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여 일어나라

열상 17:8-24; 146; 1:11-24; 7:11-17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 젊은이여 일어나라는 제가 정한 것이 아니고, 홈페이지 관리자께서 매주 성서 본문말씀을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제목을 하나 붙이는데, 마음이 들어 그대로 하였습니다. 요즘 성서본문읽기 쌍방 소통이 거의 안 되고 있는데,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주중에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말씀묵상과 기도는 이것입니다. 교회 홈피 첫 화면에 떠 있는 4개의 본문 말씀들을 읽고 묵상하고 그리고 거기에서 얻어진 것들을 놓고 기도하고 필요하다면 댓글로 남겨놓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향린교인됨의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 해석의 갈래 길]

 

오늘의 말씀은 하늘뜻펴기나 개인묵상을 함에 있어 곤혹스러운 구절입니다. 1성서의 열왕기서 말씀이나 제2성서의 루가복음 말씀들은 모두 죽은 자가 살아난 이야기입니다. 예수 부활 이야기와는 달리 예언자 엘리야가 시돈 지방의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낸 이야기나 예수께서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낸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사실 난감합니다. 믿기 힘들더라도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니 이를 사실로 믿으십시오! 라는 것으로 결론을 질 것인지, 아니면 2천년 이상이 지난 오늘 이 시점에서 저 중동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난 이 얘기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물어야 할지를 말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그러하듯이 전자의 방식을 택한다면 저도 별로 고민할 것도 없이 성서 이야기를 반복하고,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시오! 라고 말하고 여러분은 아멘! 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방식은 바로 성전 문을 나서자 말자 여러분의 삶과는 전연 무관한 얘기가 되기에 그냥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접근은 예배드리는 그 순간에는 믿음의 카타르시스가 일어나 잠시 마음에 시원함을 얻지만, 내 몸 아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어 지금 복용하고 있는 약만도 여러 개가 되는데, 도대체 죽은 사람 살려낸 얘기가 지금 내 몸 아픈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냐? 하느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나는 나다라는 분리가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죽은 자를 살린 이야기가 엘리야와 예수께서 갖고 계셨던 초인적인 능력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위대한 능력을 과학과 이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내가 이를 믿고 안 믿고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걸 믿으면 죽었던 내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인가? 죽었던 내가 살아날리도 만무하지만, 그래 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해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내가 60년을 살든 백년을 살든 그게 나의 호적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죽었던 저들이 다시금 살아났지만, 결국 다시 죽지 않았는가? 그리고 엘리야나 예수께서 그러한 초인적인 능력이 있었다면 그저 한두 사람만 살려낼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살려내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그리고 한번만 살려낼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계속 살려낸다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신앙은 과거를 오늘에 되살려내는 힘]

 

성서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그 사실이 오늘의 역사에 재현될 것이라고 믿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본문 말씀을 사실로 믿는다는 것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지만 다시 살아날 것을 고려해서 관에 못을 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신이 냉동안치실에 들어간 이후에도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판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근본주의 신앙인들이 성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을뿐더러 살아있고 힘이 있어 어떤 칼보다도 날카로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고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이런 기적 이야기들은 과거의 일회적 사건으로 곧 죽은 말씀으로 여기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과거의 사건을 과거에 묻어두지 않고 오늘의 되살려내는 힘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되살려낼 수 있겠습니까?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단순히 죽은 생명이 살아났다고 하는 신비한 종교 이야기로 이해되고 말지만, 이 이야기를 큰 빛에서 보면 이는 단순히 죽었던 한 생명이 다시 살아났다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전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와 예수를 통해 일어나고 있는 새 역사의 태동을 알리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야훼의 법이 아닌 이방신 바알의 법을 따라 나라를 다스리던 아합 왕과 그의 왕후 이세벨에 대항하였습니다. 농경의 신으로 비를 조정하는 신으로 알려진 바알을 따르던 아합 왕과 그의 백성들에게 엘리야는 3년간의 가뭄을 선포합니다. 비만이 아닌 이슬 한방울도 내리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사실 가뭄이 3년이나 계속되면 실제 고통 받는 사람들은 왕이나 귀족이 아닌 백성들이지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은 선량한 백성들입니다. 만약 이 얘기를 지금도 가뭄이 계속되고 있는 아프리카나 이미 가뭄의 고통을 겪은 바 있는 북한에서 한다면 청중들의 반응은 이 야훼 하느님은 몹시 심술이 궂거나 아니면 인간의 고통을 즐기는 가학적인 하느님이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3년간의 가뭄과 이슬방울조차 내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이 선언 또한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야훼 하느님이야 말로 세계역사와 자연의 창조주임을 선포하는 상징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시돈 지방에 살던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가뭄이 계속되던 어느 날 그녀는 생활고에 빠져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함께 마지막 남은 한 끼의 식사를 하고 죽기를 결심했습니다. 그때 비상하게 생긴 한 사람이 찾아와 자기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런 사정을 말합니다. 이 얘기를 들은 이 사람은 야훼 하느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는데, 비가 다시 올 때까지 이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소.” 그러자 이 여인은 이 얘기를 믿고 자신의 최후의 식량으로 그를 대접했고, 그녀는 실제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얘기를 많은 목사님들은 교회를 위해 자신의 마지막 남은 것을 내어 놓으면 하느님께서는 살아있는 동안 굶지 않도록 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식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것을 아전인수식 해석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본인부터 그렇게 하면 되는데, 본인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크면 클수록 목회자들이 일으키는 재정 문제로 인해 사회적인 비난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우리는 자주 보고 있습니다. 이 얘기는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지역을 넘어 시돈이라는 이방지역의 가장 가난하고 엄신 여김을 받는 한 가난한 과부까지도 보호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돈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에 어떤 여인이 생각나지 않으시나요? 악의 대명사로 나오는 왕후 이세벨이 바로 시돈왕국 출신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야기는 시돈이라는 한 지역 안에서 야훼 신을 부정하는 이세벨과 야훼 신을 전적으로 믿는 사렙다 과부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왕후로서 뭐 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여인입니다. 같은 지역 출신이지만, 사렙다 과부는 한 끼조차 자기 힘으로 이어갈 수 없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편기자가 말하는 야훼께 희망을 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성서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누가 정말 비참한 여인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넘어]

 

그런데 갑자기 이 과부의 외아들이 죽습니다. 어머니가 엘리야에게 항의합니다. “그때 같이 죽었으면 그냥 끝날 인생인데, 도대체 왜 당신이 와서 우리 둘을 살게 해놓고, 이제 와서 아들을 데려가는 것입니까? 아들이 없다면 내가 도대체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어디에 있나요?” 엘리야를 붙잡고 울부짖습니다. 이제는 엘리야가 야훼가 울부짖습니다. “오 나의 하느님 야훼여, 당신께서는 제가 머무는 이 과부의 집에 슬픔을 내리시어 이 아이를 죽이시렵니까? 이 아이의 생명을 돌려주십시오.” 이 아이의 생명이 돌아왔습니다.

 

루가복음에서 예수는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나인이란 동네에 막 들어가려는 참에 장례 행렬을 만나게 됩니다.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홀어머니의 슬퍼하는 울음소리는 그만 예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래 행렬을 멈추게 한 후에 상여에 손을 대시고, ‘젊은이여 일어나라고 외치자, 그가 일어나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소생의 이야기를 개인적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죽었다가 살아났다 결국 다시 죽었느니 당시에는 장안의 떠들썩한 화제거리가 되었겠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다지 큰 의미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서의 모든 이야기는 공동체의 이야기입니다.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공동체가 이를 읽고 기억하고 해석하여온 것입니다. 과부의 아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얘기는 다시 말하면 사회의 가장 힘없는 약자 중의 약자가 마지막 남은 희망을 잃게 되었는데, 이 희망을 하느님의 능력을 통해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루가복음 본문에 바로 이어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제자를 보내 예수께 묻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 요한은 야훼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는 로마제국의 억압적인 통치를 끝장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에게서 그런 역사가 과연 올는지에 대해 의심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답변한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걷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들은 모두 개인적 사건들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는 말 또한 개인의 회심 사건입니다. 결국 예수의 말씀은 새로운 세계는 하늘의 유황불이 내려 로마제국을 불태우고 다윗과 같이 하느님이 지명하는 한 왕이 이 나라를 다스리는 그런 천지개벽의 사건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변화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자로 나서는 그렇게 깬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나서는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이스라엘 한 나라가 아닌 세계의 모든 나라가 인간변혁으로 시작하여 사회변혁으로 그래서 세계변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당시 백성들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와 율법이라는 과거의 틀에 매여 있었고, 예수는 전연 다른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뒤틀어라]

 

월터 아이작슨이 쓴 <스티브 잡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현실 뒤틀기 장(reality distortion field)’입니다. 현실을 보이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뒤집어서 볼 줄 아는 힘이 애플을 일으킨 스티브 잡스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는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지금 세계인들은 제품의 상표는 다를지라도 이 세 가지 물건 중 하나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가 애플로 복귀하고 나서 주도한 첫 광고 캠페인은 다른 것을 생각하라(Think Different)’였습니다. 이 광고에는 상품에 관한 내용이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앨버트 아인슈타인, 마사 그레이엄, 밥 딜런, 리처드 브랜슨, 마하트마 간디, 토마스 에디슨, 마틴 루터 킹과 같이 새로운 세대를 연 사람들이 배경으로 나오고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시처럼 노래됩니다.

 

미친 자들을 위해 축배를.

사회의 부적응자들. 반항아들. 사고뭉치들.

네모난 구멍에 박힌 둥근 말뚝 같은 이들.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은 규칙을 싫어합니다.

또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말을 인용할 수도 있고,

그들에게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는 그들을 찬양하거나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할 수 없는 한 가지는 그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보고 미쳤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천재로 봅니다.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미친 자들

바로 그들이 실제로 세상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위인들은 모두 다르게 생각하였습니다. 보는 것을 믿기보다는 믿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인다고 말했기에 그래서 세상은 저들을 비합리적이고 극단적이라고 말하고 때로는 괴짜로 치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결국 저들의 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현실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현실을 중요하게 여기는 열 사람 여기에 있다고 합시다. 이 열사람이 보는 현실이 같습니까? 아닙니다. 동일한 사건도 사람마다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고, 해석은 관점에 따라 달라집니다. 현실은 현실이지만, 실상 모호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현실적이 되고자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터득한 몇 개의 공식과 몇 개의 정답만을 고집합니다. 때로 출세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큰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 큰일을 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저들은 이인자일 따름입니다.

반면 현실너머 신념을 따르는 사람들은 믿음과 핵심가치로 현실을 덧입힙니다. 보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믿는 것을 보고, 사실을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은 사실을 선택합니다. 그러면 점점 강해진 신념은 자신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자리 잡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관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맨 먼저 결정하는 것은 이론이라고 말했습니다. 개인적인 신념이 과학의 이론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신념에 기초하여 얻어진 이론이 다른 사람에게는 허무맹랑하고 비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자신에게는 법칙처럼 확실합니다. 그리고 이론에 근거한 법칙에 따른 행동들은 종종 자기충족적 예언이 됩니다. 믿는 대로 보는 것을 넘어 믿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결국은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칼 융은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우리는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운명이라고 부른다.’고 말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운명이란 우리 밖으로부터 오는 어떤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아니라, 실은 우리 안에서 내가 무의식 가운데 만들어내는 일종의 자기 암시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주장하는 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주셨고, 기꺼이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 주셨다는 직접 계시를 강조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의 직접 제자들과 다르다는 비난에 대한 자기 신념의 발언인 것입니다.

 

[독립교회의 가치 실현]

 

향린교회 60년을 맞아 처음 시작했던 4개의 핵심적인 가치와 신념이 있습니다. ‘공동체교회,’ ‘평신도교회,’ ‘입체적사회선교,’ ‘독립교회.’ 앞의 3가지 신념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지막의 독립교회는 우리가 기장에 가입함으로 말미암아 포기된 신념 내지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기장 안에서 조차 별난 교회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별난은 무시당하는 별난이 아니라, 무시할 수 없는 별난입니다. 왜냐하면 옆으로 저 멀리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로 목사 임기제가 그러합니다. 목회운영위원회와 분가가 그러합니다.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결국 국악예배나 공동축도, 사도신조 대신에 새로운 신앙고백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단지 시간의 문제입니다. 백년, 이백년이란 시간은 오늘을 살아가는 당사자들에게는 평생을 넘어가는 긴 시간이지만, 오백년이 흐르고 난후 되돌아보면 이 시간들은 모두 눈깜짝할만한 시간으로 인식됩니다.

 

독립교회의 가치적 신념은 기장에 가입되었어도 지금도 핵심적 가치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독립교회의 이상은 바꿔 말하면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서의 핵심적 가치에 기초하여 세상을 현실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꿈꾸었던 생명평화정의의 하느님 나라의 눈으로 세상을 뒤집어 보는 일입니다.

 

이익이라는 약 300년 전 조선 영조시대의 학자는 당시 받아들이기 힘든 노예제도 폐지와 과거제도 개혁 등을 주창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 때로부터 남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불행 때문이었습니다. 역사의 변두리에 있었기에 그는 세상을 뒤집어 볼 줄 아는 능력이 생겼던 것입니다. 향린교회가 독립교회를 핵심적 가치의 하나로 주장했던 것은 우리가 기장에 소속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법적 기준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이 역사의 한 복판에서 누구 편에 설 것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진 자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빼앗긴 자의 편에 설 것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제 광화문광장에서는 22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를 위한 범국민추모제가 있었습니다. 결의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민족적 사회적 해방을 향한 우리 노동자민주의 진보변혁운동은 19세기말 갑오 동학농민혁명 시기에서부터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정권 시기를 거쳐 21세기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가 넘게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 고난에 찬 대중투쟁의 앞머리에는 언제나 고귀한 생명을 바친 민족민주 열사들의 선봉투쟁이 있었다. .. (저들은) 사회와 역사의 진보를 위해 이타적인 행위를 하도록 이끄는 표준이 되어 주었다. 열사들은 또한 우리가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인간 해방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도록 자극하고 촉구했다.

 

오늘 이 남한은 전체 노동자의 90%에 달하는 중소영세비정규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이 아예 부정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자본과 정권의 횡포는 농민은 농촌빈민으로, 도시빈민들은 노점으로 먹고 살아갈 권리조차 빼앗기고 있습니다. 자본의 부동산투기를 위해 서민의 주거권은 가혹하게 짓밟히고 있고, 독점자본의 탐욕으로 소상공인의 존립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여 미래 세대의 교육과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쓰라고 낸 세금의 대부분이 북쪽의 우리 형제를 향한 한미전쟁연습비로 우리나라와 같이 좁은 땅에서는 별 효력도 없는 F35전투기와 같은 미국산 첨단무기 구입비로 쓰이고 있습니다. 북한은 전쟁을 일으킬 힘도 그럴 의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정부와 군산복합체는 북한을 악마로 만들어 벼랑 끝으로 계속 몰아가고 있습니다. 막힌 독 안으로 쥐를 몰아놓고 나서 야 봐라 저 으르렁거리는 이빨을하면서 위협을 과장하고 있습니다. 현 정권은 60년이 넘었으니 이제는 화해를 향한 디딤돌로 삼아야 할 한국전쟁을 정권유지용으로 악용하여 계속 대립과 분열을 조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남한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율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천년 전 갈릴리의 민중들이 바로 이렇게 로마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정권에 의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희생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고 역사 변혁의 꿈을 잃어버렸습니다. 남은 양식으로 최후의 한 끼를 먹고 죽을 일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예수는 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이상을 향한 신념을 갖고 살아가도록 저들의 죽은 영혼을 깨우신 것입니다. 눈 먼 자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절름발이로 하여금 걷게 하고, 죽었던 자들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젊은이여 일어나라!]

 

'젊은이여 일어나라.‘ 이는 오늘의 20대 청년들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희망을 잃고 자살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현실에 급급하여 역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개인의 출세 욕망에 사로잡혀 이웃을 나눔의 대상이 아닌 경쟁의 대상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던진 외침이자 사회적 화두입니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자만하는 오늘의 향린교회를 향해 던진 예수님의 깨우침입니다. 우리는 이제 60년이라는 한 역사의 회전을 마치고 두 번째의 회전을 시작하는 새아기에 불과합니다. 갈릴리 예수에게로 나아가 새롭게 출발하십시다.

 

오늘 오후 3시 통일부가 있는 광화문의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향린공동체 4개교회, 예수살기 그리고 촛불교회가 함께 하는 615공동선언 기념연합예배가 있습니다. 남북의 대화와 화해가 진정한 안보이고 남북통일이 진정한 복지입니다. 호국보훈의 길은 과거의 적대적인 쓰라린 전쟁의 역사를 되새겨 미움과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대립과 분열의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딛고 일어서 상생과 화해의 길을 제시함으로 남북의 민족번영 나아가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에 동참하여 새롭게 시작하는 남북대화가 단순히 정권잡은 자들의 한편의 쇼로 끝나게 나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몫으로 되찾아오는 계기로 만드십시다. 한국전쟁으로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이 백성에게 하나의 빛으로 나아가고자 시작했던 향린교회의 출발을 되새기는 역사 전환의 시기로 만들어 가십시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