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라라

30; 91-6; 요한 21:1-19; 5:11-14

 

사도행전 9장은 사도바울의 회심이 기록된 그 유명한 다마스커스 도상의 이야기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을 서던 사울은 다마스쿠스에 있는 예수쟁이들을 붙잡아 감옥에 집어넣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들고 가던 도중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자 그만 땅에 엎드러졌고,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그러자 사울이 당신이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흘동안 눈이 멀었다가 아나니야라는 예언자가 성령의 이름으로 손을 얹어 기도하자 그가 눈이 떠지고 거기서 며칠 만에 예수 복음 전하는 자로 변화하게 됩니다.

 

[바울 회심 사건의 문제점]

 

너무나 유명해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이야기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을 때면 왜 나는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하는가? 나도 사울처럼 하늘의 빛을 보고 하늘의 음성을 들어보았으면 한이 없다. 그래서 믿어도 한번 화끈하게 믿어보고 싶다는 소원 한 두 번을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물론 기도 중에 주님의 휘황찬란한 빛을 한번 보고,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도 가끔 나타납니다. 문제는 이를 사진으로 찍어 보여주거나 녹음을 해서 들려주는 일이 없어, 그 사람만 확신을 갖는다는 것이고 그래서 신비적 사건에 대한 동경심은 커져만 갑니다. 물론 그래서 저들의 삶이 조금 변화된 것을 보긴 하지만, 대부분은 사도 바울이 보여준 변화와는 거리가 멀어 잘못하면 사이비 신앙인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종종 생겨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울의 이 경험을 문자적으로만 협소하게 이해해서는 안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는 이 다마스쿠스의 경험 이야기가 22장과 26장에서 두 번 더 반복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 번의 이야기를 놓고 서로 비교하여 보면 바울이 변화되었다는 점은 같지만, 그 현상적인 사건은 조금씩 다르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9장에서는 하늘의 빛이 비추고 음성이 들려 왔을 때에, 7절 이하에 보면 동행하던 사람들이 그 음성은 들었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벙벙히 서 있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 반면 22장에서는 반대로 빛은 보았지만 음성은 듣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더욱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것은 같이 빛을 보았는데, 왜 사울만 그 빛으로 인해 눈을 멀게 되었다고 말하는가? 빛의 강도가 다르게 나타났는가? 그리고 26장에서는 22장과 같이 동행하던 사람들이 함께 빛을 보았다고 하는데, 22장과는 달리 사울만 엎드러진 것이 아니라, 모두가 땅에 엎드러지고 소리만 사울 홀로 듣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 들린 음성이 히브리말이었다고 단서를 달았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조상들의 언어인 히브리어와 당시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할 줄 아는 헬라어 그리고 로마시민권자로서 로마어 그리고 예수 당시의 평민들이 주로 쓰던 아람어를 다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활의 예수께서 히브리어로 말씀하시든 로마어로 말씀하시든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왜 앞의 두 경우에서는 그런 말이 없다가 26장에서만 히브리어로 말씀하셨다고 하는 것인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

 

같은 저자에 의해 기록된 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3가지 기술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웬만하면 적당히 섞어서 이해하면 되겠지만, 빛과 소리를 반대로 표현하는 이런 모순은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까요? 만약 여러분이 화가로서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여러분은 하늘에서 내리는 빛을 사울 한 사람에게만 비치도록 하겠습니까? 아니면 모두에게 골고루 비치도록 그리겠습니까? 사울만 땅에 엎드러지게 하겠습니까? 아니면 모두가 엎드러지게 그리겠습니까? 사실적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 난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고 믿고 성서에 이런 오류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부활 사건에 대한 4개의 복음서의 기록이 조금씩 다른 것은 다른 저자이기 때문이라고 변명이나 할 수 있지만, 사도행전의 저자는 한 사람으로 알고 있으니 이 서로 다른 기록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이냐는 판단할 수 없지만, 우리는 왜 이런 오류가 생겼느냐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하나는 누가 저자에게 있어 사울의 회심 변화가 중요했던 것이지, 그가 경험한 신비의 구체적 사실로서의 현상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울에서 바울로]

 

중요한 것은 예수를 박해하던 사울이라는 유대교의 매우 보수적인 열혈 청년이 다마스커스를 향해 가던 날 깊은 경험을 통해 바울이라는 열렬한 예수 신봉자로, 전도자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울에서 바울로라는 슬로건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극적 변화를 향한 구원 사건의 한 표본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와 같이 부모님에게서 신앙을 받은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인들은 이런 극적 회심의 경험이 없다보니, 무종교인으로 있다가 구원의 경험을 하고 나서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나, 혹은 교회 다니는 사람을 박해하거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에 비해 구원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깡패 짓을 하거나 심지어 살인자였다가 회개하여 유명한 복음 전도자가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에 비해 모태신앙인들의 신앙은 뜨뜨미지근하여 뭘 시키면 이것도 못해요 저것도 못해요 하며 피하기만 해서 못해신앙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모태신앙인들의 경우 구원 콤플렉스에 걸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사울이 이렇게 단 사흘 만에 예수를 박해하는 자에게서 복음 전하는 자로 변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물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성에 기초하여 사흘이라는 기간이 예수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간이 될 수는 있지만,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되는 곧 지식과 인품을 갖는 일이 과연 가능한 기간인가? 전하기 위해서는 예수에 대한 확신뿐만이 아니라,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을 순식간에 습득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를 이성적으로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종 어디서 공부했는지 과거가 불투명한 목사들이 바울의 급작스런 변화에 근거해서 자신을 변호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루가가 아닌 바울 자신이 이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 자신의 회고]

 

그래 확인을 해보면 바울은 이 다마스쿠스의 경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회심에 대해 말하는 곳은 단 한 곳 갈라디아 1장에 나오는 데,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 주셨고, 당신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널리 알리게 하시려고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 때 나는 어떤 사람과도 상의하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고 그리고 삼 년 후에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베드로와 함께 보름동안을 지냈습니다.” 다마스쿠스라는 이름을 언급하는데, 이는 변화된 장소가 아니라 삼년을 머물렀던 장소라는 것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회심을 하였는지에 대해서 그가 직접 말한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사도행전의 기록과는 달리 예수를 만난 이후 그는 다마스쿠스가 아닌 아라비아로 갔다고 말하는데, 이 아라비아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라비아는 광야지역이고, 수도원과 같이 수련을 쌓을 수 있는 곳이 군데군데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합니다. 곧 우리가 루가가 쓴 사도행전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글에 근거하여 추론할 수 있는 결론은 바울은 회심 이후 최소한 3년 이상을 복음 전도자로 나가기 전에 공부하고 기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도행전을 기록한 루가는 아까 언급하였듯이 바울의 다마스쿠스의 경험을 세 번 말하면서 제각각 달리 말하고 있어, 그가 스스로 주장하는 바, 여러 기록을 놓고 사실에 입각하여 객관적으로 기록하였다기보다는 자신의 주관적인 이해에 따른 기록의 단순화와 과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저는 루가가 말하는 사울의 다마스커스 경험은 그가 극화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채닝이란 신학자가 말하였듯이 성장은 서서히 진행되는 과정이며 돌발적으로 비약되는 것이 아니듯이, 즉흥적인 참회로는 죄악을 극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을 너무 극적으로 보는 것은 우리가 피해야 할 신앙의 유혹입니다. 신앙 성장은 오랜 기간의 성찰과 훈련에 의할 따름이고 다른 지름길은 없습니다. 요즘은 부흥회라는 현수막을 보기 힘들지만, 과거 부흥집회를 하는 경우 목사님들이 구원의 확신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극적인 회심과 변화된 삶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그 변화가 계속 지속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흥회의 짜릿한 맛을 본 사람은 그만 부흥회만 계속 쫓아다니는 부흥회 신자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짜릿한 맛을 주는 콜라보다는 덤덤한 맛의 샘물이 우리의 몸을 튼튼하게 하듯이 영의 성숙 또한 그러한 것입니다. 심령의 변화는 한번만으로 족한 것이고, 그 이후는 이 변화를 행동으로 이끌어내는 꾸준한 자기 훈련이 중요한 것입니다.

 

[민족주의자로서의 바울]

 

바울은 시대에 변치 않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매우 중요한 신앙 고백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2:5-7) “유다인이나 그리이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3:28)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셨습니다.”(2:14-16)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2:20) 그런데 바울의 여러 고백 중 북쪽의 그리스도 형제자매들이 가장 즐겨하는 고백이 있는데 이는 로마서 9장에 나와 있는 고백입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 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3)

 

지난 주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앞으로 팩스 한 장이 왔습니다. ‘제목은 남녘의 교우형제자매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여기에 이 바울의 고백을 인용하고 있고 나아가 변화되기 전의 사울과 변화된 후의 바울을 비교하여 언급하는 구절이 나오기에 그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지금은 멸망의 위기에 처한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한 몸을 내댄 에스더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핵참화의 위기에 처한 우리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는 길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할 때이다. 민족이 있고서야 종교인도 있고, 참다운 조국이 있고서야 진정한 신앙인의 삶을 누려갈 수 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나갈지라도 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 없는 사도바울이 자기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였으면 그렇게 말하였겠는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울이 아니라 사도 바울처럼 자기 민족을 사랑하며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는 길에 떨쳐나서야 할 것이다. 자기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정의이며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다른 민족에게 불행과 고통을 들씌우는 것은 불의이다. 주님과 세계의 량심은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 있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는 법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와 불의를 바로 가려보고 불의를 타개하고 정의를 위해 일하라고 하신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전문을 읽어보면 북쪽 형제들이 갖고 있는 전쟁에 대한 공포와 평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방금 읽어드린 부분에서 저는 회심 전의 사울이 자기 민족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성서에서 찾을 수는 없고 오히려 유대교의 전통보수주의자로서 더 민족적이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만, 북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어 민족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는 성서적 근거를 바울에게 두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전 제가 편지 글을 읽어드릴 때에 북의 그리스인들 또한 정의를 말하고 그리고 자신들이야말로 정의의 편에 서 있고 그리고 자기들이 믿는 주님의 정의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하는 이 주장에 대해 선뜻 동의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북이 미국을 악으로 보고 정의를 말하고 있지만, 현재 미국과 한편이 되어 있는 남쪽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북쪽의 정의로운 승리는 패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세계 서방 언론들은 모두 북을 악마화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현재 한미연합군의 군사훈련이 북을 상대로 진행 중에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고, 북이 미사일을 쏠 것이라는 얘기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정의의 편인가?]

 

2차 세계대전 시에 기독교국가인 영국 불란서 미국과 독일이 적으로 싸웠습니다. 그 군대에는 모두 자신들의 나라가 승리하기를 바라는 군목들이 있었고, 고향에는 전쟁터에 나간 자신들의 아들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어머니들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셨나요? 영국 군목이 부르는 야훼 하느님과 독일 군목이 부르는 야훼 하느님이 같은 분이셨다면 매우 곤란했을 것입니다. 독일 군목은 악인인 히틀러제국에 속했으니 들어주지 않으셨나요? 그러면 우리가 존경하는 본훼퍼목사님 또한 독일사람이었는데, 그분의 기도는 어떻게 된 건가요? 전쟁시의 기도는 국적과는 상관이 없는 것인가요? 영국 독일 불란서 미국의 죽어간 장병들은 어머님의 기도가 약해서 죽은 건가요? 과연 전쟁에 정의가 있는 건가요? 부시를 비롯한 미국의 대통령들은 성서에 손을 얹고 서약을 하는데, 그들이 시작한 전쟁은 그렇다면 야훼 하느님이 원하시는 전쟁이 되는 건가요?

 

시편에서는 전쟁을 일으키는 강자들을 멸하여 달라고 하는 기도가 많은데, 이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야훼 하느님은 전쟁을 원하시지는 않지만, 약자들이 당하는 고통스런 전쟁에는 관여를 하여 정의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신가요? 그렇다면 지금 북한은 약자인가요? 강자인가요? 핵을 보유하고 있으니 강자인가요? 남한은 핵폭탄은 없어도 재래식 무기는 수십 배나 전력이 강하고, 핵폭탄만 따져도 남한은 미국의 8천개 이상의 핵우산 아래 있고, 북한은 몇 개의 핵폭탄이 있으니 전쟁이 일어나면 야훼 하느님은 약자인 북한 편을 드실 건가요? 아니면 양으로 따져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많은 남한과 미국을 지지하실까요? 아니면 신앙은 양이 아니니 질로 따져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신앙을 지켜오는 소수의 제자들이 있는 북을 선택하실까요? 봉수교회는 누구의 주장대로 가짜 그리스도인가요? 진짜와 가짜는 무엇으로 구별합니까? 교회 나가는 횟수로, 성서읽기나 기도의 횟수로 아니면 이웃을 향한 선한 행위로, 양심의 기준으로... 아니면 국적별로 구분합니까? 여러분은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진짜라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보세요? 가짜라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보세요? 그럼 손 안 드신 분들은 뭡니까? 진짜도 되고 가짜도 되는 것입니까? 언제 진짜가 되고 언제 가짜가 됩니까? 자기 편한대로.. 집안에 혼자 있을 때는 진짜가 되고, 사회에 나가서는 가짜가 되는, 자기 편한 대로 색깔을 바꾼다면 카멜리온 교인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요한복음의 의도]

 

엄격히 말하면 예수 죽음 직후에도 이렇게 자기 편한 대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어떻게 말하면 그런 믿음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보다 약 2,30년 늦게 쓰인 책입니다. 이 기간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예루살렘 성전 멸망 후 유대교로부터 추방을 당하는 예수 공동체가 탄생을 했고, 당시의 시대철학이었던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는 신앙 공동체들이 여기저기 생겨나게 됩니다. 영지주의는 쉽게 말해 영육의 이원론을 주장하여 육을 죄악시여기고 영적 진리의 빛을 본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구원의 길에 이른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래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다보니 예수의 육신은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일 따름이지 진짜 육신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그 시작부터 천지창조 때부터 같이 계셨던 말씀 Logos가 육신으로 태어나셨다는 얘기를 하고 그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픈 유한의 사람으로 얘기합니다. 부활을 얘기할 때도 공관복음서에서와 같이 단지 눈으로 보였다는 얘기만을 하지 않고, 의심 많은 토마스를 내세워 그의 몸을 직접 만지도록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부활 예수는 단지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배가 고파 고기를 구워 먹는 육신을 가진 존재로 설명합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공식적인 교회 성서로 사용하고 있는 공동번역은 이 요한복음 114절을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요한복음의 신학을 부정하는 매우 잘못된 번역입니다. 요한이 사용하는 헬라오는 sarx는 인간(anthropous)이 아닌 몸(soma)도 아닌 썩어지는 살 sarx입니다. 영지주의에 대항하는 저자 요한의 의도를 좀 더 정확하게 반영하여 번역한다면, ‘말씀이 인간이 되셔서가 아닌 말씀이 육신이라는 살코기가 되셔서라고 번역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서와는 달리 12제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하지 않습니다. 열두 제자라는 단어를 쓰긴 하지만, 그 열두 제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그 이름을 열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가 공관복음서의 12명과 같은 사람인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활 이후 티베리아 호수가의 제자들이 본래의 12제자들 중 일부분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제자들을 포함하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공관복음서의 열두 제자에 포함되지 않은 제자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우선 요한복음 1장에 등장했던 필립보의 친구,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반문했던, 그러나 예수로부터는 이 사람이야 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라고 극찬을 받았던 나타나엘의 이름이 나오고 있고, 그 밖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두 제자가 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라는 요한복음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매우 비밀에 찬 한 제자가 있고 다른 한 제자는 여성인지 남성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왜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인지, 이름을 밝히면 그들이 어떤 위험에 처하기 때문인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고 하여간 요한복음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 합쳐 7명의 제자들이 호수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고향으로 돌아와 옛 직업인 어부 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지만, 예수 죽임 이후 낙심했다가 다시 부활 예수를 만나는 감격까지는 가졌지만, 그것이 새로운 삶으로 전개되지는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과 사명]

 

이에 예수는 갈릴리 호수에 다시금 나타나셔서 구체적으로 사명을 맡기십니다. 베드로에게 맡기지만, 이는 실상 예수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신 다음 내 양들을 돌보라는 목양의 부탁을 세 번 하십니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를 부인하였기에 세 번 물었다는 해석도 맞겠지만, 세 번은 더 이상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완전성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헬라어 본문으로 보면 세 번 계속되는 예수의 물음과 베드로의 답변 사이에는 묘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묻는 질문도 세 번 다 같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두 번째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세 번째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단지 문장의 단어 하나 정도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근본에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질문에서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 또한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 사람들이 아니고 그냥 이것들입니다. 베드로가 아꼈던 물건 곧 배나 직업일수도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로 번역한 것은 지나친 번역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사랑을 비교하고 이를 경쟁하도록 부추기셨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말 번역에는 세 번의 질문과 답변을 다 사랑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헬라어로 보면 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다릅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대상에 따라 달리 쓰는 크게 보아 3개가 있습니다. 아가페, 필레오, 에로스입니다. 아가페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혹은 자식을 향한 어버이의 변치 않는 내리 사랑을 말하고 필레오는 친구간의 우정의 사랑, 그리고 에로스는 남녀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원문을 보면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으실 때, 처음과 두 번 아가페의 절대 사랑으로 물으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계속 필레오의 우정의 사랑으로 답변합니다. 그러자 세 번째 예수께서 필레오로 물으시고 베드로 또한 필레오로 답합니다. 해석이 다양할 수 있는데, 예수께서 매우 높은 사랑을 요구하셨는데, 베드로가 이를 급을 낮춰 대답을 하였고, 결국 예수도 이에 동의했다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내 양을 돌보라는 세 번의 부탁도 공동번역에는 다 돌보라로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에서는 세 개의 동사가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먹이라치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양의 대상도 어린 양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 단어가 각각 달라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부탁하신 목양의 대상은 처음 공동체에 들어온 어린 신자들로부터 오래 된 나이든 신자에 이르기까지 필요에 따른 돌봄의 부탁을 하시고 있고, 단지 교회 안에 속한 새 신자들로부터 오랜 신자들뿐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까지도 돌보라는 말씀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부탁을 하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말씀을 결론지으셨습니다. 결국 부활신앙이라는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믿고 그래서 나의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하여 예수를 따르는 돌봄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향린교회 60주년을 한 달 앞두고 있습니다. ‘, 이라는 단어를 내어 걸고 여러 축하 행사들을 계획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 자신들의 사랑의 깊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우리 안의 서로를 향한 교우들간의 깊은 사랑의 교제 그리고 나아가서 세상 안에 흩어진 양들을 향한 사랑의 나눔이라고 믿습니다.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진정 나를 사랑하십니까?‘ ’정말 나를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내 양들을 먹이고 돌보십시오.‘

 

바라기는 지난 주 평화통일토론회로 부터 오늘의 길목 사회선교센터 설명회 그리고 다음 주의 정책과 선언 공청회로 계속 이어지는 예배 후의 준비모임에도 적극 참여하여 60주년 행사가 우리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행사가 되고 한국교회의 개혁과 민족의 평화적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귀하게 쓰임 받는 교회로 계속 전진하여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