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지지

열상 18:20-39; 96; 1:1-12; 7:1-10

 

조헌정목사/권지숙집사

 

연초부터 40대의 청녀신도회가 한 주일을 청녀의 날로 정하고 청녀신도회가 예배를 비롯한 교회의 모든 봉사와 친교를 담당함으로 신도회를 보다 활성화시키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는데, 저는 이 제안에 적극 찬성하여 왔습니다. 그간 60주년 행사로 인해 오늘에야 청녀의 날을 맞이했습니다. 저희 교회는 오후 예배가 없을뿐더러 주중 모임이 쉽지 않기에 일요일에 한번 모이는 이 예배를 보다 다양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각 신도회가 일 년에 한두 주일이라도 자신의 날로 선포하고 예배와 다른 교회 봉사 일들을 주관하고 다른 신도회에서는 이에 관심을 갖고 박수를 보내는 일은 교회 공동체 활성화에 있어 매우 필요한 일이라 생각하여 다른 신도회에도 적극 권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4개의 성서의 본문들 안에는 여성 이야기가 나오질 않아 성서적인 접근은 조금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남성이라 그런지 40대의 여성 그러면 첫 번째 떠오르는 단어가 사랑입니다. 완숙한 여성으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사랑을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공개적으로 얘기는 못하지만, 예수나 바울이 독신으로 사셨지만, 과연 젊은 여성을 대할 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에 대해 얘기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예수나 바울 또한 사랑을 해보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해 봅니다. 바울이 남긴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보면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라는 정의를 보면 아가페의 사랑을 말하지만, 이 배경에는 분명 인간적인 사랑의 경험이 없다면 쉽지 않은 발언입니다.

 

예수에 대해서도 예수가 참 인간이었다면 한 명의 남성으로서 결혼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학자들은 당시의 풍습에 따라 예수는 당연히 결혼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또 예수가 마리아와 더불어 사랑을 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소설이나 영화, 뮤지칼 등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작년에 영화로 히트를 한 소설 <다빈치코드>는 예수가 마리아와 결혼을 하여 아들까지 낳았다는 가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전연 터무니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복음서의 기록입니다.

 

[예수와 마리아의 특별한 관계]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집안이 있었는데, 이는 베다니아에 사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입니다. 그의 오빠 라자로가 중병에 걸려 죽었다가 예수께서 그를 무덤에서 소생시켜준 기적 이야기가 11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게 단순히 라자로의 얘기만이 아닌,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예수와의 묘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금 불순하게 읽어보면 삼각관계인 것 같은 암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12장에는 또 다시 예수의 생애 마지막 주간 첫날 그 집에서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니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마리아는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는 곧 남성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 전연 준비가 없었고 가리옷 유다는 오히려 향유를 돈으로 계산하는 타산적인데 반해 마리아만이 예수 죽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곧 마리아만이 참 제자였다는 얘기를 말하고 있고, 이는 곧 예수와 마리아와의 특별한 관계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누가복음 10장에서는 일을 하는 마르타와 말씀을 듣는 마리아로 대조하여 얘기를 전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해석이 교회 안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 일행을 접대하는 일로 부엌에 들어가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던 언니 마르타가 예수께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고 당신 발 앞에 앉아 있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는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교회가 그냥 예배만 드리고 흩어지는 곳이면 괜찮지만, 밥도 먹고 차도 먹으면서 친교를 나누는 곳이라면 누군가가 봉사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봉사를 모두가 공평하게 돌아가면서 하면 말이 안 생기는데, 누군가는 이 봉사를 열심히 할뿐더러 좋아하기하는데, 반면 어떤 사람은 손으로 하는 봉사보다는 말씀 듣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남녀의 구별이 없습니다. 성서공부를 하는 반을 해 보아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미리 와서 차를 준비하고 간식을 사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일에 무심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일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마르타는 자기 좋아하는 봉사를 하고 마리아는 자기 좋아하는 말씀공부를 하면 되는데, 문제는 마르타가 손이 모자란 것입니다. 그러면 형편되는 대로 접대하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그게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지난주 식당 일하시는 분이 갑자기 아프셔서 못 오시게 되고 준비 일손이 부족하여 책임을 맡은 봉사부장 김은미집사님의 마음이 매우 분주했었습니다. 그래 여기저기 연락을 하여 식사를 준비하였는데, 만약 일손이 부족하여 제대로 음식이 나오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불평하는 소리가 나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봉사하는 사람 최선을 다했음에도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그러니 형편 되는대로 하면 하면 된다는 말이 성립하려면 주는 대로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고맙게 먹는 일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식사의 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답변에 있습니다. 마르타가 하는 봉사의 일에 대해 약간 비판적으로 말씀하시고 마리아의 선택을 좋은 것으로 빼앗아서는 안 되는 것으로 말씀하신 대목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로서 저는 말씀공부도 중요하지만, 봉사의 손길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임을 알고 있기에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가 항상 난감합니다.

 

가끔 유모어로 좌중을 웃기시는 목사님이 엊그제 이 구절을 두고 이런 얘기를 하시더군요. “만약에 마르타와 마리아가 서로 바뀌어, 마리아가 부엌에 있고, 마르타가 방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는 그때에도 마리아야, 마리아야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언니 마르타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정답인즉 예수는 아마 부엌에 가셨을 것이다.’ 웃으라고 한 얘기이지만, 저는 이 안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다고 봅니다. 누가복음 얘기만 보면 마르타와 마리아의 얘기는 단순히 봉사와 말씀 듣는 일의 비교를 말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의 얘기까지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예수와 마리아의 관계가 평범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남한의 청렴성 정도]

 

청여의 사랑 이야기는 이후 생활목회자 하늘뜻펴기에서 계속 듣기를 바라고 오늘은 고상균목사의 부목사 부임식이 있어 중고등부도 함께 예배에 참여하고 있으니 교육에 관련하여 한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한국투명성 기구가 지난해에 실시한 청렴성 조사 결과에서 부정한 입학이나 취업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고 응답한 청소년은 46%에 불과했으며 정직하게 사는 것보다는 거짓말을 하거나 불법을 통해서라도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응답한 청소년이 40.1%로 성인 31%에 비해 훨씬 높았다. 이 말은 우리나라 청소년 둘 중 하나는 부정한 방법으로 입학이나 취업을 알선해 올 경우 이를 받아들이겠다는 말이고, 열 명 중 네 명은 정직보다는 부자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이런 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청년세대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세상을 우리 어른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대학이 이미 학문 연구의 터전이 아닌 직업학교로 전락한 사실은 다 알려져 있습니다. 이를 정부가 조장하고 있는데, 대학평가 기준에 졸업생 취직률이 반영되다 보니 대학에서는 취직이 잘 되지 않는 국문학과와 같은 학과들을 폐지하고 있고 중고등학교에서는 역사나 윤리같은 과목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언론에 보도된 청년들의 역사인식은 매우 심각한데, ‘야스쿠니신사를 젠틀맨의 종류라고 생각하며 서대문형무소가 어디에 왜 있었는지를 모를뿐더러,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민중항쟁이나 제주43항쟁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역사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모른다는 일이고 과거를 모르면 자신의 현재나 미래에 대해서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서를 읽고 예배 시간에 성서의 한 본문을 택해 하늘뜻이 무엇인지를 풀어 설명하는 것은 모두 성서 안에 펼쳐진 과거 역사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우리를 성찰하고 내일의 갈 길을 정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열왕기상 말씀은 아합이라는 왕과 엘리야라는 선지자와의 대결의 장면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얘기 배후에는 이세벨이라는 이방 왕후가 있었고, 이 왕후로 인해 이방종교가 성행했던 배경이 있습니다. 이는 단지 백성들이 야훼신을 믿느냐 혹은 바알신을 믿는냐 하는 종교간의 싸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야훼 종교가 갖는 역사인식과 바알 종교가 갖는 물질축복의 싸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선생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책망하는 다른 복음의 실체입니다. 엘리야선지자가 백성들을 향해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 만일 야훼가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라는 결단의 촉구는 여전히 오늘 이 시대에서 꿩도 먹고 알도 먹으려는 우리들의 얌체신앙을 향해 던지는 결단의 촉구입니다.

 

[팔꿈치 사회]

 

고려대의 강수돌교수가 최근 <팔꿈치 사회>라는 책을 냈습니다. ‘팔꿈치 사회’(Ellenbogengesellschaft)라는 독일어는 현지에서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바 있는데, 이 말의 뜻은 누가 봐도 반칙이 틀림없지만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며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회를 가리킨다. 오로지 더 높은 사다리 오르기 게임에 열중하는 곧 자본이 강제하는 생존경쟁을 마치 자신의 삶의 논리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우리 남한 사회의 모순을 지적한 것입니다.

 

한 학급에 40명의 학생이 있다면 한두 명을 빼놓고는 모두가 자신은 실패자/루저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브레이크 없는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승자독식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부의 편중이 1990년대에는 '2080 사회'였다면, 지금은 '1090 사회'의 사회를 넘어 '199 사회'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돈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맘몬주의에서는 이 한 사람을 빼놓고는 나머지 99명은 모두 실패자로 전락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살아갈 의미를 잃게 되고 그래서 지금 이 남한은 초등학생이고 중고등학생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국가가 되고 만 것입니다.

 

강교수는 말합니다. <“더 이상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을 목표로 살아선 안 된다.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일류인생'이다. 그것은 꿈의 발견, 실력증진, 사회 헌신의 3요소로 구성된다.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은 소수만 성공하지만 일류인생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는 내 아이가 경쟁의 승자가 아니라 사랑의 주체자가 되기를 바란다.”>

자신만이 가진 재능과 자질을 소중히 여김으로 자존감을 갖는 일이야 말로 청소년기에 매우 중요한 일인데, 인생의 목적을 돈에 두다 보니 성적만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잘못된 풍토가 생기고 만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참여한 우리 모든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향해 그리고 어르신들은 손주들을 향해 성적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라는 얘기를 자주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꽃이 저마다의 모양으로 저마다의 시기에 자신의 숨은 모습을 드러내듯이 세상이 어떻게 평가하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열정과 꿈을 갖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이야 말로 참다운 성공인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 향린의 푸른이 여러분! 영어와 수학에서 점수 몇 점을 더 얻는 일보다 좋은 문학작품을 읽어 감성을 일깨우고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을 갖는 일이야 말로 정말 귀한 것입니다. 이는 결코 돈으로 살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갖가지 불법을 저지른 일들이 언론에 계속 폭로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청와대의 대변인이라는 어떤 인간은 외국에 나가 자신의 저급한 수준을 드러냈을 뿐더러 온 나라를 창피하게 만들지 않았나요?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권력의 자리에 올랐다 한들, 그 한 번의 뉴스로 그 자신은 물론 그 자식들조차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진리를 찾아 나서기 바랍니다.

 

오늘 루가복음 본문에 로마의 백부장 얘기가 나옵니다. 그는 출세와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아끼는 종이 중병에 걸리자 그는 예수께 그의 병 낫기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그는 유대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여 회당까지 지어주었다고 말합니다. 종을 아끼는 인간애, 약소민족에 대한 배려와 야훼 하느님에 대한 믿음까지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분명 로마인으로 출세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는 수없이 많은 백부장들이 있었지만, 이천년이 지난 지금 저들의 얘기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직 이 한 사람만이 기억되고 있습니다. 황제마저도 기억되지 않고 있습니다. 긴 역사에서 보면 이 백부장이야 말로 성공한 사람이죠. 그가 다른 백부장과 다른 점은 국경과 인종을 넘은 순수한 인간애를 지니고 있었고, 역사에 대한 긴 안목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을 넘어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대망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는 푸른이들이 되시기를 다시 한 번 당부드립니다. 바울로 선생이 말한 대로 사람의 호감이 아닌 하느님의 지지를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청녀를 대표하여 권지숙집사님께서 나오셔서 자신의 삶에 있어 중요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들려줄텐데, 이 이야기 속에서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들을 발굴해내고 그래서 이를 자녀들과 손주들과 함께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불혹의 나이 40]

 

청년여신도회 권지숙입니다.

우리 청년여신도회는 40세부터 49세까지 즉 40대 여성들의 신도회입니다.

40대를 불혹의 나이라 합니다. 다 아시겠지만 아니 불() 미혹할 혹()자를 써서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사십대를 넘기신 교우님들 정말 그러하셨나요? 개인적으로 저는 세상이치를 터득하기는 커녕, 세상일에 매일매일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이 땅에 살아왔던 그리고 살고 있는 40대 여성들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먼저 몇 년 전 돌아가신 저의 할머니의 마흔 살 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할머니는 열아홉의 나이에 저의 할아버지인 권영수씨와 결혼을 하셨습니다. 시집은 안동권씨 집성촌인 경기도 이천이었습니다. 제가 일곱 살까지 살았던 제 고향이기도 합니다. 할머니는 결혼해서 20년동안 위로는 시아버지와 아래로는 6남매를 키우며 나름 평범하고도 행복한 삶을 사셨죠.

 

[할머니 이야기]

 

1950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말입니다. , 여기서 저는 제 어린 시절의 얘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는 6월만 되면, 호국의 달이라는 기치아래 반공포스터와 웅변대회로 한 달을 보내고는 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전쟁이 났을 때 7살이셨구요, 7살이면 전쟁에 대한 작은 기억이라도 있을텐데 막상 저의 집에서는 어머니 아버지 모두 전쟁 때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중학생인 오빠가 장래 희망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이 되겠다는 말을 한 날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시고는 말없이 우시던 기억도 있습니다. 머리가 커가면서 우리 집에서는 6.25전쟁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일종의 금기사항이라 생각하고 아무 말도 묻지 않았죠...

 

앞서 제 할머니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할머니는 시집온 이후 82세까지 평생을 경기도 이천을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명절에는 자식들이 모두 있는 서울로 역귀향을 하셨구요. 제가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할머니께서 서울로 오실 때마다 할머니의 목욕은 제 담당이었습니다. 저는 할머니와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목욕시간에는 제 아버지의 어린시절 이야기며, 할아버지 이야기 들을 들을 수 있었고, 그 이야기들의 퍼즐을 맞췄을 때는 참으로 가슴 아픈 전쟁의 상처가 우리 집에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19506.25전쟁이 일어났고, 할아버지께서는 공산주의 사상이 좋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 굳게 믿으셔서 공산당 활동을 하셨답니다. 국방군 인민군 서로 밀고 밀리던 시기, 할아버지는 국방군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도망치듯 고향을 떠났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할아버지는 전쟁통에 실종 된 분으로 되어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할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으셨고, 따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조차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북으로 갔을 거야라고 하시더군요. 할아버지의 실종과 함께, 일종의 면죄부를 받기 위해 당시 열 여덟의 장자는(, 저의 제일 큰아버지시죠) 국방군에 지원하여 전쟁에 나갔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는 할머니 나이 마흔이었고, 80가까운 시아버지와 아직 나이어린 6남매가 있었답니다.

 

지금 저의 나이 보단 적지만 어쩌면 위로 모셔야 할 어른이 있고, 돌봐야할 나이어린 자녀가 있는 것으로 치면, 딱 저의 청여의 시기 였을 겁니다. 하루아침에 청상과부가 된 저의 할머니는 어찌 됐던 연로한 시아버지를 모시고, 아이들과 살아내야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실종은 바로 연좌제라는 사슬로 한 가족을 옭아맸습니다. 그래도 할머니와 저의 아버지 형제들을 지켜준 것은 할머니의 시아버지, 즉 제 증조부와 안동 권씨 집성촌의 마을 공동체 여러분들이었답니다. 공산당을 지지했던 것이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손가락질 받을 때 할아버지가 옳았음을, 어려운 사람을 위하는 일에 항상 앞에 있었음을 밥상머리교육을 통해 계속 알려주셨다고 합니다. 마을 공동체에서는 오히려 나라에서 받는 차별과는 다르게, 그 전에 공산당을 지지했던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똘똘 뭉쳐 어린 6남매을 지켜 주었답니다.

 

모두 할아버지가 덕을 많이 쌓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해도 한 없이 나약할 수 밖에 없는 40대 여성의 삶에 어머니라는 이름과, 함께한 마을 공동체가 있었기에 할머니의 삶을 뿌리째 흔드는 바람에도 견뎌내실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할머니는 90이 넘으셔서 돌아가셨습니다. 60세부터는 가톨릭신자로 하느님을 믿으며 사셨구요. 이른 새벽에 기도하시는 모습을 여러 번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를 마치신 할머니께 여쭤 보았습니다. “할머니 하느님한테 뭐라 기도 했어?” 별 말씀 없이 웃으시던 할머니께서는 느이 할아버지랑 말이다 같이 산 게 20년인데, 헤어져 산게 50년이 넘는구나...” 하시더군요. 할머니의 기도만큼 절실하진 못해도 제 기도에 통일된 조국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가 됐습니다.

 

[탈북 여성 이야기]

 

또 한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저의 남편의 공방에는 몇 년 전부터 탈북여성의 자활을 돕는 일환으로, 탈북여성들에게 일을 주고 있습니다. 자활원이라는 여성 자활을 돕는 단체에서 탈북여성이 한번 오면 최장 2년까지만 일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2년이 다 되어갈 때쯤이면 그래도 속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사이가 되구요. 한참 바쁠 때는 남편과 공방 식구들은 공방에서 먹고 자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면 가끔은 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직접 공방으로 찾아가서 아빠를 보여주고 오기도 했구요...

 

그때 거기서 만난 한 40대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탈북여성의 아이들이 우리 집과 또래가 비슷하여 더 친근감이 느껴졌던 분인데요, 탈북의 이유가 아이들이 너무 배고파 해서였답니다. 남한에서는 그래도 먹는 것 만큼은 배불리 먹이고, 자신도 자활의 계기를 만들 수 있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그 분이 하루는 그러더라구요, 목숨걸고 넘어온 남한에서는 마음이 너무 배고파서 죽을 지경이랍니다. 탈북해서 온 남한에서 참으로 많이도 대형교회나 온갖 집회에서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간증 및 연설에 대해 제한해 온답니다. 이념을 떠나 사무치게 그리운 고향인데, 그리고 북에 있는 가족들은 어떻게 하라고 자기가 거기에 나설 수 있겠냐고 하더군요.

 

나는 북한도 밉지만, 남한도 미워요하던 그 40대 여성이 흔들릴 때 마다 잡아 줄 것이 무엇일까? 솔직히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거라 말하지 못했습니다. 네 제 믿음이 강건하지 못해서겠지요.... 저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나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두 여인들보다 훨씬 부유해진 삶을 살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저나 두분 여성이나 별 반 다를 것은 없는 듯 합니다. 저는 할머니처럼 전쟁을 겪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분단된 조국에서 매일매일 전쟁을 치루며 살고 있습니다. 저는 12, 9살 남매을 두고 있습니다. 열두 살 딸아이가 태권도장을 다니며 운동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태권도장에 가는 것이 무섭다고 하더라구요. 이유는 관장님이 매일 정신교육의 일환으로 북한이 쳐들어 올 때를 대비하여 힘을 길러야 한다는 말씀을 한다는 것이지요. 북한을 우리의 적으로 표현하며.... 전쟁나면 모두 죽는다는 이야기와 함께... 관장님 말이 많은 부분 옳지 않다고 설명은 해 줬지만, 혹여 우리아이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저는 그 태권도 관장님께 따지거나 하지 않고, 조용히 아이를 다른 학원으로 옮기는 것으로 제 나름의 소심한 복수만 했을 뿐입니다.

 

친구 중에 조금 이른 결혼을 한 친구가 얼마 전에 큰 아이를 군대에 보냈습니다.그러면서 이 친구가 그러더군요. 자신은 한번도 통일이 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바란 적도, 절실히 통일의 필요성을 느낀 적도 없었는데, 막상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들을 군대에 보내다보니 분단된 상황이 너무나 원망스럽다구요....

 

제 아홉 살 둘째는 얼마 전부터 꿈이 마술사에서 의대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훌륭한 의사라는 거창한 꿈이 아니라 오로지 의대생입니다. 꿈이 의대생으로 바뀌게 된 것에는 계기가 있습니다. 막 제대하고 나온 사촌형과 한참 이야기 하던 중, 군대를 가면 매일 진짜 총을 든다는 말을 듣고는 아이는 거의 사색이 되었습니다. 평소 총이나 칼 같은 무기 장남감을 좋아했던지라 오히려 제가 놀라서 물어봤더니, 아이는 장남감 총은 괜찮은데 진짜 총을 매일 드는 것은 너무 무섭다고 울먹였습니다. 그리고는 군대를 가지 않을 수 있는 방법, 매일 총을 들지 않을 방법 등을 사촌형에게 꼬치꼬치 묻더라구요. 저는 통일이 되면 군대에 무조건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었는데 아이는 그 것만으로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나 봅니다.

 

아이의 바램 중에는 엄마가 매일 통일이 되게 기도 해주세요라는 것과, 한 가지 방법으로 총을 매일 들지 않아도 되는 의대생이 되어서 군의관으로 군대를 간다는 것으로 나름 결론이 났습니다. 겨우 아홉 살 아이가 10년뒤 자신이 진짜 총을 들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 요새말로 웃프다고 할 수 있겠네요. 웃기고도 슬픈 현실이지요. 분단된 이 땅에는 여전히 전쟁의 공포가 생활의 구석구석 스며있고, 때로 그 공포심을 조장하여 우리 삶을 척박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잘 기르기 위해 저는 매 순간 고민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한 친구는 강원도 촌에 사시는 80이 넘은 노모께 야생진드기 조심하라고 전화를 드렸더니, ‘이북 놈들이 비행기에 진드기들을 실어 날라 뿌린 게 아니냐그게 아니면 어떻게 전국에 다 퍼지냐?’ 하셨답니다. , 정말 북한은 못하는게 없나 봅니다. 어머니의 불안한 마음을 풀어드리고,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려드리는 것도 우리의 몫입니다.

 

저희 40대는 이렇게 돌봐야 할 자녀와, 모셔야 할 어르신들 사이에 있는 낀세대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 향린의 40대 여성뿐만 아니라 제 주위의 같은 또래의 많은 분들이 맞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일을 하는데요, 제 하루를 살펴보면 아침 630분에 기상, 간단한 아침식사 준비, 7시쯤 아이들 깨워서 아침먹이고, 출근 준비하고 815분에 아이들 등교와 함께 출근,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고, 오후 6시 반에서 7시 사이에 퇴근을 해서는 바로 저녁을 준비해서 아이들 먹이고, 학교 숙제 점검하고 설거지하고 아직 어린 둘째가 씻는 것을 도와주고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얼추 저녁 10시가 넘습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이틀에 한번은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돌리고, 다림질도 합니다. 여기서 사춘기에 접어든 딸아이와 마음을 교류하는 대화란 없습니다. 아직도 엄마 손이 많이 가는 둘째와 눈 맞추며 이야기하고 좋은 책 한권 함께 읽는 시간도 없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알림장 가져와봐’ ‘숙제했어?’ ‘학원은 갔었니?’ ‘방 정리해야지’, ‘양치하자등등입니다. 엄마가 아니라 아이들의 관리자가 되는 순간입니다. 주말에는 조금 다를까요? 주말에는 일주일치 반찬을 해야하고, 비염이 있는 아이들을 위해 집안먼지도 구석구석 털어줘야 하고, 각종 경조사에 참여도 해야 합니다. 물론 멀리 계신 부모님께 안부전화도 드려야 하지요....

 

여기서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말씀드리면 저의 남편은 보기 드물게 가정적이고 아이들에게도 참으로 좋은 아빠입니다. 남편도 함께 하는 시간만큼은 가사와 육아에 적극 동참합니다만, 남편의 일터가 멀리있고, 잦은 야간 작업과 장기 출장으로 육아와 가사는 아직도 많은 부분 제 몫입니다. 맞벌이가 아닌 전업주부의 가정이라고 해서 상황이 많이 다르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40대 여성의 일상도 제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정, 직장, 육아 등에서 우리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일이 생기면 짜잔 하고 나타나서 해결하는 것이 당연한 수퍼우먼이여야 할 때가 많습니다. 아이는 하느님이 주신 큰 선물이라지요? 그런데 저는... 육아를 하면서 감사할 줄 모르고, 가사와 직장생활, 내가 선택해서 다니는 교회생활에서는 억울병(?) 증상도 약간 있고, 반우울증 상태로 감정이 뚝 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업하는 남편에 비해 내가 하는 일이 하찮게 취급받는 것 같을 때 억울하고, 향린에서 함께하는 거리기도회에 한 번도 함께하지 못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가서 또 한주를 준비해야 할 때도 억울하고, 다른 신도회는 안그런데 청여는 왜 그렇게 밖에 못하냐는 말을 들었을 때 우울증이 도지기도 합니다. 20, 30대에는 없던 감정이었 던 것 같습니다. 저는 향린에 나오기 시작한지 12년차 교인입니다.

 

고백하건데 제 삶은 예수님 가르치신대로 낮은 곳으로 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 아이를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아이들을 평등하게 대하지 못했고,

내 일신의 안락을 위해 부정을 눈 감고 모른체 하기도 했으며, 폭력앞에 항거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40대인 저는 이렇게 신앙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서 매 순간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결코 불혹의 세대가 아님을 고백합니다. 향린공동체라고 합니다. 네 우리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공동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향린은 사생활 침해라고 생각하시는지 개개인의 생활적인 면이나 개인의 고민에는 선뜻 표현하려 하지도 않고 알고 있음에도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말로만 공동체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습니다. 0년 전 전쟁으로 가족이 와해되고 삶 전체가 와해되었을 때 그 가족을, 할머니의 삶을 지켜주던 버팀목으로 마을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같은 성씨라는 하나의 공통점밖에 없었으나 가족 이기주의가 아닌 진정한 공동체로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지켜 줄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나 생각해 봅니다. 집성촌이다 보니 여기 저기 다 일가친척이여서 일까요? 울도 담도 낮았던 시절 옆집 아이가 밥은 먹었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굳이 알아보려고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고, 우리집 일에 여럿이 함께 와서 품앗이 해주고, 내가 다른 날 이웃집에 가서 함께 노동하며 자연스레 생겨난 공동체 의식이었겠지요.

 

전 제 삶의 큰 버팀목 중 하나가 우리 향린공동체가 되리라 기도해 봅니다. 마음의 울타리를 낮추고 내 옆의 사람이 밥은 먹었는지 아프지는 않는지 살펴보고 아플 때 다독여주고, 잘 못할 때는 호통도 쳐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60년 전에는 자연스레 생겨난 공동체라면, 우리 향린공동체는 헌신을 필요로 하는 공동체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제 마음의 울타리를 낮추겠습니다. 거기에 늘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해 주시실 거라 믿습니다.

 

40대를 살고 있는 저는. 저희 청년여신도들은. 많이 흔들릴 겁니다. 그러나 결코 부러지지는 않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이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