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봇의 포도밭과 국가권력

열상 21:1-21a; 5:1-8; 2:15-21; 7:36-8:3

 

희랍 신화에 마이다스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욕에 사로잡힌 그는 어느 날 신에게 자기가 만지는 모든 것들이 황금이 되게 해달라고 청원을 하여 허락을 받습니다. 그래 그가 의자를 만지자 의자가 황금으로 변하고 책상을 만지자 또 황금으로 변하고 그가 만지는 대로 방안의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갑자기 방안이 번쩍번쩍합니다. 그는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식사 때가 되어 식당으로 갔습니다. 그가 앉자말자 의자가 황금으로 변하고 손을 대자 테이블이 황금으로 변화됩니다. 포크를 들자 그게 또 황금으로 변합니다. 황금 포크로 음식을 먹으려니까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만 음식이 입술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황금으로 변하고 맙니다. 모든 음식이 입술에 닿자말자 황금으로 변합니다. 그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사랑하는 딸이 아빠하고 품안으로 달려오자 자기도 모르게 딸을 껴안았습니다. 그만 딸이 황금으로 변하고 맙니다. 그는 그제야 탐욕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불행하게 하고 파괴하게 하는 악의 근원임을 깨닫습니다.

 

열왕기상에 기록된 아합왕은 마이다스왕과 같은 사람입니다. 아합왕이 통치하던 시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경제적으로 풍성했던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만족을 몰랐습니다. 그는 이즈르엘에 별궁을 갖고 있었는데, 그 옆에 나봇이라는 사람이 갖고 있는 포도밭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정원으로 만들고 싶어 더 크고 좋은 포도원을 주든가 아니면 몇 배로 값을 쳐줄테니 팔라고 했더니 이는 나의 조상 때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라 팔수가 없습니다.’라고 거절을 합니다. 여기서 조상 때로부터라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음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분배받은 땅이라는 말입니다. 본래 내 소유가 아닌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매매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조상의 묘가 있는 선산은 매매할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다음해인 50년째 해를 희년이라 불렀습니다. 이때가 되면 노예를 해방하고 남의 땅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때로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남의 종이 되었거나 땅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이런 불평등이 대를 넘어 계속 되는 것은 하느님의 정의로운 뜻이 아닌 것임을 분명히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왕의 요청에 대한 나봇의 거절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른 신앙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포도밭과 채소밭의 차이]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또 하나의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건 아합왕이 포도밭을 정원으로 쓰겠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누군가 과수원을 사서 이를 정원으로 만드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에서 포도밭을 정원으로 바꾸겠다는 왕의 의도는 단순히 땅을 다른 목적으로 쓴다고 하는 변경의 의미를 넘어 매우 깊은 신학적인 함의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예전 번역서에서는 이를 채소밭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표준새번역에서부터 정원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왕이니까 산책용이나 관상용으로 정원이 필요할 것이라는 전 이해를 갖고 정원이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만, 이는 잘못된 번역입니다. 채소밭이 옳은 번역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garden of vegetables,’ 혹은 ‘garden of herbs' 채소밭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왕이 필요로 하는 것은 채소밭보다는 정원일 것이라고 하는 관점은 오늘 우리들에게는 타당하지만, 이는 열왕기서의 저자 곧 신명기적 역사관을 갖고 아합왕의 행적을 기록했던 신학적 의도를 완전히 덮어버리는 실수였다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채소는 단순히 비타민 C가 많이 함유되어 있는 일종의 음식의 종류로서 말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채소는 인간에게 주신 야훼 하느님의 자연의 선물입니다만, 출애굽기 이후 신명기적 역사관이 들어가 있는 성서구절에서 채소는 애굽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에 질려 이렇게 불평합니다. “아 고기 좀 먹어 봤으면, 애굽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 오이, 참외, 부추, , 마늘이 눈앞에 선한데, 지금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 죽는구나.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이 만나밖에 없다니.” 신명기 11장에서는 모세의 입을 빌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들어 가 차지하려는 땅은 너희가 나온 애굽과는 다르다. 거기에서는 씨를 심을 다음 채소밭에 물을 줄 때처럼 발을 놀려 물을 대어야 했지만, 너희가 건너 가 차지하려는 땅은 산과 골짜기가 많은 곳이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로 땅을 적신다. 그 땅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몸소 돌보아 주시는 땅이다. 너희는 오늘 주는 나의 명령을 귀담아 들어라, 너희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그를 섬겨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 땅에 가을비와 봄비를 철 맞게 내려주시어 밀과 술과 기름을 거두어들이게 해 주시고 들에는 너희 가축이 뜯어 먹을 풀이 자라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배불리 먹으며 잘 살게 될 것이다.”

 

[깨달음의 기쁨]

 

최후의 만찬으로 유명한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nobelist pleasure is the happiness of understanding" ‘가장 고귀한 기쁨은 깨달음의 행복이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진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은 아니더라도 이전부터 의심을 품고 있었지만, 좀처럼 해명이 되지 않아 궁금하던 차에 우연한 기회에 이를 깨닫게 되면 찾아오는 기쁨이 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늘뜻을 준비하면서 성서를 묵상하고 연구하다 보면 가끔 그런 때가 있는데, 지난주가 그런 때였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성서를 읽어오면서 여러 의문들을 갖고 있었고, 신학공부를 하면서 많은 경우 답을 찾게 되지만, 모든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무슨 구원이나 최후의 심판과 같은 큰 주제가 아닌 곁가지의 질문인 경우에는 답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믿음에는 큰 영향이 주지 않아 그냥 살아갑니다.

 

그 중의 하나가 광야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채를 먹고 싶어 했는데, 왜 하느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는 주시면서 채소는 주시지 않는 것일까? 물도 귀하고 계속 이동을 해야 하니 이건 힘들었겠구나 그렇게만 생각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아까 읽어드린 신명기 11장을 묵상하면서 더 큰 의문이 생겼습니다. “너희가 들어 가 차지하려는 땅은 너희가 나온 애굽과는 다르다. 거기에서는 씨를 심을 다음 채소밭에 물을 줄 때처럼 발을 놀려 물을 대어야 했지만, 너희가 건너 가 차지하려는 땅은 산과 골짜기가 많은 곳이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로 땅을 적신다. 그 땅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몸소 돌보아 주시는 땅이다.” 가나안에서는 정착을 하여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애굽과는 다르다고 하면서 채소밭 재배와는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왜 채소밭이 애굽적인 것인가? 아니, 우리나라 농촌가면 가는 곳마다 채소밭이고, 강남향린교회는 옥상에다 간이 채소밭을 만들어 놓았는데, 왜 이게 애굽적인 곧 반야훼적인 일이 되는 것인가? 오래 전부터 여기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그게 어제야 풀렸습니다. 어디 책에서 본 것이 아니라, 의문을 품고 살아오다 보니까 성령의 도움으로 해답이 나온 것입니다.

 

[채소와 포도나무 그리고 무화과나무]

 

그 이유는 이어지는 말씀 속에 담겨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드릴테니 잘 들어보세요. “너희가 들어 가 차지하려는 땅은 너희가 나온 애굽과는 다르다. 거기에서는 씨를 심을 다음 채소밭에 물을 줄 때처럼 발을 놀려 물을 대어야 했지만, 너희가 건너 가 차지하려는 땅은 산과 골짜기가 많은 곳이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로 땅을 적신다. 그 땅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몸소 돌보아 주시는 땅이다.” 애굽에서의 생활과 가나안에 살아갈 삶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땅에서 나오는 소산물로 먹고 살 것이라는 것은 같습니다. 다른 점은 소산물의 내용인 것 같지만, 실은 소산물을 얻기까지의 방법입니다. 애굽에서 채소는 어떻게 얻습니까? ‘물을 주어서.’ 그런데 그 물을 주는 모양을 설명하는 중요한 수식어가 하나 있습니다. ’발을 놀려.‘ 이게 왜 채소밭이 애굽적인 것이 되고 반야훼적인 되는 가를 설명하는 핵심 단어입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사철의 경계가 분명하고 물이 풍부한 곳에서 채소를 가꾸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아침저녁으로 물만 잘 대어주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 태양열이 강하게 내리 쬐이는 중동지역이라면 사정은 전연 달라집니다. 우리같이 아침저녁에만 물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뿌리가 마르고 잎이 타지 않도록 하루 온종일 물을 주어야 합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안됩니다. 부지런히 발을 놀려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채소는 필요한 음식이긴 하지만, 절대적인 음식은 아닙니다. 채소 먹지 않아도 죽지는 않습니다. 여분의 음식입니다. 그런데 이를 재배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 밤낮으로 붙어 있어야 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고용이 된 사람입니다.

 

중동에서 물은 귀한 것입니다. 채소밭을 강가에 만들면 쉽게 재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대시대에 이를 먹는 사람은 일종의 특권계층입니다. 이들은 강가에 살지 않습니다. 적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높은 곳에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살았습니다. 강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채소는 더운 지방에서는 하루를 가지 않아 상합니다. 그러니까 채소를 얻기 위해서는 성 안에 큰 저수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시멘트가 없었으니 바위를 통째로 파야 했고, 건기 우기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으니 건기에 채소를 먹기 위해서는 엄청난 크기의 저수지가 필요했습니다.

 

쉽게 말해 채소는 왕이나 귀족들이 먹었고, 이를 위해서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해야 하고, 이 일을 전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노예들이 필요했고 노예를 얻기 위해서는 전쟁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왜 채소밭이 애굽적인 악의 상징이 되는 지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8,90년대 미국에서 목회할 때에 멕시코 유까딴이라는 지역에 한인 후예들이 살고 있어 그쪽에 선교를 여러 번 다닌 경험이 있습니다. 낮의 해가 워낙 뜨거워 그늘에만 앉아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힙니다. 늦은 오후가 되면 하루에 한 번씩 소낙비가 쏟아지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활동을 합니다. 옥수수를 갈아서 기름에 튀긴 토르티야에 양고기나 닭고기를 싸서 간 콩과 함께 먹습니다. 야채는 구경조차하기 힘듭니다. 야채 대신 열대 과일을 먹음으로 비타민 C를 보충합니다.

 

1성서에서 채소밭을 애굽에 비유하는 것은 채소밭이 노예 계층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으로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너희들은 야훼 하느님만 경배하고 잘 섬겨라. 그리하면 비를 주관하시는 야훼 하느님이 봄비 가을비를 적절히 내리시어 먹을 것이 풍성해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는 자연의 양식은 밀과 술과 기름이라고 말합니다. 술은 포도나무 열매에서, 기름은 무화과나무열매에서 얻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이스라엘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에 자주 비유되는 것을 봅니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그 땅에서 나오는 작물이라기보다는 노예의 노동력 없이도 누구나가 쉽게 일해서 얻을 수 있는 작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곧 애굽의 채소밭은 노예계급을 필요로 하는 차별적인 국가경제 생산구조를 말하는 것이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으로 자라는 가나안에서의 밀과 술과 기름은 노예제도가 필요 없는 마을평등경제 생산구조를 뜻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이 처음 추구했던 평등마을 생산구조는 왕을 세움으로 결국은 깨지고 말았고, 사무엘선지자가 예견한대로 국가제도는 세금과 징병과 노예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야훼 하느님만이 유일한 통치자임을 고백하는 신명기적 역사관을 갖고 있는 열왕기서의 저자는 왕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채소밭으로 바꾸겠다는 한 개인의 욕망을 통해 국가권력이 얼마나 인간사회를 착취하고 불평등한 구조로 만들어가고 있는 악의 뿌리인가를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평등의 대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라고 하는 미경제학자가 저술한 <불평등의 대가> The Price of Inequality라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빈부의 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가 어디인가요? 미국입니다. 두 번째로 심한 나라는 어디이지요? 두말할 것도 없이 미국에 정치군사적으로 문화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남한입니다. 이 책의 1장 제목은 <1퍼센트의 나라 미국>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의 하나이고 군사력에 있어서는 2위부터 40위까지의 모든 군사력을 합친 것보다도 더 큰 힘이 있는 국가이지만, 세계에서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 경제적 차별이 가장 심한 나라가 미국입니다. 자유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최근 29살의 에드워드 스노우던이라는 컴퓨터정보 기술자가 목숨을 걸고 폭로하였듯이 미국인은 물론이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이메일과 전화를 도청하여 왔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테러방지, 국가안보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내 메일을 들여다보고 내 전화를 도청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허락할 수 없는 내 개인의 권리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천부의 권리입니다. 그런데 미국정부가 그런 범죄를 저질러왔고, 오바마 또한 이런 일을 허용하여 왔던 것입니다. 자유란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었을 때를 말합니다.

 

우리는 아담 스미스이래 시장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 자유라는 이름으로 경쟁의 구조 안에 놔두면 저절로 모든 이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주장을 하여왔습니다만, 오늘날 이를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미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이 성공한다고 하는 것은 쓰레기에서 장미꽃을 보는 것처럼 희귀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는 말도 옛말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비정규직은 하나의 직장만으로는 살아가기가 힘들기에 두 개 세 개의 파트직을 가져야 하기에 주경야경(晝耕夜耕)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도 머리만 조금 있고, 열심히만 하면 사법고시를 통해 법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외무고시에 합격하면 외교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법전문대학을 나와야 하고 외교전문대학을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전문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엄친모의 탄탄한 계획과 조부모의 경제 뒷받침없이는 불가능한 세상이 되었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이병철, 아버지 이건희, 아들 이재용 그리고 돈으로 일류중학교를 부정입학한 손자로 이어지는 삼성회장직은 자유 경쟁의 결과물인가요? 아니면 바보 천지가 아닌 다음에는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세습과 상속의 결과물인가요?

 

이게 몇 몇 특수한 재벌집안의 얘기라 하고 좀 더 넓게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겠습니다. 그 예로 판사직을 보겠습니다. 2010년 새로 임용된 판사 138명 가운데 38명이 특목고 출신이었습니다. 그보다 10년 전에는 특목고 출신이 단 한명에 불과했습니다. 그중 대원외고가 두드러졌는데, 1999년부터 2010년까지 11년동안 임명된 특목고 출신 판사 171명 가운데 대원외고는 64명을 차지해 압도적인 1위였고, 학교별 현직 판사수에서도 경기고를 스무명 차이로 따돌렸습니다. 특목고를 제외하면 같은 서울이라도 강남, 서초, 송파구 등 강남 3구 출신의 비중이 매년 절반을 넘습니다. 이게 판사직에만 해당하는 얘기이겠습니까? 결국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는 자유경쟁은 옛말이고 돈 많은 가정의 자녀들이 좋은 학교를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싹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절반 이상이 자신은 중산층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지금은 20-30%에 지나지 않고, 절반 가까이가 자신을 하위계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파트 하나 소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1%, 1%를 위한, 1%에 의한 나라]

 

작년 정부가 발표한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2270불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면 일인당 25백만원입니다. 4인 가족이면 1억원의 수입이 있어야 하는데, 여러분은 물론이고 주위에 1억원이 되는 가정이 얼마나 됩니까? 정상적으로 절반이 되어야 합니다. 향린교회 교인들은 다른 교회에 비하면 수준이 높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6,70%는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1,20%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 돈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그게 소수 1%의 재벌들과 부자들이 싹쓸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티글리츠가 말하기를 미국은 이제 더 이상 기회의 땅이 아니다. 미국은 1퍼센트의, 1퍼센트를 위한, 1퍼센트에 의한 나라이다지금 미국은 학자금 대출금 수만달러를 떠안은 채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층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귀족같은 사람들과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해도 방 한칸 소유하기가 힘든 노예와 같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뱃속에서부터 그 운명이 결정이 되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인가요? 아니면 왕정국가인가요?

 

미국의 경우 2008년 금융위기 이전 호황기에는 상위 1퍼센트가 국민소득의 65%이상을 거머쥐었는데, 이후 회복기에는 무려 추가 소득의 93%를 가져갔습니다. 지난 30년간 하위 90%의 임금이 15% 증가한 반면, 상위 1%의 임금은 무려 150%가 증가했고, 이를 상위 0.1%로 범위를 줄이면 증가율은 무려 300%에 달합니다. 그리하여 월마트가문의 상속자 6인의 재산은 미국 전체 국민 하위 30%의 재산을 다 합친 것과 같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불평등은 정치 시스템 실패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불평등은 경제시스템의 불안정을 낳고 이 불안정은 다시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우리는 이러한 악순환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 가고 있다.” 세금에 있어서도 많이 버는 사람이 더 높은 비율의 세금을 내야 하지만, 갖가지 세율 혜택을 통해 더 적은 비율의 세금을 내는 부조리한 현상이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 지난해에는 오큐파이 월가 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남한은 미국에 종속되어 있어 이보다 더 심각한 상태로 가고 있습니다만, 정부가 통계를 숨기고 언론을 통제하고 있어 이런 얘기가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은 국가권력보다 더 큰 권력이 있는데, 이는 고 노무현대통령이 말한 대로 재벌 권력입니다. 국가권력은 5년마다 투표라도 해서 물갈이를 하는데, 재벌권력은 투표도 없이 자손대대로 이를 세습하고 있고, 이제는 오히려 정치권력을 좌우하는 힘까지 갖고 있습니다. 검찰, 경찰, 판사 등등에게 떡값이라는 명목 하에 장학금을 지불하여 온 결과 무소불위(無所不爲)라는 말은 이들에게 해당합니다. CJ 이재현회장의 500억 탈세가 최근 밝혀졌지만, 어찌 이 한사람뿐이겠습니까? 그는 하나의 본보기일 따름입니다. 빙산의 일각입니다. 언론인들이 주축이 되어 탈세를 목적으로 외국에 세워놓은 페어퍼 회사들을 낱낱이 고발해도 재벌에 예속된 검찰들은 묵묵무답입니다. 박근혜대통령이 전두환씨의 은닉된 재산을 찾아내겠다고 말하지만, 그러기 전에 자신의 아버지 박정희가 권력으로 빼앗아 물려받은 영남대학과 부산일보 등의 육영재단 재산들을 모두 사회에 헌납한 후에 이런 얘기를 해야 할 것입니다.

 

[‘에 맞는 정치]

 

이전 정부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본인이 후보시절 약속한 일부터 지켜야 할 것입니다. 회계조작을 통한 3천명 이상을 해고함으로 24명의 자살자가 일어난 쌍용차 국정조사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남북관계를 위해 신뢰프로세스를 갖겠다고 했지만, 이번처럼 좋은 기회를 말도 안 되는 을 내세워 내 팽겨 버렸습니다. 과거의 정부들이 한 남북대화들은 모두 격에 맞지 않는 굴욕적인 회담이었다고 거부해버렸습니다. 보수진영을 부추기는 정치적인 인기몰이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선거를 통해 시작한 정부이니 뭔가를 새롭게 하고 싶겠지만, 북은 할아버지 때로부터 아버지를 이어져 내려온 세습정권이자 유훈통치가 계속되는 하나의 정권입니다. 김대중정권의 615공동성명과 노무현정권의 104 정상선언을 무시하는 일은 북의 김정은정권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부정하는 일과 같습니다. 과거를 부정하면서 어떻게 북과 신뢰를 쌓겠다는 말인지 제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격을 따지면 박근혜정부 하에서의 정상회담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항일투쟁을 한 독립군인 김일성장군의 손자와 일제 황제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세하고 항일 독립군을 향해 총을 쏜 일본군 소좌 박정희의 딸이 어떻게 한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남과 북이 전쟁 위기까지 갔던 지난 3,4월을 생각하면 격을 따지며 남북대화를 내팽기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큰 실망을 하였습니다. 북이 깐깐하게 나와도 경제나 군사력에 있어 수십 배나 강한 남이 형님과 같이 대범한 자세로 받아들이며 나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대통령은 백성들의 어버이로 저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며 정치를 해야 합니다. 지금 전 재산을 개성에 투자하여 이를 온통 날리게 된 남쪽의 기업인들이 수백 명이나 되고 이에 관련한 기업들과 그 가족들을 합치면 남쪽만도 20만이 넘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북은 말할 것도 없지요. 게다가 이번 남북회담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살아온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실망과 그 아픔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고통 받고 있는 백성들을 생각하면 격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대통령도 격이 필요합니다. 격에 맞는 인간에 대한 품성과 역사에 대한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님이 폭력에 의해 살해당하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언론에 드러난 사실을 보면 인간미가 별로 없습니다. 유모어 한마디 하는 것도 없고, 진정성이 담겨 있는 사랑의 언어도 없습니다. 찬 바람이 이는 정치적 발언만 하고 있습니다. 양비론을 언급하면서 북을 비판하면 비판했지 자신을 비판하는 말은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국민은 그저 그가 하는 대로 예 예만 하면서 구경만 하라는 말인가요? 과연 독재자의 딸다운 발언입니다. 민주주의란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백성들이 주인이 된다는 말은 백성들이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내놓는 것을 말합니다. democracydemo라는 말은 비판을 드러내놓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99%, 99%에 의한, 99%를 위하여]

 

오늘 4개의 성서 본문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평등에 기초한 평화로운 사회 건설입니다. 열왕기서는 우리가 살펴본대로 아합왕과 이세벨이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은 중대한 범죄행위임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채소밭을 가꾸는 일은 결국 노예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이는 차별과 불평등을 조장하는 일임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거만한 자와 악한 짓을 하는 자 거짓말쟁이와 피에 주린 자와 사기 치는 자들을 속히 멸하여 줄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사도바울의 핵심적인 주장을 얘기하는데, 이는 단지 신학적인 담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주인과 노예, 여자와 남자,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다는 곧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구원에 있어 평등하다고 하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루가복음서는 한 행실이 좋지 않은 한 여인이 예수께 와서 비싼 향유를 부어 예수의 죽음을 준비하는 얘기를 전하고 이 여인이 예수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곧 당시 종교적인 가르침에 의하면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는 한 여인이 구원받았다고 하는 인간의 통치가 아닌 하느님이 직접 통치하는 의와 생명이 넘치는 새 세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루가는 예수의 비유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부조리한 세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을 진 사람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이 두 사람이 다 빚을 갚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돈놀이꾼은 그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값이었으니까, 일당 8만원으로 계산한다면 오백데나리온은 한 사천만원쯤 되고 오십데나리온은 사백만원쯤 됩니다. 사백만원이라면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갚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것마저도 값을 수 없는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폭로하는데, 실상 우리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 경우에는 돈 몇 백만원이 없어서 입니다. 루가복음은 단순히 구원에 관한 신학적인 담론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불평등한 부조리의 사회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듯이...’라는 주기도문에서 마태는 라는 종교적이고 심리적인 용어를 사용하는데 반해, 루가는 이라는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용서 또한 마음의 용서가 아닌 빚의 탕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루가에게 있어 구원이란 1%의 1%에 의한 1%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 99%99%에 의한 99%를 위한 평등 세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국가권력은 바로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상이 실현될 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우리가 주기도에서 항상 기도하는 정의와 평화, 생명의 하느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말은 바로 우리가 이러한 세상이 속히 임하도록 기도하며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