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창립 기념 주일

향린, 이름 그대로

시편 47 ; 이사 45,5-8 ; 2 고린토 2,14-17 ; 요한 12,20-26

김 경 재 목사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이름의 본질을 드러내는 현실재]

오늘같이 중요한 교회설립 기념주일엔 마땅히 담임목사께서 말씀 강단을 담당해야 할 것인데, 부족한 사람을 단 위에 세우시는 뜻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오늘 설교자는 한국에 많은 교회공동체가 있지만, 향린교회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우리가 못하는 일을 해내는 이 교회를 더욱 기대합니다. 그러나, 사실 오늘 설교자는 향린교회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잘 모릅니다. 그러기에, 도리어 향린교회를 밖에서 보고 느끼며 사랑하는 자로서, 허심탄회한 말씀을 성경에 의지하여 증언해 달라는 부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읽은 여러 곳의 성경말씀중에서, 특히 고린도후서 2장 14-17절과 읽지는 않았지만 그 본문 말씀에 곧바로 뒤따라오는 고린도후서 3장 1-3절 말씀에 의지하여 증언하려 합니다. 설교 제목을 “향린, 이름 그대로”라고 적어보냈습니다. 설교 핵심인즉 “그리스도의 향기와 그리스도의 편지로서의 향린교회가 되소서”라는 당부입니다.

이름은 개인 이름이나 단체 이름이나, 부르기 쉽고 다른 실체와 구별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방편적 호칭이라고 현대인들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은 고대사회에로 갈수록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이름이 표시하는 실재 그 자체라고 여겼고, 그 이름을 부를 땐 그 이름의 주인공과 현실재가 그 장소에 현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설립 60주년이 되는 주일인즉, ‘향린’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교회공동체가 되자고 새삼스럽게 다짐하려는 것입니다. 듣건데 ‘향린’이라는 교회이름은 지금 이 자리가 아닌 장소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맨처음 신앙선배들이 모였을 때, ‘향린고아원’이라는 사회복지사업하는 선린단체가 있었는데, 그 지역의 토지를 구입 또는 임대하여 첨 예배장소를 정했다고 들었습니다. ‘향린고아원’ 이름에서 ‘향린’이라는 단어 곧 “이웃에게 향기를 발한다” 의미가 너무 좋아서 그대로 교회이름으로 삼기로 처음 회중공동체가 결정했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향기’를 세상에 발하는 생명공동체]

오늘 성경본문 중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냄새니,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냄새요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이다”(고후 2:15) 라는 예사스럽지 않은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편지에서 ‘우리는’이라고 표현하는 편지 발송자가 복수형태로 되어 있는 것은 바울과 선교동역자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디도등을 염두에 두고 편지를 쓴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공동체에게 이 편지를 쓰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먼저 말합니다. 불가에서 흔히 하는 속담같은 말이 있는데 “생선 싼 종이에서는 비린 냄새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냄새가 난다”라는 속담이 그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불생불멸하는 불성이지만 현실적 인간 실존은 세상 속에 살면서 온갖 속세의 가치관과 습관과 밝지 못한 것들에게 마음이 훈습된다는 경고입니다. 숯불구이 불고기 음식집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오면 옷에서 고기 냄새가 나듯이 인간 실존은 훈습된 비본래적 상태에서 벗어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경고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제단에 피운 향냄새와 희생제물을 제단 화로불에 불태울 때 제물타는 냄새가 몸에 배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또한 로마제국 치하 전쟁에서, 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이나 패전국의 패잔병들이 쇠사슬에 묶인채 광산 노역장으로 끌려가는 행진 속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이미 진동함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선교동역자들이 지중해 연안 도시를 방문할 때, 때론 죄인신분처럼 포승에 묶인 신분으로, 어떤 때는 고귀한 자처럼 지방 영주들에게 대접을 받으면서 세계곳곳으로 순례하는 삶이 그리스도의 냄새를 이곳 저곳으로 풍기고 다니는 하느님의 사도들 혹은 하느님의 종들로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느님께 감사한다”(고후 2:14)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냄새를 풍기는 주체는 동일한 냄새일 터인데, 구원 받을 자에게는 ‘생명의 냄새’로 느껴질 것이고, 망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냄새’로 느껴질 것이라는 이상한 말을 함니다. ‘그리스도 냄새’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과 십자가와 부활’속에 나타난 복음이 발산하는 ‘새로운 피조물’에서 풍겨 나오는 신선한 기운이고 화평과 사랑의 향기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은, 당시 지도자라고 일컫는 다른 사람들처럼 ‘순수한 하느님의 말씀’에 물타기를 하여, 순전성을 잃어버린 가짜 포도주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느님께 받는 것 같이, 하느님 앞에서와 그리스도안에서 말하는 생명의 말씀”일 때 그 말씀 자체는 불의한 자에게는 심혼골수를 쪼개는 날카로운 칼이 될 것이고, 의롭게 살려는 자에게는 비록 가진 것이 없고 내몰리는 상황일지라도 그들에게 생기와 희망을 주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가 된다는 것입니다.

향린교회의 처음 초석을 놓던 시대에 말씀 강단을 주로 맡으셨던 안병무 교수를 한국신학대학에서 직접 가깝게 모시면서, 십여년 이상 교직에 몸담았던 행복한 시절이 설교자에게 있었습니다. 안병무 선생이 학생들의 학위논문 심사 때나 설교 연습 강평시간에 하시던 말씀이 귀에 쟁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설교자나 성경해설자가 저지르는 가장 무서운 유혹과 범죄행위는 성경에 증언되는 ‘하느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좋게 적당히 잡것과 물을 타서 교인들에게 ‘스칸달론’을 일으키지 않도록 변질시키는 죄악이라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복음 그 자체를 너무나 세속화되고 지성화되고 영악해진 우리에겐 솔직히 짐이요 거리끼는 말씀이요 듣기 거북한 말씀이기 때문에 각종 이유와 그럴싸한 명분을 붙여 변질시키고 완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살기엔 우리의 사회적 상황이 너무나 어렵고 우리 신앙의지가 약하여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라고 정직하게 고백할 일이지, 왜 괴변과 명분을 늘어놓으면서 순전한 말씀을 잡되고 혼잡하게 만드느냐는 준엄한 질책을 하셨습니다.

왜 향린교회에 대한 평이, 수많은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교 교회들의 평이 서로 정반대로 상반되는 것입니까? 향린교회는 정치교회요, 영혼구원과 평강을 선물하지 않고 무거운 도덕적 짐을 짊어지게 하는 인본주의 교회요 자유주의적 교회라고 비방하는 무리들이 많습니다. 다른 한편에선, 오늘날 교회들이 너무나 변질되어 교회다운 교회 찾기가 어려운 이 시대에 그래도 교회다운 교회는 향린교회를 비롯한 몇몇 교회뿐이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밖에서 많이 만남니다. 향린교회라는 존재 그 자체가 어떤 사람에겐 ‘죽음의 냄새’로 어떤 자에겐 ‘생명의 냄새’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향린교회가 사도바울이 말하는 ‘우리 증언자들’처럼 만약 ‘하느님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갈릴리 원복음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느님께 받은 것 같이, 하느님 앞에서와 그리스도안에서 말하고 선포하는 교회’로서 책임을 계속 담당해주기를 기대하고 기원합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걸어온 것처럼 계속 걸어나간다면, 구원받을 자에게는 생명의 냄새로, 망할자에겐 죽음의 냄새로 작용할 것입니다.

복음공동체의 얼굴은 경직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평화요 비폭력이요 설득이요 인내하는 희망이요 웃음이요 유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물러빠진 나약함은 아닙니다. ‘세상을 이미 이기신 예수’를 맘에 모신 자들은 ‘이미 이긴 전장’에 나가는 군사와 같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죽은 후 영혼이 들어가는 저세상 천국만이 아니듯이, 영계를 부인하는 현세적 시공간에 제한된 지상천국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 곳과 저 곳, 하늘과 땅, 시간과 영원, 감성과 지성과 영성이 각각 차원을 달리하면서 그 하나도 소홀하게 되어 지거나 살아지지 않은 체 승화되고 변화되는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편지를 전달하는 우체부가 아니라 ‘그리스도 편지 그 자체’]

오늘 설교의 성경본문은 다른 성격구절 봉독을 참작하여 2장 14-17절까지만 읽었지만, 성경의 편집과 문맥을 감안한다면 3장 1-3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두 가지 은유를 들어서 복음의 본질을 선포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삶에 부딪혀 새롭게 거듭난 자들의 인간됨에서 풍겨나는 ‘그리스도 냄새’ 비유와, 다른 은유는 ‘그리스도 편지’ 은유입니다.

앞에서 불가의 속담을 소개한바 있습니다. “생선 싼 종이에서는 생선 비린 냄새가 나고, 향 쌌던 종이에서는 향냄새가 난다”는 속담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제대로 만나고, 중생체험하고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덧입었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말로서 예수가 구세주임을 전달하는 우체부 역할’에 머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오늘 바울편지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복음을 전달하는 정보전달자로서의 우체부가 아니라 ‘편지 그 자체’이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이나 잉크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영으로 쓴 것이다. 돌판이나 종이위에나 자판기를 두드려 노트북 화면에다가 것이 아니라, 육체의 마음판, 몸 안에 심장의 세포안에 쓴 것, 옛 성경 표현으로는 육의 심비에 쓴 편지라고 강조입니다. 요즘말로하면, ‘예수전도’가 아니라 ‘예수따름’에로, ‘예수따름’ 단계에서 ‘예수닮음’에로, ‘예수닮음’에서 ‘예수 살기’에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지요.

향린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주목을 받고, 비난과 칭찬을 동시에 받고, 모함과 모형의 두가지 서로 대립되는 평가를 듣는 이유는 다른데서 오는 것이 아님니다. 향링공동체 구성원들의 많은 신도가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로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닥쳐오는 두 가지 반응일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힘 자체만으로 우리 자신이 ‘예수의 냄새,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려 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요 율법적 짐이 될 위험이 큼니다. 다소 성공하면 종교적 교만병에 걸릴 것이요, 실패하면 신앙적 죄책감에 시달릴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론 된 것이며”, 성공과 실패, 밝음과 어두움, 용기와 비겁한, 그 모든 우리 약함과 강함을 다 이미 아시고 격려해 주시며 우리들의 약함과 실패까지도 들어서 쓰시면서, 당신의 사랑과 진리와 참의 세계를 펼쳐가시는 하느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현실상황과 오늘의 말씀]

한국이 배출한 한 들판의 예언자 함석헌옹의 말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현대는 인류문명이 크게 한 번 허물을 벗어야 하는 문명전환기임에 틀림 없습니다. 전통적인 정치경제 이념, 아직도 맹위를 떨치는 국가주의 망령들, 고대와 중세시대 찬란했던 영광의 시대 복위를 꿈꾸는 세계 종교들의 자기 전통 우월주의와 권위강화, 그 모든 껍질은 한번 벗겨지고 거듭나야 하는 시대일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오늘의 현실이 참으로 답답합니다. 더욱이, 남북 분단상황에서 남북이 이렇게 대결적이고 반생명적인 험담과 살의를 내뿜은 것은, 하느님 앞에서 무서운 죄요, 인류 다른 문명인 앞에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형제살인행위일 뿐입니다.

새로 출발한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의 기본방향이 이번 박대통령의 미국 방문시 오바마 미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밝혀졌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주도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는 정책전환이 있기를 바랬는데, 본질적으로는 이명박 정부와 큰 차이가 없는 듯하여 실망스럽습니다. 그런데, 더욱 걱정이 되는 것은 미국 방문중 발생한 청와대 대변인이라는 윤모씨의 행동이 보여준 ‘사건의 의미’입니다. ‘생선 싼 종이에서는 비린냄세가 나고 향 싼 종이에서는 향기가 난다“고 했지요.

윤씨의 사건이 개인의 불미스런 돌발행위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온 세계에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격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고, 한국민 전체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며, 많은 경비와 준비를 했을 한미정상회담의 모든 찬치상을 한순간에 뒤엎어버리는 이런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누적되어 온 박대통령의 통치철학과 박근혜 정권을 만들어낸 한나라당의 도덕적 수준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크게 성경의 눈으로 보면, 우리사회의 은폐되고 분장되고 위장된 온갖 반민주적, 반인권적, 몰가치적 병폐를 경고하는 하늘의 ‘표징’이라고까지 느껴질 정도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대통령의 공식일정이 아직 끝나지도 않은 시간에 한시간 한시간을 긴장과 치밀한 준비와 지성의 맘으로 대기해야 할 최고 공무원이 호텔에서 술을 마시고 성희롱을 할만큼 이나라 정부의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의 도덕적 불감증이 치유불가능한 한계상황에 도달했다는 증좌입니다. 언론인 출신이라고는 도저히 봐 줄 수 없는 극우적 글을 남발해 왔고, 정권아부적인 그 윤씨의 행태와 품격을 보고, 그를 고급공무원에로 채용은 불가하다는 수많은 국민여론과 여야충고를 귀담아듣지 않고 그를 기용한 박대통령의 독단과 소통부재의 통치자세가 불러온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국민은 그 일련사건의 근본원인과 최종책임을 대통령에게 묻는 것입니다. 주말 언론에 나타난 윤씨의 해명이란 것이 여전히 변명과 책임덮기와 박정권의 책임문제로 확산하는 것을 막아보려는 청와대의 자세이기 때문에, 더욱 더 심각성을 느끼게 됨니다. 해명자 말처럼 양심상 큰 잘못이 없다면, 왜 도망치듯 남모르게 방문일행에서 일탈하여 귀국했는가 말입니다. 그래서, 박정권이라는 정책을 알리는 편지배달부의 새로 입힌 복장이나 편지봉투 색깔을 바꾼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편지내용 그 알맹이 자체’를 바꾸시라는 요청을 국민들과 하늘이 하는 것입니다.

역사와 사회의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도, 하느님은 쉬지않고 창조세계 안에서 ‘새로움과 창조적 전진’을 이뤄가십니다. 이 문명전환기, 허물 벗는 시대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은, 진실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냄새’를 제대로 발하고 ‘그리스도의 편지’ 그 자체를 우리 몸으로서 전달하는 일일 것입니다. 향린교회가, 지난 60년 동안 그렇게 걸어왔듯이, 더욱 더 순수한 갈릴리 복음을 겸손하지만 힘있게, 우리는 약하지만 담대하게 설교에서, 이웃봉사에서, 역사적 증언행동에서 삶으로 증언해 나가면서 향린 이름 그대로 ‘순수한 갈리리 예수 복음이란 게 무엇인지를 세상에 보여주는 신앙공동체’로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향린과 함께 동행하신 하느님이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