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623일 주일 하늘뜻펴기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갑자기 더워지더니 이제는 벌써 장마철이라 합니다. 오래도록 이어질 후텁지근한 날씨에 향린교우 모두, 특별히 어르신들 모두 건강한 몸과 마음 지키시는 여름이 되시길 기원 드립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지난해의 나와 올해의 자신이 같지 않듯 매 순간이 새로운 시간과 경험이겠지만 올해는 특히 저에게 새로운 상황과 많이 만나는 때인 듯 합니다. 올 일월부터 아버지와 같은 시간, 다른 공간으로 나뉘어 있게 된 상황, 공동체의 60주년이라는 역사적 순간, 그리고 목사 임직과 함께 목회실1번 방 앞에 붙여진 고상균 목사라는, 참 어색하기만 한 이름 앞에 섰을 때의 느낌, 그리고 임직 후 첫 하늘뜻펴기로 선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그러기에 성서의 다양한 이야기 중 참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인 오늘 본문 역시 저에게는 참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네가 엘리야라면 나는 이세벨이다!>

처음 본문 열왕기상에서 엘리야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바로 직전 18장에서 사 백 오십 명의 바알사제들로 대표되는 국가권력과 혈혈단신으로 맞서 얻은 기적적 승리를 맛본 뒤라 이야기 속 엘리야의 공포와 슬픔은 더욱 크지 않았을까 합니다. 더욱이 이번에는 국가권력의 정점 왕비 이세벨이 나섰다는 점에서도 그렇겠습니다. 유대인들의 7~8세기 편집본인 맛소라 성서를 기초로 하는 우리말 성서는 다소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기원전에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서 70인역과 1차 라틴어 성서는 이세벨의 전갈 내용을 다음과 같이 더욱 대립적으로 명시합니다. “네가 엘리야라면 나는 이세벨이다. 내가 너를 내일까지 죽이지 않으면 신께서 나를 죽이실 것이다!” “야훼는 나의 하느님이시다라는 뜻의 엘리야에게 바알왕자께서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의미를 지닌 이세벨의 도전장, 네가 야훼라면 나는 바알이다. 바알이 야훼를 죽일 것이다.” 라는 편지 앞에서 왕의 부덕으로 가뭄이 온다는 내용의 실로 대담한 반정부 활동을 전개했던 엘리야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위한 도망자가 되어 남쪽 국경 부근 황무지를 떠돕니다. 마치 필생의 꿈이었던 바보회가 해산되고, 어렵게 만든 진정서가 근로감독관에 의해 휴지조각이 되며, 급기야 직장에서까지 쫓겨난 후 공사판을 전전하다 삼각산기도원 건설현장으로 들어가 숨듯 살아가던 당시의 전태일 열사와도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출구가 없다고 여겨진 엘리야는 다른 우리말 성서에서 로뎀나무로 명명되는 싸리나무, 즉 황무지 한 중간 한낮의 더위를 잠시 달래기에도 역부족인 앙상한 나무아래서 급기야 죽기를 간청합니다. “주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를 죽이십시오.” 나를 좀 도와 달라고 손을 들어 다른 이에게 손짓 할 만큼의 힘도 남아있지 않다고 느껴질 때, 더 이상 울 기력도 없다 여겨질 때, 최선을 다했음에도 돌아오는 실패와 허무함으로 그만 주저앉고 싶어질 때, 분명 위로인 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게 이래라 저래라 등 떠미는 것 같아 딱 듣고 싶지 않을 때, 그래서 전후좌우가 막혀 더 이상은 숨을 쉴 수 없다 여겨지는 순간, 이야기 속 엘리야는 우리 모두에게 한 번씩 있음직한 그 느낌과도 같이 싸리나무 아래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일어나서 먹어라! 쉬어라!>

그런데 이렇게 일생일대의 위기 앞에서 모든 것을 버리려하는 엘리야에게 하느님께는 영화 동막골의 산골 마을 이장님처럼 참 소박하고 생각에 따라서는 어이없게도 그저 먹고 마신 후, 쉬라합니다. ‘일어나서 먹어라. 참 고되었으니 일어나서 먹어라 마찬가지로 소박한 음식, 과자한 조각과 물 한 병을 주시면서 말이지요. 때로 삶과 생각을 반전시키는 놀라운 일은 그렇게 소박한 쉼, 잠시의 낮잠, 한 잔의 숨돌림, 어색하니 말없이 안아줌과 손잡아줌이나 조용하게 함께 흘리는 눈물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튼 이를 통해 죽음의 자리에서 간신히 벗어난 엘리야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고, 앞선 오경에서 모세와 하느님이 처음 만난 장소인 호렙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느님의 음성과 만납니다.

하느님의 뜻을 어긴 에덴의 인간들에게, 동생을 살해한 가인에게 등 성서 속에서 인간과 처음 만나는 대목의 하느님은 짓궂으리만치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네 동생은 어디에 있느냐?’등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의 신은 목적을 잃고 헤매고 있는 엘리야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죽음의 좌절에서는 벗어났다 하더라도 여전히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무엇을 하고 있냐는 신의 질문 앞에서 산속 동굴에 웅크린 채 그는 대답 대신 넋두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모든 백성들은 야훼를 따르는 예언자들을 죽였고, 이제 저까지도 죽이려 합니다.’

너무 큰 속상함이 있을 때, 앞을 막아서는 것이 너무 거대하다 여겨질 때, 뭔가 하느라고 열심히 했는데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거나 오히려 나빠질 때, 우리는 때로 더는 한발도 나아가지 않은 채 문제를 더욱 문제스럽게 만들어 고민하고 그만 그 문제 안에 잠겨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야기 속 앞선 18장에서 백성들이 처단한 이들은 바알사제들이었고, 자기를 죽이려 달려드는 이는 이세벨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모든 예언자들을 없애고 자신도 죽이려 한다는 엘리야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무언가 강력한 신적 존재가 단숨에 확 상황을 바꿔주기를 염원하거나 공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합니다. 신에게 주저리 주저리 넋두리를 하는 엘리야도 마찬가지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이에 대해 야훼는 웅크린 동굴에서 나와서 나를 만나라 합니다. 그리고 강한 바람, 큰 지진, 거친 불길 등 소위 한 번에 무언가 싹 바꿔줄 것 같은 퍼포먼스 속에서는 나타나지 않다가 그와 같은 것들이 모두 사라진 다음 앞선 과자 한 개와 물 한 병만큼 매우 소박하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아직 7천명이 있다!>

이제 무언가를 알아차린 엘리야는 이전의 넋두리와 같은 내용이지만 다른 느낌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상황을 야훼에게 전하고, 이에 야훼는 다음을 준비하라 이야기합니다. 북이스라엘 최고 전성기였던 아합의 치세에서 조공을 바치고 있었던 시리아의 왕 하사엘, 아합정권을 뒤엎을 차기 임금 예후, 자신의 뒤를 이어 계속된 야훼신앙운동을 이끌 후계자 엘리사 등 비록 당장은 아합과 이세벨의 치세가 서슬 퍼렇지만 차분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정치, 군사, 종교 등 사회 전 영역을 변혁시킬 때를 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것이 슬프고 두려운 엘리야에게 야훼는 다음과 같은 위로를 전합니다. “너와 함께 할 이들이 아직 7천명이나 있다.” 가수 싸이의 공연장에는 8만이 넘는 인파가 몰려도 공권력에 침탈당하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대한문 문향소에서는 십 수 명 이상을 찾아 볼 수 없을 때, 남들은 별 문제없이 잘 살아가는데 나에게만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 같이 느껴질 때,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너와 함께 할 사람들이 있단다. 그리고 저마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있단다. 힘내라.”

본문은 우리에게 현실의 어려움, 직면한 위기, 강한 세력의 악행이라는 상황에서 이를 우리대신 한순간에 날려줄 신적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않는 대신, 그렇게 약하디 약한 듯 하지만, 그 슬픔의 상황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고난의 순간을 겪어가시는 하느님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결국 지금 상황의 변화를, 어려움과 절망의 순간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그에 처한 내가, 혹은 우리가 그 현상을 회피하지 말고 직면하며, 변화와 변혁을 위해 작지만 소중한 한걸음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직면과 변화를 위한 움직임은 유대교적 율법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여성과 외국인, 그리고 노예를 계급으로 구분하려 했던 이들로 인해 큰 위기에 직면했던 갈라디아 공동체에게 보낸 바울의 돌직구 서신에서 더욱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믿음을 얻었으니 다른 외부의 도움, 즉 후견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 입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무섭기 그지없는 로마군단의 흑멧돼지 군기가 펄럭이는 슬픔과 고통의 땅 게르게사의 광인, 그 전쟁과 야만스러운 공권력의 폭력 앞에서 미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이, 그래서 자신의 존재도 잊어버린채 그저 군대라는 말만 기억하고 있었던 사람의 파괴된 마음과의 지극히 만남을 통해, 그에게 다시금 존재를 인식하게 해준 예수는 그 기쁨에 겨워 주님과 함께하겠다는 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라. 결국 네가 살아야 할 곳은 그곳이란다. 그리고 그곳에서 네가 알고 있는 것을 전해라. 네가 돌아가 살아야 할 곳은 네 삶의 현장이다.” 마치 얼마 전에 끝난 직장의 신의 일본원작 파견의 품격에서 주인공 오오마에 하루코가 파견직 후배에게 남기는 말, “결국 노동한다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너는 어디에서 무었을 하고 있느냐?>

살기가 참 힘든 세상입니다.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돈을 버는데 돈을 벌기 위해서는 더 불행해져야 합니다.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언제부턴가 가족 간의 골은 점점 더 깊어가기도 합니다. 몸과 마음이 노곤해 질 때까지 참여를 하고 연대도 해보았는데 오히려 상황은 점점 더 마음 아프게 나빠지기만 합니다. 전지전능 하시다던 신은 이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때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의 한 중간에, 빛 한줄기도 볼 수 없는 곳에서 이제는 더 이상 한발도 내딛을 힘도 용기도 남아있지 않다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제 나의 거친 숨을 고르게 하고 내 안의 것을 지르는데 급급하던 입과 험상궂거나 절망적인 안광을 뿜어내던 눈을 감고 그 순간 조용히 전해지는 주님의 말씀을 느껴보시길 소망합니다. “참 많이 힘들었구나. 쉬어라. 무척 지쳤겠구나. 충분히 노력했다. 무얼 좀 먹고 쉬어라.” 아마도 그와 같은 주님의 음성은 친구와 가족의 입을 통해, 수줍게 던지는 아이의 미소에서, 혹은 함께 어깨를 걸고 자리를 지키는 동지의 땀 냄새 가득한 등판에서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그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만나셨다면 이제는 다시 한 번 움직여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염원하는 어떤 것을 향한 그 한걸음 만큼만의 용기와 힘을 내 봅시다. 주님은 오늘 함께 나누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제 네가, 너희들이 그 희망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그와 같은 희망들은 아직 여기저기에 있단다. 이러한 때에 너는 어디에서 무었을 하고 있느냐?” 뉴스를 보면 엘지트윈스가 모처럼 신바람야구를 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볼 것이 없는 이 때, 우리가 마음을 다해 염원하는 평화로운 세상과는 점점 멀어지는 듯 한 지금, 우리는 갈라진 이 땅, 상처난 마음의 화해를 염원하는 주일을 맞이합니다. 그 첫걸음의 시작과 첫 마음을 새롭게 다잡는 야훼의 기운이 함께하시길 기원 드리며. 주님의 질문을 접한 후, 그 첫걸음을 움직여나갔던 전태일 열사의 글로 부족한 말씀의 끝을 대신하겠습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으로,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볼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의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이제는 함께 모신 말씀을 생각하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주보 목회마당에 있는 기도문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