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앞뒤 생각 없이 너무 성급한 결정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두 번째 사람은 가만히 있었는데 예수께서 먼저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마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를 생각이 별로 없었던 사람 같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핑계를 댑니다. 가장 강력한 핑계이지요. 아버지의 장례를 먼저 치르겠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일은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선행으로 간주되었고(토비 1:18-19, 2:3-7 참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출애굽기 20장 12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에 따라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의무였습니다(창세 50,5, 토빗 4,3: 6,15). “부모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형상이다”라는 유대 격언이 보여 주듯이 제사장과 하느님께 바쳐진 나실인을 제외하고는(레 21:11, 민 6:6-7 참조), 누구든지 아버지의 장례에는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사실 예수를 따를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보냈다면 이 사람은 다시 안 올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따르긴 따르겠는데 가족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오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무모하게 무작정 따라 나서는 사람이거나, 아예 따를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따를 생각이 있지만 가족하고 작별인사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은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입니다. 여기에 “자꾸”라는 말을 스치듯 들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이 되었든, 직장일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쟁기를 잡고 밭을 갈려고 했다면 앞에서 끄는 소를 뚫어지게 보면서 쟁기를 굳게 잡고 앞으로 나가야지 자꾸 뒤를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뒤를 보면 밭도 못 갈고, 또 한편으론 여전히 쟁기를 잡고 있기에 미련이 남아 뒤를 돌아보게 하는 그 일도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흔들리는 마음을 보시고 확고한 결단을 하도록 촉구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혹시 우리들이 이 세 부류 중 한 사람이 아닌지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이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는지 따르지 않았는지 보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물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열린 질문으로 남게 됩니다. 예수를 따르려는 우리 향린교인들은 머리 둘 곳 없는 사람의 아들의 삶을 겪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더 깊은 신앙적 결단과 자기 성찰 없이 무작정 덤볐다가 또 금방 실의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한 발 빼고 머뭇머뭇 하는 우리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명하시는 예수님에게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신앙은 언제나 과단성 있는 돌아섬, 즉 철저한 회개와 헌신을 요하는데, 그럴 때마다 발생하는 심리적, 사회적 저항 앞에서 우리는 늘 우왕좌왕 한 것은 아닌가? 예수의 제자라고 하면서 사실은 세상의 연줄에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유의 서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갈라디아서의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마십시오.”라는 권면으로 시작합니다. 한편으로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미 행하신 일, 즉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해방(Liberty)시켜 자유(Freedom)의 몸이 되게 하신 은총을 누리면 되고, 또 한편으로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않도록 자유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13절에는 하느님께서 자유를 주시려고 우리들을 부르셨는데, 우리는 그 자유를 육정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말고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인으로 살라’는 말과 ‘서로 종이 되라’는 명령은 모순입니다. 그러나 자유인으로 산다면서 이기적인 욕망 충족에 빠지는 것은 방종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자유를 이웃 사랑에 사용할 때 그것은 나의 자유와 남의 자유를 다 올바로 지키는 길이 됩니다.

독재 시절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 때는 우리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주는 강력한 권력이 있었습니다. 국가권력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향을 파괴했고, 일부 기득권의 권력 유지를 위해 많은 개인이 희생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못 살게 굴고 억압하고 협박하는 권력은 타도대상이었고, 우리는 그 권력을 타도하기 위해 함께 싸웠습니다. 그 투쟁은 정당했기에 가열찼고, 뜨거웠고, 한편으로는 곧 도래할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로 설레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예수께서 가시면 어디든 가겠다고 우리는 나섰고 80년대 후반 민중의 힘이 온 천하게 가득할 때 정말 세상을 뒤바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2013년 오늘 외부의 규율과 억압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자,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정치적 자유의 신장에 따라 경제적 자유도 보장되었고 누구나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성공신화가 판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누가 우리를 억압하지 않아도 우리들 스스로가 경쟁의 우위에 서려고 자신이 자신을 착취하고 닦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없는 경쟁과 소유욕의 늪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스스로 패배자가 됩니다. 다른 이들과 함께 하기 보다 다른 이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매 순간 무엇인가 끊임없이 활동하고 또 하고, 노력하고 도전하지만 그러는 사이 피로가 쌓이고 기력은 소진되며 짜증이 나고, 무기력해집니다.

그래서 오늘날 잠깐 반짝이는 힘으로, 또는 감정의 휘둘려 예수가 가시는 길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다고 나섰다가는 금방 진이 빠지고 실망하여 지쳐 나가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활동이 아니라 진지하게 사색하는 힘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곱씹어 봅시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고 핑계를 댄 이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문자 그대로 보면 매우 파격적인 언사입니다. 당대의 예절과 경건함, 율법까지도 무시한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대다수의 주석서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의 긴박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설합니다만, 조금만 더 차분히 생각해 봅시다. 죽은 자들은 죽은 자를 장례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오히려 산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인가 다른 상징일 것입니다. 핑계를 대는 이에게 일침을 놓는 것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삶과 죽음의 대비로 볼 때 예수님의 명령은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죽음의 일인가, 생명의 일인가를 묻게 합니다. 무엇이 더 귀중하고, 더 시급한 것인가? 어느 일이 더 생명 살림에 가까운 일인가? 나 자신은 나름 열심히 무언가를 계속 하고 있지만 그것이 혹시 남과 나를 소진시키는 죽음에 가까웠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듣지도 못하고 전하지도 못했던 것은 아닌가? 이미 죽은 이를 기억하고 기리는 행위는 어찌 보면 어찌할 수 없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영역에 머물러 지금 당장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암시가 아니었던가?

지난 금요일에 약 5000명의 시민이 ‘국정원에 납치된 민주주의를 찾습니다’라는 제목의 촛불집회를 열었습니다. 같은 날 저녁 6시에 향린, 강남향린, 들꽃향린, 섬돌향린 우리 향린공동체도 기자회견을 갖고 국정원의 불법 대선 개입을 규탄하는 기도회를 하였습니다.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과 이 사실을 알고서도 숨기고 축소한 경찰의 행태가 만천하에 드러나 각계 각층이 시국선언을 하고, 광화문 파이낸셜 빌딩 앞에서는 지난 21일부터 매일 저녁 7시30분 대학생들이 주관하는 촛불문화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한쪽에서는 또 보수단체가 “NLL은 영토선이라는 주장”을 언급하면서 물타기 하는데 한 몫 합니다.

시민 운동가이자 고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사건 조사관이기도 했던 고상만 씨는 자신의 트위터에 “부정선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보수 세력이 아니다. 그냥 ‘부정부패 세력’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분과 관련되어 세간에 화재가 되고 있는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가족이 함께 시국선언문을 냈기 때문입니다. 이 가족이 낸 시국선언문을 조금만 읽어 보겠습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의 부정선거 의혹에 대한 우리 가족 시국 선언문’

국민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

Justice delayed is democracy denied. -Robert F. Kennedy

정의의 실천을 뒤로 미루면 민주주의가 거부당한다. -로버트 F. 케네디

2013년 6월 14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재임하던 국정원이 지난 18대 대선 과정에서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국정원장 개인이 개입한 것으로도 큰 중죄인데, 그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담당하는 국가정보원의 공무원을 자신의 사병처럼 여론조작에 동원했다.

경기도 고양시에 살고 있는 우리 가족 4인은 지난 2013년 6월 14일 발표된 국가정보원의 18대 대선 불법개입에 대해 용납할 수 없는 분노와 수치심을 느낀다. 대한민국의 안보를 책임지는 이 나라 최고 정보기관이 특정 후보의 당선을 목적으로 인터넷에 여론을 조작하는 댓글을 썼다는 사실은 우리 가족에게 실망을 넘어 피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안겨주었다.

또한 이같은 국정원의 부정선거 의혹에 대해 그 진실을 밝혀 사회 정의를 바로잡을 ‘권한과 책임’이 있는 경찰이 오히려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은폐, 조작했음이 밝혀졌고 대한민국의 법을 수호하는 검찰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청장만을 불구속 기소하고 이외 국정원의 모든 부정선거 관련 공무원에 대해서는 기소유예 처분하는 등 사실상의 ‘면죄부’를 내렸다.

이에 우리 가족 4인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제기하며 시국선언을 발표한다.

중간 생략하고

우리 가족 4인은 국가의 정보기관에 의해 벌어진 이번 부정선거를, 4·19와 5·18, 그리고 6월 항쟁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이들의 피와 죽음으로 이룩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흑역사’로 규정한다.

특히 이러한 부정선거 의혹을 비판하는 국민적 의혹을 훼손하고자 뜬금없이 ‘NLL 대화록’을 공개하며 극단적인 저항을 하고 있는 국정원의 반복적인 정치개입에 대해 거듭 비판한다. 이를 용인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대해 깊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더 이상 국민에게 분노와 실망을 안겨주지 않도록 하기를 충고하고 싶다. 과거 부정선거로 인해 물러난 1960년 3·15 부정 선거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강력히 촉구한다.

민주주의의 밑동까지 썩게 만든 이 사건에 대해 깊은 반성을 촉구하며 국가권력기관의 부정 선거 의혹에 대한 진실이 국정조사를 통해 모두 밝혀지기를 강력히 촉구하고자 시국선언문을 발표한다.

경기도 고양시 거주

아빠 고상만, 엄마 장경희, 아들 고충열(대학 2학년), 딸 고**(중학교 3학년)

이 가족 선언문은 대학교 2학년인 이 집의 아들이 언론보도를 보다가 너무 화가 난다면서 이 부정선거에 대해 가족들에게 우리도 뭔가 해야 하지 않겠냐는 제안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 선언문의 초안도 아들이 작성했습니다. 제가 이 시국선언문을 소개한 이유는 이 글이 개인의 일상의 영역인 가정에서 세대가 함께 고민하고 의논하여 발표되었기 때문입니다. 시국선언 하면 영향력 있는 재야 원로들이나 교수님들 뭐 이런 분들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렇게 가정에서 뭐라도 해야겠다고 하면서 한 경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것 하나가 참 민주주의의 단초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형식적 민주주의에 그 내용을 채워가는 첫걸음이라 생각합니다.

부모자식간의 대화가 단절된 한국의 가정에서 다 자란 아들이 제안하고 아빠와 엄마, 그리고 중학교 여동생이 모여 나라의 중요한 문제를 차분히 토론할 수 있는 이런 가정이 보편적 현상이 될 때 우리의 민주주의는 분명 한 단계 성숙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면 사실 겁부터 납니다. 정말 모든 것을 버리고, 전 재산을 포기하고, 집도 없이 노숙자처럼 다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리 겁을 먹고 포기합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예수님의 삶은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청년들에게 자발적 가난의 중요성을 얘기하면서 무슨 일을 해도 먹고 살 수는 있으니 너무 불안해 하지 말라고 했더니, 대다수의 청년들이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렇듯 자본주의 사회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어려운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그렇게 어렵거나 먼 데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종노릇하는 것이 지긋지긋하다면, 흥청망청 먹고 마셔 보았지만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 없었던 우리네 경험을 차분히 반추해 본다면, 이제 헛된 욕망을 버리고 주님께서 주신 참 자유에 우리는 환호성을 질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여러분이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정말 모든 것을 다 털어 놓을 수 있는 곳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그분에게서 그 자리를 발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세상을 좋게 창조하시고 모든 생명들을 풍성하게 하시는 하느님이야말로 내가 맘 놓고 기댈 수 있는 곳이라는 그 예수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안정을 기대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뛰어들 수 있고, 사실 자유란 불안의 다른 이름이며,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서(脫) 하느님을 향(向)해 나아가는 자유가 나를 초월하게 하는 모험을 감행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 안에서 모험을 할 때,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또 하기 전에 이미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내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 둘 곳이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역설적으로 온 세상이 머리 둘 곳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의 믿음을 우리 믿음으로 간직하고 예수를 따라 육정이 빚어내는 추한 일들로부터 자유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지도를 받아 사랑, 기쁨, 평화의 새 생명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님이 주신 자유를 서로를 섬기는데 사용함으로써 남이 보기엔 종이지만 자기 자신과 모두를 참된 자유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