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주일- 창립정신(3) [바벨탑과 다락방]

104:24-31; 11:1-9; 2:1-8; 14:8-17

 

조헌정/강은성

 

[해방절과 오순절]

 

성서의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지만, 인간역사의 시각에서 볼 때에는 3천여 년 전 애굽 제국에서 히브리라 불리던 노예들이 폭정을 견디지 못해 저항을 하다 끝내 탈출을 하는 출애굽해방 사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들을 조상으로 삼아 자유와 평등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야훼신앙부족공동체가 생겨나는데, 저들은 스스로를 노예 혹은 떠돌이를 의미하는 히브리족 혹은 하느님과의 겨룸을 의미하는 이스라엘족이라 부르며 이날을 해방의 날로 지켜 왔습니다. 성서에서는 이 날을 죽음의 천사들이 어린 양의 피를 바른 문설주는 뛰어넘었다고 해서 유월절 혹은 과월절이라 부릅니다.

 

이 해방절로부터 50일째가 되는 날을 오순절이라 부르며 그해의 첫 열매인 햇보리를 야훼 하느님께 감사의 예물로 드려왔습니다. 천년 이상 이 해방과 감사의 절기를 지켜왔는데, 절반 이상의 역사를 다른 제국들의 지배하에 있었으니 저들이 두 절기를 얼마나 절절하게 지켜왔을 것인가를 우리는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남의 나라의 지배 아래 있다면 815의 광복절을 그냥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셨던 때는 로마제국의 지배아래에 있었고, 예수께서는 이 해방절에 로마제국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당하셨고, 이후 50일 되었을 때, 예수의 제자들은 매우 특별한 경험을 합니다. 이 특별한 경험이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2장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처형당하신 과월절로부터 50일간의 삶을 요약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당국의 핍박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 채 살아가다 오순절이 다가오자 성전에 나아가기를 꺼려했던 저들은 마가의 집 이층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당시 저들의 마음은 이러했을 것입니다. 스승 예수가 죽었다고 해서 그냥 제각기 흩어져 살아가기에는 지나간 3년간의 삶이 너무나 허망했고, 그건 예수를 또 한 번 배반하는 비겁한 행위로 여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를 도모하기에는 120여명에 불과한 저들로서는 힘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목숨은 하나밖에 없는지라 겁도 났습니다. 그래 하늘을 향해 기도로 몸부림을 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의 시작]

 

그렇게 기도하기를 몇 시간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합쳐지던 순간, 갑자기 하늘로부터 거역할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내려오더니, 거기 모인 제자들이 각기 다른 나라의 말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거역할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을 성령이라고 말하고, 이 거룩한 영은 오늘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바 하느님께서 보내신 진리의 성령이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죽음이 두려워서 숨어 지내던 제자들이 갑자기 거리 한가운데로 나가 당국을 향해 당신들이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갈릴리의 예수라는 사람은 하느님이 보낸 참 메시야였고, 그리고 그 예수는 너희들이 생각한 것처럼 땅속에 묻힌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고, 조금 있으면 다시 와서 이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러자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이때로부터 새로운 신앙혁신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그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의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들의 모임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좁은 의미에서 우리는 신앙을 통해 행복해지는 삶, 건강하고 부유한 삶을 원합니다만, 실상 이런 삶은 결국 100년이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니 정작 중요한 신앙의 목표는 죽음 극복에 있습니다. 진정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수만 있다면... 정말 그렇게만 살수 있다면... 세상에 무슨 걱정이고 염려고 불안이고 행복이고 건강과 같은 스트레스는 다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2천 년 전 오늘로 돌아가 보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희로애락을 같이 하며 존경하며 따랐던 예수라는 스승이 빨갱이로 몰려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래 제자들은 붙잡히면 같은 조직원으로 최소한 무기징역을 당할 판이라 현장으로부터 도망을 쳤습니다. 그리고 복음서는 숨어 지내던 저들에게 부활 예수가 여러 번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 대목입니다. 우리 가 누군가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았다고 해서 그 경험이 내게 나의 생명을 던질만한 용기를 가져다 주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가끔 의학적으로 사망선고를 받고서도 다시 살아나 몇 년을 더 살다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김정준목사님은 관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20대 청년시절 심한 폐병으로 의사가 도저히 살아날 가망성이 없다고 판단을 하였고, 그래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다 어느 날 소생하여 건강을 되찾았고, 그 이후 수십 년을 살며 연세대신학대학장과 한신대학장을 지내시며 저작과 어려운 시기에 엄청난 일들을 감당하셨습니다.

 

요즘 <나는 천국을 보았다.>라는 책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 이는 어떤 신앙인의 신비 체험이 아니라, 하바드의과대학을 비롯한 여러 학교에서 공부하고 학술지에 150여 편이 넘는 논문들을 게재하고, 국제의학컨퍼런스에서 200회 이상의 연구 발표를 하여 온 세계적인 뇌의학 권위자이자 신경외과 전문의인 이븐 알렉산더의 체험 이야기입니다. 200811월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감염으로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뇌 기능이 완전히 멈추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은 더 이상의 가망이 없다고 여겨 사망 판정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7일째 되는 날에 이승의 세계로 되돌아왔다. 그의 임사체험기는 생명에 대한 현대과학의 정설을 뒤엎고, 뇌를 떠난 영혼의 실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김정준목사님께 직접 배웠고, 또 이 알렉산더라는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내가 예수의 제자들과 같이 더 이상 감옥 가는 일이나 사형 받을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따라 살게 되는 사람으로 변화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천년 전 제자들의 경험과 나의 경험의 차이는 무엇인가?

 

어제 한겨레신문에 성공회 한홍구교수의 광주민주민중항쟁을 회고하는 <도청에 끝까지 남은 그들을 기억하자>라는 글의 일부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학살에 시민들은 처음에는 공포에 떨며 도망갔지만 어느 지점에선가 그야말로 겁대가리를 상실했다. 공수부대에 쫓길 때는 그저 무서운 생각뿐이었지만, 일단 몸을 피하고 나면 계엄군이 사람들을 때리고 죽이던 그 모습이 떠올라 엄청난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같이 시위를 구경하던 사람, 조금 전가지 같이 구호를 외치던 사람, 조금 전까지 같이 도망치던 사람이 픽픽 쓰러지는 것을 보니 죽고 사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계엄군의 만행에 몸서리를 치며 발을 구르던 시민들이 공수부대를 몰아내자며 저항에 나섰다. 계엄군은 겁먹고 도망쳐야 할 시민들이 장년 노년층까지 나서 저항하자 크게 당황하였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의 극적 변화의 이야기를 역사적 눈길로 접근하면 광주 시민들의 극적인 변화 장면과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의 제자들은 한 마음이 되어 모든 가진 것들을 내어놓았다고 성서는 증언합니다. 한교수의 증언을 계속 들어보겠습니다.

 

시민들에 대한 집단 발포 직후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서울에서 담화문을 발표하여 광주사태불순분자고정간첩들의 선동에 넘어간 깡패, 불량배 등 소수의 폭도들에 의한 것이라고 왜곡했다. 앵무새언론은 광주는 폭도들의 약탈과 방화와 파괴가 넘치는 무법천지 난장판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시민들이 주인이 된 광주는 너무나 질서가 잡히고 평온했다. .... 광주엔들 도둑놈, 양아치, 강도가 없었겠는가... (그러나) 도시 전체가 거대한 상갓집으로 변한 광주에서는 모두가 상주였던 것이다. 5월 광주는 거대한 슬픔의 공동체이자 나눔의 공동체였다. 계엄군이 광주의 외곽을 차단하여 물자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물가는 오르지 않았고 매점매석도 없었다. 양동시장과 대인시장의 상인들은 거리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을 먹였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천년 전의 성령강림절 사건과 80년의 광주 사건과는 분명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떼죽음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선 시민들의 저항운동이 파출소의 무기고를 부수고 총을 들었다고 해서 결코 폭력적이었다고 예단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에 근거한 비폭력 항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예수운동과의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고 그래서 광주항쟁은 역사의 불의한 세력들에 의해 폭동으로 매도되고 있고, 반면 예수운동은 새로운 신앙운동으로 자리매김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각 지방의 순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듣고, 저들이 마음에 찔림을 얻어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의 핵심을 사도행전의 저자 루가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체험을 한 제자들이 각기 다른 나라의 말을 하게 되었다는 언어소통의 사건이 먼저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점에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이때 제자들이 각기 하나의 외국어만 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여러 언어를 동시에 하게 되었는지 혹은 이 언어능력이 그때 잠시 동안만 있었는지, 아니면 오랜 기간 계속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언어소통의 사건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에서 나오는 언어혼잡의 사건을 온전히 뒤집는 하나의 우주적 사건 곧 재창조의 사건으로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벨이라고 하는 단어가 암시하듯이 제국 바빌론은 다른 나라에서 포로로 잡아온 이들을 노예로 삼아 성전의 높은 탑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 목적은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그러자 야훼께서는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의 무엇을 두려워 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인간들이 곧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음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 바벨탑 사건을 철학자 벤야민은 말과 사물이 헤어지는 결정적 사건이라고 해석합니다만,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어보고자 하는 종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제 2의 선악과 사건인 것은 분명합니다.

 

[박스 인생]

 

현대도시문명의 상징은 마천루 고층빌딩입니다. 고층빌딩으로 즐비한 뉴욕의 맨하탄은 인류도시문명의 상징입니다. 그 안에는 세계의 경제를 주무르는 월스트리트가 있고, 이 상징인 112층의 쌍둥이빌딩은 911 테러를 겪고 무너져 내렸습니다. 911이 지금은 정치적 테러로만 이해되고 있지만, 앞으로 시간이 흘러 인류문화사적으로 접근하게 될 때에는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도시문명이란 인간이 하나의 박스 안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30평의 고층 아파트박스 안에서 엘리베이터라는 박스를 통해 지상으로 내려와 버스와 전철이라는 박스를 타고 이동하여 사무실이라는 박스 안에서 일하다가 식당이라는 박스와 스타벅스라는 박스를 들락날락하다가 다시 아파트박스로 돌아와 침대박스 안에서 잠을 자다 끝내는 관이라는 박스 안에 들어가 영원히 자는 박스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 박스 인생은 예를 들면 엘리베이터박스나 전철박스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 어깨를 맞대고 상대방의 숨소리를 들어가며 살아가니 그 누구보다도 가까워야 하지만, 실상은 그 사람과는 단 한 번도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눈 적이 없는 전적인 타자입니다. 하나의 공간 안에 있지만, 회색의 도시문명은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단순히 모를 뿐만 아니라 편가리를 합니다. 강남과 강북, 지상의 인간과 지하도의 노숙자, 한 지붕 아래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상사와 부하, 갑과 을, 도시문명은 인간을 하나의 좁은 공간으로 계속 몰아넣지만,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끊임없이 벽을 세워나갑니다.

 

모두가 같은 시간 9시 출근 11시 예배 7시 회식에 만나고 떠들고, 좁은 공간 안에서 어깨를 맞대고 살아가지만, 소통 단절이라고 하는 기묘한 세상 속에서 모두가 고독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벨탑이라고 하는 언어혼잡은 수천 년 전의 신화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현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성공이라는 미명 아래 경쟁을 부추기는 개인주의와 비싸고 화려한 것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물질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가 바로 오늘의 바벨탑인 것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언론을 통해 이 시대의 바벨탑을 또 하나 보았습니다. 그건 수리온이라고 하는 국산 공격용 헬기 앞에서 군복을 입은 여성 대통령과 V 자의 한 줄로 늘어선 군인들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는 장면입니다. 군사무기 앞에서 손가락을 추켜세운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 최고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그리고 나서 이 여성은 무기군수산업을 키우는 일이야 말로 창조경제라는 말을 했습니다. 인간을 어떻게 하면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장 많이 죽이는 대량살상 무기를 잘 만들어 이를 수출하여 파는 것이 창조경제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이야 죽든 말든 아니 사람을 죽여서라도 돈만 벌면 된다는 논리인 것입니다. 제가 살다 살다 무식하다 못해 이런 반생명적인 사탄적인 발언이 일국의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경우는 처음입니다. 어렸을 때에 부모가 총에 의해 모두 살해당했기에 어느 정도의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만, 이 모습과 발언은 폭력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또 한명의 폭군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히틀러가 어렸을 때의 폭력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폭력의 지배 세계를 꿈꿨듯이 저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이 나라가 앞으로 어디를 향해 갈까하는 두려움으로 온 몸에 소름이 꽉 끼쳐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절을 맞이합니다. 성령강림은 단지 성령이 인간에게 임했다는 것이 아니라 언어혼잡의 바벨탑사건을 무력화하고 언어소통의 다락방 사건을 통해 자유와 평등의 새로운 인간 존중, 화해와 일치의 생명의 시대가 돌입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규정하는 신분이나 지위나 빈부와 같은 차별들은 이제는 무력해졌고, 우리는 모두 한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한 형제요 자매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시작은 인간 사이에 존재했던 불통과 불신의 벽을 깨는 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가로막는 종교의 벽을 깼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쟁의 벽을 깼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초대교회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과의 소통의 회복이고 세상과의 소통의 회복입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 마냥 나눠서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저 멀리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세상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향린교회의 창립정신 중 하나는 사회선교입니다. 이를 개인의 삶에 역점을 두면 입체적 선교라 부를 수 있고, 공동체에 역점을 두면 민족통일선교라 부를 수 있습니다. 60주년을 맞아 오늘 우리는 향린신앙실천선언문을 채택하고 이를 세상에 선포할 것입니다. 이는 다락방의 성령체험을 통해 교회의 벽을 넘어서서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우리의 입을 여는 방언의 사건이자 진리를 들고 거리로 나서는 사건입니다. 60년 전 향린교회는 성령강림절을 맞아 남북으로 나뉘어 총질을 해대며 서로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이 땅에 자신의 뜻을 드러냈습니다. 이제 60년이 지난 2013년 성령강림절에 또 다시 향린교회는 이 세상을 향해 우리의 뜻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간 오랜 시간 다듬어 온 실천 내용을 중심으로 60주년 정책과 선언 위원장강은성장로께서 나오시어 계속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 생활목회자 - 강은성장로

 

제가 이번 주일 하늘뜻 펴기를 맡은 것은, 조 목사님이 우리 교회의 창립 이념 중 하나인 입체적 선교 내지 사회선교를 설명하는 데에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이하여 발표하는 '교회갱신과 사회선교 실천을 위한 제안'문이 적절하다고 보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 주보를 보면서 마음이 쿵 내려 앉았습니다. 한문덕 목사님이 맡으신 하늘뜻 펴기 제목이 '선교지향적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성서연구에 대한 깊이, 동양 전통의 사색, 평소의 인품이나 말씀하시는 것까지 어느 하나 흠잡기 어려운 한 목사님이 하신 바로 다음 주에, 비슷한 주제로 제가 평신도 설교를 해야 하다니... 속으로 이건 망했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기장 교단은 세계교회협의회가 주창한 '하느님의 선교'를 믿습니다. 선교의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며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벌이시는 선교 활동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의 본질은 사람을 많이 교회에 불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보전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세상과 사람을 변혁시키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 사회선교의 핵심 근거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회선교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이것을 온 삶으로 보여 준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로마 제국주의 압제에 헤롯과 같은 지방권력, 유대 종교권력의 착취까지 3중고를 겪던 이스라엘 민중을 보며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자신의 주위에 몰려 드는 군중들을 먹이고 고치고 말씀을 전하시는 동시에 그들을 옥죄는 정결법, 안식일법 등의 본질을 드러내고 권력을 가차없이 비판하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당시 권력의 중심지 예루살렘에 올라가, 권력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성전 권력을 뒤엎었습니다. 그 끝은 십자가 처형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입니다. 예수님의 민중 사랑의 정점은 성전숙청 사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이 사건의 자연스런 결말인 것이지요. 그가 민중을 사랑하는 척만 했거나 조금만 사랑했어도 정치범으로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970년대 산업선교로 시작한 이 땅의 사회선교 역시 노동자, 도시빈민, 농민과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리며,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을 안아주면서,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과, 독재, 공권력, 기업, 구조적 폭력에 분노해 왔습니다. 연민만 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함께 투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2% 부족한 사랑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40주년에 발표한 교회갱신 선언에서 우리는 교회가 예배와 문화에 민족 정서를 담고, 민주적 공동체, 선교지향적 공동체로 갱신하기를 제안하였습니다. 60주년을 맞이하여 정책과 선언을 준비하면서 40주년 이후에 발표한 여러 선언의 실천에 대한 평가와 반성, 그리고 이후 20년 동안 변화된 상황에 교회가 응답하고 지향해야 할 사항을 60주년 선언에 담는 것으로 그 기본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교회갱신 선언의 예배 문화와 민주적 공동체 내용 중에서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가 실천하지 못했거나 좀더 심화 발전시켜야 할 사항을 60주년 선언의 '예배 문화와 교회 개혁' 분야에 묶어 넣었고, 그 동안의 우리 경험을 바탕으로 교회 내의 차별 없는 평등과 교회개혁을 위한 연대를 추가했습니다.

 

교회갱신 선언에서 선교지향적 공동체에 관한 내용은, 이후 우리 교회의 실천 경험, 변화한 사회환경과 남북 및 국제환경을 반영하며 우리 교회와 사회가 앞으로 지향해 나가야 할 4가지 분야, 즉 평화통일, 인권, 생태환경, 교육의 내용으로 확대하였고, 구체화시켰습니다. 그 만큼 지난 20년 동안 우리 교회의 역량이 커졌고, 선교의 활동의 범위도 다양해 지고 넓어졌을 뿐 아니라 참여 교인들의 폭도 크게 늘어났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선언에 들어가는 몇 가지 사항을 짚어 보고자 합니다.

 

<평화 통일>

 

지난 4월에 '통일토론회를 했습니다. 그 날 주요 의제 중 하나가 북한 핵문제였는데요. 토론회 뒤에 우리 향린교회에서 통일의 상대방인 북한을 그렇게 비판하는 토론회를 할 수 있느냐, 비판 내용이 냉전수구세력이나 마찬가지 아니냐는 우려를 들었습니다. 실향민이거나 한국전쟁에서 고초를 당하신 교우님들, 일생을 통일운동에 헌신하시고, 오랫동안 향린교회에 다니시면서 고난의 행군을 겪는 북에 대한 안타까워 하며 기도와 헌금으로 함께 했던 많은 교우님들이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그 전통의 한 자락에서 살아 왔기 때문에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 말씀을 듣다 보면 마음이 찡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도 객관적으로 보셔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의 20대에서 40대 초반까지의 세대 즉, 사회주의권이 무너져 내리면서 민주화운동 세력이 덩달아 흔들렸던 90년대 초반 이후에 대학에 들어갔던 세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던 세대는, 이전 세대가 독재에 항거하면서도, 압축적인 경제성장의 과실을 따먹는 기간에 성장하여, 그 압축성장의 부작용이 극대화되었을 때의 피해를 입은 세대입니다. 혹시 20년 뒤에 통일이 된다고 가정할 때, 그들은 통일비용을 세금으로 내고, 가족과 함께 사회적 혼란과 불안을 겪으며, 기쁨과 어려움을 사회 일선에서 짊어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통일이 더 현실적인 무게로 다가옵니다.

 

남한 통일운동이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을 잇는 정부가 들어선다 하더라도 자신의 재임기간 동안 우리가 바라는 만큼 통일에 진전이 이뤄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향린교회 20-40 청년들이 통일운동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을 통해 통일운동이 대중운동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외환 위기 뒤에 확연히 달라진 삶의 환경에서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인지, 소통의 문법이 다른 그들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주시고 마음을 열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선언에는 이러한 고민을 평화통일 분야에 담았습니다.

 

"기성세대는 일제강점기와 분단,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질곡의 역사를 끝내지 못하고 전쟁과 분단의 상황을 후대에 물려주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하여 교회는 젊은 세대에게 사죄해야 마땅하다. ... 교회는 기존 통일운동의 긍정적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내용과 방식을 통해 청년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둘째로, 인권 분야에는 우리가 연대하고 지원했던 현장의 경험을 많이 반영하여 국가폭력과 기업의 폭력 중단,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같은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작년에 동성혼 결혼식장 대여 문제로 교회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날선 논쟁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여러 교우들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실제로 날선 논쟁의 글을 올리셨던 교우들을 만나 보니 생각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내상이 커서 그런지 그 뒤로 교회 안에서 성소수자 문제는 아예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작년 8월에 당회에서 동성혼 결혼식장 대여 논쟁에 관한 당회의 입장을 낸 뒤 그에따라 이후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한채윤 대표를 초대해 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10명 정도의 당회원들이 모여서 궁금한 점을 묻고 토론도 하면서 서로 상황을 많이 공감하고 이해하게 됐습니다. 사실 다수 교인들이 성소수자 문제가 익숙하지 않을 것이고 그 동안 개별적인 경험과 지식을 통해 갖고 있는 인상도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작년의 고통스런 경험과 교육을 통해 60주년 선언에는 이렇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성소수자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 그들에 대한 사회적 혐오가 근절되며, 성소수자 교인과 비성소수자 교인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셋째. 생태환경 분야를 보겠습니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 실무자로 일했고, 우리 교회에서 생명환경위 실무 역할을 훌륭하게 해 왔던 정 아무개 집사가 오래 전에 한 말이 참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환경운동단체에서 열심히 할 수록 단체의 주장과 내 생활 사이의 괴리가 생겨서 괴로워서 그만뒀다고 했습니다. 사실 냉정하게 보면 도시에 사는 우리 삶 자체가 지구 환경에 폐를 끼치는 일입니다.

 

생태환경 분야 작성을 주도하신 이상춘 장로님의 지론은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완전 공감되는 말씀입니다. 이 분야는 친환경 농산물, 생명살림 자매결연, 탈핵운동에 이르기까지 익숙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개인과 가정의 생활이 좀더 생태적인 삶으로 변화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생태공동체가 조직되어 조그만 활동부터 체계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활동에 많은 교우님들께서 함께 하시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교육 분야입니다. 교육에 대한 고민은 반성에서 시작했습니다.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학교교육과 사교육으로 고통에 가까운 어려움을 겪고 있고 부모들도 그에 못지 않게 힘들어 하는 환경에서, 신앙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올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르치고, 학부모와 함께 소통하며 이러한 문제를 함께 헤쳐 나가야 할 우리 교회교육이 교회 차원의 과제가 되지 못한 채 교육담당 목회자와 교사들만이 허덕이며 감당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교육은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교회학교 교육과 성인교육으로 나뉘는데 60주년 선언에서는 교회학교 교육을 시급하다고 보고 주로 다뤘습니다. 교회학교에 교회 차원의 힘을 실으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교회학교가 향린교회의 다음 세대가 아니라 이 땅의 2세들을 키우는 교육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향린에서 교육 받은 아이가 다른 교회를 가거나 아예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향린에서의 배움은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의 긴 인생에 매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바로 제 자신이 거의 완전히 교회교육의 산물인데요. 그 꼴보수라는 예장합동측 교단에서 모태신앙으로 자라서 교회학교에서 배우고, 대학 때는 성서공부 모임, 사회과학 공부 모임 등 성인교육을 통해 성장하여, 20대 중반에 향린교회에 와서 지금까지 그럭저럭 봉사하고 있으니 향린교회는 남는 장사를 한 셈입니다. ^^

 

이번 선언에 학부모회와 교육위원회 조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영아부, 유아부에 아빠모임과 엄마모임이 잘 되고 있는데요.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 아이를 둔 교우님들은, 학부모회를 구성하여 교회학교 교사와의 교류, 학부모 사이의 공유와 토론, 신앙지도교육 등을 체계적으로 한다면 자녀를 양육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 자녀를 둔 학부모로서 저도 꼭 참석하겠습니다.

 

<향린교인 생활실천 다짐>

 

그리고 40주년 이후의 선언과 실천을 점검하면서, 개인과 가정에서의 실천이 부족하지 않았나 제 자신부터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60주년에는 개인과 가정의 실천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향린교인 생활실천 다짐’ 12개 항목을 작성했습니다. 5가지 분야별로 모두 40 여 개를 놓고 3주 동안 교우님들이 스티커를 붙여 주신 것 중 다 득표한 항목을 고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가정, 직장의 모든 관계에서 차별적 언어나 행위를 하지 않도록 민감하게 성찰하며 행동한다.” 와 같이 개별적 생활실천부터, “우리는 한반도 평화협정 실현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나선다.” 와 같이 공동의 실천이 필요한 것까지 다양한 생활실천 다짐이 선정되었습니다.

 

공동의회에서 채택되면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만들어 드리려고 합니다. 늘 보시면서 실천하시면 좋겠습니다. 교회갱신선언 중 시행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목회자 및 장로임기제, 우리가락 예배, 사회선교센터 등이 그것인데요. 그래서 60주년 선언을 준비하면서 실천의 주체와 방안에 관해서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목회운영위원회, 당회, 목회실, 교육부, 사회부 등 각 부서, 신도회, 평화나눔공동체 등이 정책이나 활동방향을 정할 때 이 선언을 참고해 주시고, 선언의 추진 방안이나 선언 내용 중에서 좀더 구체화 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구체화 방안도 더 고민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성서본문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들이 예루살렘 거리에서 말씀을 전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계 각 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의 말로 말씀을 들었다는 기적 같은 이야기입니다. 매우 익숙한 이 본문을 사회선교 관점에서 여러 번 읽다 보니까, 선교의 본질을 참 잘 드러내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이 여러 나라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그 나라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듯, 우리 사회 곳곳에서 고난받는 이들에게 그들이 처한 상황에 맞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바로 사회 선교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받는 분들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잘 전하는 방법은 그 분들의 현장에 찾아 가는 것입니다. 사회부나 촛불교회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현장에 가서 예배를 함께 드리고 있습니다. 주보에도 소식이 계속 나고 있으니까 챙겨 보시고 함께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1년에 한두 번은 주일에 현장예배나 거리예배가 있어서 온 교우들이 은혜스러운 시간을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사회선교 주무부서에서 꼭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끔 언론에 나오는 묻지 마 범죄 소식을 들으며, 이제 우리 사회에서 나 혼자만, 내 가족만 잘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분들도 진지하게 사회를 바꿔야 하는 고민을 하고 시민단체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당하는 이웃들에게 삶과 죽음을 통해 사회선교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지금 여기에서 교회 갱신과 사회 선교 실천에 적극 나서야 할 것입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의 말씀]

 

자신의 영혼을 흐리게 하는 모든 오물을 제거하라. 그러면 사랑만이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대상을 찾으면서 너 자신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것, 나아가서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생명을 주는 것, 즉 신을 대상으로 선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