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공동체로 함께 살아가기

148; 11:1-18; 요한묵시 21:1-6; 13:31-35

 

조헌정목사 나명훈집사

 

오늘 다음 주일 그리고 5월 마지막 주일과 6월 첫 주일 4주간에 걸쳐서 향린 60주년을 맞아 창립 정신을 되돌아보고 이를 다가오는 세대에서 이를 어떻게 발전 성숙시켜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창립 정신은 공동체, 평신도목회, 입체적 선교, 독립교회 4가지인데, 이를 와 평신도가 함께 진행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나명훈집사와 함께, 다음 주는 평신도목회 주제로 목회운영위원회 위원장이신 김창희장로, 그리고 526일 주일에는 입체적 선교 정신을 오늘 각자의 삶에 구현해내는 실천 항목들을 고민하고 이끌어내기 위해 애쓰고 계시는 정책과 선언위원회의 강은성장로가 저와 함께 하늘뜻을 펼칩니다.

 

독립교회 부분은 누구와 함께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미정입니다. 이미 기장교단에 가입하였으니까 독립교회는 포기한 것 아니냐 하는 질문을 하시는 분이 계시지만, 저는 오히려 이 부분은 더 심화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관련하여서는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와 공동체]

 

요즘은 공동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고, 어떤 분들은 교회라는 말 대신에 공동체라는 말을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영성이란 단어 또한 성장과 부흥이라는 과거 교회의 중심 표어에 대신하여 자주 쓰이면서 공동체 영성이란 말이 교회의 목회신학적 주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있어 교회 하면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예배이고, 예배를 신앙 활동의 중심에 두다 보니 교회 건물을 중요하였고, 그래서 예배당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것이 하느님의 뜻으로 이해가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건축에 따른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어나면서 여기에 대해 자성하는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고, 지금은 작지만 교회 건물을 갖지 않는 교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건물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만이 참 예배이고, 과연 예배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가져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3년간의 하느님 나라 활동 가운데 예배드리는 모습이 별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모습, 병자들을 고치시고 사탄을 내쫓아 인간 회복을 하시는 모습이 중심이고 중간 중간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논쟁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논쟁의 핵심은 안식일법과 성전중심 체제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여인은 우리 조상들은 그리심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려왔고, 선생님과 같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자 예수님의 답변은 이 산이다, 혹은 예루살렘이다 하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소에 구별없이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를 드리면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드린다는 의미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남지만, 우선 예수님의 말씀은 참 예배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장소에 구애되지 않는다면 시간 또한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굳이 향린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이고, 성수주일 또한 우리 신앙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당시 예배의 중심이자 하느님의 집으로 여겼던 성전을 허물라는 과격한 발언까지 하셨습니다. 여기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금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전한 것이고, 이는 향린교회 담임목사의 입장과 다른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새겨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여간 예수님의 말씀은 함께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고 하늘말씀을 듣는 예배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결국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드린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초대교회의 모습이 보입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을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고,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순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244-46) 여기에 성전에 모였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분명 예배와 기도를 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배는 한 부분이었습니다. 예배에 앞서 저들은 가진 것들을 모두 내어 놓고 공동 소유로 했습니다. 그냥 이사람 저사람 알지도 못하는 사람끼리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족 이상의 진정한 생활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예배를 드렸고, 그리고 그냥 예배드리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집집마다 돌아가며 식탁교제를 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예배가 성전 안에서의 드려지는 공식적인 예배가 핵심이 아니라, 생활공동체가 보다 중요한 핵심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드린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됩니다. 목욕재계하고 새 옷 입고 세상을 향한 모든 잡념을 버리고 드리는 예배가 참 영적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소유를 내어 놓을 만큼 하나의 가족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참 영적 예배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향린교회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12명이 처음 생활 공동체로 시작을 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눌 뿐만 아니라 하루 3번 기도 시간을 갖는 수도원적인 예배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가정이 있고, 또 세상 직업을 갖게 됨으로 이를 계속 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으며, 얼마 지나지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참여함으로 생활공동체에 참여하지 않는 교인들과의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여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2년정도 이를 지켜온 것만 해도 엄청난 결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도 청소년 시절 목사를 지망했을 때, 처음 떠오르는 교회의 모습은 이런 공동체였습니다. 사람이 혈연을 넘어 함께 모여 산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친구들끼리 그런 공동체를 만들면서 살자고 자주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만나면 그런 꿈을 얘기합니다. 미국에서 이민목회를 십여년 하면서 제 마음에 회의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교인들을 최대한 나의 교회로 끌어 모으고, 그래서 교회 건물을 키워나가는 것이 예수님께서 나에게 부탁하신 목회 목적이 맞나? 어디 교회를 나간들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다 자기 교회인데, 내가 내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 또한 이기적인 생각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가 여럿 있는데, 한 자녀는 성공을 하여 부자과 되었고, 다른 자녀는 끼니를 제대로 이어가기 힘들 만큼 가난합니다. 성공한 자녀가 와서 부모님께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어머님 아버님 기뻐하십시오. 제가 성공을 하여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효도입니까? 아니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불효입니까?

 

[공동체를 찾아서]

 

그런 회의가 들면서 공동체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처음 찾아간 곳이 부르더호프공동체였습니다.(현재는 남성명사인 부르더호프라는 단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이 공동체는 1920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재세례파 개혁교인들이 중심이 된 집단 공동체운동입니다. 지금은 영국, 미국, 독일, 호주에 각각 250명에서 300명이 거주하는 7개의 마을공동체를 비롯해서 약 26개의 여러 형태의 작은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저는 시간이 마련되는대로 영국과 미국과 독일에 있는 공동체들을 찾아가 짧은 기간이지만, 함께 일하고 먹고 자고 대화하면서 교회의 본래적 모습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하여 왔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기독교 영성 공동체와 일반 공동체도 다녀보곤 했습니다.

 

제가 사실 이런 공동체에 전문가는 아닙니다만, 두 달 전 평신도 교회로 잘 알려져 있는 새길교회에서 신앙포럼을 열면서 저보고 세계 공동체와 영성을 소개해달라고 해서 얘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때로 목회의 열정이 식어가고 때로 어떤 것이 바른 길인가를 놓고 고민할 때마다 제게 힘을 주고 방향을 잡아주는 것은 제가 경험한 공동체들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들이었습니다.

갓난아기로부터 90대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나의 가족과 같이 살아갑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노래하고 함께 논의하고 ... 저들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그냥 흘러나옵니다. 예 자연 그대로의 미소 바로 그 것입니다. 얼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 또한 그러합니다. 살아가는 모든 삶이 소박 단순합니다. 욕심이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갈등이 일면 결코 뒤에서 얘기하지 않습니다. 직접 만나 얘기하고, 필요하다면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얘기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약점을 갖고 있지만, 그 약점을 공동체가 하나 되어 뛰어넘어가고자 합니다. 그냥 모여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인간성을 보다 거룩하게 승화시켜가고 세계의 갈등과 빈곤 지역에 가서 평화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 또한 공동체로 시작을 했고, 이런 공동체 정신을 만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하여 왔지만, 아직도 많은 교인들이 건물에 기초한 교회 성장이라는 전통적인 교회 관념을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희 교회는 100명을 넘어서는 모든 교회가 그러하듯이 소통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세대간의 갈등이 점점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냥 예배만 드리고 흩어지면 문제가 안 되는데, 예배 후 여러 가지 모임이 진행되고 있는데, 여기에 상다수가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교회의 결정 구조를 다른 교회마냥 당회에서만 결의하면 괜찮은데, 민주주의 운영이라는 이름하에 목회운영위원회와 제직회와 부서와 신도회 각각의 모든 구조들을 다 거쳐야 하는 구조를 갖다 보니 회의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회의라는 것은 잘못하면 하면 할수록 의견이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의견 대립만 깊어가기에 개인을 존중하는 민주운영 체제를 유지하면서 그 결의를 단순화시키는 방식이 어떤 것일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가진 것을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는 아니더라도 모든 세대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작은 공동체 단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구역이 이를 대신했지만, 향린교회가 지역교회가 아닌데다가, 현재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당신은 이 구역에 사니 여기에 참여하라고 하는 일종의 권위적인 구조에 젊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 자발성을 갖는 작은 공동체 운동을 평화나눔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시작을 하였고 지금은 여러 가지 분화의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희 교회 안에는 소모임이라는 이름으로 10여개의 자체 모임이 있고, 거기에 아빠 모임, 엄마 모임, 청년모임, 사회부모임, 길목, 교사모임 등등의 여러 모임을 합한다면 아마도 약 20여개의 작은 모임 운동이 진행 중에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각기 자기중심적인 이런 모임들이 어떻게 서로 소통을 함으로 방향을 세우고 힘을 모아갈 것인지, 그리고 이러한 일종의 동아리 모임에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건강이나 교통의 문제로 참여하기 힘든 어르신 세대들과의 소통은 어떻게 이룩하여 나갈 것인지가 공동체적 관점에서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죽음 직전에 유언으로 남기신 말씀은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사도바울의 말씀대로 우리의 소유를 나누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우리의 예배가 천사의 찬양이 되고, 감동적인 하늘뜻펴기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 사이에 사랑이 없으면 그건 꽹과리 소리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최종 목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젊은이들은 거동이 불편한 장녀장남 교우들을 자신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로 여겨 만나면 그간 평안하셨어요? 라고 따뜻하게 인사하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에는 붙잡아 드리고 또 나이 드신 분들은 젊은이들을 손주로 여겨 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들이 있다 하더라도 귀엽게 여겨 받아들이는 그런 사랑 나눔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몸으로 서로 사랑할 때에 비로소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우리를 예수의 제자라고 인정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말씀은 그 사랑은 단지 우리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방인 곧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그런 사람들까지도 우리 자신의 형제자매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예수 공동체가 될 수 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금 남북민족공동체가 파탄이 나고 있는데, 우리만이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 또한 모순일 것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는 다양한 요구들이 있습니다. 이를 다 채울 수는 없지만,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시행을 하여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 교인여론 조사에서 나온 것 중에 예배 영성을 보다 깊게 참여하고자 분들이 있어서 예배영성공동체를 제안했고, 제가 한 달에 한번 이를 이끌어가겠다고 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제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저를 대신해서 이 모임을 이끌어 오신 분이 나명훈집사님이십니다. 현재 성가대에서 봉사하시지만, 한때 신학을 공부하고자 했던 분으로 우리 안에서는 공동체와 예배 영성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나오셔서 그간의 활동을 통한 경험도 나누고 예수께서 처음 지향하고자 하셨던 그리고 향린교회 창립정신의 핵심인 공동체 영성을 어떻게 실천해 나갔으면 하는지에 대한 말씀을 듣겠습니다. 뜨거운 경청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도입]

 

저는 20105월부터 향린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향린에서 하는 여러가지 프로그램들이 신선하고 많은 자극을 주었기 때문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작년 6월부터 참여하게 된 향린예배영성공동체는 다양한 예배와 영성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을 넓히고 배워보자는 것과 그 경험들을 통해서 향린에 접목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60주년을 맞아 향린 창립정신중 공동체교회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측면에서 예배영성공동체의 경험을 나누어 보자는 목사님의 요청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내용에 대한 정리 및 중간보고 성격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다녀온 곳으로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천안 디아코니아, 국경선에서 평화 통일운동을 하는 김포 민통선 평화교회, 공동소유와 소비를 실천하는 생활 공동체인 예가교회, 얼마전 휴전선에 국경선 평화학교를 개교한 평화의 씨앗들-철원교회, 수유리에 있는 아름다운마을공동체, 기독교계통에서는 가장 불교의 선전통에 근접한 침묵기도를 하는 퀘이커모임, 찬양이 곧 기도임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떼제공동체 등입니다.

 

영성공동체 모임 참여를 계기로 제 개인적으로는 관심을 조금 더 넓혀 노자 장자 등의 동양철학 공부와Temple stay 불교참선체험도 경험해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고자 하는 얘기는 공동체와 영성에 관한 것입니다.

 

왜 특히 교회에서는 공동체 얘기가 끊임없이 나오는 것일까요?

성경을 통한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밑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필요성, 절박함 때문일까요? 저는 전자도 중요하지만, 후자에 더 강조점을 두고 싶습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 우러나는 깨달음이 있을 때 진정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기독인들의 공통 고민이겠지만, 저도 신앙과 삶의 일치, 일상에서 예수살기가 늘 고민이고 과제입니다. 주일예배를 통해서 큰 감명을 받을수록 세상에서 자유인으로 사십시요라는 향린의 파송사는 늘 제 어깨를 무겁게 짓누릅니다. 일요일과 달리 나머지 평일은 예수의 가치관과는 180도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괴물처럼 돌진하는 자본세상의 부속품으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사는 제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파송사를 들을 때마다 제 속마음은 나 자유인 아닌데라는 생각이 드는데 자꾸 자유인으로 살아가라니 조금은 불만스럽기도 합니다. 나만 이런가? 내가 못났구나 라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자유인으로 정의롭게 양심적으로 살아라고 신자들에게 얘기만할 것이 아니라 책임도 져줘야 하는 것 아닌가? 구조에 억눌려 신음하고 있는데 설교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연 일상속에서 예수살기를 개개인의 책임으로만 맡겨놔서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선데이 크리스쳔으로서 세상을 변화시켜나갈 수 있는 것인가? 세상은 커녕 나 하나 건사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적 고민인 것 같습니다.

 

 

[관찰]

 

이런 고민을 바탕으로 예배영성공동체 모임을 통해서 보고 느낀 것을 세가지 꼭지로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공동체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지난 1월 수유리에 있는 아름다운마을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마침 운좋게도 마을내 결혼식이 있어 참관할 수 있었읍니다. 이렇다 저렇다 말이 필요없이 마을의 행사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일반 예식장이 아니라 마을 가까운 장소를 빌려 마을사람들이 직접 기획하고 결혼식을 준비하였습니다. 마을사람들이 다 모여 마을잔치를 벌였습니다. 시간에 쫓기지도 않고 자유롭고도 여유있게 결혼식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뒤풀이까지 진행하면서 놀았습니다. 이런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아 이 사람들은 일요일만 만나는 사람들이 아니구나. 같이 사는 사람들이구나 같은 동네 같은 마을 사람들이구나. 하나의 큰 가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잡한 예식장 빌리고 비싼 부페 준비해도, 식사만 하고 바쁘게 뿔뿔히 헤어지는 일반적 결혼식의 모습이 아니라 정말 같이 기뻐하고 축하해주는 사랑하는 가족들이구나 옛날 대가족하에서의 마을처럼 누구네 엄마 누구네 아들 하며 서로 챙겨주는구나. 지금까지 교회모임에서 그런 것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신선한 문화충격이었습니다. 부러웠습니다.

 

결혼한 사람이나 못한 사람이나 취업한 사람이나 못한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구별없이 함께 마을을 이루고 사는 것입니다. 저녁에 아이들 손잡고 마실 나갈 수 있는 거리에 모여 산다는 것입니다.

 

대학 동아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일상에서의 예수살이를 철저히 고민하면서 20년을 일군 마을이라고 합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이 공동체는 공동소유 공동소비를 기본으로 실천하고있고, 마을내 공동밥상(공동식당)의 운영을 통한 매일의 밥상공동체 실천도 하고 있었습니다. 마을내 유치원, 초등대안학교, 수도원, 교회, 젊은이들의 육성을 위한 '기독청년 아카데미' 및 생명평화연대 등의 사회참여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었습니다.

 

두번째로 느낀 것은 진정한 가족으로의 훈련입니다.

 

서울역 근처 기장 예가교회의 사례인데요.

교회이름인 '예수님의 새가족'의 의미 그대로 기존의 혈연중심의 가족을 무작위로 섞어 교회내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줍니다. 가족의 구성은 일반가족과 같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이들로 구성하고 새로운 가족이 함께 돌아가면서 교회청소, 예배준비, 주일날 대략 80명분의 식사준비까지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단순히 당번이 아니라 교회와 다른 지체를 섬기는 훈련으로 알고 아주 진지하고 정성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관리집사를 별도로 두지 않는데 그 이유도 자기집 청소를 외부사람 고용해서 하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요. 내 집 창틀 및 구석구석을 직접 뜯고 닦고 하면서 집에 애정이 생기듯이 우리 교회도 교우들이 직접 나와서 청소하고 다른 지체들을 위해 직접 장보고 음식준비하여 먹인다고 상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커질 수록 이런 것은 점점 힘들어지겠죠.

 

저희 집 아이들이 올해 경기도 시골에 있는 대안학교에 편입하였는데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학생, 학부모, 교사의 주체적이고 민주적인 참여 및 교육공동체 추구, 획일적인 제도권 교육과의 독립 등 우리 교회 창립정신과 비슷한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청소나 학교건물 보수 등의 일을 외부사람 부르지 않고 학부모와 교사나 나와서 같이합니다. 아이들을 위한 교육적 고려가 담겨있는 색깔 페인트 작업, 창고 수리, 지붕 수리, 대청소 등을 하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학교에 대한 애착 및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더 생기게 되고 동시에 같이 땀을 흘리는 학부모들간의 유대감은 더 깊어져 마치 가족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가교회는 매주 성찬식을 실시하는데, 그 의미가 기본적으로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 살과 피를 다른 지체들에게 떼어 준다고 하는 의미를 강조하여 이것도 사랑의 실천을 위한 훈련으로 삼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기도를 중심으로 한 영성훈련입니다.

 

이번 영성공동체 모임은 지금까지의 기도의 틀을 넘나드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몸의 독을 빼고 사랑하는 몸으로 만들기 위한 수련으로 호흡기도를 실천하는 예가교회,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빛의 미세한 소리를 침묵으로 기다리는 퀘이커모임, 역시 퀘이커 base의 기도를 실천하고 계시는 평화의 씨앗들 철원교회 정지석목사님, 정목사님의 평화를 위한 큰 비전과 과감한 실천이 매일의 소이산 기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점, 단순하고 쉬운 가사와 음으로 우리의 깊은 내면을 울리고 종교의 차이를 넘어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을 쉽게 모이게 하는 묘한 힘을 가진 떼제기도모임 등 각 공동체 생명력의 중심에는 나름의 기도훈련이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지적인 종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사랑 하나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단순하지만, 기독교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을 하기위해 우리는 우리 몸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영성수련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아니라 몸의 변화입니다. 사랑은 생각으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데 몸이 가벼워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도훈련입니다. 무엇을 달라고 무엇을 달라고 하면서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를 버리고 비워서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체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많이 하는 절도 하심(下心) 즉 몸과 마음을 지극히 낮추고 비우는 좋은 수련방법입니다. 퀘이커는 모든 일을 하기 전에 10분이고 20분이고 반드시 침묵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모습]

 

이제 이런 공동체와 영성측면에서 우리 향린의 모습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첫째 우리는 함께 사는 공동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향린은 주중에도 공부모임이나 거리기도회 등의 활동이 나름 활발하지만, 일주일에 정식으로는 한번 모이는 기성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공동체교회로의 역동을 기대하기는 상당히 힘든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해내야 하는 활동은 많고 목표도 높아서 이런 일들이 주일날 집중이 됩니다. 주일날은 일이 중심이 되고 회의가 많아집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다라는 주님이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람이 먼저이다라고 알고 있지만 원치 않게 일이 우선이 되기 쉽습니다. 마음을 낮추고 고요히 하느님을 바라보고 싶은데 일요일은 오히려 기도하기 힘든 날입니다. 그런 공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만이 아니라 기성교회 일반의 공통적 문제이겠지만,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외부적으로 함께 살자를 외치지만 정작 내부적으로 우리는 함께 살고 있지 못합니다.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조사가 교회전체의 행사가 되지 못하고 아는 사람들만 참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부끄럽지만, 오히려 교회밖에서 이런 함께 살기 노력들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을공동체, 협동조합, 문턱없는 밥상 같은 밥상 공동체, 교육을 주체적으로 스스로 만들어가고자 하는 대안학교 등이 그렇습니다.

함께 사는 것의 가치, 함께 살아야만 하는 필연성, 상대가 없으면 내가 없다는 인식, 너와 내가 그물처럼 연결되어있다는 인식, 인간과 자연이 연결되어있다는 인식 등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얘기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돌들이 소리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향린40년사에 이런 말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들이 추구했던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 잠깐 교회나와서 한시간 예배보고 설교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교회가 아니었다. 사회생활에 쫓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단 몇 시간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성서공부를 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이들의 확신이었다."

 

공동체로 살고자 하는 본질적 출발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혼자 살아보니까 안 되겠더라 라고 하는 철저한 절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특히,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에 무방비하게 내 던져진 개인과 가족들은 무력하게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와 가족의 생존문제에만 몰두하게 만들고 있고, 그 생존마저도 지켜내지 못해 곳곳에서 아우성치는 상황입니다.

이런 시대에 가난하고 힘없고 아픔을 당하는,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우리의 이웃들에게 향기로운 존재가 되자는 사명으로 존재하는 향린이기에 스스로의 모습이 더 고민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둘째 앞의 함께 살기와 연결되는 것이지만 서로 하나되고 사랑하는 훈련이 약합니다.

 

모임의 하나됨을 해치는 요인중 가장 기본적으로 경계해야할 것이 끼리끼리인데,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지간에 여러가지 형태의 끼리끼리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혈연가족이든, 세대차이든 부서활동이든 간에 말입니다. 모르니 사랑하는 훈련이 될 수 없습니다.

이의 해결을 위해 소통의 필요성을 얘기하지만, 일주일에 한번 만나서 그것도 그날은 각자의 일들로 분주해서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별도의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단발성 이벤트가 되어 지속적이 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교회 일에 있어서 과도한 분업화가 이루어져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각자 맡은 일을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 해야겠지만, 더 크고 중요한 전체상황에서 분업은 신속하게 2순위가 되고, 교회라는 전체상황으로 힘을 집중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셋째 기도모임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부족한 것 같습니다.

 

순수하게 기도만을 위한 모임은 거의 없습니다. 어색합니다.

침묵하고 기다리는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같이 기도하더라도 510분 침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 대표기도를 하지 않으면 매우 낯설어집니다. 단지 우리 교회만의 현상이라기보다는 청원기도 중심의 개신교 일반의 현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기도의 맛을 느낄 수 없고 그러니 더 안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호흡과 바람같은 성령을 느낄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을 발달시키지 못했습니다.

기도 방법 같은 것을 소개하는 공부모임은 있었으나, 그것을 직접 실행하면서 수련해보는 프로그램은 한 달에 한번 있는 수요기도회를 빼면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뿌리가 되어야할 영성훈련의 부재로 향린의 상징인 적극적인 사회참여활동마저 지칠 수 있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제안 ; 실천]

 

지금까지 공동체와 영성이라는 측면에서 외부 공동체를 방문하면서 느낀 것에 빗대어 우리 교회의 현재 모습을 비판적으로 보았습니다.

 

저는 향린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을 큰 선물로 생각하고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2000일 가까이 외롭게 투쟁하는 재능교육의 친구가 되어 주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남한사회의 가장 핫이슈가 되고 있는 사회적 약자의 현장에 지치지 않고 좋은 이웃이 되어주려 하고 그런 현장에 향린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얘기하고 있는 공동체나 영성부분은 분명히 균형을 맞추어 향린이 더욱 온전한 교회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저의 꿈 및 작은 실천제안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향린마을에서 우리 동지/지체/교우들과 같이 살고 싶다는 꿈을 꿔봅니다.

 

지난번 아름다움마을공동체를 다녀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괴물 같은 세상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향기로운 이웃이 되겠다는 높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향린동산이라는 말도 참 좋습니다. 향린의 선배들이 아마 그런 생각으로 부지를 조성하고 이름을 지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아름다운마을공동체처럼 아이들 손잡고 저녁 마실 나갈 수 있는 거리에 모여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형 술한잔 하고 싶어요 하면 밤늦게라도 나와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 회의 때문이 아니라 밤새 자기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 그런 것이 공동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디 멀리 갔다와서 거기에 가면 향린 가족들이 살고 있는 그런 고향같은 마을. 그곳에서 우리 아이들을 같이 돌보고 키우며 향린의 정신으로 청년들이 준비시키고, 어르신과 아이들이 같이 살고, 동네 경사가 있을 때에는 다함께 마을잔치를, 슬픈 일이 있을 때는 상호 부조하고 함께 슬퍼하는 그런 마을을 꿈꾸어봅니다.

 

저는 이 생각을 하면서 이것이 비현실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작은 실천들은 즉각 실행할 수 있습니다. 내 주변에 우리 지역/구역에 누가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적극적으로 삶을 나누고 친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로 함께 사는 것이 하느님의 지상명령으로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의 실상에서 우러나오는 홀로는 살 수 없다는 절박성으로 접근하면 어떤 방법이라도 나오리라 생각됩니다. 양평에 향린공동체마을 조성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공동체 관련해서 창립이후 얼마나 많은 설교가 있었겠습니까? 조목사님 설교만해도 제가 본 것이 몇차례 되는 것 같습니다. 몇 사람 중심으로 끌고가거나 회의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각자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자발적 열정과 선한 의지를 통해서만 이루지는 일이라 믿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소이산에 혼자 오르면서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꿈꾸며 기도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는 철원의 정지석목사님 선한 눈빛이 생각납니다.

 

둘째, 향린 나름의 기도방법에 대한 연구와 실습을 당장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지난해 정지석목사님의 소이산 기도에 자극받아 12월부터 매주 토요일 5시에 청소년부실에서 향린기도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저를 포함해서 3명 정도 참석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형식없이 자유롭게 촛불 켜놓고 앉아서 기도실천합니다. 실습하고 수련한다는 마음으로 무조건 앉아있습니다.

기도하고 싶으신 분들은 오셔서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선불교에서는 참선하는 것을 앉는다라고 표현합니다. “자 오늘은 30분 앉을까요?” 하고는 죽비를 3번 칩니다. 그러면 일순간 침묵하면서 깊이 참선에 들어갑니다.

 

우리도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어떤 복잡하고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바로 회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한 30분 앉을까요?”하고 30분동안 깊이 침묵하고 나서 회의하고 하면 좋지 않을까요?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는 현장에서도 향린사람들은 모여서 같이 한 20분만 앉읍시다하고 시작하면 어떨까요?

 

기도수련방법에는 개신교내 기도전통은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타종교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넘나들며 배우려고 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요즘 가톨릭에서는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이 참선을 배우려고 불교선방을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이제 제 얘기는 마쳤습니다. 이제 종소리와 함께 3분동안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