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나는 하나

23; 9:36-43; 7:9-17; 10:22-30

 

지난 주 글을 읽다가 지난 주 하늘뜻펴기에서 인용하였으면 하는 좋은 글귀가 발견되어 늦었지만,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지난 주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신 후 함께 공동체의 식사를 나눈 다음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때 헬라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관계에 따라 크게 세 가지 단어가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아가페, 에로스, 필레오. 아가페는 하느님, 혹은 어버이의 자녀를 향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고, 에로스는 남녀간의 정열적인 사랑을 뜻하고, 필레오는 친구간의 우정의 사랑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향한 세 번의 질문에서 처음 두 번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물었는데,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함을 주께서 아십니다.’라는 답변에서 아가페로 답하지 않고, ‘필레오로 답하였습니다. 상황에 변화에도 불구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겠다고 하는 아가페의 사랑은 힘들고, 친구간의 사랑, 물론 변치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 사랑하겠다고 하는 솔직한 답변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세 번째 질문에서 아가페를 포기하시고 필레오로 물으시고, 베드로 또한 필레오로 답변하였습니다.

 

저는 지난 주 이에 대한 해석에서 예수께서는 처음 베드로에게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셨는데, 베드로가 할 수 없다고 계속 버티자, 예수께서 한발 물러섰다는 얘기를 하였습니다. 물러서신 것은 베드로의 강경한 답변으로 인해 예수께서도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여기서 왜 예수께서는 인간으로서는 가능하지 않는 신적인 아가페의 사랑을 베드로에게 요구하셨느냐는 질문입니다. 물론 이 질문에 앞서 우리는 먼저 베드로가 아가페의 사랑은 힘들고 필레오의 사랑까지 할 수 있다고 답변한 그의 고집(?)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는 모두 베드로의 답변에 따라 아가페의 사랑을 해야 하는 당위성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 대해 감사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하나의 질문이 있는데, 그건 예수께서는 왜 베드로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미 베드로의 씁쓸한 배반을 경험했습니다.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그것도 창을 든 병정 앞에서가 아니라 아무런 힘도 없는 여종 앞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베드로의 배반이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는 스승에게 목숨을 걸고 그와 함께 하겠다는 맹세를 한바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적어도 예수와 함께 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그 누구보다도 심지가 강한 베드로가 넘어진 것을 경험하고 나서도 여전히 인간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셨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는 지금 오늘의 우리를 향해서도 필레오의 사랑이 아닌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가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신격화?]

 

이에 대한 답이 될 만한 얘기를 토마스 그린이라는 학자가 했습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말 같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처럼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참다운 사랑은 동격들 사이에서만 존재 가능하며, 따라서 우리는 신격화되어야만 비로소, 하느님이 아시는 만큼 알 수 있고 또 하느님한테서 사랑받는 만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어버이께서 완전하심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일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거처하시면서 우리를 변화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그 일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거처하시면서 우리를 변화시킬때에만 가능하다.’는 전제가 붙어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신격화되어야 한다 곧 하느님과 같이 우리도 완전해질 때 참다운 사랑을 할 수 있고, 이것이 당위성이 아닌 가능성으로 주장하는 토마스 그린의 주장은 일견 옳은 것 같으면서도 매우 도발적입니다. 그런데 사실 요한복음 자체가 매우 도발적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입을 빌려 우리는 예수의 친구임을 강조합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다 알려 주었다.”(1511) 그리고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단지 예수를 따르는 아니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다보며 믿는 사람으로 따라가려 하는데 반해 예수는 우리를 함께 동행하는 벗으로 아니 예수보다 앞서서 나아가는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시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시고,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께서는 하느님과 자신은 하나이심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개념을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는 전통적 신관으로 접근한다면 벽에 부딪힐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야훼 가 뜻한 반 나는 나다 라고 하는 자유인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이는 이해가 가능할 것이고, 더 나아가 예수께서 하느님과 하나이시라면 지금 예수와 더불어 먹고 자며 함께 생활하는 제자들 또한 하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간 요한복음은 영육의 이원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에 대해 강하게 반발을 하면서도 동시에 영지주의가 갖고 있는 소수비밀집단의 영적 구원의 특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복음서입니다.

 

[메시야의 정체성]

 

오늘 말씀은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인가?’하는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내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 내 일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고 답변하십니다. 일을 보면 나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매우 단호하고 분명한 답변같지만, 한편으로 보면 매우 모호한 답변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가 메시야임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하는 일을 보고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아 묻는 것인데, 예수께서는 하는 일을 보고 판단할 수 있다고 답변하시면서, ‘너희들이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은 곧 내가 메시야임을 믿지 못하는 것은 너희들이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내 양이 되면이라는 가정은 일종의 소수종파의 사람들이 많이 주장하는 가정입니다. ‘확신이 없는가? 그렇다면 우리 예배에 참여해 봐라. 성서공부에도 참여해 봐라. 그런 후에 판단해라.’ 어떻게 말하면 이게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예수님의 주장은 너희들이 내 양이 되면 나의 메시야성을 알게 될 것이라는 답변인데, 지금 질문을 던지고 있는 유대인들은 당신의 양이 되려면 먼저 당신이 정말 우리가 바라는 목자인지를 확인해야 하는데, 일을 보아서는 판단이 서지 않으니 먼저 말로 확실한 답변을 달라.’는 것입니다. 서로의 주장이 어긋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해결 없는 양측의 주장과도 같습니다.

 

여러분도 가끔 누구와 더불어 진지한 대화를 하다보면 뭔가 핵심이 서로 비켜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계속 질문을 던지고 성실한 답변을 하는데도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대화의 접근 방식이 분명하지 않아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유대인들간의 주장이 서로 어긋나고 있는 것은 핵심 단어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핵심 단어는 어떤 것입니까? 그건 메시야입니다. 유대인들의 이해와 예수의 이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당신 예수의 부활을 믿어요? 믿지 않아요? 라는 단순획일성 질문에 불트만이라는 학자는 당신이 말하는 부활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물었듯이, 우리의 대화가 어긋난다고 생각될 때에는, 서로의 서 있는 자리가 다르기에 어쩔 수 없다고 그냥 돌아서지 말고, 핵심 주제에 대한 서로의 이해 차이가 무엇인지를 묻는 성찰의 작업이 필요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점을 소홀히 하여 문제가 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합니다. 교회에서 의견이 갈려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이때 양측의 주장하는 근거는 다 같습니다. ‘그건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도 헤어지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 내에 이견이 생기면 먼저 사랑의 정의부터 확인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현재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든지, 아니면 사랑하기 때문에 미래를 위해 변화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되는데, 그대가 사랑하는 현재의 이해는 무엇인지, 그대가 사랑하는 미래의 모습은 무엇인지? 적어도 향린이라면 이런 정도의 대화 방식은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분 만나면 이 얘기 저 분 만나면 저 얘기. 모두가 교회를 사랑하기에 저한테 건의하는데, 그런데 내용은 정반대입니다. 여러분이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수결로 결정하면 다수의 횡포라 말하고, 결정을 미루면 우유부단하다 하는데, 그때 예수는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내 우리 안의 양이 먼저 되라. 당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데, 어찌 무작정 당신의 우리 안에 먼저 들어갈 수 있습니까? 들어가기 전에 당신이 누구인지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알려면 먼저 믿어라. 바르게 믿기 위해서는 알아야 합니다. 믿음과 앎의 선후관계에 대한 평행선을 걷는 두 개의 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에 보면 군중들 사이에 예수에 대한 평가가 서로 엇갈리고 있음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그는 마귀가 들렸소.’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마귀 들린 사람이 어찌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소.’하고 반문하였던 것입니다. 그래 그러면 우리가 직접 예수를 만나 확인해 보자. 그래서 지금 유대인들이 떼를 지어 예수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구절을 보면 예수를 둘러싸고,’ 예수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예수를 압박하는 일종의 협박성 질문인 것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조이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 메시야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 여기서 질문자들이 가졌던 그리스도 곧 메시야에 대한 이해는 무엇이었는가? 물론 역사적으로 당시의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었던 메시야의 이해를 학문적으로 찾아내어 답변할 수도 있지만, 사실 저자가 이런 얘기를 할 때에는 이미 이에 대한 해답으로서의 실마리를 이야기 속에서 던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화가들이 성서의 그림을 그릴 때에 그 그림 속에 자신을 그려 넣듯이 말입니다.

 

[메시야와 봉헌절]

 

오늘 이야기는 때는 겨울이었다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겨울이냐 여름이냐 하는 계절은 메시야성에 대한 이해와는 관계가 없는 단어입니다. 물론 계절 교인들이 있긴 합니다. 서양에는 부활절과 성탄절에만 나오는 교인들을 절기 교인 혹은 계절 교인이라고 부릅니다. 저희 교회도 계절을 타는 약간의 계절 교인이 있긴 합니다만, 여기서는 상관이 없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얘기도 아닌데 왜 겨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건 예루살렘에서 진행되고 있는 봉헌절 축제를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수사입니다. 여기서 봉헌절이 어떤 절기인가를 아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이해에 대한 해결의 열쇠가 되겠지요. 봉헌절은 수전절 혹은 수복절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기원전 164년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황제의 우상숭배 강요정책에 대항하여 유다스 마카비우스 형제들이 주동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20년간의 게릴리 전을 통해 유대왕국의 독립을 다시 찾은 다음 성전을 깨끗이 하고 8일동안 불을 밝혔는데, 이를 기념하는 축제일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독립의 기간은 다시금 로마의 지배를 받기 까지 약 100년간에 불과하지만, 무려 기원 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나라의 독립을 잃어버린 이후 약 450년만에 독립을 하였으니 우리가 일제하에서 35년만에 독립을 하였던 사실을 기억하면 저들이 얼마나 감격하였을 것인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를 하누카라고 부르는데, 보통 성탄절 전후이 오는데 유대인들이 가장 성대하게 지키는 절기입니다. 미국에서도 보면 유대가정에서는 창문에다 8개의 초를 얹어놓고 매일 하나씩 더해가며 불을 켜는데, 유대인 동네를 지나가면 이것 또한 하나의 볼거리입니다. 봉헌절이란 과월절 혹은 유월절과 마찬가지로 유다왕국의 독립과 해방을 기리는 정치적 절기였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에게 유월절은 천년도 넘는 과거의 사건이었지만, 봉헌절은 불과 100년 전 얘기로서 그 기쁨의 얘기들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를 에워싸고 있는 유다인들의 관심은 언제 다시금 이 로마의 지긋지긋한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고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최대의 관심이었고, 이런 메시야성에 대한 전제를 갖고 예수에게 당신이 메시야인가? 하고 묻는 것입니다. 여기에 당연히 예수의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변혁을 꾀하고 로마의 불의한 지배를 끝낸다는 점에서는 이지만, 그러나 방식과 때에 있어서는 저들의 기대와는 달랐기에 아니오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답변은 예와 아니오로 획일적으로 구분하여 답변할 수 없었고, 나와 함께 거하면 내 하는 일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그리고 나를 믿게 될 것이다라고 답변하신 것입니다. 그 나라는 유다스 마카베우스 형제들이 쟁취했던 그러한 있다 사라지는 그런 왕국의 나라가 아닌 영원한 나라임을 말씀하고 있고, 이는 한번 쟁취하면 누가 힘으로 빼앗아갈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영원하다라는 단어를 영혼으로 이해하여 곧잘 하늘에 거하는 영적 존재로 건너 띠고 마는데, 요한복음은 예수의 육신을 강조하듯이 이 땅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임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영성과 현실 변혁]

 

영성가 파커 파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영혼은 관대해서, 세상의 필요를 받아들인다. 영혼은 지혜로워서, 물을 걸어 잠그지 않고 고통을 감수한다. 영혼은 희망을 품는 존재이기에, 지속적으로 우리의 가슴을 여는 방식으로 세상에 관여한다. 영혼은 창조적이어서, 우리를 패배시키는 현실과 도피가 되는 환상 그 사이에서 길을 발견한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우리를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서로에게서 분리시키는 벽을 내려놓는 것이다.” 곱씹어 볼수록 단맛이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영원 혹은 영생, 영혼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에 우리의 현실과 관련이 없는 비현실적이고, 몰역사적인 어떤 관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일에 관여하고 필요에 따라 고통도 감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영성이해이며 십자가와 부활을 바로 이해하는 길입니다. 아마도 여기에 기독교와 맑시스트의 접점이 있을 것이며 남의 기독교와 북의 주체철학내지는 주체종교와의 접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역사변혁적 시각에서 다른 세 본문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의 고통받는 현실과는 별 관계가 없는 뜬구름의 얘기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도대체 아쉬운 것이 얼마나 많은데, 아쉬울 것 없다고 말하는 이 시편의 첫마디부터 동의할 수 없습니다.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노동과 일 그리고 내일에 대한 염려로 스트레스가 쌓여 생기는커녕 피곤만 쌓이는게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내 잔이 넘치고 한평생 복에 겨워 살아간다는 감사의 고백이 나올 수 있는 것은 무슨 연유입니까?

 

그런데 이 다윗이 목동이었던 시절을 회고하며 지었다고 하는 이 시편 23편 바로 앞의 시편 22편 또한 다윗의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22편은 23편과는 정반대로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살려 달라 울부 짓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 나의 하느님, 온종일 불러 봐도 대답 하나 없으시고, 밤새도록 외쳐도 모르는체 하십니까?” 아마 오늘 시청 앞 대한문이나 그 건너편에서 천막을 빼앗기고 비닐 한 장에 노숙해야 하는 쌍용차나 재능해고자들의 기도가 그러할 것입니다. 150일 넘게 14만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철탑에 올라간 해고자들이나 혜화동 종탑에 올라가 50일 넘게 비바람에 시달리며 하소연하는 저들의 기도소리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시편 23편의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게 없어라는 노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23편의 시인은 그냥 정신 나간 한 신앙인의 고백이 아니라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이를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의 결단을 통한 고백인 것입니다.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을 바꿔내겠다고 하는 변혁의 노래인 것입니다.

 

요한묵시록의 그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군중들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옥좌와 어린 앞에서 찬송하는 모습은 로마제국의 신앙핍박에 대한 현실도피를 위한 환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환상을 통해 이 땅의 고통 받는 현실을 이겨내는 희망의 원천이 되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나가는 그 승리의 날이 곧 올 것임을 확신케 하는 변혁의 힘을 주는 하느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죽은 다비타라는 여신도를 살려낸 이야기 또한 단순히 베드로의 기적적 능력을 말하기 보다는 부활사건을 통한 새로운 시대의 임박성을 알리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부활을 문자로 받아들인다면 그 부활한 다비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는 아예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무덤 속에 있는 시체를 살려내지 않았나요? 부활이라고 한다면 영원한 몸을 갖게 되었다는 말인데, 부활한 나사로는 지금 어디에 있고 다비타는 어디에 있나요? 결국 다시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비타나 나사로의 소생의 얘기는 영혼의 탄생, 동물적인 것이 인간화되고, 육체가 정신으로, 의식으로, 이성으로, 정의로, 사랑과 관용의 정신으로 바뀌는 변화를 말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이 땅의 제국들의 칼과 총의 역사를 거스르는 새로운 하늘의 정의와 사랑의 역사가 움터오고 있다는 상징성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 단순히 한 인간이 몇 년을 더 오래 산다는 개인적인 복의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나되는 향린의 부활 선언]

 

같은 관점에서 하느님 어버이와 나는 하나이다.’ 라는 예수님의 선언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선언은 그래서 나는 하느님이라는 해석도 되지만, 동시에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해석도 되는 것입니다. 하늘이라는 피안의 존재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땅이라는 차안의 존재로 현실에 더욱 굳게 발을 내디딜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믿는 자들의 선택 사항입니다. 향린교회는 지난 60년 이 선택 사이에서 항상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고민하고 역사 참여, 사회 선교에 힘을 기울려 왔습니다. 이미 40주년에 대 사회적으로 발표한 신앙고백선언과 교회갱신선언을교회적 선언이 아닌 오늘 우리 자신의 선언으로 60주년의 부활 선언으로 공포하고자 합니다. 오늘 오후에 이어지는 정책과 선언 공청회에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여러분이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여러분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여러분은 이미 향린교회와 운명을 같이하는 사람이 된 것이고, 그 향린교회는 이미 60년간의 자기 노력과 투쟁, 그리고 아픔을 통해 이 광야같은 한국의 사회와 역사 속에 일정부분 자리매김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피해나갈 길이 없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나의 일부로 받아들여 더욱 투철하게 살아가는 길이 현명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여기에 내가 메시야이다라는 선언을 넘어 하느님과 나는 하나이다라는 예수의 자기 선언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나아가는 길에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불기둥으로 우리의 갈 길을 지시하시고 구름기둥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믿으며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